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 전, 솔바람 사람 대부분이 전국 국유림 휴양림을 즐겨 다닌 탓에 국유림 휴양림에 대해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기획되고 나름대로 쉽게 원고가 모아졌지만 그 이후 출판사의 여력 등을 비롯한 여러 사정이 겹쳐 어느 듯 2년 정도 출간이 미루어졌다. 이런 탓에 지금처럼 반듯한 단행본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솔바람 식구들 대부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또한 이번 오서산 정모와 함께 ‘48시간의 행복’이라는 책의 첫 번째 질감을 솔바람 식구들과 휴양림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다 같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6일, 토요일 저녁 현지아빠가 건네준 단행본 ‘48시간의 행복’ 속의 이야기들은 대략 2년 여 전에 모아져 당연히 그 원고 내용도 훨씬 그 이전의 오래된 원숙한 글로 다듬어지지 않은 여행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소 진부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솔바람 각 집마다 나름대로다닌 것을 그린 여행기는 그 때, 그 순간만의 느낌을 여전히 보여주며, 숨 쉬고 살아있었다. 이렇게 책다운 책으로 나오게 해 준, 현지아빠의 알게 모르게 계속된 발간에 대한 물밑 작업과 수고에 그냥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마냥 감사하고 싶다. 아울러 이번 오서산 모임에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 우리의 카페지기, 젊은 대장 주은아빠와 맘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서산 정모에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는 올해 3월초에만 하더라도 나로서는 스스로 장담하지 못했다. 정모 일정이 게시되기 전, 이미 4월 첫 주 토요일 서울 북악산 산행을 가야되는 모임 약속이 있었고, 아내도 지난 연말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 병치레를 하면서 장시간 여행을 한다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반전으로 오서산 정모에 갈 수 있는 여건이 순식간에 각각 두 사람에게 주어졌다. 지난 3월의 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본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단행본이 오서산 정모에 맞추어 출간될 수 있겠다는 현지아빠의 언급과 함께 “우리 두 집은 당연히 참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독려에 그만 나로서는 책임감 내지 의무감(?)이 더해져 북악산 산행의 사전 약속을 2순위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내도 2월말부터 거의 매 주말마다 움직인 작은 산행들이 모아져 다시 예전처럼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어느 듯 만들어진 듯 했고, 현지아빠와 본인 말을 통해 전해진 현지맘의 간접적인 동행 독려는 아내로 하여금 오서산 정모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나서게 했다.
천안아산역에서 오서산 휴양림 여행이자 정모를 향한 아내와의 주말 만남. 아내와 나는 성영이가 주말에 혼자 있게 되는 만큼 성영이의 제반 사항을 챙겨주고 난 뒤 나설 수 있는 오전 9시 이후를 동대구역을 출발 시간으로 해서 천안아산역에 KTX가 도착하는 오전 10시 50분을 서로의 약속 시간으로 정해 두었다. 그러나 전날 나로서는 회사 일로 대구로 내려가지 못한 만큼 아내의 도착시간보다 먼저 내려가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으나 주말의 경부고속도로 안성-천안간 도로 정체로 인해 오히려 아내가 나를 마중하는 사정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어떻게 보면 내가 아내의 약속 시간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것은 지난 6일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오고 많이 추워진 꽃샘추위에 사람들이 나들이를 많이 포기해서 도로가 정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나만의 섣부른 오판과 군포 숙소에서 서둘러 나서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다는 것을 말로 치장하며 아내에게 천안아산역에 도착해 있는 위치를 휴대폰으로 알린다. 아내가 천안아산역사 어느 쪽에서 나오는지 몰라서 차 안에서 앞뒤 좌우로 차창 밖을 유심히 살피는 가운데 문득 룸 미러에 나타난 뒤쪽에서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은 의외로 불만스런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 같으면 여행 속 기다림의 10분이 마치 1시간과 같아서 얼굴 인상을 찡그리며 제법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어 놓을 법도 했지만 의외로 아내의 표정은 평온한 표정 그 자체였다. 작은 등산 배낭을 매고 한 손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 다른 한 손에는 호두과자 박스를 들고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은 불평의 시작이 아닌 여행을 시작하는 설레임이었다.
배낭을 뒷자리에 내려놓고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출발하는 가운데 늦은 나에 대한 불만이 아닌 대구 집에 혼자 두고 온 고딩, 성영이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과 고충의 푸념소리를 먼저 내어놓는다. 예전 어릴 때는 “여행 같이 가자!”는 말에 대해 무조건 “Yes”라고 하며 따라 나섰던 성영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이제는 머리가 큰 탓인지,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재어가며, 단호히 “No”라고 말하는 냉정한(?) 모습에 대해 엄마로서는 웬지 배신감과 함께 예전처럼 쉽지 따라주지 않은 것에 대해 속상해 하는 것이다. 이런 아들이 미우면서도 아내는 성영이가 지금쯤 혼자 학원을 제 시간에 잘 갔는지, 준비해 둔 먹거리를 냉장고에서 제 때에 잘 찾아 먹을 수 있을는지, 부모 없는 밤에 혼자 영화를 밤새워가며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한다. 나로서는 이미 혼자 있게 된 아들, 멀리 있는 우리가 걱정과 염려를 한다고 해서 아이가 어떤 텔레파시를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잘 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듯 하지만 엄마인 아내로서는 내내 성영이에 대해 걱정스러워한다. 어떻게 보면 말 잘 듣지 않은 고딩 남자 아이에 대해 청소년기 남자 아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주말부부 생활로 인해 아빠의 역할이 거의 없는 것에 대한 엄마와 아내로서 아빠와 남편인 나에 대한 푸념과 볼멘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천안아산역을 어느 정도 벗어나 아산시로 넘어가는 가운데 아내는 성영이에 대한 얘기를 접어두고 마치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천안아산 역사 안에서 만났던 성영이 또래의 한 거지 와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아내는 역사 안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 두 잔과 호두과자를 사고 난 뒤 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늦어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바로 눈 앞에서 쓰레기통 안을 샅샅이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는 허름한 옷차림의 한 남자 아이를 발견했다. 유심히 바라본 그 아이의 행동은 사람들이 먹다 버린 병이나 종이컵에서 미량의 커피나 쥬스를 마시고자 하는, 바로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절실함이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 아내는 너무 안타까웠고 아이의 나이도 아들 성영이의 또래인 듯 해서 약간의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주게 되었다. 그 아이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커피 한 잔을 바로 받아서 바로 앞에서 뜨거운 커피를 허겁지겁 받아 마시고.... 약간의 미소와 여유를 찾아가고.... 그런 가운데 다시 그 아이의 시선은 다시 아내가 들고 있던 호두과자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게 되고.... 아이의 무언의 간절함에 아내는 다시 호두과자 상자 안의 반을 덜어내어 아이에게 선 듯 건네주었다. 이번에도 그 아이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바로 호두과자를 받아서 마치 며칠간을 굶은 사람처럼 급하게 호두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내는 아이가 불쌍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대구에 두고 온 성영이가 겹쳐지고....... 두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져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는 작은 이야기.
아이를 집에 놔 두고 온 모처럼의 오늘 오서산 휴양림 부부여행이 오히려 두 사람만의 여행이어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같이 하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약간 담긴 여행으로 시작되고 있는 듯. 아빠이자 남편인 나로서는 지금 여행에서 아이를 잠시 잊고 있지만, 엄마이자 아내인 성영엄마는 집에 두고 온 아이를 여전히 머리 속에 담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 몇 년 동안 아내는 여전히 아이가 동행하지 않는 여정이 되는 대구 인근의 가까운 곳을 다녀오거나 근교산 산행을 하게 되더라도 내내 잠시 그 출발을 주저하곤 했다. 어떻게 보면 아내나 나는 예전 성영이를 데리고 워낙 많은 곳을 여행하고 산행을 한 터라 아직도 부부만의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듯. 그러나 최근, 아내의 지난 연말 발병이후 우선 건강을 위해서라도 먼저 부부 두 사람만의 여행과 산행을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처럼 다시 시작하자는 논리가 만들어진 듯 하다.
천안에서 예산으로 가는 21번 국도 길. 어느 듯 아산의 남서쪽 끝 자락인 아산 신창읍을 지나간다. 이 지역도 최근 서울-천안 간 전철이 연장되어 좋아진 교통사정으로 적지 않은 아파트와 다른 건물이 생겨났지만, 5년 여 전 이 곳에 지금 회사의 연구소가 있어서 가끔씩 들렸던 감자탕집, 짜장면집, 구이집 등을 발견하며, 나로서는 추억을 찾아내는 길이 된다. 더더욱 이 곳은 서해안 쪽을 가더라도 대전-서천간 고속도로와 대전-당진간 고속도로, 남천안-공주간 고속도로가 열려 여행의 중간 길로 택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듯 하다. 신창읍을 지나면 도고온천 지역. 도고역 앞을 지나가면서 문득 세계 식물원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한다. 예전 이 곳에 근무하고 있을 때 주말에 아내가 초등학생인 성영이를 데리고 와서 인근 휴양림에서 하루를 묵고 요즘처럼 썩 괜찮은 식물원이 없었던 만큼 이 곳에서 다양한 식물 종을 재미있게 찾아보고, 많은 종류의 선인장과 예쁜 여러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은 것을 아내와 같이 기억해낸다.
어느 듯 오후 1시를 넘어서면서 천안아산역 출발 때부터 고민하다가 미루어두었던 점심 식사를 이 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세계식물원 인근을 지나 여전히 21번 국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신례원 마을 입구에서 나로서는 머리를 식히는 드라이브를 겸해서 소박한 밥상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기사식당 한 곳을 갑자기 떠올렸다. 아산시내에 접어들면서부터 본인이 예전부터 알던 맛집으로 박나물을 넣어서 제대로 하는 연포탕 집과 이승만 대통령시절부터 유명했던 장어집을 말했지만 소위 고콜레스테롤 식품이라는 것 때문에 썩 내지 않던 아내가 의외로 이번에는 다소 늦어진 식사 시간과 시장기 탓인지 수긍을 한다. 신례원 입구 마을에 위치한 고향기사 식당. 식당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이 식당은 몇 년 사이에 건물 안 리모델링을 한 듯 예전의 허름한 식당 내부 모습이 아닌 방 구조가 다소 달라져 있었고 탁자 배치도 일부 바뀌어져 있었다. 웬지 모처럼 찾아간 나로서는 막연한 섭섭함과 아쉬움. 그러나 주인과 배달하는 아주머니는 거의 바뀌지 않은 듯. 주문 하기. 나의 아내에 대한 추천 메뉴는 조기탕, 오삼 불고기, 된장찌개. 그러나 아내의 선택에 따라 주문한 메뉴는 버섯찌개. 본인이 별 다른 토를 달지 않았던 이유는 실상 이 기사식당의 매력은 주문한 단품 찌개류가 아니라 단품 주문 음식과 같이 나오는 밑반찬이 풍부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김치, 무꽁치 조림, 풋나물 겉절이, 젓갈, 계란찜, 상추쌈과 풋고추, 쌈장, 김치에 이르는 집에서 먹는 반찬들. 소형 가스렌지에 버섯찌개가 올려져 끓여지는 가운데 밑반찬과 함께 밥 공기 두 그릇을 가져다 준다. 나름대로 맛잇는 아내와 여행지에서 모처럼의 점심식사. 식사를 하고 나오는 가운데 아내는 이 집에 대한 촌평으로 특별히 어떤 음식이 맛있었다는 것이 아닌 여행지에서 1만 2천원의 소박한 점심 비용에 더 큰 점수를 준다.
식사 후 네비게이션에 오서산 자연휴양림을 표시하고 다시 출발. 운전하는 가운데 다른 솔바람 식구들의 오는 길이 궁금해서 현지아빠와 주은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지아빠는 의외로 지금 안양 집에서 나와 인근에서 먼저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주은아빠는 이미 친구들인 재욱, 시연아빠 식구네와 함께 광천에서 일찍 만나 장을 보고난 뒤, 지금 오서산 휴양림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는 감사스럽기도 하고 미안스러운 소식을 전해준다. 세 젊은 아빠네 가족 덕분에 여행에서 다소 귀찮은 반찬거리를 준비해야 아내로서도 무척 여유로운 여행이 되었다고 고마워한다.
신례원에서 예산으로 넘어가는 21번 국도 길에서 추사고택과 예당저수지의 방향을 알리는 안내 표시판을 발견한다. 이 곳 역시 심심찮게 산책삼아 들렸던 곳이어서 그저 반가움. 어느 듯 예산 마을을 벗어날 즈음에 이 곳이 예산 사과로 유명한 과수원 인근이어서 사과를 판매하는 집들이 많이 보여 그 가운데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정모 식사 준비를 주은아빠에게 전적으로 맡겨둔 탓에 오서산 휴양림에 그냥 맨손으로 들어가기는 뭔가 아쉬워서 편안한 마음으로 먹기에 좋은 중품 정도의 사과 한 박스를 사기로 작정 했다. 사과주산지 대구에 살아왔던 경험으르 전시되어 있던 여러 사과 가운데 크고 흠집이 없는 상품이 아닌 다소 크기가 작고 볼품이 없는 사과 한 상자를 고르고 난 뒤 사과 맛보기. 의외로 사과 맛의 제철이 지난,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저장 사과였지만 예전에 제철 10월말에 이 곳에서 맛본 시원한 과육 맛을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격에서도 1상자 2만5천원에 만족.
다시 출발. 예산을 벗어나고 휴양림이 위치한 홍성 땅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도로표지판에서 ‘홍성’이라는 지명을 발견하면서부터 지난해 10월 안면도 오션캐슬에 세미나를 하러 가는 길에 국도길을 택해 달리다가 문득 보여 찾은 화가 이응로 생가터에 최근 세워진 ‘이응로 기념관’이 문득 떠올랐다. 시멘트 사각형 건축물에 나무 재질로 외형을 깔끔하게 단장한 기념관 건물,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던 고암 이응로 선생의 일대기 소개기와 화첩, 그림, 이야기들을 당시 방문에서 짧은 시간에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직 오서산에 들어가는 시간이 나름대로 여유가 있는 듯 해서 이 곳에 다시 들려보기로 했다. 충남 홍성의 ‘이응로’를 네비게이션 상에서 확인하여 충남 홍성의 ‘이응노의 집’을 바로 찾아가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차를 세워놓고 지도를 보며 홍성에 들어와서 다시 묻거나 홍성군 관광안내도를 구해 특정 장소를 찾아가곤 했지만 이제는 네비게이션의 힘을 빌려 여행지를 찾아가는 것.. 그러나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는 이면에는 여행지를 찾아가는 편리함이 커지만 돌아와서 가늠해 보면 예전 익숙했던 도로번호에 대한 기억과 경로를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요즘 보편화된 계산기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간단한 수기 셈조차 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었듯이....... 지금의 네비게이션은 전국 도로번호를 거의 외웠던 나를 점점, 아니 벌써 길치로 만들어 놓고 있는 지 모르겠다.
홍성으로 접어드는 가운데 21번 국도길 주변에서 며칠 전인가 대전 청사로부터 이전해서 내포 신도시에 새로 개청한 충남도청 개청식 경축 안내 현수막들이 심심찮게 발견한다. 작년 늦가울 업무 차 보령화력발전소로 가는 길목에 이른 새벽 서울을 출발해 잠시 오른 용봉산에서 우연히 내려다본 마무리 공사 중이었던 충남 도청사 건물 모습을 기억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에 위치한 경북도청사도 얼마 있지 않으면 안동 하회마을 인근으로 옮겨갈 것이고...... 도청사의 이전은 그 지역의 삶의 역사를 알게 모르게, 지나고 나면 제법 크게 바뀌게 하는 듯. 돌이켜 보면 충남 도청사도 일제 강점기 시절 철도 개설과 함께 당시 공주 지역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의 도시 규모가 제법 커지게 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전시가 광역시로 변한 가운데 충남도청사 이전이 결정되고 난 뒤 서해안 고속도로에 이어 최근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가 열려 마침 도청사가 이 곳 홍성 내포 땅으로 옮겨오게 됨으로써 이 지역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는 지 긍금 해진다.
용봉산에서 바라본 지난 10월의 내포신도시의 마무리 공사 중이었던 충남도청사
고암 이응로 화백 생가터에 지어진 '이응노 기념관'
홍성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하고 그리워한 고암 이응로 화백
예산에서 30여 분을 달렸을까 어느 듯 홍성읍에 이르고 홍성운동장 옆을 지나 인근의 이응노 생가터에 위치한 ‘이응노의 집’을 찾아 들어간다. 충남 홍성군 중계리 홍천 마을에 위치한 기념관. 오늘은 이응노선생의 자취를 예전에 익히 알고 있던 고암 이응노 선생이 프랑스로부터 귀국해서 기거했던 수덕사의 수덕여관이 아닌 고향 홍성 땅에서 찾는다. 지난 10월 혼자 왔을 때는 관람료로 천원을 내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날 따라 매표 발매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안내원은 우리에게 그냥 들어가라고 안내한다. 안내원이 건네주는 <고암 이응노 1904년 홍성 → 1989년, 파리>의 브로셔 한 권. 그 내용 중에서 고암 이응노 선생의 파게티 갤러리 개인전 도록 서문(1971년)이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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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았던 곳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삼백 리 떨어져 있는 홍성에서도 몇 십리 더 떨어진 고요하고 평온한 작은 마을이다. 우리 집 남쪽으로는 월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고, 북쪽에는 용봉산이라고 불리는 바위투성이의 봉우리가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계절에 따라, 이 산들의 모습은 그 이름처럼 보였다. 즉, 월산이 아름답고 수수하며 우아하여 한마디로 여인의 자태를 보여준다면, 용봉산은 강인하고 위엄있게 우뚝 솟아 있었다. 선인들은 어찌 이리도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을까.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감탄을 하게 된다.
산들은 저마다 꼭 알맞은 높이와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이 산들은 실제보다 훨씬 커 보였다. 살아가면서 산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올빼미 바위, 새색시 바위, 늙은이 바위, 거울 바위처럼 우리는 바윗돌 하나 하나마다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그것은 단지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마치 늙으신 부모님이나 형제 혹은 친구에게 끌리듯이 그 바위들에게 끌렸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이러한 자연 속에서 자라났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아득히 지나가 버린 시절이 이렇게 또렷이 떠오르다니 ! 오늘도 내 손은 붓을 잡고 내 눈은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지금도 그 때처럼, 그린다는 것으로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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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부
문인화로부터 시작도어 풍경화로 이어지는 이응로 화백의 초기 그림
그리고 추상으로 이어진 이응로의 그림. 군상.
예전 수덕사 수덕여관 입구 돌바위에서 발견하곤 했던 이응로 화백의 추상 그림. 탁본으로 전시되어 있어 새삼스럽다.
전시관 건물 내애서 건축미를 바라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제 3시관에는 이응로 화백 그림 이외에 현대작가의 전시도 열리고 있다. 한 장의 그림과 함께 그 그림을 그리는 시간적인 흐름과 공간을 보여주는 Image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서해 홍성 바다에서 위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홍성 사람임을, 자신의 뿌리인 월산과 용봉산을 그리워했던 고암(顧菴) 이응로 선생의 최초 문인화(사군자)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풍경화 시기, 반추상의 풍경/인물화 시기, 구성 연작시기, 동백림 사건과 연결된 옥중시기, 그리고 마지막 군상의 시기로 이어지는 기념관 내 1, 2 전시실의 전시 작품을 통해 아내와 함께 나는 지난 1900년대 초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시기, 경제성장과 민주화 과정에 이르는 근현대사의 과정을 이응로 선생의 그림과 화첩, 조각 작품들을 통해 읽어 내려간다. “예술은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라고 얘기하던 이응로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는 나에게 지금 이응로 선생은 마치 “자네는 지금 나의 그림을 보고 홍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되묻고 있는 듯 하다. 그런 가운데 다소 엉뚱스럽지만 충북 증평의 김기창 운보미술관과 강원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이 문득 떠오른다. 증평의 질마재와 양구의 광치령이 생각나듯이....
이응로 기념관 전경.... 소마미술관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기념관 맞은 편의 휴식공간. 왼쪽은 사무실이고 오른쪽은 작은 카페.
생가터에 최근 다시 재현된 이응노 생가
전시실의 이 곳, 저 곳을 아내와 한참동안 둘러보고 난 뒤 빠져나와 전시관 앞 이응로 선생 생가터에 복원된 초가집을 바라본다. 안내원 말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이 곳에는 이응로 선생 친인척이 이 자리에 살고 있었으며, 몇 해 전, 홍성군에서 이 터 일대와 집들을 매입하여 기념관조성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건물이 이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10월에 왔을 때는 초가집 공사를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어느 듯 지금은 공사가 마무리되어 나름대로 제대로 된 초가집이 서 있다. 그러나 새로 지은 초가집이어서 그런 지 나에게 그렇게 큰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밖에서 바라보는 사각형 기념관 건물이 꽤나 인상적이고 단아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서울 송파, 올림픽 공원 내 소마미술관을 건축한 조성룡 교수의 작품. 소마 미술관을 가본 사람이면 두 건물을 가늠하며 색다른 비교감을 가질 수 있을 듯.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두 건물에 대해 표면의 목조 외형과 사각형 질감, 통유리를 사용한 것에서부터 나로서는 마치 형제 건물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다시 이응로 생가 기념관을 빠져 나와 오서산이 있는 광천읍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홍성읍을 통과하면서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이 나타나고 홍주읍성 성곽터와 홍주군청 앞의 고목 들을 바라보면서 홍성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지는 순간, 방금 전 이응로 생가 기념관을 나서면서 받아든 ‘홍주성 역사관’ 브로셔를 나중에 볼 겸해서 가지고 나왔는데 그 ‘홍주성 역사관‘ 건물이 우연찮게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다. 오서산으로 오고 있는 솔바람 식구를 찾아가는 마음도 급했지만 고양이가 고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비가 내리고 바람이 다소 부는 을씨년스런 날씨였지만 최근 세워진 홍주성 역사관 내부가 궁금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홍주땅을 소개하는 광천사람 소리꾼 장사익....
홍주(홍성)과 함께 예산, 덕산으로 연결되는 내포평야.
전시관 내 전시물에서 인상적이었던 사실화 그림. 석천 한유도. 748년 영조 때의 궁중화원 김의경의 작품
1825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조선교구의 박해를 나타낸 삽화 그림.
홍주성 역사관을 들어가서 지하층부터 시작되는 전시관은 홍성의 역사를 새로 가늠하게 되는, 나에게는 홍성의 새로운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생각이상으로 잘 소개되어 있었다. 특별한 진품이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사전 기획자의 홍성, 홍주에 대한 역사 소개에 대한 세밀한 의도가 담겨 있는 듯 했다. 이 역사관에서 30여분의 시간은 그동안 수도 없이 홍성 땅을 지나다니곤 했지만 ‘내가 이 정도로 홍성을 몰랐나?하고‘ 생각할 만큼 잘 소개되어 있었다. 홍성 광천 사람인 소리꾼 장사익씨의 안내로 첫 소개되는 홍성군에 대한 안내멘트와 지하층 들어가는 첫머리에 있는 홍주성의 성곽 모형을 통해 홍주(홍성)의 면면을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최영,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 등의 나라에 자신의 인생 역정을 바친 역사의 길목에서 늘 당당하게 걸어갔던 이들의 여정과 함께 이들이 홍주 출신이었음을...... 그러므로 한국 근세사,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 홍주 땅에서 적지 않은 항일 독립투사들이 새롭게 나오는 현실에서 결국 이 지역 지명을 ‘홍주에서 강제적으로 ‘홍성’으로 바뀌게 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홍성 땅에서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 700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예사스럽지 않음을.......... 해설 내용 중의 순조실록 내용 중 하나가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홍주는 사학(邪學)이 가장 심하게 물든 지역이다” 홍주 출신 사람들의 발자취가 나에게 던져주는 이 곳의 역사의 언어들은 홍주가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님을 쉽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홍주성 역사관의 옥상에서 홍주성 전체를 눈으로 360도 바라보고 난 뒤 역사관을 나오다가 인근 군청 앞의 인상적이었던 고목에 대해 안내원에게 물으니 홍성군청사가 다른 지역과 달리 조선 홍주목의 목사가 집무를 했던 동헌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어 군청 내 느티나무들도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꼭 한 번 둘려보고 가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역사관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나로서는 홍주에 대해 나름대로 마음이 이끌려 있었던 만큼 홍주목의 옛 모습이 남겨져 있는 군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주성 역사관에서 빠져 나와 홍성군청사로 건너가기.
홍성군청으로 들어가는 길......
홍주목의 입구를 알리는 위문, 홍주아문
홍성군청 들어가는 담벼락을 따라 봄 비에 함께 걸어가는 길. 홍주아문이 나타나고, 홍주목 동헌 입구임을 알리는 홍주아문은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가운데 세워져 있다고 옆의 안내판에 소개하고 있다. 비록 세월이 흘러 현대식 군 청사 건물이 들어섰지만 지금의 홍주아문은 여전히 당당히 위문으로서 그 격을 유지하고 있다. 아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니 현대식 군청사 앞 마당에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위병인 양 당당하게 서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심어진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명명되어 있고 홍주 땅에 액운이 생기면 밤새도록 울었다고 설명이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도청사 건물 정문에서 청사 뒤편으로 돌아가니 바로 홍주목 동헌이었던 22칸의 목조건물이 바로 눈 앞에 들어온다. 특이하게 동헌(東軒)이라는 한자 편액 대신 안회당(安懷堂)이라고 씌어진 편액이 달려있고. 안회? 편안할 안, 품을 회..... 편안함을 품는 집 ? 그 당시의 편안함이 과연 백성에게 진정한 ‘편안암’으로 다가왔을까라는...... 그렇지만 편안함을 품는 집이라는데 고개를 끄덕끄덕이면서 엉뚱하게 같은 발음의 안회, 안회당앞에서 문득 공자가 총애했던 제자, 안회(顔回)를 나로서는 떠올린다.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자기의 분수와 위치를 지키며 한 시대를 살아갔던 안회. 편안함이라는 것은 바로 욕망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홍주목의 동헌이었던 안회정. 군청 안에 잘 보존되어 관리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회당을 둘러보고난 뒤, 그 뒤편에는 또 다시 작은 연못과 정자, 오래된 나무 몇 그루가 우리의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안회당 뒤뜰에 세워진 정자, 여하정 그리고 연못. 아울러 고목과 어울린 정자와 연못을 몇 발치에서 떨어져서 바라보는 정경은 봄비가 내리는 주말 오후의 봄을 여는 서정의 운치로는 그만이었다. 여하정 정자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는 가운데서 문득 하나의 표지석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신앙 증거터’라는 쓰여진 검은 비석. 이 비석 안내판 설명에는 천주교 박해시대(1791-1869년)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문초를 받았던 곳이라고 씌어져 있다. 잠시 침묵. 침묵 속에서 나로서는 목숨을 바쳐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던 순교자들의 삶과 ‘과연 오늘날의 천주교 신자인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 가’를 나에게 스스로 물어보는 시간이 되고 있다. 아내와 나로서는 역사의 의미가 아닌 또 다른 의미의 장소에 와 있음을 발견한다.
홍주목사 내에 위치한 정자, 여하정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쉬어가는 것도....
여하정 정자 주변과 안회당 주위를 비가 오는 가운데서 천천히 거닐다가 다시 오서산 모임 시간에 마음이 쫓겨 오래 있지 못하고 차룰 주차해둔 곳으로 빠져 나왔다. 시간 여건상 홍주성 동문과 홍주성곽, 나머지의 순교성지 일대를 더 둘러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아내와 나는 다시 오서산 휴양림이 있는 광천읍 쪽으로 21번 국도를 따라 넘어간다. 넘어가는 가운데 2주전 인근의 보령화력발전소에 업무 차 왔다가 들린 오천항 아래에 있는 천주교 갈매못 순교성지 얘기를 하니, 오서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나의 마음을 뒤로하고 아내는 바로 다시 그 곳으로 가보자고 재촉한다. 나로서는 보령화력 발전소에 오는 길에 가끔씩 이곳 갈매못에 들리기도 하지만 아내로서는 대구에서 이 쪽에 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만큼 솔바람식구들에게 마음 속으로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빠른 시간 내에 둘러보고 오서산 휴양림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서산 휴양림에 3시경에 들어가려고 한 사전 계획이 이미 홍주성 역사관 방문에 이어 갈매못 성지 방문으로 인해 2시간여 지체되고 있다. 마음이 바쁜 나로서는 광천읍에서 서둘러 청소면소재지를 거쳐 빠른 속도로 몰아 오천항으로 넘어갔다. 키 조개로 유명한 오천항을 지나쳐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갈매못. 원 이름은 갈마연,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라는 의미. 어떻게 보면 지금 이 곳 갈매못 성지에서 우리는 잠시 영적 목마름을 찾는 두 사람이 된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초가 되는 비망록을 작성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주교이자 조선 5대 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신부 3명과 지도층 신자 2명이 이 곳 충청도 수영이 있는 해변에서 순교했고 이 5명의 성인들 이외에 5백여 명이 무명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참수형을 당한 곳, 갈매못에서 우리는 작은 산 위에 위치한 기념관과 성당 안에서 각자의 침묵과 기도 시간을 갖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곳의 시간이 지난 주 3월 31일, 부활절에 이은 엠마오 여정이 되고 있는 지도.....( *엠마오 여정 : 예수 십자가 죽음이후 예수의 죽음에 낙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제자 두 사람에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걸어가면서 이야기 하고, 저녁에 서로 식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다시 알아 보게 되는 성경 속의 이야기, 가톨릭의 전통으로 부활절 일요일이후 신부님과 수녀님, 교인들은 심심찮게 여행을 떠나는데 이를 엠마오 여정이라고 관습적으로 일컫는다)
갈매못 천주교 박해기념 성지 기념관 내부
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 디블뤼 주교를 포함한 5명이 이 곳 갈매곳에서 순교하다...
갈매못에서 내려다 본 오천항 앞바다...
십자가에 못박힘....
기념관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갈매못에서 오서산으로 출발하려고 할 즈음, 현지아빠로부터 휴대폰 알람 소리가 들어온다. “중간에 어디로 샜구만?” “ㅎㅎ 예, 빨리 들어갈께요.......” “모두 들어와 있어요...” “(작은 소리로) 예~~~(미안함)” 오천항 갈매못 성지에서 서둘러 휴양림으로 들어간다. 오천항의 충청도 수영터를 차창 밖으로 아내에게 잠시 보여주고 다시 청소면 소재지로 빠져 나와 오서산 휴양림이 있는 산 쪽으로 들어간다. 장현 저수지를 지나고 오서산 휴양림 정문을 거쳐 수련관으로 올라가는데 웬지 지금의 휴양림의 짧은 오름 길이 웬지 오늘따라 몇 년 전인가 봄 첫 정모 때와 같은 설레임으로 가득찬 길이 된다. 단지 그 때는 단지 얼굴을 모르고 on-line 상으로만 느껴온 사람들을 off-line으로 만난다는 ‘첫 설레임’이었지만 오늘의 정모는 이미 수년 동안 얼굴을 익혀온 얼굴인 만큼 새로운 얼굴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예전 힘들게 명절 때마다 겨우 보게 되는 식구들을 보는 설레임이 아닐까하고 가늠해 본다.
재욱아빠의 능숙한 돼지수육 썰기... 감탄.
'48시간의 행복'의 단행본 발간 묶음을 풀었다. 현지아빠는 각 집에 나누어 주고....
음식이 차려지는 가운데 배부된 '48시간의 행복'을 받아들고 흐뭇해 하는 솔바람 식구들...
어느 듯 축하의 춘설이 내리고.....
수련관 앞에 차를 세우고 나오니 2층 베란다 위에서 바로 연우아빠가 반가운 인사를 한다. 이어 현지아빠, 수람아빠, 은주아빠, 상린아빠, 유진아빠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악수하고 현지맘을 비롯한 여러 맘님들과도 반가운 인사. 그러는 가운데 현지아빠를 비롯한 몇 몇 사람들이 며칠 전 출간한 ‘48시간의 행복’ 책 묶음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다른 한 쪽에서 재욱아빠는 카페 대장 주은아빠의 감시(?)하에 돼지고기 수육을 썰고 있다. 주은이네, 재욱이네, 시연이네 솔바람 내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이 세 가족의 부지런함 덕분에 오늘은 아무런 먹거리 준비 없이, 부담 없이 이곳으로 넘어왔다. 어느 듯 휴양림 수련관 창밖은 우리들의 정모를 기념하고 ‘48시간의 행복’을 축하하는 4월의 하얀 꽃가루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4월의 춘설에 솔바람 식구들은 모두 감탄사를 내어 놓으며 나름대로 각자의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눈 내리는 4월 휴양림 주변의 모습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다른 한편에서는 얇게 썬 먹음직스러운 수육, 상린아빠가 준비해온 싱싱한 회, 쭈꾸미, 달지않고 바싹한 강정, 시연이네 할머니가 담근 깊은 맛을 지닌 묵은 김치, 이 곳에서 끓인 얼큰한 매운탕, 그리고 먹기 좋게 만든 쌈장과 새우젓 양념이 밥상 위에 올려 진다. 그러는 가운데 현지아빠는 새 책 단행본을 각 집의 집필한 횟수에 에 비례해서 출판사의 책 인세를 대신한다며 각자에게 배당된 나누어 준다. 그리고 여행기를 쓰지 않은 가족들에게도 한 부씩 배부되어 책을 받아든 이들은 노란색으로 단장한 ‘48시간의 행복’의 책 껍질을 벗겨 속살을 들여다 본다. 모두들 그럴싸하게, 제법 깔끔하게, 그야말로 책 답게 만들어진 우리들의 책에 대해 모두 감탄사를 내어놓으며 현지아빠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자축의 시간을 가진다. 그 덕분에 서문과 여행 tip, 그리고 교정을 본 연우아빠와 나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황송하게 여러 사람들이 해온다. 나로서는 별로 한 일이 없음과 그동안의 게으름에 그만 계면쩍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봐도 소주 한 잔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오서산 정모에 차려진 음식 차림. 캬~~
情의 나눔...
카페지기 주은아빠의 인사.
맘들도 건배...
우리들의 이야기는 내내 끝이 없어라. 한사람, 한 사람의 어설픈 얘기도 한 웃음과 재미거리가 되고...
모두 각자의 잔에 술을 따르고 축하의 잔을 높이 들었다. 책의 발간과 함께 모처럼 열 한가족이 모인 정모를 축하하는 건배의 잔, 아울러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준 주은아빠와 재욱, 시연아빠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세 가족이 만들어준 성찬들은 정이 가득찬, 봄의 정겨움과 같은 맛. 재욱 아빠에 의해 알맞게 삶아지고 정성스럽게 썰어진 얇은 수육이 시연아빠의 어머니 솜씨의 묵은지 깊은 맛과 어울려 소주 한 잔이 바로 감칠 맛이 되고 있다. 책 발간에 얽힌 그동안의 여러 사연들이 오고간 뒤, 요즘 각 집의 살아가는 이런 저런 얘기들이 또 다른 술 안주로 등장한다. 수람 엄마의 복지사로서 격무에 시달리는 고충과 애로사항들, 주은아빠의 바쁜 회사 이야기로 건강과 치유를 의미하는 ‘웰리힐리'이름에 얽힌 이야기, 어느 듯 현지네의 우진이가 다가오는 5월 21일 군대에 들어가게 된다는 깜짝 발표와 여행을 한 번 가야한다는 현지맘 얘기, 상린아빠의 내내 들어도 싫지 않은 광천 자랑과 최명석 독바위 젓갈 집 이야기, 연우아빠의 대구에서 서울 본사로 복귀한 사연, 우리 집 성영맘의 지난 연말이 병치레 이후의 운동과 현미, 채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유진맘과 은주맘이 입시를 앞둔 고딩으로 인해 지금에 있지 못해 섭섭해하는(?) 두 아빠의 아쉬움까지......... 하여, 나로서는 유진아빠에게 유진맘에게 전화를 걸 것을 부탁했다. 휴대폰 전화로 본인과 연우아빠는 서로 전화를 바꾸어 가며 안부 인사와 여기에 오지 못한 유진맘에게 위로의 전화. 어느 듯 남자들은 술 마시게 마시고 옆 자리의 맘들은 맘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며 간혹 건배하며 서로 곡차를 나누면서 오서산의 춘야를 즐기고 있다. 한편, 다른 방에 가 있는 주은이와 수람이를 비롯한 여러 명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 주은아빠가 문득 올해 바쁜 일로 한 해만 카페지기를 연우아빠에게 물려 주고 싶다는 의사를 우리에게 표시한다. 젊은 아빠가 계속하기를 주문하는 현지아빠와 본인의 의견에 반해 주은아빠는 지금 회사 일로 많이 바쁜 듯, 간곡하게 다시 카페지기를 연우아빠가 다시 1년 정도만 운영해주기를 요청한다. 이를 듣는 나머지 솔바람 식구들로서는 두 사람 중 누구나 해도 별 문제가 없을 듯 했고,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연우아빠와 주은아빠가 서로의 이해를 통해 다가오는 5월1일부터 연우아빠가 1년간 다시 카페지기를 맡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카페를 위해 여러 수고를 해 온 주은아빠와 새로 다시 맡은 연우아빠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박수를 치고.......... 일배 일배 우일배. 그리고 주은아빠의 제안으로 6월 넷째 주 야영정모를 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미정.... 여기에 대해서도 모두 동의와 함께 예약에 대한 거국적인 잠여 협조에 대한 주은 아빠의 당부가 있었다. 두 달 후애 열릴 솔바람의 휴양림 방이 아닌 캠핑 정모에 대해 여름철의 만남과 줄거움을 기대하며 모두 미소.......
서우, 서우아빠와 서우맘의 도착...
배달은석과 모카하라를 서우아빠, 서우맘으로 이름을 바꾸게 한 서우. 솔바람의 마스코트
어느 듯 휴양림 수련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시간, 8시를 조금 지났을까? 얼마 전 새롭게 태어난 딸, 서우를 데리고 배달은석, 아니 서우아빠가 모카하라 아내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다. 모두 일어나 반가운 인사, 축하의 인사도... 그리고 모두의 시선은 이 집 딸의 얼굴에 모아진다.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앳된 아기 모습에 모두들 감탄. 한 아이로 인한 부부의 축복과 기쁨, 즐거움이 서우네 배달은석과 모카하라님의 얼굴에 담겨져 있다. 서우네 부부 두 사람을 한 식사가 차려지고....... 그러는 가운데 주은아빠가 준비해온 소주가 벌써 떨어졌다. 잔치에 술이 떨어지다니.....그러자 주은아빠에게 아빠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ㅎㅎ “고작 10병이 뭐야 ? “ 은주아빠는 ”최소 한 사람당 2병씩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라고 푸념하기도......이에 주은아빠의 변명 왈, “수퍼마켓에서 혼자 주은맘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소주를 10병 이상 사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는 고백.
술이 좀 더 필요해서 술을 사러 나간 사이에 남은 사람들은 상 정리
재욱아빠와 시연아빠는 설거지...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시간.... 남자 아이들은 어디에.....
다시 상이 차려지고 이번에는 주은아빠의 라면 끓이는 솜씨가 발휘됩니다.
젊은 아빠들의 의기투합...
오서산 휴양림의 밤은 깊어갑니다.
나로서는 내일 아침의 등산을 위해 따로 남겨둔 소주 한 병과 1 L 맥주 한 병을 내어놓지만 이 술의 양은 지금의 아빠들에게는 조족지혈의 양. 결국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연우아빠에게 운전을 강요하여(?) 한밤 중 술 추진조가 만들어졌다. 추진조가 출발하고 잠시 1차 여흥의 마침과 장내 정리. 맘들은 여자들 방으로 옮겨가서 씻고, 그러는 사이에 나머지 아빠들은 상 정리와 설거지를 하고, 남아 있던 안주를 모아 2차 작은 상차림으로 옮겨간다. 그러는 가운데 술을 사러 나갔던 연우아빠, 은주아빠, 유진아빠가 돌아오고........ 두 번째 잔치연에서 안주는 라면. 주은아빠가 끓이는 라면 냄새에 옆 방에 있던 엄마와 아이들도 어느 새 다시 건너오고... 첫 번째 라면 냄비는 아이들과 엄마들의 차지, 그리고 두 번째 라면냄비는 아빠들의 먹거리이자 소주 안주거리가 된다. 소주 한 잔과 라면 국물의 어울림. 옆에서 재욱아빠와 서우아빠의 동갑내기 인사. 그리고 한 살 많지만 같이 또래로서 어울리는 시연아빠. 세 사람의 오서산 휴양림 결의 내지 의기투합이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마냥 흐뭇함. 예전 현지아빠, 연우아빠, 본인의 같은 또래의 동년배로서와 같은 어울림과 마음이 느껴졌다면........... 어느 듯 밤은 깊어가고, 맘들과 여자 아이들도 옆의 여자방으로 모두 건너가고
평소 일찍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가진 상린아빠가 작은 방으로 자러간 가운데 아빠들의 직장생활에 고충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직장의 각자의 위치에서 처신과 윗사람과 아랫 사람을 대하는 어려움, 바쁜 가운데서 여유와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 가족에 대한 의무감 등등......
예전처럼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 솔바람 아빠들, 밤 12시를 넘어가자 이제 정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내일 이른 아침의 오서산 산행을 위해 이 정도에서 오서산의 토요일 밤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잠자리 정리하고 이불 펴기. 상 정리를 하는 가운데 남자들 숙소 잠자리에서 적지 않은 이불이 여자들 방으로 옮겨간 터라 이불 수가 당연히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우아빠, 주은아빠, 유진아빠가 각각 2개씩의 얇은 침낭을 집으로부터 가져온 덕분에 남자 모두 잘 자리에 깔 수 있을 이불이 바닥에 깔렸다. 그리고 방안의 온도는 눈이 내리고 난 뒤 제법 추워진 바깥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온기가 더해져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방안 온도가 되어 나름대로 편안한 하룻밤 잠자리가 되었다. 각자 세면 후 잠자리에 들기 앞서 우리 남자들은 분명 내일 이른 아침 상린 아빠가 우리들을 6시 이전에 깨울 것이라고 예견했다. 먼저 잠자리에 든 만큼 분명 이른 새벽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을 상린아빠가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간에 이른 기상으로 모두를 깨우게 될 수 있음을..........ㅎㅎ 모두 꿈나라로.... 거룩한 죽음.
첫댓글 깨알 같은 기억력에 그저 탄복을 ^^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것을 보고 오시고,
게다가 느낌 하나하나가 다 같이 여행한 사람처럼 산뜻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성영아빠의 후기네요. 역시나 조금 길고...
그 짧은 시간에 많이도 다녔네요.
안 가봐도 가본 것 같습니다.
모범적인 여행후기 감사합니다
정호아빠는 안 오신 만큼 술 사야 됨..... 주은아빠 책 배달비도 겸해서.....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성영아빠님은 하루 36시간을 사시는듯...
부부, 홀아비, 가족여행 어떻게 보면 서로 컨셉이 안맞는 모임인데도 어색하지 않고
서로간의 정을 담뿍 느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大作 후기 정독했습니다 ^^
다음 날 아침에 먹었던 그 호두과자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성영맘님의 따뜻한 마음이 이 곳까지 전해집니다 ^^
제 밑에 마침 홍성 출신 직원이 있는데, 쓰신 글 내용으로 홍성에 대해서 아는 척 한 번 해야겠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난 고장이나 일 열심히 하라 드립 한 번 날려 줘야겠네요 ㅋㅋㅋ
P.S. 서우 사진도 정말 잘 나왔습니다. ㅎㅎㅎ
정독은 못하고 사진위주로 한 번, 다시 들어와서 읽다가 또 제대로 못 읽고 댓글 다는중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의 폐해인지 장문의 글 읽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글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요즘 뭘 진득하니 못하는 조급증이 있는듯...
젊은아빠들의 얼굴이 참 좋아보이네요. 예전에 유진아빠도 저렇게 젊었을텐데 말이죠.ㅋㅋ
서우 눈을 보면 다 마음이 홀릴 것 같으네요. 유진이 표현대로 비현실적인 외모가 맞는 듯 합니다.
올려놓고 보니 저 역시 다시 보기 귀찮아네요. 한 번 글 쓰고 나면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ㅎㅎ 유진아빠 젊을 때 사진 한 번 올려보시죠. 그러면 우리가 지금의 젊은 아빠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ㅎㅎ
성영아빠님 이글 다보기 힘들것 같아서 우선 퇴근하고 내일 봐야겠습니다. ^^ 오랜만에 성영아빠님다운 글이 올라온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