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4.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기의 역사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은 협객 형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다.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조국과 가족을 잃어버린 무사들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궁에 진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대업을 위해, 현상금이 걸려 있던 자신의 목을 기꺼이 내놓은 동지의 희생을 등에 업고, 형가는 포상의 빌미로 진시황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 편을 읽어보면, 형가의 실체를 마주한 진시황의 면모는 영화에서처럼 침착하지도 비장하지도 않다. 황제는 허둥지둥 대다가 제대로 칼을 뽑지도 못한다. 법가의 나라인 터라, 무기를 소지하고 어전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을 지키느라 황제를 돕지 못하는 신하들의 충정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극동 문화권의 전기(傳記) 장르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편에서 유래한다. 역사가들의 평에 따르면, <사기>가 지니는 역사로서의 가치는 <한서>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나 이 <사기열전> 편은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더 인정되는 경우이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역사가의 관점이 투영되는 기록이라는 것이 나중에 보게 될 투키디데스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사마천이 글의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방식은 한문학의 한 필법으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사마천은 <열전> 속 주인공들의 삶이 건네는 인생의 교훈으로 한 챕터를 마무리했다.
서양에서 비교의 대상을 찾는다면 아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지 않을까 싶다. 플루타르코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보다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의 묘사에 치중했다.
내가 쓰고자 하는 바는 역사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영예로운 위업이 언제나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보잘 것 없는 순간이나 표정, 농담이 치열한 전투와 뛰어난 무기보다 인물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기도 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도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하기 위해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얼굴을 더 세밀하게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러니 내가 인물의 영혼을 드러내는 특징에 집중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중요한 사건이나 전투는 다른 사람이 논하도록 하고 나는 인물의 영혼을 드러내는 특징에 집중해 그들의 인생을 묘사하고자 한다.
원제는 ‘고귀한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전기(Lives of the Noble Greeks and Romans)’였으나 언제부턴가 작가 본인의 이름이 붙여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부른다. 이 책은 삶의 궤적이 유사한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쌍으로 묶어서 비교하는 서술 방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 총 22쌍의 전기와 4개의 단독 열전으로 구성돼 총 50여 명의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을 다룬다.
로마보다는 그리스인의 생애가 더 자세하게 다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에서 집필을 하면서 로마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얻는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스스로 고백하듯 라틴어 실력이 미숙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전설의 시대로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사료를 취합한 결과이며, 어떤 시기의 역사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유일한 사료를 제공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영웅 대 영웅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서로를 향해 돈을 집어 던지며 싸우는 배트맨과 아이언맨의 대결. 그만큼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몸에 지니고 있는 역량은 미미하고, 고가의 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우이다. 브루스웨인의 육체에 동양의 '쿵푸'적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과 달리, 토니 스타크는 무기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직접 장비를 제작하는 천재 공학도이다. 둘 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브루스 웨인의 극복이 어두운 심연으로 침잠하는 방식이라면, 토니 스타크는 특유의 너스레와 유쾌함으로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다.
이젠 전 지구적 화법이 되어 버린 어벤져스와 저스티스, 마니아층에선 각 진영에서 비슷한 포지션을 맡고 있는 히어로 캐릭터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마블과 DC의 세계관을 설명해 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플루타르코스의 비교가 이런 식이다. 스피드라는 공통 키워드로 마블의 '퀵실버'와 DC의 '플래시'를 선정해 그들의 인생을 서술하고, 부록으로 그들이 지닌 쾌속 능력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적 인물을 선정해 그 생애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서술한 후, 두 인물을 비교하는 짧은 비평을 덧붙인다. 일례로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하는 첫 번째 비교 대상인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공통 키워드는 '건국'이다.
로마 제국이 추구해야 할 탁월함은 무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이름 높은 가치의 추구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무적이며 영광스러운 모습을 로마의 건국 영웅 로물루스가 보여 줬다면, '아름답고 이름 높은 덕목은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모범을 보여 줬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기》 <열전> 편과 비교할 수 있는 사례는, 그리스와 로마를 대표하는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의 경우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연설에서도 드러난다.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에는 꾸밈말이나 우스갯소리가 전혀 없고, 주제에 대해서만 집중되어 있는 무서울 정도의 진지함이 살아 있다. 반면에 키케로의 연설은 농담이 너무 심해서, 자신의 품위까지 깎아 내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변론할 때도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으며, 변론을 부탁한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체면이 깎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사기열전> 중에서도 장의(張儀)와 소진(蘇秦) 편을 떠올리게 한다. 장의와 소진 역시 중국의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말빨’이었다. 이런 비교평가는 플루타르코스의 윤리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사기>와 비교하자면, 사마천이 글의 말미에 '태사공 왈'로 시작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듯, 플루타르코스는 이 비교의 페이지에서 영웅들의 면모로부터 취사선택해야 할 교훈적 가치들을 적어 내린다.
플루타르코스는 몽테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아이들의 판단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필독서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꼽고 있다. 그만큼 플루타르코스의 인생을 이끌어 간 힘은 윤리였으며, 오늘날 많은 평론가들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윤리학의 장르로 분류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자신이 플라톤의 계보로 분류되는 철학자이면서도, 철학자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철학자들은 영웅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의 삶을 지배했던 키워드가 '윤리'였듯, 그에게 철학은 이론과 담론에 머물러 있는 생각이 아닌 적극적 행위의 동사였다. 그 연장선에서 그가 역사의 서술 방식을 '전기'로 택한 것은, 로마 문화의 실용적 성격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