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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역사 스크랩 러시아 / 우크라이나(키예프)의 역사
파랑새 추천 0 조회 554 13.08.03 18: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러시아의 역사

 

Coat of Arms of the Russian Federation.svg

러시아의 역사
시기
초기 동슬라브족 선사-8세기
불가르족 7-13세기
하자르족 7-10세기
루시 8-9세기
키예프 공국 9-12세기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 12-14세기
노브고로드 공국 12-15세기
몽골 침략기 1220-1240년대
몽골 점령기 1240-1480년대
모스크바 대공국 1340년-1547년
모스크바 러시아 1547년-1721년
러시아 제국 1721년-1917년
소비에트 러시아 1917년-1922년
소비에트 연방 1922년-1991년
1917-1927;(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1927-1953 · 1953-1985 · 1985-1991
러시아 연방 1992년-현재

 

러시아역사는 일반적으로 동유럽슬라브 민족이 분열될 때, 키예프 공국이 세워지고 흥한 것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시의 옛 영토뿐만 아니라 우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 극동오호츠크 해연안까지 형성된 국가 발전의 역사로 파악된다.

 

 

그러나 실제로 루시에서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의식을 확립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있고, 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는 동방 정교회 신도인 러시아인과는 다른 민족의 기원을 가지는 여러 사람이 독자적인 전통과 역사를 걸어 왔다.

 

목차

[편집] 초기 역사

[편집] 슬라브인 이전

초기 동슬라브족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남러시아 쪽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남러시아에 진출하였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남러시아에 들어섰지만, 7세기부터는 러시아 대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편집] 초기 동슬라브족

현재의 러시아 연방의 유럽 부분과 우크라이나의 북부, 그리고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게르만인의 서방으로의 이동 뒤 동슬라브족으로 불리는 슬라브 민족의 일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슬라브어파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민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유목민 상당수는 언어적으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하자르 한국을 형성했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게르만족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쪽 슬라브 사람들노르만인하자르인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편집] 키예프 공국

후기 러시아인이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로트이 되었고 류리크의 일족이 동슬라브인의 거주지역으로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 사이에서 몇 개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시로 불리게 되었지만, 루시라고 하는 명칭이 후에 러시아라고 하는 국명의 어원이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단어는 중세 시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단어였으며, 루시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루시라고 불렀다.

[편집]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키예프 공국을 계승한 국가로, 블라지미르 모노마흐 이후 번성하였다.

[편집] 몽골 지배기

킵차크 한국바투의 서양 원정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킵차크 한국을 '황금의 약탈자'라는 뜻의 골든 호르드(Golden Horde)라고 불렀다.

 

킵차크 한국은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편집] 모스크바 대공국

몽골의 지배기동안 러시아의 중심지는 남부의 키에프에서 동북부로 이동하게 된다.

모스크바 대공국1147년유리 돌고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낸다. 이후 몽골의 침략 기간 동안 약탈당했다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 다니일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1317년에 모스크바의 군주는 금장 한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칸으로부터 러시아의 대칸으로 인정받는다. 트베르와 같은 경쟁도시들과의 투쟁,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다툼 속에 모스크바는 점차 러시아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도시로 인정받게 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은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당시 금장 한국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은 트베르의 미하일과 싸워 이겼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1380년에는 자신들이 임명한 대공인 미하일의 복수를 위해 출격한 몽골군을 돈 강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1382년에 토크타미시 칸에게 패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당한다.

 

이후에도 금장한국의 통치는 계속되었으나 돈 강의 전투 이후에는 러시아 독자적인 발달에 크게 간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반 3세때는 이미 유명무실화된 금장한국의 지배를 폐기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에 이르러 모스크바 공국은 '연합체'적인 모습을 벗고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편집] 모스크바 러시아

몽골의 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는 3살의 나이에 대공이 된다. 초반 몇 년간의 섭정 통치가 끝나고 1547년에 이반 4세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 즉 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분권적인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끝나고, 중앙집권적인 모스크바 러시아(러시아어: Царство Русское, 짜르스뜨보 루스까예)가 성립된다.

 

강력한 이반 4세의 통치기간 동안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해외 영토가 많이 팽창하였지만, 후계 문제 때문에 러시아는 동란 시대로 접어든다.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가짜 차르가 3명이 등장한 가운데,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에 자리를 계승한다.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모스크바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편집]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러시아어: 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은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도중 러시아 혁명(1917년 3월)에 의해서 타도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 때이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하였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일명 '대문호')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 패한 영향이 컸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이었다. 그러나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면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가 제한되었고,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다.

 

니콜라이 2세도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하였다. 그는 러일 전쟁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일본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하였고, 1917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군인,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 정부의 퇴진을 원하였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비에트(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 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그 중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는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하였다.

 

1918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에서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격파하여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30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편집]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차르(황제) 퇴위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를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임시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7일레닌의 지도하에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붉은 군대로 개편했다.

 

그후 일본을 포함한 열강에 의한 간섭 전쟁과 시베리아 출병, 백군과의 내전에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일당독재 지배를 결정지었다.

[편집] 소비에트 연방

1922년 12월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SFSR, 벨로루시 SSR, 우크라이나 SSR, 자카프카스 SFSR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死後)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나라안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일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했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이 숙청한 사람은 1200만 명에 이르렀다고도 하며, 무리한 경제발전계획으로 강제수용된 이들도 많았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집권했고, 스탈린중앙유럽 국가를 공산주의화 해 위성국(衛星國)으로 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자는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소련과 나치 독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어 소련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으로 말미암아 발트 3국까지 점령했다. 또한 소련은 핀란드를 흡수하려고 겨울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1941년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首都)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끝에 승리, 전세(戰勢)를 역전시켜 끝내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켰다.

 

소련군 점령지대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연합군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사할린, 만주국한국 북부를 점령했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 감시국가였다. 그는 식량 생산에 힘을 쏟아 일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농업생산의 확대로써 농지의 비영양화, 사막화가 진행되어, 결국 소련은 식량을 해외로부터 수입해야 하게 되었다.

 

또, 중앙유럽 위성국에서는 자주 반체제 운동,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소련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해 무력개입을 통하여 이를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核)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모택동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중소대립).

 

1964년에 농업정책의 실패와 서방에 대한 유화(宥化)정책을 이유로 실각(失脚)한 흐루쇼프에 대신해 강경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지도자가 된 이후, 관료의 세습화 등 체제의 부패가 진행된 동시에 식료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으며, 이와 함께 동쪽 제국 전체의 경제가 점차 침체해 갔다.

 

또한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을 지지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다음해의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나라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낭비했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더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경공업에 대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구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제 대신 복수정당제(複數政黨制)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衛星國家)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국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했다.

 

이에 따라 냉전은 사실상 붕괴, 1989년 12월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조지 H. W. 부시 대통령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했다.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등은 이에 반발해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개혁파와 소련 국민, 서방 각국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어 같은 해 9월 최고 소비에트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SFSR, 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SSR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에 합의하고, 다른 소련 가맹 공화국들도 CIS에 연달아 가입했기 때문에,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사임하고, 소련은 해체되었다.

[편집] 러시아 연방

1990년 6월 12일에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러시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보리스 옐친에 이어 대통령에 선출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집권하며 혼란을 수습하고 러시아의 재건을 이끌었다.

 

 2008년 3월 총선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키예프공국>

 

우크라이나 영토는 동슬라브인들의 초기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남쪽 지방이었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였다. 키예프 공국은 현재의 스웨덴 영토에서 온 바이킹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현지의 슬라브인들인 루시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그리하여 10세기와 11세기에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의 중심부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끼예프 공국(우크라이나어: Ки?вська Русь, 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또는 끼예프 루시880년경부터 12세기 중반까지 현 우크라이나키예프를 중심으로 존재한 고대 국가로 동슬라브족들이 구성원들의 주를 이루었다.

 

창시자는 바랑기아인 출신 노브고로트의 올레크 공(公)으로 드니프르 강 유역을 정복하여 루시의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새 정복지의 키예프로 옮겼다.

[편집] 전성기

블라디미르 1세 때에 동방 정교회가 국교로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년1054년)까지 최전성기였다.

[편집] 쇠퇴기

끼예프 루시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고 흑해 유목민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고, 블라지미르 모노마흐(재위 1113년1125년)가 회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중엽에 몽골에게 정복을 당해 멸망되

키예프 공국은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약해졌다.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Galicia, Halych)와 볼히니아(Volhynia, Volodymyr-Volynskii)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전체 영토가 폴란드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 당시에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코자크 헤티만국(Cossack Hetmanate)이 세워져 백년 이상 모스크바 공국(Muscovy)의 압력을 견뎌냈으나 결국 우크라이나폴란드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초기 동슬라브족
키예프 루시
몽골 침략
할리치-볼히니아 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Cossack era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서우크라이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하여, 이 두 형태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에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1921년-1922년 간, 1932년-193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여 명에서 많게는 1천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러 차례를 겪은 우크라이나1991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에서 조각이 나서 이 조각체가 독립국가연합을 형성하였다.

 

2010년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때, 빅토르 야누코비치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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