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하하하! 우리 한국인은 ‘완전 잡종 튀기’ 이다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도대체 핏줄이 뭡니까. 왜 그렇게 거기에 매달려 안달을 못합니까.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그 얼마나 많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일어나고 있습니까. 단일민족? 단군의 자손? 갑자기 자궁이 답답해집니다. 불알 밑이 뻐근해집니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똥구멍이 꽉 막혀 며칠씩 똥을 못 눈 것 같습니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 당수는 버럭 핏대를 냅니다. “프랑스 축구대표팀에 유색인종이 너무 많아 프랑스인들이 대표팀에 대해 완전한 동질감을 갖지 못한다. 프랑스 다인종 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프랑스 정통 백인인 골키퍼 바르테즈는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만약 그가 계속 국가 부르기를 거부한다면 대표팀에서 쫓아내야 한다. 그만이 유일하게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이탈리아 극우파 정치인 로베르토 칼데롤리는 한술 더 뜹니다. “2006독일월드컵 우승은 이탈리아 정체성의 승리다. 전원이 백인이고 가톨릭교도인 이탈리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흑인, 이슬람교, 공산당으로 이뤄진 프랑스를 상대로 이긴 것이다.”
4대째 한국에서 살아온 선교사 집안의 아들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그의 국적은 미국입니다. 하지만 그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면 불편합니다. 미국에서 4년간 의학 공부를 하면서 그는 향수병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그가 뛰어놀던 고향 순천, 집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정 많고 순박했던 사람들, 언제나 그를 반겨주었던 그리운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자꾸만 어른거렸습니다.
더구나 결정적인 것은 미국인들은 도대체 그 맛있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난 돌아가야 해, 내가 살 곳은 순천이야”라며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유년시절을 전라도 순천에서 한국아이들과 똑같이 보냈습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천방지축 개구쟁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난 한국말을 하며 한국친구들과 지내면서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친구들 역시 어떤 차별대우도 하지 않았다. 물안개처럼 아련한 그 시절의 추억은 나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웬만한 전라도 사람 못지않은 ‘징글징글한 전라도 기질’도 그 때 다 몸에 배었다. 함부로 쏜 화살처럼 천방지축 순천 골목길을 휘젓고 다녔다. 찐 고구마, 이빨 빠진 일곱 살 무렵의 순천 친구들, 여름의 앵두서리, 가을의 감 서리, 양어장의 잉어를 잡아 뒷산에서 불에 구워 먹은 일, 자치기, 땅 따먹기, 구슬치기…. 난 내 소개를 할 대마다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 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순천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내가 가장 좋아하고 ,그것이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순천 어르신네들을 만나면 오메, ’그 짠(존·JOHN)이가 벌써 요렇게 컸냐? 오메, 니가 그 개구쟁이 짠이냐?‘며 놀라신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지음, 생각의 나무)
하지만 그런 그도 연세대 의대 시절,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미국 제국주의자‘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내면세계가 어떻든 일단 생김새가 다르면 한국인이 아닌 것입니다. 오호라, 그 지긋지긋한 단일민족 신화여!.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 겸 사회학과 교수는 지적합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를 강하게 움직인 사회구성원리는 기족주의나 유교보다는 단일민족의식, 즉 혈통민족주의였다. 최근의 한일, 한중 중일관계 긴장의 뿌리는 하나같이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한중일 정치권에서 이를 이용해온 측면이 크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나 노무현정부의 동북아시대론 모두 그 핵심은 세계질서를 민족국가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보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인노동자와 조선족, 앞으로 남한 주도로 통일될 경우 북한 주민 지위 등을 생각할 때,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단일민족 신화는 가끔 엉뚱한 해프닝을 낳습니다. 고고학자 김병모 박사가 그 좋은 예입니다. 김 박사는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피부가 검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해 봐도 김 박사의 피부는 유난히 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혹시 내 몸속에 형제들과 다른 유전인자가 있는 게 아닌가’하고 늘 고민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의 주인공이 아닐까’하는 불경스런 의심까지 하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피부가 검다는 것은 검은 유전자가 내 몸속에 있다는 것인데 그 인자가 어떻게 내 몸속으로 스며들게 되었을까? 인도인이나 아프리카인들이 나와 어떤 과정으로 연결되었을까’를 생각하며 10대를 보냈습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의문을 반쯤 풀 수 있었습니다. 그의 성(姓)인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 왕에게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까무잡잡한 인도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때부터 허황옥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국 연구에 빠져들었습니다. 40년 동안 허황옥의 발자취를 따라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김 박사처럼 인도인의 검은 얼굴로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김해 김씨, 김해 허씨, 그리고 여기서 파생한 인천 이씨들을 보며 한민족은 결코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몽골계통의 북방 기마민족의 피와 인도 등 해양민족의 피가 섞였다는 것입니다.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1,2’(고래실 출판사)는 바로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닌 잡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김 박사의 ‘40년 피땀 어린 발자취’입니다.
고고학자는 탐정입니다. 김병모는 추리소설가입니다. 셜록 홈즈요, 괴도 루팡입니다. 그는 우선 한국에 수없이 남아있는 고인돌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인돌은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 중국 내륙 깊숙한 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신 서유럽의 덴마크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지중해안 여러 곳과 흑해지방에서도 더러 눈에 뜨입니다.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인돌은 초기 농경기술의 전파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인도에도 많이 있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발견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 남쪽을 중심으로 중국의 황해 연안과 일본의 큐슈 지방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벼농사에 알맞은 지역입니다. 유럽의 고인돌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던 기원전 2500년 생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도 고인돌은 유럽보다 한참 뒤인 기원전 800~200년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한반도 고인돌은 인도보다 늦은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약 1천년간 유행했습니다.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기간이고 고조선이 세력을 결집하던 단계입니다. 남쪽에서는 이렇다할 국가나 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지만 벼농사기술이 전파되어 그 직전인 신석기시대까지 주식이었던 ‘조, 기장, 도토리’를 먹지 않게 됐습니다. 대신 엄청난 쌀 생산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서 진의 통일이 진행되고 있을 즈음입니다.
결국 김박사는 ‘고인돌이 서유럽에서 발생하여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김박사는 그들이 바로 한반도에 벼농사 기술을 전해준 사람들이라고 단언합니다.
“한반도의 벼농사는 인도가 포함된 남아시아에서 전파된 것이다. 그때 벼농사기술자들이 한반도에 대거 들어왔고 그들이 소개한 새로운 매장 풍속이 바로 고인돌이다. 물론 그들은 벼농사에 관련된 농업언어도 자연스레 퍼트렸다. 지금도 벼농사와 관련된 인도 드라비다 어휘와 한국어중엔 같거나 비슷한 것이 허다하다.
밥(밥), 쌀(살), 벼(비아), 풀(풀), 씨(씨), 알(아리), 모(몰), 가래(가라이), 사래(사라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태권도나 유도가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그대로 같이 사용되는 원리와 똑같다. 인도 타밀어로 볍씨는 ‘아리씨’다. 아리는 한 알 두알 할 때의 ‘알’이고 씨는 종자라는 뜻의 ‘씨’이다.
이만큼 한국의 농사언어와 인도의 그것은 흡사하다. 현대 한국어는 알타이어계통이다. 알타이어에는 카자흐어, 위구르어, 몽골어, 한국어, 일본어 등이 있다. 하지만 한국어는 처음부터 알타이어가 아니었다. 원래 한반도 남부지방에 살던 농민들이 쓰던 한어(韓語)라는 것이 있었다.
이 한어는 유목민족이 한반도로 대거 들어오면서 유목민언어에 밀려 사라졌다. 유목민언어는 크게 부여-고구려-백제계통의 언어와 신라-가야계통의 언어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고구려-백제계 언어는 사라지고 신라-가야계통의 언어가 한반도 공통어로 발전했다. 신라어가 고려 조선을 거쳐 한국어가 된 것이다. 알타이어를 한반도에 소개한 집단은 삼한시대의 진한인(辰韓人)이다.
진한인은 원래 중국 서북방의 유목민으로 중국 진나라 때 만리장성 등의 노역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진한이 커서 신라가 된 것이다. 결국 북방에서 들어온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인도 벼농사기술자들이 한반도 남부지방에 정착하고 난 훨씬 후의 일인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많이 발병하는 성인백혈병이 특이하게도 일본에서는 큐슈 지방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시아의 성인백혈병은 중국의 양자강 이남인 후난성 광저우 베트남 태국 등에서만 발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고인돌이 발견되는 지역과 똑같은가. 흔히 백혈병은 유전병으로 부계유전현상이 강한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성인백혈병은 남아시아계 성인들에게만 일어나는 유전질환일지도 모른다.”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1’· 고래실 출판사)
한국에는 고인돌이 아직도 3만여 개나 남아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고인돌의 반이 훨씬 넘습니다. 그 중 90%가 전라남북도에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1만여 개가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지역은 아시아 원주민들 중 난생신화를 믿고 있는 종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일치합니다. 한국고대사 주인공들인 신라 박혁거세와 김알지, 고구려 고주몽, 가야 김수로 등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중국 절강성의 서(徐)나라 언(偃)왕, 대만 빠이완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화학자들은 ‘한반도 고대주민들의 사유세계는 남아시아주민들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보통 한국 고인돌에선 돌칼, 화살촉 돌창, 돌낫, 돌 방추차 등이 나옵니다. 인도 고인돌에선 청동제 팔찌, 비녀, 그릇, 거울. 옥 목걸이 옥팔찌 등이 나왔습니다. 인도 탁자형 고인돌에선 적색토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적색토기와 흡사합니다.
1965년 충북 제천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선 사람의 뼈가 발굴돼 고고학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과연 그 유골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 방사선 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410년 전후에 살았던 170cm 키의 40대 남자로 추정됐습니다. 하지만 두개골 측정결과 놀랍게도 두개지수가 66.3인 초장두형의 완전 서양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국인 평균 두개지수는 81.5로 단두형입니다. 두개지수는 두개골의 앞뒤길이인 두장과 귀와귀의 길이인 두폭을 비율로 계산한 것입니다. 서양인은 장두형이고 동양인은 단두형인 것이지요. 그런데 고인돌 유골의 주인공은 지금 서양인보다도 더 완전한 유럽인종입니다.
얼굴전문가 조용진고수가 컴퓨터로 복원한 황석리인의 모습은 완전히 서양인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조교수는 황석리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지금도 남한강변인 원주와 충주지역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2005년 10월 강원도 정선군 북면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발굴된 인골도 현재의 영국인과 유사한 유전인자를 가진 약 3000년 전의 청동기인인 것으로 1차 판명됐습니다. 서울대 해부학교실 신동훈 교수팀은 “이 인골의 DNA염기 서열을 분석한 결과 현재 영국인 유전자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벼농사를 전해준 사람들은 지금의 유럽인이나 인도인들일까요? 아리송한 것은 인도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골의 주인공은 대부분 몽골인종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김 박사는 고인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한반도의 남방문화의 흔적은 곳곳에 있습니다.
“제주 ‘퉁방울 눈’ 돌하르방도 남방문화의 증거다. 혹자는 고려 때 침
입한 원나라 몽골군대가 제주도에 오래 머물면서 남겨진 몽골풍속이라
고 해석한다. 그러나 정작 몽골에는 하르방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
다. 뜻밖에도 하르방은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있다. 제주 하르방은 모
두 성인인데 비해 발리 섬 하르방은 남여노소가 모두 있다는 점이 다르
다면 다르다.
발리 섬 하르방은 사람들에게 괴질을 막아주는 의사 같은 역할을 한다.
필리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된다. 그 뿐인가. 남미 잉카제국
의 석상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제주 돌하르방과 똑 닮았는지 놀라울 정
도다. 눈망울 큰 남자들이 두 손을 아랫배에 대고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정말 해학적이다.
또 있다. 제주 조랑말의 혈청 속에 들어있는 단백질을 비교연구해본 결과 가장 가까운 종류는 ‘타이 말’이었다. 타이 말은 광동 말 계통으로 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토종말이다. 한마디로 제주 조랑말은 몽골말과는 전혀 유전자가 다르다. 놀라운 사실은 제주 ‘난쟁이선인장’의 원산지가 멕시코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 멀고도 먼 멕시코선인장이 제주에서 자생하고 있는가. 해답은 바로 적도해류와 흑조(쿠로시오)해류입니다. 남미 페루→폴리네시아→파푸아뉴기니→발리(적도해류)→필리핀→한반도→일본열도(흑조해류)로 이어지는 이 두 해류를 타고 모든 것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것이다. 중남미 원산의 수많은 동식물이 적도해류에 밀려 아시아에 도착했고 지금도 떠밀려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1’· 고래실 출판사)
“김해시의 배후산은 신어산(神魚山)이다. ‘신령스런 물고기 산’이다. 신어(神魚)는 김해 김수로 왕릉에서도 볼 수 있다. 능 앞에 서있는 조선시대 형식의 삼문 문설주 위에 쌍둥이 신어(전면 3쌍, 후면 3쌍)가 그려져 있다. 경남 제원암 대웅전과 합천 영암사 터의 탑 받침에도 물고기 조각이 선명하게 보인다. 김해를 중심으로 경남지방 절 곳곳에 물고기 문양이 자주 보인다.
이건 또 무엇을 뜻하는 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48년 7월27일 붉은 돛을 단 배가 가락국 해안에 도착했다. 배에서 20여명이 상륙하는 데 그 중 한 여인이 바로 인도 아유타국 출신의 16세 허황옥이다. 아유타국은 인도의 아요디아의 한자식 표기다.
아요디아는 갠지스강 중류에 흐르는 사라유 강변에 자리 잡은 고대도시. 인도 전국시대인 기원전 6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고대국가인 코살라의 수도다. 지금도 이 도시에는 신어 문양이 지천이다. 도시 아이콘인 것이다. 힌두교사원의 대문 위에 빠짐없이 새겨져있고 박물관 정문, 자동차 번호판, 경찰제복 단추, 인도식 인력거인 릭샤 등 없는 곳이 없다.
신어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국립박물관 본관 정문 앞 바닥에 그래픽으로 그려져 있고 네팔 카드만두 국립박물관 유물전시관에도 선명하게 조각돼 있다. 파키스탄 인더스 강 상류의 고대도시 페샤와르시내의 많은 자동차 옆구리에 너도나도 신어 그림을 그리고 다닌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신전 대문 위에도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신어는 주신(主神) 양 옆에서 보좌하는 보호자 역할을 하며 평화의 보호자다. 즉 신어사상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신어는 국기가 없던 시절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사용했던 국장(國章)급 아이콘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에선 물고기를 ‘가라’라고 부른다. 가락국의 별칭인 ‘가라’와 같은 발음이다.”
“수로왕은 허황옥과 결혼해 10왕자 2공주를 두었다. 이 중 두 왕자가 어머니 허씨 성을 따랐다. 허황옥이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이 땅에 허씨가 끊어지니 아들 중 2명에게 허씨를 내려달라’고 수로왕에게 부탁해서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인도와 한국 사이에는 바닷길로 수만리인데 그 당시 작은 배로 어떻게 왔을까.
2천여 년 전에 인도에서 한국까지 머나먼 바다를 건너 항해할 수 있는 배가 있었을까. 나침반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그 시절에 어떻게 원양항해가 가능했을까. 김해 허황옥 능 비문에는 허황옥의 시호를 보주(普州)태후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허황옥이 보주라는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도 아요디아에는 보주라는 지명이 없다.
난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본 끝에 보주가 뜻밖에도 중국 촉나라 사천성 성도와 중경의 사이에 있는 지방도시 안악의 옛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들은 인도 아요디아에서 중국남부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인도 북쪽에서 침입한 쿠샨에 의해 아요디아 왕조가 무너지자 아요디아의 지배층이었던 힌두교 브라만 신앙지도자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운남 사천지방에 허씨 성을 쓰며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가 이 지역에 남군이라는 식민지를 세우고 과다하게 세금을 징수하려하자 서기 47년 허씨족을 중심으로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다 패한다. 결국 이들은 다시 한나라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는 데 그 중 일부인 허황옥이 그의 오빠 허보옥(장유화상)과 함께 장강을 타고 삼협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현대판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 안악에는 14개의 보주 허씨 집성촌이 있으며 인구는 약 15만 명이다. 그곳엔 아직까지도 허황옥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물론 신어 그림도 있다. 신어는 보주 허씨 상징이었다. 허황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김해 은하사에도 두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허황옥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인도의 남방계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상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2’· 고래실 출판사)
허명철 김해병원 원장은 허황후의 후손인 김해 허씨입니다. 그는 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재야 전문가입니다. 그 탑은 허 황후가 배에 같이 싣고 온 탑으로 전해집니다. 허 박사는 이 탑에 쓰인 돌의 재질을 분석한 뒤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돌과 비교 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똑같았습니다. 허 박사는 당연히 허 황후는 틀림없이 인도에서 왔다고 믿습니다. 일연은 호계사를 직접 답사한 뒤 삼국유사에 파사석탑의 모양을 묘사했습니다. ‘장방형의 탑은 오층인데 그 조각은 매우 신기하며, 돌은 약간 붉은 빛 무늬가 있고 재질이 조금 연하니 이 지방 물건이 아니다.’
서울대 이홍규교수는 말합니다. “사람 유전자에는 부계를 확인할 수 있는 Y염색체가 있는데 북아시아계는 O형, 남아시아계는 C,D형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 염색체에는 O형과 C,D형이 혼합돼 있다. 가야고분에서 발견된 인골에서도 남아시아인의 유전인자가 많이 발견됐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북방계와 남방계의 피가 섞였다는 것입니다. 크크크! 잡종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인돌시대의 벼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지금 한국인과는 완전히 다른 인도계열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반 무당 반 학자’로 유명한 국립민속박물관 양종승 학예연구관은 ‘무속신앙에 한민족의 정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한국인은 '영적인(spritual) 민족'이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한민족 특유의 신바람 기질은 무속에서 비롯됐다는 것이지요.
"무당이 괜히 작두를 타는 게 아니다. 신바람으로 작두 위에 오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는 건데, 사람들은 그 앞에 절 한번 하고 집과 일터로 돌아가 다시 힘을 내 살아가는 것이다."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정(情)이 피보다 진하다’고 믿습니다. 그의 생김새는 미국인이지만, 그는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를 키운 건 팔할이 한국인의 정이었습니다. 그 웬수 놈의 정 때문에 이 땅을 죽어도 못 떠납니다. 아직도 그 사라져 가는 정을 찾아 북한 곳곳을 헤매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아직도 그 정이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없이 살아도 그들에겐 사람으로서의 정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대접하는 고봉밥을 먹으면서 울고 그들이 주는 마음에 속으로 눈물 흘립니다.
“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온 오리지널 토종 한국인이다. 그러기에 난 한국문화와 정서에 익숙하고 인간관계 역시 한국인들 관습에 따른다. 하지만 이 정서와 관습은 서양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난 국적은 미국인이면서 사양의 문화와 서양의 인간관계 방식에 도대체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인이 지닌 정, 가장 큰 장점인 정,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정, 더불어 살 수 있는 강력한 요소인 정, 끈끈한 정,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 ‘웬수같은 그놈의 정’ 때문에 난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고 영원히 한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해도, 순천사람들을 만나거나 마음 편한 자리, 흥분할 때는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 나온다. ‘아따, 거시기 왜 안 있냐’ 특히 전라도 사투리 대명사는 ‘거시기’다. 약간 말하기가 거시기할 때, 거시기라는 말을 쓰면 웬만한 일은 다 통하고 해결된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지음, 생각의 나무)
그렇습니다. 핏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이든 신바람이든 한국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모두 한국인입니다. 한민족은 분명 잡종입니다. 그것도 여러 민족의 피가 마구 섞인 완전 혼혈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 난리입니까?
요즘 결혼하는 10쌍 중 한 두쌍은 국제결혼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더 섞여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축구국가대표팀에 토고 아데바요르 같은 검은 골잡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머리’ 지네딘 지단 같은 플레이메이커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걱정 붙들어 매시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핏줄이 아닙니다. 그놈의 맘몬입니다. 돈입니다. 돈푼깨나 있다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마구 무시합니다. 돈 좀 있다고 조선족들을 아예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강호에선 돈이 피보다 진합니다. 이제 한국에선 돈 없는 자는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닙니다. “에라~이….” 그냥 한번 박치기로 확 받아버리고 싶습니다. 삼배합장.
출처:http://blog.naver.com/martiansortion/220536971724 불별 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