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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陽陳公諱守 㕘軍公派祖 事蹟碑文 幷序 여양진공 휘 수 참군공파조 사적비문 병서
공의 휘는 수(守)요. 생졸년은 미상(未詳)이며, 조선 제11代 중종조(中宗朝) 한성부(漢城府) 훈련원 참군(㕘軍)벼슬을 지냈다. 족보의 사적을 살핀즉 배위(配位)는 연안김씨(延安金氏)다. 백형 휘 우(宇)집의공파조님이 진사시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시정(施政)을 논한 일 때문에 김안로(金安老)로 부터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역사에서, '동생인 휘 수 참군공의 생애(生涯)를 재조명(再照明) 하고자 한다. 伯兄-진우(陳宇) / 中宗 29 (1534) 식년(式年) 진사 1등 [합격등위] 1등, 고유번호:0001 *1514년 전후출생추정(오차범위 -+ 1~2년) /동생(弟)-진식(陳寔) 명종明宗 02년(1547) 정미알성방(丁未謁聖榜) 문과급제 고유번호:03017 / 족보기록, 문과급제기록- 己卯(1519)년생으로 역사에 명백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진식 부제학공의 형인, 휘 수(守) 참군공파조는 1516년 전후출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을사사화 때 동생인 휘 식 부제학공은 형(陳宇)의 억울함을 왕에게 상소를 올리며 논리적으로 항변했다. 참군공은 당시 형인 집의공 파조님과 함께 김안로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불의(不義)와 맞서다 일생을 마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졸년(卒年)은 을사乙巳(1545)년이 된다. 그 결과 참혹하게 일생을 마쳤고 후손이 가문을 보전키 어려운 한시대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때 이로인해 생졸년이 미상(未詳)인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형제애(兄弟愛), 불의에 맞서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했을 두분의 영전에 늦게나마 엎드려 명복을 빈다. 형과 아우의 사적은 역사에 뚜렸히 기록되어 전해지나, 참군공의 행적은 찾기가 쉽지않았다. 오호통재(嗚乎痛哉)라! 그러나 그날의 슬픔은 잠시 뒤로하고 형제의 발자취따라 참군공의 사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이는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미루어 짐작하는 역사도 소중하고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은 될 수 있으며, 추측이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것으로 생각된다. 참군공의 선계는 고려 인종조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고 여양군(驪陽君)에 봉군된 휘 총후(寵厚)를 시조로하며, 개부의 동삼사 중서문하성 참지정사겸 판병부사(開府儀同三司 中書門下省 參知政事兼 判兵部事)를 지낸 휘 준(俊)이 2세조다. 3世(10대조) 휘 광수(光脩) 병부상서공은 문과에급제하여 내직인 낭중(郎中)벼슬에 계시다 안서(현 황해도 해주)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부임(赴任)하시어 선정(善政)을 베푼 기록이 동문선(東文選) 서하집(西河集)에 실려 전한다. 4世(9대조) 휘 화 (澕) 매호공은 신종 경신(1200)년에 시부시詩賦試에서 장원으로, 계해癸亥(1203)년 국자방시國子榜試에서 아원관亞元官으로 급제하였다. 국자감 학정, 서장관(書狀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옥당(玉堂)에 들었고,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공주지사(知公州事) 재임시 졸(卒)하였는데, 당대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쌍운주필로 유명하며' 사장(詞章)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5世(8代祖) 휘 영헌(令獻)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6世(7대조) 휘 번(蕃)은 중계中系 전서공파조(典書公派祖)가 되시며, 9世(高祖父) 휘 중성(仲誠) 형조참판공과 10世(曾祖父) 휘 치중(致中) 광양현감공은 세조혜장대왕실록, 세조 2권(卷二) 1455년 12월 27일(戊辰) 원종原從 3등공신에 록훈(錄勳)되어 전해진다. 11世(祖父) 휘 유(猷) 조봉대부(朝奉大夫) 산청현감공은 정상청간政尙淸簡한 사적이 읍지(邑誌)에 실려있고, 씨족원류에 서령(署令 종5품)으로 전한다. 배위(配位) 영인(令人) 해주정씨海州鄭氏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휘 충석(忠碩)의 따님이시다. 三子 12世 고휘考諱 복명(福命) 진사공은 연산군의 폭정(暴政)에 출사(出仕)를 하지않고 초야에 묻혀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대(代)를이어 아들 3형제가 김안로(金安老)의 횡포에 맞서다 "두형제(휘 宇, 휘 守)가 목숨을 잃고 가문을 보전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나 후손들은 슬기롭게 위기를 넘기며 번영의 기틀을 다져 오늘에 이른다. 장자(長子) 휘諱 계원(繼源)의 字는 백행(百行)이며,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손자 휘 순(恂)의 字는 성보誠甫이며, 배위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조선의 역사속에 가장 참혹(慘酷)했던 연산의 폭정(暴政)과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소용돌이속에 이처럼 불의에 항거하며 사서에 뚜렸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날의 참화(慘禍)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되어 사화당시 형제가 지킨 의열(義烈)이, 명문(名門)중에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되었고, 후손들에겐 자긍심(自矜心)으로 남았다. 지난해 어느날 대종회 제유사 '해진'일가로부터 참군공파 후손들의 위선사업계획을 들었고 사적비를 세우고자하는데 비문을 정리해 줄 수 없는지를 물어왔다. 본디 후생(後生)은 학문이 일천(一淺)하고 비재하여 극구사양하였으나 이후 수차에 걸처 청(請)하는바가 간곡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검토해보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글문이 막혀 어디서 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족보의 사적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며 불면(不眠)의 밤을 지새웠다. 해진(海鎭) 일가는 보학에 조예가 깊고 매사에 신중하며 예의범절이 밝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여' 평소 친분을 두터히 하던 터라 고민이 깊어갈 무렵, '몇일전 다시 비문을 청하므로 사양키 어려웠다. 수년전부터 여양진씨 선현의 사적을 연구하고 검토하던중 참군공 진수 선현의 형제인 집의공 진우陳宇, 부제학공 진식陳寔 두분의 문과급제기록을 십수차(十數次) 정독(正讀)하고 정리했던터라 두분의 기록에서 형제인 참군공의 사적을 더듬고 미루어 짐작되는 글로 선현의 생애(生涯)를 간략히 정리한다. 후일 훌륭한 학자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자료를 보충하여 훌륭하신 삶의 여정(旅程)을 다시 정리해주길 바라면서, '사적비에 명(銘)하여 불비약술(不備略述)한다.
歲在 癸巳(2013)年 仲春之節 傍孫 海松 玉洙 謹撰 세재 계사(2013)년 중춘지절 방손 해송 옥수 근찬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작성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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