한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경주
경주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다. 천년 고도인 경주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로 지방의 소도시로 남아있어 유적의 보존 상태가 너무나 좋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가 불타고, 임진왜란으로 경상도 전체가 일본이 장악하였음에도 경주에 남아있는 수많은 유적을 보면 천년 전의 경주가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신라 시대 건물들은 왕궁터나 절터로만 남아있어 머리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서울의 수많은 궁궐과 유적들이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 경주가 소도시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포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주말마다 가까운 경주로 산책 나가 유적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도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경주를 수십 번 찾아갔음에도 또 가고 싶을 정도로 경주는 한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40195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40286_thumb.jpg)
경주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네 군데나 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15개임을 감안하면 경주가 가진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국립공원 여행기에서 소개한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경주역사문화지구' 중 '남산 지구' 두 곳 외에도 '한국의 역사 마을'로 등재된 '양동마을',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경주 옥산서원'이 있을 정도로 경주는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뽐내었다. 뒤에 소개한 두 곳의 세계유산은 나중에 소개하는 것으로 하고 이번에는 '경주역사문화지구'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16 -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 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27233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27387_thumb.jpg)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 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릉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52379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52385_thumb.jpg)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 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 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 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17681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17753_thumb.jpg)
대릉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신라 왕들의 안식처인 대릉원에 가다
'경주역사문화지구'는 총 다섯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은 '대릉원 지구'다. '대릉원 지구'는 신라를 지배했던 왕들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릉원으로 조성된 경주 황남리 고분군과 미추왕릉 외에도 경주 노동리 고분군, 경주 노서리 고분군, 신라 오릉, 경주 동부 사적지대, 재매정이 대릉원 지구를 구성하는 유적들이다. 경주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왕릉을 볼 수 있을 정도니 경주역사문화지구 중에서도 가장 먼저 찾아갈 지구가 될 수밖에 없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04034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04269_thumb.jpg)
터미널에서 나와 대릉원 북쪽의 태종로를 걸으면 왼쪽에도 거대한 무덤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무료로 볼 수 있는 노동리 고분군과 노서리 고분군으로 한국이 일제강점기였던 시절 스웨덴 왕자인 구스타프 아돌프가 와서 발굴에 참여하는 굴욕적인 역사를 가진 서봉총이 있는 곳이다. 우리 민족이 천 년 동안 건드리지 않고 남겨두었던 무덤을 외국인이 여행 중에 멋대로 파헤치다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집트의 수많은 무덤이 유럽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것과 비슷한 일이다. 지금에 와서야 대한민국의 국력이 강해져 수탈당한 문화재를 환수하는 걸 보면 문화의 보존과 별개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33920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33877_thumb.jpg)
대릉원의 다른 이름은 경주 황남리 고분군인데 공원으로 조성되어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다. 대릉원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크고 작은 무덤 20 여기로 구성되어 있다. 천마총·황남대총·미추왕릉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무덤이 발굴이 되지 않은 데다 주인을 몰라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50787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51140_thumb.jpg)
대릉원에서 특히 유명한 무덤은 천마총이다.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되어 있으며,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되었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천마총이 발굴이 된 1973년에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근에 이 천마가 ‘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19083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919117_thumb.jpg)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 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천마총에는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실제 유물은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39638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1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39716_thumb.jpg)
황남대총은 경주 중심 고분군인 대릉원지구 북편에 자리한 초대형 무덤이다. 현재까지 발굴한 신라 무덤 중 가장 크며 남・북분이 연접한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다. 무덤의 크기만큼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거대한 크기와 화려한 유물 때문에 황남대총 남분은 왕릉으로 추정되는데, 그 주인공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50년가량의 절대 편년에 차이가 있어 신라사 연구의 주요 쟁점이 되어 왔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57681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857797_thumb.jpg)
황남대총을 발굴한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시작하고 급변하던 시기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관광자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1971년 ‘경주관광종합 개발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일환으로 미추왕릉 지구 정화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황남대총과 천마총 발굴을 기획했다. 원래는 황남대총을 발굴하여 그 내부를 복원,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남·북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하고 당시 조사 경험도 부족했던 탓에, 그에 앞서 천마총을 시험 삼아 발굴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황남대총 발굴은 북분을 먼저 조사하고 남분은 뒤에 조사했다. 이는 발굴과 정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두 고분을 동시에 발굴했을 때 발생할 착오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28782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28843_thumb.jpg)
북분은 1973년 6월 천마총의 적석부(積石部, 시신을 안치한 곳으로 나무곽을 둘러싼 돌무지)를 조사할 무렵 발굴을 시작했고 그다음 해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북분 발굴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착장한 금관을 비롯해 35,769점의 유물이 나왔다. 또한 나무곽 주변으로 적석을 쌓기 위해 마련한 목가구(木架構)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여 신라 마립 간기(麻立干期) 최상위 무덤의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80m에 달하는 신라 무덤을 발굴한 것 자체가 큰 성과였다. 발굴 이후 50여 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신라 고분 연구에 중요한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19102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19125_thumb.jpg)
대릉원에서 현재 땅 위로 봉분이 남아있는 것은 20여 기이지만, 땅 속에 작은 무덤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부이지만 독무덤(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어 신라 무덤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 시대 무덤에 대한 관념은 현재와 많은 차이를 보였음이 확실하다. 도읍이었던 경주 한가운데 수많은 거대한 무덤을 조성한 것을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 자는 선대를 살아간 왕으로부터 지혜를 얻고, 죽은 자는 후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영원히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시 한복판에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세계 어딜 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주는 특별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09049_thumb.jpg)
![제16화 - 신라 왕들의 안식처, 경주 대릉원2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19%2F20220919204709301_thumb.jpg)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더라도 대릉원은 찾아갈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깔끔하게 조성된 잔디밭 위로 솟아오른 봉분은 아파트나 고층 건물로 뒤덮인 한국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경주 시내의 건물은 고도 제한이 있어 경주역사문화지구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김포의 장릉 앞으로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선 모습을 보면 사람들의 문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살면서 열 번은 찾아갔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유롭게 걷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대릉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