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97. [역경의 열매] 정성진 (1-30) 엘리트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고난 속 ‘예수’ 만나
씀씀이 컸던 아버지 재산 탕진… 어려운 형편에도 신앙 물려줘 흔들리는 삶 이겨낸 원동력
정성진 목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사단법인 크로스로드 사무실에서 자신의 저서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을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1955년 2월 4일 어머니 윤덕희(1917~1986) 권사는 경기도 안산 도일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한 뒤 집에 와서 날 낳으셨다. 도일교회는 집안 땅 1322㎡(400평) 위에 어머니가 개척하신 교회였다.
당시 부흥회 강사는 이성봉(1900~1965) 목사였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 목사가 내 이름을 지었다. 성회 기간 중 태어난 아이라고 ‘성스러울 성(聖)’자를 사용하셨다. 내 이름이 ‘성진’이 된 이유다.
교회를 개척하실 정도로 신실하셨던 어머니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신앙이었다. 어머니는 자애로우셨다. 경기여고 출신인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꿈을 펼치지 못하셨다. 그러다 19살 되던 해, 안산 거부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아버지 집안은 당시 큰 양조장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결혼 직후 승마용 말을 사서 집에서 길렀을 정도로 씀씀이가 컸다. 필요한 게 있으면 일본으로 달려가 사 오셨다.
결혼식 날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포천까지 택시를 보냈는데, 쌀 30가마니 값과 맞먹는 택시비를 지불했다. 택시에서 내린 신부는 집 안까지 비단을 밟고 들어왔다. 어머니의 결혼은 이토록 화려했다. 하지만 편안한 삶은 길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 5년 뒤부터 밖으로 돌았다. 어머니와 사이에 4남 3녀를 두신 아버지의 자녀는 모두 11명이나 된다. 4명은 이복형제다.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탕진했다. 위로 형과 누나가 줄줄이 있던 내가 경험한 건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시편 119편 71절의 말씀처럼 살았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덕분이다. 가난 속에서 태어난 내게 어머니가 그토록 물려주고 싶어하셨던 것도 예수였다. 앞으로 펼쳐질 어려움을 예수만 따라 살며 극복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았었다.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다만 중독되기 직전까지만 했다. 나의 결단으로 돌이킬 수 있는 지점까지만 경험했다. 그리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은 날 경험시켰고 단련시키셨다. 방황의 길에서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새벽, 푸른빛이 앞산 정상을 타고 넘던 시간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교회로 가셨다. 안산을 떠나던 4살 때까지 매일 이렇게 하셨으니 기억에 뚜렷하게 남은 것 같다. 어머니는 위아래로 몸을 움직이며 교회 종을 치셨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나도 흔들렸다. 새벽 종소리는 온몸을 울렸다. 거칠게 살던 시절, 마음에는 어릴 때 들었던 그 종소리가 늘 들렸다.
약력=1955년 경기도 안산 출생. 서울장신대 신학과,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졸업, 실천신학대학원대 명예 목회학박사. 거룩한빛광성교회 위임목사, 미래목회포럼 이사장, 국민일보 목회자포럼 회장 역임. 현 한국교회봉사단 이사장, 사단법인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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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역경의 열매] 정성진 (2) 집 팔아 모두 교회에 헌금하고 관리집사
다니던 교회 부목사 교회 개척, 교회에 딸린 작은 방으로 이사… 온 가족 관리집사 돼 청소 도맡아
정성진 목사(뒷줄 맨 오른쪽)가 1984년 큰 형 정한진 장로 집에서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버지 윤덕희 집사와 어머니 정규명 권사(앞줄 왼쪽 세 번째와 네 번째)도 참석했다. 정성진 목사 제공
아버지는 6·25전쟁 후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주택 24채를 지으셨지만,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부도가 나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난리를 마무리 짓지 않고 고향 안산으로 돌아오셨다.
대신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서울로 보내셨다.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고군분투 끝에 모든 걸 수습하셨다. 남은 건 아버지가 지은 집 중 단 한 채뿐이었다.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와는 그때부터 완전히 떨어져 지내다 1980년이 지나서야 잠시 가족과 교류했다.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셨다. 집에서 3㎞ 떨어진 장위동 장석교회를 다니셨다.
나도 15살까지 이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부목사이던 이인구 목사님이 장위중앙교회를 개척하시면서 우리 가정을 비롯해 모두 7가정이 이 목사님을 따라 교회를 옮겼다. 이때가 69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전 재산인 집을 파신 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두 장위중앙교회에 헌금하셨다. 그리고는 교회 관리집사가 됐다. 우리는 그날부터 교회에 딸린 작은 방으로 이사했다. 누나들은 출가했고 큰 형을 제외한 3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시에는 온 가족이 관리집사였다. 함께 교회를 청소했던 기억이 난다. 본당 높이 설치돼 있던 벽시계가 항상 문제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쳐야 했는데 처음에는 무섭더니 나중에는 서로 올라가겠다고 해 큰 형이 순서를 정해줬다. 토요일이면 교회학교를 위한 천막을 세우고 의자도 옮겼다.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삶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가난했다. 가난이 흠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신실하셨고 기도하는 분이었다.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교회를 섬기셨고 우리를 돌보셨다.
아버지가 야속할 법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탓을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늘 편을 드셨다. 아버지가 단정하신 분이고 남을 비난할 줄 몰랐다는 사실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됐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버지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계모 아래 자라며 사랑을 못 받았다. 사랑을 못 받아 이런 것이니 너희가 이해해 달라.” 이래서일까. 우리는 모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다. 어머니가 증오와 미움, 아픔을 신앙으로 덮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는 항상 두통을 달고 사셨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진통제인 ‘명랑’ ‘뇌신’ 등을 늘 드셨다. 약을 드시면서도 하루에 꼭 2시간씩 기도하셨다. 우리 형제자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기도하셨다. 그 기도가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86년에 돌아가셨다. 정말 많은 분이 오셔서 어머니를 추억하셨다. 친구들도 와서 무릎 꿇고 흐느꼈다. 학창시절, 가난 때문에 학비를 가장 늦게 내던 나였지만 구김살 없이 자란 건 모두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다.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역경의 열매] 정성진 (3) 입대 후 군목 김홍태 목사 만나 신앙에 눈 떠
리더십 강해 학교·교회에서 늘 회장… 3학년 2학기 돼서야 정신 차리고 공부
정성진 목사는 뫄한뭐루 유단자다. 사진은 두 명의 뫄한뭐루 유단자가 칼을 들고 대련하는 모습. 국민일보DB
학창시절, 나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흥미가 없으니 공부를 잘할 리 없었다. 대신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국어 국사 사회 지리 과목은 잘했다. 나머지 과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학 영어 과목 시험을 볼 때 백지를 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반장을 했다. 교회에서도 늘 회장을 맡았다. 리더십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공부는 못해도 주변에 친구가 끊이질 않았던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건 따로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3살 위 형을 따라 태권도 도장을 다녔다. 문무관이라는 곳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무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태권도를 시작한 뒤에야 알게 됐다. 주먹에 자신이 생기다 보니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도장에서 승급 심사가 있던 날이었다. 3분 동안 상대와 겨루기를 하면 됐다. 나는 시작부터 상대를 쉬지 않고 공격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잠시 후 사범이 달려와 날 잡았다. 그렇게 심사는 끝났다.
그런데 관장이 손짓으로 사범을 부르는 게 아닌가. 잠시 귓속말을 했다. 사범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내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성진아, 너 내일부터 도장 나오지 말아라. 무술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너에게는 무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구나.”
도장에서 쫓겨난 뒤에도 학업에는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사이 청량공고에 진학했다. 공부에는 여전히 취미가 없었지만, 글쓰기는 좋아했다. 학예부장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졸업식 때도 송사, 답사를 도맡아 쓰고 낭독했다. 그때 갈고 닦은 글쓰기 실력을 목사가 된 뒤에도 잘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3학년 2학기가 돼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마지막 시험에서 2등을 할 정도로 학업 성취도가 높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목표를 높게 잡았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물론 기초가 부실하다 보니 합격은 요원했다. 삼수하던 중 포기했다.
입시 준비를 하면서 무술도 다시 시작했다. ‘뫄한뭐루’라는 격투기 도장에 등록했다. 공격적인 무술이었다. 나는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다. 사범을 따라 도장 깨기를 다녔을 정도로 성장했다. 어느새 뫄한뭐루 서울 도장 유단자 1호가 됐다.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중에는 늘 후배들을 거느리고 무술을 연마했다. 그렇다고 주먹을 쓰는 깡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훗날 뫄한뭐루 창시자가 희한한 종교를 만들었다. 그때 무술을 그만뒀다.
대학 입시를 포기한 뒤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나는 군목이던 김홍태 목사님을 만났다. 그분의 삶과 신앙은 지금까지 내게 큰 본보기가 된다. 훗날 신학을 시작하게 된 데도 그분의 영향이 컸다. 제대한 뒤 당시 2년제였던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입학했고 1981년 졸업한 뒤 서울장신대에 편입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4) 시력검사표 외워 현역 입대… 신앙 멘토들 만나
복무 중 군목과 두 분 장로 모습에 관리집사로 교회 살며 가졌던 목사·장로에 대한 편견 사라져
정성진 목사(뒷줄 오른쪽 끝)가 1978년 12월 경남 창원 육군대학교회에서 여전도회 회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홍태 목사.
인생의 변곡점이 여러 차례 있었다. 군대에 간 것도 그중 하나였다. 시력이 좋지 않아 현역 입대가 어려웠지만,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해야 했는데, 문제는 시력검사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시력검사표를 보고 또 봤다. 외우기 위해서였다. 꼼수를 부려 군대에 안 가려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반대였다. 시력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신체검사 합격통지를 받았다.
당시 사병 복무기간은 34개월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군대학으로 배치받았다. 군 생활이 즐거웠다. 적성에 맞았다. 나는 장군 당번병과 정훈병을 거쳐 군종병으로 활동했다.
육군대학교회에서 김홍태(90) 목사님을 만났다. 당시 군목이던 김 목사님의 계급은 중령이었다. 내게는 영적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이 분을 통해 참 목사의 모습을 봤다. 1958년 군목으로 임관해 81년 전역하신 김 목사님은 “군 선교에는 은퇴가 없다”면서 여전히 군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신다. 전역 직전 교회가 없던 국방대학원 강의실에서 군 교회를 개척하셨다. 그곳에서 민간인 사역자로 2002년까지 목회하셨다. 김 목사님은 내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이 목회 여정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실제 김 목사님은 육군대학교회에선 1530명, 국방대학원교회에선 2500명을 전도해 복음의 결실을 보셨다. 나는 늘 김 목사님을 성자라고 부른다. 이런 분 곁에서 군 복무를 한 건 내겐 큰 축복이었다.
군 복무 중 육군대학 교수로 계시던 이필섭 장로님도 만났다. 대장으로 예편하신 이 장로님은 당시 대령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장로님은 제대 후에도 군 선교 활동을 하셨다. 한국기독군인연합회와 세계기독군인연합회의 회장도 역임하셨다.
당시 중령으로서 대대장이던 윤항중 장로님과의 만남도 특별하다. 훗날 소장까지 진급하신 윤 장로님은 서울 광림교회에서 장로가 된 뒤 일산으로 이사 오셔서 내가 시무하던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출석하셨다. 윤 장로님은 나를 특별히 아껴주셨다. 요즘도 나를 만나면 이러신다. “정 목사님을 만나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한 일이다.
군대에 안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결국, 모든 게 주님이 예비하셨던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잘 따랐던 것뿐이었다. 시력검사표를 외워서 입대한 군대에서 나는 좋은 신앙의 멘토들을 만났다.
교회 관리집사였던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살면서 안 봐도 될 걸 너무 많이 봤다. 교회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목사와 장로에 대한 존경심도 별로 없었다. 이랬던 내가 군에서 참 목사와 장로를 만나 편견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5) 협심증·서맥증 걸려 “죽기 전에 신학교 들어가자”
‘YH 사건’ 현장 보고 맘 아파하다 심장까지 망가져 일상 대화 힘들어
정성진 목사가 민주화 운동을 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영등포산업선교회 전경.
1979년 2월 전역했다. 좋은 분들께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세상도 그럴 것 같았지만,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당장 취업 문이 바늘구멍처럼 좁았다. 여덟 군데에 이력서를 냈지만,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환경관리사가 유망하다고 해 학원에 등록해 자격증을 땄다. 이 자격증으로 동아제약에 입사했다. 생산부서에서 2년간 일했다. 동료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다. 동료들과 대화하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사에 허락을 받아 신우회를 조직했다. 나는 초대회장으로 일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79년 8월 9일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날 신민당에 입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포 신민당사에 도착하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YH 사건’ 현장이었다. 가발을 만들던 YH무역이 폐업조치를 하자 여공들이 항의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다 농성하던 여공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통해 공권력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봤다. 무기력해졌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심장까지 망가졌다. 협심증과 서맥증이 왔다. 심장 박동이 분당 60회 미만으로 느려지는 병이었다. 웅변에 능했지만, 숨이 차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워졌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던 분들이 떠올랐다. 김홍태 목사님의 간절한 권유가 특히 생생하게 기억났다.
“죽기 전에 신학교에 들어가자. 그렇게 많이 권유받았는데, 까짓것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서울장신대 야간과정 2학년에 편입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마음이 편해졌다. 심장병도 자연스럽게 나았다. 나의 활발한 성격은 신학교에서 더욱 빛났다.
목회선교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동아리는 민주화 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그곳에서 송유성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재판에 넘겨졌다. 그 친구가 판결을 받을 때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판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의 우렁찬 목소리가 법정을 갈랐다. “나는 비록 영어의 몸이 되지만 제2, 제3의 민주투사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는 결국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가슴에 불을 지르는 일갈이었다. ‘민주 투사가 되리라’고 다짐하고 그날부터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문턱을 넘었다. 여기서 민주화운동에 인생을 바친 여러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만나 교제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민주화 투사를 꿈꾸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피상적으로 알던 예수님이 내 마음 깊이 들어왔다. 81년 10월 3일의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6) 민중 신학 심취 목사보다 민주투사 되고 싶어
신학교 졸업 후 민중과 평생 살 생각… 폐광 13년 지난 마을서 전도사로 사역
한 탄광 갱도에서 광부들이 간식을 먹는 모습. 국민일보DB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목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생기지 않았다. 신학교는 좌절과 고통을 부여잡고 도착한 도피성 같은 공간이었다. 1981년 10월 3일까지는 그랬다. 그날 아침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성진아. 10월 3일에 면목순복음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린다.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
부흥강사는 현기봉 목사였다. 훗날 신비주의를 조장한다며 논란에 휩싸인 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교만한 신학생이었다. “부흥사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헌금이나 많이 내라고 하겠지.”
뭐라도 트집을 잡겠다며 작정하고 자리를 잡았다. 차가웠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데 2시간쯤 걸렸다. 부흥회 중 나는 쓰러지기까지 했다. 뜨거운 것이 몸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도 받았다.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교만한 마음부터 내려놓게 해 달라고 구하고 또 구했다. “주님을 만나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머리로만 알던 예수님이 온몸과 마음, 영혼 깊숙한 곳까지 찾아와 나를 만져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목사보다 민주 투사가 되고 싶었다. 민중신학에 심취해 있던 운동권 학생일 뿐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다. 민중과 함께 평생 살고 싶어서였다. 일부러 가난한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곳이 충북 음성의 금왕교회였다.
서울장신대 졸업을 두 달 앞둔 1983년 10월, 이 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교회는 금왕광산 옆에 있었다. 폐광된 지 13년이 지난 광산이었다. 광산에 기대 살던 주민은 폐광과 동시에 가난의 나락으로 빠져 버렸다.
교인은 6명뿐이었다. 이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가난해도 순박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상을 꿈꿨다. 현실은 달랐다. 오랜 가난이 순박했던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수시로 범죄가 발생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몸이 아팠다. 무엇보다 나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항상 날 겨냥했다.
광부였던 남자 중 상당수는 진폐증 환자였다. 갱도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다. 홀로 된 여자들은 그리움에 시달리다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할 일이라곤 때때로 심방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역했던 2년 동안 140명을 전도했다. 민중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수업을 마쳐야 했다. 동기들보다 나이도 많아 신학대학원 진학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사이 나는 주민의 일원이 됐다. 교인들로부터 과분한 사랑도 받았다. 이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금왕교회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인 83년 12월에는 결혼도 했다. 든든한 목회 동반자인 송점옥 사모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변화시킨 또 다른 변곡점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7) 아내 출근한 시간 노려 장인 장모께 먼저 프러포즈
주경야독 맹렬여성 모습에 반해 집 찾아가 무릎 꿇고 결혼 허락 받아… 사역 2년 동안 주말 부부로 지내
정성진 목사와 송점옥 사모가 1983년 12월 3일 서울 동대문 서울장신대 예배실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했다. 주례는 송 사모가 출석하던 서울 강서구 금성교회 조유준 담임목사(가운데)가 했다.
학교에 갈 때마다 자꾸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송점옥씨였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수도통합병원에 근무하며 밤에는 대학에 다니던 맹렬여성이었다. 아내는 1등을 도맡아 하던 모범생이었고, 나는 각종 시위에 빠지지 않던 ‘데모 수석’이었다. 나와는 참 달랐던 사람이었다.
아내를 향한 마음이 커지면서 기도가 절로 나왔다. 물론 상대방의 마음도 사야 했다. 연애가 익숙하지 않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기도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김칫국물을 마신 것이었다. 모범생 아내가 데모만 하는 신학생을 좋아할 리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우선 남학생들을 모았다. “점옥이와 나는 연애할 거다. 너희들 넘보지 말아라.” 일생 누구를 힘으로 괴롭힌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을 넘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내가 무술 유단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던 때였다. 다행히 넘본 사람은 없었다.
고백도 했다. “점옥씨,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벌벌 떨며 말했지만, 답은 없었다. 점점 어색한 관계가 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자세로 구애를 시작했다. 요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가능했다.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따라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점옥씨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길게 연애할 마음은 없었다. 서둘러 결혼하고 싶었다. 아내가 출근한 시간을 노려 화곡동 집으로 찾아갔다.
“저는 점옥씨 친구 정성진이라고 합니다. 함께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장인과 장모님이 될 어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책임감은 강합니다. 사랑만 주고 살겠습니다. 점옥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눈도 뜨지 못한 채 쏟아내듯 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하고 가게.” 기도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밥맛이 좋았다. 차도 얻어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철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옥씨가 들어왔다. 집에 내가 있는 걸 보고 눈만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결국, 나는 아내보다 장인, 장모님께 먼저 프러포즈를 한 셈이었다.
그날 저녁, 그렇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식은 1983년 12월 3일에 했다.
내가 금왕교회에서 사역하는 2년 동안은 주말부부로 지냈다. 아내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회사생활을 했고 주말에만 금왕에 왔다.
시외버스를 타고 금왕에 도착해도 3㎞를 더 들어와야 했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던 노선버스를 우연히 만나면 좀 편히 올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시골길을 걸어야 했다.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매주 금왕교회에 딸린, 다 쓰러져 가는 사택으로 왔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8) 학교 부당한 조치에 투쟁… 대치하다 무기정학
정권 겨냥해 플래카드 건 2학년 선배들 무기정학 받아 학내 분규 심각한 상황
정성진 목사(가운데)가 1989년 프랑스에서 신학대학원 동기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학우회장이던 정 목사는 신학대학원 남성중창단 유럽순회공연에 동행했다.
1985년 말, 나는 금왕교회 사역을 마무리했다. 아내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게 이유였다. 주중에는 출근하고 주말에는 먼 곳까지 와 사역을 돕던 아내는 늘 피곤해 했다. 결국, 간염에 걸렸다. 제대로 쉬질 못하니 잘 낫지도 않았다. 그러다 유산까지 하게 됐다. 더이상 이렇게 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교인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야 했다. 입학시험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질 않았다. 1986년 첫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때 이미 나는 31살이었다. 남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조급해졌다. 막 공부에 속도가 붙던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86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내 신앙의 모판이셨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한 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있다.
절치부심 끝에 이듬해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합격했다. 신대원 생활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시대가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87년 4월로 기억한다. 2학년 선배들이 캠퍼스에 정권을 겨냥한 플래카드를 걸었단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한때 민주투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나 아니던가. 학교의 조치가 부당하다고 봤다. 당시 나는 99명의 학생에게 자퇴서를 받아 학교에 제출하고 투쟁하기 시작했다. 플래카드에서 시작된 학내 분규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종합관에 멀쩡한 창문이 없을 정도였다. 징계자가 줄을 이었다. 학생들은 방어벽을 치고 학교와 대치를 이어갔다. 나도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88년, 징계 중 신학대학원 학우회장에 당선됐다. 학생들의 마음을 보듬어야 할 위치가 됐다. 학교 관계자들과 8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농성을 풀기로 합의했다. 학교는 모든 징계자를 구제했다. 그리고 화해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당시 학장과 이사장이 노태우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해 설교와 축도를 했다. 이게 또 논란이 됐다. 신군부 세력을 축복했다며 학생들이 들끓었다. 공방 끝에 결국 학장과 이사장 모두 사임하며 일단락됐다.
비슷한 시기, 학우회가 대학의 재정 장부를 입수해 분석했고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재단 사무국장이 비리의 핵심이었다. 학우회 임원들이 주축이 돼 체포조를 조직해 재단 사무국장이던 A장로가 시무하는 서울의 B교회로 달려갔다.
“장로님, 교회에 있는 걸 알고 왔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아니면 저희가 교회로 들어가겠습니다.”
비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날 A장로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사회가 해당 직원을 징계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A장로도 짐을 쌌다. 원우회가 거둔 성과였다. 몇몇 교수님은 격려도 해 주셨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92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였다. 안수식이 열린 교회가 재정 비리를 일으켰던 그 장로가 시무하던 B교회였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9) 목사 안수 앞두고 “이런 사람은 안돼”라며 발목
과거 재정 문제로 드잡이까지 한 장로 안수자 명단 검토 중 나를 지목하며 반대
정성진 목사(두번째 줄 왼쪽 네 번째)가 1992년 5월 서울 B교회에서 열린 서울동남노회 봄 노회 때 목사안수를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2년 1월 서울 광성교회에 전임전도사로 부임했다. 그해 5월 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 봄 노회 때 목사안수를 받기로 돼 있었다.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무엇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감쌌다. 좋은 목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회가 열리는 장소가 B교회로 정해진 것이었다. 88년 장로회신학대 재정 문제의 핵심 인물이던 재단 A사무국장이 장로로 시무하던 교회였다.
그 장로를 체포하겠다고 교회로 쳐들어갔을 때 나는 체포조장이었다. 앞장서서 한 집사와 드잡이까지 했었다. 하필 그 집사도 그사이 장로가 됐다. 그들이 날 잊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일이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회 사무실 간사에게 연락이 왔다.
“전도사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지금 전도사님 같은 사람에게는 목사안수를 줘서는 안 된다고들 하시는데…. 지금 노회 사무실로 좀 오셔야겠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때는 정의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흘러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칼이 돼 돌아왔다. ‘교계가 이렇게 좁구나.’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노회 사무실에서 총무 목사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노회 임원들이 목사안수자 명단을 검토하다 그 교회 장로 한 분이 전도사님을 지목하며 ‘이렇게 과격한 사람에게 목사안수를 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몇 분이 그 의견에 동조하시면서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교회를 직접 방문해서 해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석고대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목사 안수식이 열리기 직전 주일 저녁, B교회 당회가 열렸다. 회의실에 찾아가 무조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성실한 목사가 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목회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빌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용서받지 못하면 목사안수가 정말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혼날 걸 각오하고 갔다. 하지만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은 나를 탓하지 않으셨다.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계셨을 두 분 장로님 마음도 편치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 목회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용서를 받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동이 솟아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가 37세였다. 30대 후반, 목사안수를 앞두고 나는 큰 교훈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수는 반드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이날부터 나는 모두가 친구이자 동반자라 생각하고 목회했다.
이 시절, 나를 목사로 키우고 다듬어 주신 분도 만났다. 김창인 광성교회 원로목사였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0) 대형교회 부교역자 면접… “교회 옆으로 이사 오시죠”
광성교회 부임해 암사동 교구서 목회… 특별교구 심방 위해 하루 100㎞ 운전
정성진 목사(앞줄 왼쪽 세 번째)가 2019년 11월 24일 경기도 고양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열린 이임식 후 김창인 목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친구 김호권(현 동부광성교회 담임목사)이 광성교회 부목사로 있었다. 1991년 11월쯤으로 기억한다. 호권이가 나를 찾아왔다.
“성진아. 우리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뽑는데 네가 와줬으면 좋겠다. 김창인 목사님께도 귀띔해 뒀다.”
나는 봉천제일교회 전임전도사였다. 교회를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친구 부탁이니 면접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약속된 날 교회에 갔다. 김창인 목사님 앞에 앉았다. 광성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우신 목사님이셨다. 늘 뵙고 싶었다. 그런데 그분 첫인상이 너무 쌀쌀맞아 놀랐다. 5분쯤 대화했을까.
“정 전도사님. 교회 옆으로 이사 오시죠.”
이 말만 남긴 채 방에서 나가셨다. 이렇게 광성교회와 연을 맺게 됐다. 92년 1월 첫 주 부임했다.
나는 김 목사님의 진면목을 봤다. 거칠게 살았던 사람은 강한 상대를 빨리 알아본다. 센 상대를 만나면 빨리 피하든지 복종하든지 해야 한다. 김 목사님과의 만남이 그랬다.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었다. 목회를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셨다. 부교역자들도 자신을 따르길 바라셨다. 그 과정에서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이 났다.
말씀도 길게 하시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맡겨진 일은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나의 혈기는 점차 사라졌다.
당연히 김 목사님께 배울 게 많았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나이 어린 후배 목사들에게 목회를 가르치셨다. 나는 순종하는 기쁨도 알게 됐다.
부임하자마자 암사동 교구를 맡았다. 교인들을 심방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데 5개월이나 지났을까. 김 목사님께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부총회장 선거에 나간다는 말이 돌았다. 어느 날 목사님이 날 불렀다.
“정 목사, 오늘부터 날 좀 도와야겠다. 잘 부탁한다.”
그날부터 나는 그분의 비서가 됐다. 그해 9월 24일 서울 명성교회에서 예장통합 77회 총회가 열렸고 김 목사님은 부총회장에 당선되셨다. 잠깐 비서로 일할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그때부터 무려 4년 동안 비서로 일했다.
특별 교구도 맡기셨다. 이 교구는 멀리 이사한 교인을 위해 만들어진 교구였다. 강원도 춘천에서 대전까지 교인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김 목사님 사모님이 직접 챙기신 정말 특별한 교구였다. 하루가 멀다고 사모님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심방을 다녔다. 하루 100㎞ 운전하는 게 다반사였다.
늦은 밤 교회로 돌아오면 김 목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는 할 일을 주셨다. 비서로 일하는 동안 하루도 못 쉬었다. 휴가도 딱 한 번 간 기억이 난다. 동료들은 하나둘 담임목회를 나갔다. 나이까지 많았던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김 목사님은 내 거취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매일 일은 늘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1) “정 목사 봐둔 땅 있나요”… 교회 개척 기대에 벅차
한 협동 장로님 개척 제안… 준비하다 담임 목사에게 들통
정성진 목사가 1996년 원목으로 부임했던 경기도 가평 광성기도원 전경.
담임목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당시 광성교회는 선임 목사에게 1년마다 개척 지원을 해 주는 전통이 있었다. 내 위로 다섯 명의 선배가 있었다. 41살, 기다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김창인 목사님과 상의하지 않고 두 군데 교회에 이력서를 낸 일도 있었다. 물론 다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초의 일이었다. 평소 얼굴만 알고 지내던 한 협동 장로님이 날 좀 보자고 하셨다. “정 목사님, 제가 사실 장로가 되면서 하나님께 ‘꼭 교회를 짓겠다’고 약속했어요. 교회만 지으면 뭐합니까. 목사님이 계셔야죠. 정 목사님께서 담임을 맡아주세요. 부탁합니다.”
무작정 그러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제가 기도한 뒤 답을 드려도 될까요.”
장로님도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내와 두 달 동안 기도했고 그 길이 내가 갈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런데 사달이 생겼다. 그 장로님이 김 목사님께 자신의 계획을 말해 버린 것이었다. 김 목사님이 분노하셨다. “정 목사, 내가 정 목사 개척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었어요. 그런데 이러면 섭섭합니다. 그 장로님 따라 나가든지 알아서 해요.”
일이 꼬였다. 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목사가 되지 않았던가. 김 목사님과 등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목사님. 목사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교회에 남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그럼 바로 기도원 원목으로 가세요.”
경기도 가평에 있던 광성기도원 원목은 개척 지원이 결정된 부목사가 마지막으로 사역하는 곳이었다. 물론 확실한 약속을 하신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내 위에는 선임들이 많았다.
곧 담임목사가 될 거로 생각했을 아내에게 미안했다. “여보, 우리 이사 가야 해. 나 기도원 원목으로 발령받았어.”
아내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기도원이 산속에 있다 보니 아이들 통학을 위해 반드시 운전해야 했다. 정말 고마웠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갔다. 갑작스럽게 기도원 원목으로 발령낸 게 미안하셨는지 김 목사님이 기도원을 찾는 횟수가 늘었다. 인정받는 것 같아 내심 기뻤지만, 김 목사님은 한 번도 혼자 오시는 법이 없었다. 20여 명이나 되는 부교역자들을 모두 데리고 오셨다. 대식구 밥은 늘 아내 몫이었다.
기도원에 온 지 몇 달쯤 지났을까. 김 목사님이 “정 목사, 땅 좀 봐뒀나. 아직 안 봤으면 빨리 알아봐야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온 것이었다. 담임목회를 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주변 소개를 받아 경기도 남양주의 한 교회를 보러 갔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2) 개척 직후 터진 외환위기에도 꾸준히 교인 늘어
1997년 ‘거룩한빛광성교회’ 개척… 광성교회 재정지원에도 7억원 빚
정성진 목사와 송점옥 사모(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1998년 거룩한빛광성교회 옛 성전 본당에서 두 손을 들고 찬양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도농에 인조견사를 뽑던 원진레이온 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 용지에 8000세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사업계획이 발표됐다. 단지 안에 종교부지도 나왔다. 현장에 가보니 공장은 철거된 뒤였다. 아파트 건축 공사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많은 세대가 들어오는 만큼 목회지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려면 3년 이상 남아있다는 게 단점이었다.
‘공사장 한복판에서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경기도 고양에 문 닫은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교회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 목회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다만 고양 일산 신도시에는 이미 28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1993년부터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 대형교회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도시의 장점은 이미 사라졌다. 목회의 레드오션이었던 셈이었다. 도농보다 나을 게 없었는데도 왠지 마음이 끌렸다. 아내와 기도를 한 뒤 일산에서 개척하기로 했다. 96년 12월 초, 김창인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일산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 지체할 것 없다. 지금 가자.”
김 목사님이 직접 계약하는 자리에 간 경우가 없었다. 김 목사님은 그날 직접 일산의 부동산까지 오셔서 직접 계약을 하셨다. 97년 1월 ‘거룩한빛광성교회’는 이렇게 출발했다.
광성교회가 큰 재정을 지원해 줬지만, 빚이 7억원이나 됐다. 나는 김 목사님께 배운 대로 목회했다. 하루하루 희망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주변에 교회가 많았지만 새 교인도 꾸준히 등록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해 11월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온 나라가 뒤집혔다. 은행 이자율이 24%까지 치솟았다. 순리대로 하면 나는 그때 망했어야 했다.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모두가 절벽에 몰렸던 때였다. 의지할 건 주님뿐이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면서 목회에 힘썼다.
감사하게도 교인이 늘었다. 98년 1월 출석 교인이 400명을 넘어섰다. 교회학교 학생도 200명을 웃돌았다. 새신자가 한 주도 끊이지 않고 등록했다. 심지어 추석이나 설 명절 중에도 교회를 찾아오는 새신자가 있었다. 개척교회 목사 입장에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은행 이자를 한 번도 연체하지 않았다. 이자율도 9%까지 떨어졌다. 교회를 개척하면 여러 차례 고비가 찾아온다. 개척 직후 외환위기의 높은 파고가 덮쳤지만 이겨냈다. 남들보다 늦게 개척했는데도 교인이 늘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3) 개척 초기 건강한 교회 만들려 평신도 교육에 노력
온누리교회 교육 프로그램 도입하려다 여건 안돼 제자훈련 교재로 직접 강의
거룩한빛광성교회가 창립 4주년을 맞은 2000년 옛 예배당에서 임직예배를 드리는 모습.
큰 교회 부목사를 지냈어도 담임목사가 되면 시행착오를 겪는다. 목회 성공 여부는 변수 대응력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나도 고군분투했다. 1998년이었다. 서울 온누리교회가 새 교인이 등록하면 9주 동안 교육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교인에게 교인 번호를 발급했다. 이 시스템이 좋아 보였다.
온누리교회 교인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로 했는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9주 동안이나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너무 많은 교인이 한꺼번에 등록한 게 이유였다. 교육 대상자가 예상외로 많아지다 보니 장기간 교육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래도 교인 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나섰다. 옥한흠 목사님이 쓴 제자훈련 교재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열심히 강의했고 교인들도 잘 따라와 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로 강의 평가를 해보니 내가 너무 중심에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정성진 제자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나만의 교회, 나만의 신자를 만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시 온누리교회에 있던 반태효 목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반 목사가 ‘두란노 1대 1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라는 새 교육과정을 소개했다.
교재를 보니 마음에 들었다. 온누리교회가 통 큰 후원도 해줬다. 훈련받은 교인들을 일산까지 보내 제자 양육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우리교회에 적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프로그램이 교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알파 코스도 운영했다. 강의는 아내가 맡았다. 알파 코스를 통해 6000여명의 교인이 교육을 받았다.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한 선교단체의 교재를 편집해 ‘생활신앙’이라는 자체 교재도 제작했다. 삶이 예배로 바뀌는 교인을 양육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이 공부반도 아내가 이끌었다.
이처럼 개척 초기부터 평신도 교육에 힘쓴 이유가 있다. 당시 교계에선 목사들이 평신도를 너무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자성이 있었다. 그게 못마땅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만인 제사장이라는 개념을 만천하에 소개했다면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평신도는 목사의 설교만 듣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래서는 건강한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이 아이디어를 준 곳이 있다. 바로 군대였다. 여러모로 군대는 나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군에서 엿본 평생훈련 시스템을 교회에 적용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4) 성경공부반 개설… 훈련받은 교인들 신앙 단단해져
교인 위한 고품질 평생교육 과정 열고 1년에 8개월씩 운영 방학 때는 특강
거룩한빛광성교회에 개설된 한 성경공부반에서 2015년 수강생들이 발표하고 있다.
육군대학에서 군 복무를 하며 장교들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는지 엿봤다. 사실 깜짝 놀랐다. 군인들은 훈련만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장교 아파트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밤새워 공부했다.
병과 별 교육과정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각급 지휘관마다 별도의 교육도 받아야 했다. 장군도 예외가 없었다. 장교들은 전역할 때까지 수많은 교육과정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이걸 보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과연 목사들도 이렇게 공부할까. 교인들도 이렇게 훈련할까. 교회 관리집사를 하신 어머니 덕분에 교회에 살면서도 교인과 목회자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를 개척하면서 교인을 위한 평생교육 과정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부교역자들도 공부하도록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목사들은 반드시 성경공부반을 개설한 뒤 교인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게 전통이 됐다. 수강 신청을 한 교인이 5명을 넘지 않으면 폐강시켰다. 고품질 성경공부반을 개설하라는 취지에서였다. 부목사들이 개설하는 성경공부반은 1년에 8개월씩 운영했다. 나머지 4개월은 방학이었다. 이때도 쉬지 않고 특강을 개설했다.
외부 선교단체의 교육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보통 목사들은 교인들이 외부 선교단체에 출입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교인들이 선교단체에 빠져 교회 봉사를 등한시하는 걸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선교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예수전도단과 조이의 선교 훈련 프로그램이 좋았다. 이들도 교회 안에 선교 훈련을 위한 공부반을 개설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이런 사례는 없다.
“교회 안에 선교단체가 들어오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교인들이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고 선교단체에서만 일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당회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평신도를 훈련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고, 외부 선교단체에서 활동해도 하나님 나라 백성 아닌가.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든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목사의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둬야 한다. 그 꿈을 이루는 일이라면 작은 희생을 감수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훈련받은 교인들의 신앙은 더 단단해졌다. 결과적으로 유익한 게 더 많았다.
교인을 훈련시키는 일과 함께 개척 초기부터 심혈을 기울인 일이 있다. 교회 표준정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어떤 교회도 시도하지 않던 일이었다. 정관의 핵심은 담임목사의 65세 은퇴와 원로목사제 폐지였다. 담임목사인 나부터 특권을 내려놓겠다는 의지를 정관에 담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5) 공동체 질서 잡아줄 ‘교회 내규’ 제정에 심혈
개척 2년 만에 헌법제정위원회 구성
정성진 목사와 송점옥 사모가 지난해 11월 경기도 거룩한빛광성교회 본당에서 진행된 은퇴예배에서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꽃다발을 받은 뒤 포옹하고 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를 개척한 지 2년 만이던 1998년 나는 교회에 헌법제정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교회 내규를 만들기 위한 위원회였다. 개혁적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 내규가 반드시 필요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내규에 관심이 많았었다. 무엇보다 자체 내규가 있어야 좌고우면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교인 중 법을 잘 아는 분들을 물색했다. 마침 서울대 법대 출신인 한 집사님과 대학 법학과에서 강의하는 집사님을 찾았다. 두 분을 중심으로 위원을 선정하고 연구를 맡겼다. 연구 초기, 나는 다른 교회의 내규를 모아 위원회에 전달했다.
“헌법제정위원들은 우리 교회의 미래를 그리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그리고 깊이 연구해 주세요.” 간절히 당부했다.
실제 연구는 신중하게 진행됐다. 교인들은 어떤 내규가 나올지 궁금해 했다. 이런저런 조항을 넣어달라거나, 빼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의견을 반영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헌법제정위원회의 몫으로 남겨 뒀다.
위원들이 1년간 연구해 내규 안을 완성했다. 만족스러웠다. 이를 두고 6개월간 치열하게 토론했다. 핵심은 담임목사 65세 은퇴와 원로목사제 폐지였다. 6년에 한 차례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를 진행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장로도 65세 정년과 6년 시무안을 담았다.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것도 내규의 핵심이었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 내용이다. 당시로선 충격적이어서 논란이 컸다. 다만 담임목사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안이 담겨 있었기에 다른 개혁적인 조항들도 폐기되지 않았다.
내규는 연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2000년 공동의회에서 최종 통과됐다. 공동의회에서 내규가 통과됐으니 나와 장로들은 잘 지키는 일만 남았다. 실제 우리 당회는 내규를 잘 지켰다. 내규는 개척 초기의 어수선했던 교회의 질서를 잡아줬다.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규가 나침반이 돼 줬다.
나도 내규에 담긴 대로 만 64세가 되던 지난해 은퇴했고 원로목사도 되지 않았다. 임기 중 두 차례 재신임 투표도 진행했다.
“태양도 하나고 대통령도 한 명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원로목사가 상왕처럼 있으면 전통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교인들의 의견이 둘로 갈라질 수 있다. 이는 교회에 누를 끼치는 일이다.”
목회하면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규에 따라 65세에 은퇴하고 원로목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 마음에 욕심이 싹트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 퇴로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개혁적인 내용을 담은 내규는 실제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틈날 때마다 후배들에게 교회 자체 내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이 때문이다. 내규를 제정하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 결국 교회를 건강하게 키워간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6) 개표 참관하다 부활절 칸타타 불참… 아내 “이혼합시다”
“정치하는 목사와 같이 살 수 없다”
거룩한빛광성교회 찬양대가 2019년 4월 부활절 칸타타를 연주하고 있다.
일산은 빠르게 성장했다. 인구도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2000년에 들어서면서 동네가 어수선해졌다. 러브호텔이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곳에 무분별하게 생겨난 게 이유였다. 요란한 외장 때문에 아이들이 “새로 생긴 놀이동산에 데려가 달라”고 부모에게 조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어린아이들 눈에 러브호텔이 놀이동산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고양시 러브호텔 난립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여기에는 대화·마두·백석·탄현동 지역 주민과 고양청년회, 여성민우회 등 시민 단체가 참여했다. 나는 기독교 대표였다. 허가를 내준 최종 결재권자인 고양시장과 면담을 추진했다. 시장은 공대위 임원을 만난 자리에서 무조건 발뺌했다.
“나는 법대로 허가를 내줬을 뿐입니다. 조금의 특혜도 없었습니다.”
공대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주거지 가운데 러브호텔 같은 시설을 허가해 준 것 자체를 특혜로 봤다.
“시장님이 합법적으로 허가를 내줬다고 하시니 저희도 합법적으로 퇴진운동을 하겠습니다.”
고양시민 5만여명에게 시장 퇴진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이 가운데 교인이 1만7000여명이었다. 교인 서명은 내가 주도해 받았다. 합법을 내세웠던 고양시장은 결국 낙선했다. 시민의 힘이었다. 이듬해에는 ‘백석동 나이트클럽 건축허가’가 취소됐다. 시민들의 요구가 일부 관철된 것이었다.
당시 나는 고양시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양 시민운동의 좌장 역할을 맡게 됐다. 2002년 고양시장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한 경선이 진행됐다.
새천년민주당 측에서 내게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수락했다. 그런데 경선 개표가 그해 3월 31일이었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뭔가 마음이 불안했다. 오전에 부활절 예배 설교를 한 뒤 개표장에 도착했다. 내심 잠시 지켜본 뒤 교회에서 오후에 진행되는 부활절 칸타타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슬쩍 자리를 뜨자 여러 후보자 캠프 관계자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위원장님 떠나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자리를 지켜주세요.” 당황스러웠다. ‘부활주일에 담임목사가 시장 후보 뽑는 선거 개표를 지키고 있다니…’ 좌불안석이었다.
교회에서는 계속 연락이 왔다. “목사님 이제 세 곡 남았습니다.” “마지막 곡 시작했습니다.” 개표는 길어졌다. 결국 수석부목사에게 연락했다. “칸타타가 끝나면 나 대신 축도를 부탁하네.”
개표는 늦은 밤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니 사모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목사가 정치한다고 부활절 칸타타에 못 오는 게 말이 됩니까.” 날카로웠다. 잘못했으니 변명할 수도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는 청천벽력같은 말이 나왔다. “이혼합시다. 정치하는 목사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7) 빠른 교회 성장에 이전 결정… 2000석 넓은 본당 건축
늘어난 교인 수 비해 본당 너무 좁아… 교육관·주차장 따로 마련해도 역부족
정성진 목사(오른쪽 다섯 번째)가 2003년 12월 7일 거룩한빛광성교회 새 예배당 착공 예배에서 첫 삽을 뜨고 있다.
부활절 칸타타에 참석하지 못한 건 큰 실수였다. 아내가 화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시민운동에 관여하는 걸 못마땅해 했다. 목회만 해도 바쁜데 왜 지역 일에 관심을 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역교회 목사로서 지역사회 일에 관심을 두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젊을 때 나의 꿈이 정치인 아니었던가. 담임목사를 하면서 정치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가진 영향력을 선한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짐했다. “다시는 교회 밖 일로 교회를 돌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2002년 상반기에는 장년이 1400여명 출석했고 교회학교 학생도 600명을 넘어섰다. 지하에 있던 350석 본당은 너무 좁았다. 그사이 교회 주변에 교육관도 샀다. 주차장을 짓기 위해 1074㎡(325평) 넓이의 대지도 샀는데 이 땅도 좁았다. 지하 5층을 파도 80대밖에 주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어느 날 한 장로님이 찾아왔다. “목사님, 더이상 이 자리에선 어렵습니다. 교회 이전을 해야 합니다. 한군데 봐 둔 곳이 있습니다.”
교회 이전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망했던 교회에서 부흥을 경험해 더욱 애착이 컸다. 게다가 장로님이 봐뒀다는 땅이 너무 외진 곳이었다. 일산에서 금촌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일산과 파주의 경계였다. 심지어 비포장도로였다. 2000년대 초반에 비포장도로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그곳에 지금의 교회를 지을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 이전에 대해 장로님들도 하나둘 동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기도 후 장로님들과 함께 그 땅에 모였다. 장로님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다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장로님들도 크게 내색하지는 않으셨다. 답사한 뒤 당회를 열었다.
“아무래도 땅 보는 눈은 저보다 장로님들이 낫습니다. 장로님들께서 땅을 좋게 보시니 저도 좋습니다. 이전을 하도록 하시죠. 건축위원회를 조직합시다. 대신 저는 건축위원회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장로님들은 좋은 예배당 짓는 데 힘써 주세요. 저는 그동안 교인을 배가시키겠습니다.”
개척한 지 6년 만이던 2002년 8월 건축위원회가 조직됐다. 사실 이것만 해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교회 성장이 멈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 우리는 그토록 어렵던 때 가파른 성장을 경험했다.
건축은 일정대로 진행됐다. 장로님들은 본당을 4000석으로 짓자고 했지만, 나는 너무 넓다고 생각했다. 결국 본당은 2000석으로 정해졌다. 나는 넓은 예배당을 교인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열심히 성도들을 심방하고 훈련시켰다. 새 교인이 매주 교회를 찾았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8) 입당 두 달 남겨두고 교회 짓던 건설사 부도
교회 건축 경험토대로 건축위원회 지휘… 교인 중 두 분 선정해 공사 마무리 부탁
거룩한빛광성교회 교인들이 2005년 9월 4일 입당예배 때 필사한 성경을 들고 새 예배당에 입장하고 있다.
2005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건축위원장이 반쯤 우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우리 교회를 짓던 건설사가 부도났다는 소식이었다. 입당을 고작 두 달 남겨둔 때였다. 알고 보니 이 건설사가 무려 18개의 교회를 동시에 지으면서 공사비를 돌려막다 사달이 난 것이었다.
“장로님, 일단 건축위원들을 모아주세요.” 당회실에 모인 건축위원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해법을 찾아야 했다. “저도 건축위원회에 들어가겠습니다. 함께 헤쳐 나갑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에 건축위원회를 이끌었다. 그 결정을 하면서 몇 가지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20살 때 다니던 신장위교회가 건축을 할 때 건축현장 감독을 하면서 교회 건축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봤다. 광성기도원에 있던 7개월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진두지휘한 경험도 있었다. 이 경험이 위기 때 약이 됐다.
굵직한 공사는 모두 완료된 시점이었다. 교인 중 건축과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두 분을 선정했다. 이분들께 마지막 공사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챙겼다.
입당예배 날짜는 9월 4일로 정해져 있었다. 미룰 수 없었다. 모든 교인이 새 예배당 완공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결국, 무사히 완공했다. 입당예배 때 교인들이 직접 쓴 필사 성경을 앞세우고 새 예배당에 들어왔다. 이날 설교는 김창인 목사님이 전하셨다. 감격스러운 예배였다. 교인들이 쓴 성경은 지금도 강대상 위에 있다.
교회 건축을 기적 속에서 마무리했다. 지금도 감사할 게 많다. 무엇보다 공사 중 다친 사람이 나 한 명뿐이라는 게 가장 감사하다. 나는 공사 중반, 현장을 돌아보다 파이프에 부딪혀 머리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막고 기도했다. “주님, 제 피를 받으셨으니 다시는 공사현장에서 피 흘리는 일 없이 공사를 마치게 해 주소서.” 이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셨다. 1만3223㎡(4000평) 부지에 건평 1만㎡가 넘는 큰 공사였다. 사고 위험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교인들도 쉬지 않고 기도했다. 공사현장에 기도실을 먼저 세우고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릴레이 기도를 했다. 기도 위에 세워진 예배당은 복음의 용광로와도 같았다. 입당 후 한해에 4000명씩 새신자가 등록을 했다. 3년 만에 1만명이 늘었다. 교회 주변도 많이 변했다. 입당과 거의 동시에 교회 앞 비포장도로가 6차선 포장도로가 됐다. 교회 근처의 운정지구도 개발을 시작해 속속 아파트가 들어섰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19) 전 교인 대상 교회명 공모… 개명 무산에 묘수 내
위치상 지역명 본뜬 교회 이름 개명 필요… 교인이 먼저 바꾸자 제의에 재투표
거룩한빛광성교회 전경. 일곱 개의 디자인 중 교인 투표로 결정된 디자인으로 지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반드시 교인들의 뜻을 물었다. 수시로 투표를 했다. 장로와 권사가 6년 임기제다 보니 중직자 선거도 매년 했다. 이를 위해 선거관리위원회를 상시 운영했을 정도였다.
2005년 9월 4일 입당예배를 드린 뒤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 교회 이름이 뭔가 어색했다. 이름은 일산광성교회였는데, 새 예배당이 위치한 곳은 고양과 파주의 경계에 있었다. 지역명을 따 만든 교회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교회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전 교인을 대상으로 공모를 했다.
예상했지만 기존 교회명인 ‘일산광성교회’도 후보에 올랐다. 나는 ‘거룩한빛광성교회’라는 이름을 냈다. 모든 이름을 두고 투표를 했다. 개표를 시작하니 의외로 기존 이름을 지지한 교인이 많았다. 결국, 개명은 무산됐다.
하지만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명이 필요했다. ‘광성’이라는 이름에도 원래 지역명이 담겨 있었다. 현재 서울 광성교회가 있는 자리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이었다. 광성은 ‘광주군을 별처럼 밝히자’는 의미였다. 개척 초기부터 나는 빛 광(光)에 거룩한 성(聖)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거룩한빛’이 나온 이유였다.
하지만 투표까지 끝난 마당에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묘수를 냈다. 신축 예배당 앞에 큰 돌을 세운 뒤 교회 이름을 새겨 넣기로 했다. 당회에도 거룩한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자는 다짐을 담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물론 교회의 모든 공식 문서와 주보 등에는 기존의 이름을 사용했다. 대신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 하는 장로님들께 “거룩한 빛을 전하는 일산광성교회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그렇게 기도했다.
그해 연말 제직회가 열렸다. 한 집사가 발언했다. “대표기도 하시는 분들이 ‘거룩한 빛을 비추는 일산광성교회’라고 하시는데 너무 깁니다. 자꾸 듣다 보니 거룩한빛이라는 수식어가 너무 좋은데 이참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빛광성교회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제직들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투표에 부쳤다.
“거룩한빛광성교회라는 이름이 좋다면 투표용지에 동그라미 표시하시면 됩니다.”
교인들은 거룩한빛광성이라는 이름을 만장일치로 지지해줬다.
대형교회를 이끌면서 늘 생각했던 게 있다. 담임목사가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결정이 다 맞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늘 교인들의 의견을 물었다. 새 예배당 디자인도 일곱 개를 놓고 투표했다.
담임목사가 자신의 결정대로만 목회하면 꼭 문제가 생긴다. 교인의 마음을 얻어야 교회가 평안하고 건강하게 성장한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0) 목회자가 가져야 할 갈등 해법 ‘아사교회생’
교회 내 많은 문제는 담임 목사 몫…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마음으로 이익 내려놓고 해결해야
거룩한빛광성교회 본당에서 2015년 12월 교인으로 구성된 광성핸드벨 연주팀이 공연하고 있다.
2005년 새 예배당으로 이전할 때 장년 교인이 매주 2200명 정도 출석했다. 기적과 같았다. 하지만 새 예배당에서는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9월 4일 입당예배를 드린 뒤 그해 연말까지 1000명이 늘었다. 깜짝 놀랐다. 장로님 중에 이런 푸념을 하는 분들이 계셨다고 한다. “담임목사님께 본당을 4000석으로 지어야 한다고 분명 말씀드렸는데….” 본당을 더 넓게 짓지 않았다는 후회였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지나치게 크게 짓는 건 과시욕이라 생각해 반대했다.
입당 후 3년간 1만명의 교인이 늘었다. 폭발적 성장이었다. 성장은커녕 교세가 줄어들던 시절이었다. 우리 교회의 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내게 교회 성장의 비결을 묻는 목회자가 많다. 현직에 있을 때 은퇴 후 이런 경험을 나눌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의 크로스로드가 태어난 배경이다. 교회 성장을 꿈꾸는 건 사실 어려운 시대다. 대신 나는 개척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 목회자들의 야성(野性)을 길러주는 곳이 크로스로드다.
목회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에 있다. 교회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원래 교회가 그런 곳이다. 대부분 갈등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한다. 부서나 위원회 안에서 생긴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몇몇 문제는 교회를 어지럽힌다. 작은 일이 온 교회를 할퀸 뒤 결국 담임목사에게 도착한다. A에서 시작했던 갈등이 Z가 된 뒤에야 담임목사 앞에 오는 셈이다. 최초 갈등 당사자들조차 일의 내막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담임목사는 꼬일 대로 꼬인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마지막 해결사가 돼야 한다. 복잡하다고, 귀찮다고 담임목사에게까지 온 문제를 외면하면 안 된다. 쌓이면 결국 폭발한다. 그때는 누가 와도 해결할 수 없다. 곪을 대로 곪은 게 터진 뒤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그때는 정말 늦은 것이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런 갈등을 해결했다. 해결하고 나면 모두가 성숙해진다. 갈등 해결의 끝에 성숙이라는 비밀이 담겨 있다. 사건·사고는 늘 일어난다. 이를 원만히 해결하는 게 성장의 열쇠다.
복잡하게 꼬인 갈등을 해결하는 비법도 있다. 내가 죽으면 된다. 내 이익을 앞세우면서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다. 내가 아파야 한다. 내가 살겠다고 발버둥 치면 일을 그르친다.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경구에 내 목회의 긴 여정이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갈등의 중재자로만 산 건 아니다. 우리 교회가 운정신도시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광성문화센터는 지역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1) 지역사회 향해 교회 담 허물자 주중에도 주민들 북적
교인 중 예체능 전문가들로 강좌 개설… 저렴하고 수준 높은 문화센터로 큰 인기
정성진 목사(가운데)가 2014년 열린 ‘당구 선교회’ 친선대회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교인 중 음악이나 연극, 체육 전문가들이 많았다. 1998년 첫 예배당에 있던 시절 이분들을 만나 주민들을 위한 무료 강좌를 개설하자는 논의를 했다.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에 주민들이 입주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기반시설이 조성되지 않아 이분들이 갈 곳이 많지 않은데 교회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강좌를 개설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교인들이 흔쾌히 응해줬다. 이렇게 해서 19개의 무료 강좌가 개설됐고 50개까지 늘었다. 2005년 새 예배당으로 옮긴 뒤에도 이런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산의 백화점이나 주민센터에도 문화강좌들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수준을 대폭 높여야 했다. 부득이하게 유료 강좌로 전환한 뒤 광성문화센터를 개설했다. 수강료는 저렴하게 책정했다. 문화센터를 일산교육청에 등록하고 강좌를 200개까지 개설했다. 큰 인기를 끌었고 매주 2000여명의 주민이 교회를 찾았다.
주중에도 교회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된 셈이었다. 보람이 컸다. 나는 지역사회를 향해 교회의 담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센터가 교회와 주민의 접점이 됐다.
문화센터는 교회의 사역을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새 예배당에는 도서관 카페 노인대학 등이 만들어졌다. 무료 병원도 운영하는데 50여명의 의료선교회 회원들이 봉사한다. 주민들은 언제든 교회를 찾았다. 교회 담을 허물려던 바람을 이뤘다.
교회 운영도 수평적으로 했다. 제직회 산하 360개 부서와 30개 위원회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대부분 교회는 부서장을 당회가 임명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각 부서와 위원회 안에서 부서장과 위원장을 선출하도록 했다. 맡을 사람이 없어 선출하지 못한 곳만 당회가 상의해 임명했다.
거룩한빛광성교회 구성원이라면 다 알고 있는 게 ‘망할 권리’다. “우리 교회 조직관리규칙은 하나뿐입니다. ‘망할 권리를 준다’는 것이에요.” 모두가 이렇게 말하고 이를 실행한다. 뭐든 자유롭게 하라는 취지에서 이런 권리를 줬다.
교인들도 취지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바다낚시 선교회’ ‘골프 선교회’ ‘당구 선교회’ ‘사이클 선교회’ 등이 생겼고 활발하게 운영됐다. 최근에는 목공 동호회인 ‘백향목 선교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오토캠핑 선교회’ 회원들은 토요일 교외로 캠핑을 떠났다가 그 지역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에서 특송도 하고 헌금도 한 뒤 돌아왔다. 교회가 교인 삶의 중심이 됐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웃도 초청해 여러 선교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모두가 교회에서 어울렸다. 교회 안에서만 즐거웠던 건 아니다. 10년간 157개 미자립교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지역 미자립교회와 동반 성장을 꿈꿨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 주님 말씀 실천
가용 예산의 51% 선교비로 지출, 전문적 복지 재단 ‘해피월드’ 세워
거룩한빛광성교회 노인복지센터에서 교인들이 화분으로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모습.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목회하면서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거룩한빛광성교회의 지향점이 됐다. 교회는 가용 예산의 51%를 선교비로 지출했다. 이 예산이 은퇴하던 해에는 45억 원까지 늘었다.
나머지 예산은 교회 경상비와 부채 상환에 사용했다. 부채가 있는데도 거액의 선교비를 지출한 건 우리 교회가 값없이 받았던 사랑을 값없이 나눠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미국의 공공신학자이자 기독교 잡지 ‘소저너스’ 대표인 짐 월리스는 “예산은 도덕적 문제”라고 했다. 재정 사용처가 어딘지를 보면 그 교회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은퇴 직전 출석 교인은 1만1000명을 웃돌았다. 재적교인은 2만명을 넘었다. 2018년 12월 파주 거룩한빛운정교회(유정상 목사)를 분립할 때 4500명이 교회를 옮겼다. 이 교회가 24번째 분립한 교회였다. 예산과 교회, 교인 모두 나눔의 대상이었다.
나누는 사역은 나뿐 아니라 교인 모두의 뜻이었다. 교인들이 매주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주다가 망해도 성공이다”였다. 교인들은 이 구호를 세 차례 반복해 외쳤다.
이웃을 전문적으로 섬기기 위해 2007년 복지재단 해피월드를 설립했다. 경기도 고양과 파주에서 교회가 세운 전문 복지재단은 처음이었다. 550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곳이다. 해피월드는 다양한 사역을 한다. 그중 해피뱅크는 저소득 취약 계층이나 금융권을 이용하기 어려운 저신용자들에게 창업 및 경영개선 자금 200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재원은 교회와 휴면예금관리재단의 지원금으로 마련했다.
해피천사운동도 긴급자금 수혈 사업이다. 실직이나 질병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가정에 자금을 지원한다. 대상자는 시청이나 주민센터 등에서 추천한 사람이나 스스로 신청한 사람 중 심사를 거쳐 선정한다.
탈북자 자녀를 돌보는 새꿈터 사역도 의미 있다. 평일 낮 2시부터 저녁 9시까지 간식을 제공하고 공부를 가르친다. 3명의 직원과 4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한글 영어 수학을 가르치며 탈북자 자녀들의 한국 적응을 돕는다.
이주민을 위해서는 다문화센터와 다문화학교를 운영한다. 교육청의 인가를 받은 시설로 국적 취득에 필요한 교육을 비롯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한 다문화가정 자녀의 졸업을 돕는다.
노인들을 위해서는 광성노인복지센터를 세웠다. 주간 보호, 방문 요양, 방문목욕 서비스 등을 실시하고 있다. 덕양·파주·운정노인복지관을 비롯해 문산종합복지관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은퇴 전 10년 동안 157개의 미자립교회를 섬겼다. 이들은 우리의 형제교회였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3) ‘형제교회’ 157곳에 전도 훈련 지원… 동반 부흥 꿈꿔
파주지역 작은 교회에 교인들 파송… 지속적인 후원 통해 자립 도와
정성진 목사가 지난 7월 경기도 파주 민간인통제구역 안의 해마루촌에 세운 수도원 앞에서 함께 성장하는 교회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다.
일산에도 작은 교회들이 많았다. 자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국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안타까웠다.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2010년 9월 이런 바람을 담아 작은교회살리기연합을 조직하고 대표를 맡았다. 이 조직은 1년 뒤 작은교회세우기연합으로 단체명을 바꿨다. CBS방송이 서울 양천구 사옥 안에 사무실을 내줬다. 주요 도시에 거점교회를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전국의 작은 교회를 그물망처럼 연결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회들이 처한 형편이 각양각색이었다. 교회성장 프로그램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재정적인 지원을 통한 성장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작은교회세우기연합 대표직은 내려놨다. 나는 경기도 고양과 파주의 작은 교회 지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사실을 지역에 알리고 157개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거룩한빛광성교회의 형제와도 같았다. 형제 공동체로서 동반 부흥을 꿈꿨었다.
우선 전도 훈련을 받은 교인들을 형제교회로 파송했다. 훈련받은 4명의 교인은 매주 한 차례 형제교회에 가서 예배를 돕고 전도 훈련도 지원했다. 우리 교회는 매년 권사와 안수집사, 장로로 임직하는 교인이 200명 정도 배출됐다. 이들을 형제교회로 파송했다. 그곳에서 예배드리고 헌금도 하도록 했다. 임직 훈련의 하나였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게 했다. 교회는 형제교회에 매달 10만원 상당의 전도용품을 지원했다.
목회자 훈련도 했다. 157명의 목회자를 매주 월요일 우리 교회로 초청해 교육했다. 예수전도단의 ‘예수 제자 훈련학교’(DTS)에서 목회자 부부가 훈련받도록 했다. 8개월 교육과정인데 모든 비용을 지원했다.
사역은 활발하게 진행됐다. 봄·가을 두 차례 형제교회 목회자 부부와 야유회도 갔다. 해외 선교의 기회도 제공했다. 사모님들이 주축이 된 기도팀도 있었고 목회자 찬양팀을 만들어 활동을 지원했다. 완전한 공동체가 됐다.
이런 관심과 지원에도 형제교회들의 성장 속도는 느렸다. 사실 157개 교회 중 출석 교인 100명을 넘은 교회는 한 곳뿐이다. 그만큼 성장이 어려운 시대다. 이런 현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린다. 특히 성장이 멈춰버린 현실을 신학대학 교수들이 알아야 한다. 신학생들도 이를 알고 현장에 나가야 한다.
큰 성과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대형교회에 가진 반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작은 교회들은 2~3가정만 큰 교회로 옮겨도 존폐의 갈림길에 놓인다. 뿌리 깊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 만남은 서로 사이에 신뢰를 형성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는 교인을 빼가지 않는다는 확신이었다. 나는 은퇴했지만, 거룩한빛광성교회는 지금도 형제교회를 섬기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4) 기독교 인재 양성의 꿈 ‘광성드림학교’로 결실 맺어
김승태 장로와 설립 추진 2006년 개교… 시행착오 거치며 명문으로 자리매김
거룩한빛광성교회가 설립한 경기도 고양 광성드림학교 전경. 교회는 교회 건너편 7080㎡(2142평) 부지에 6673㎡(2018평)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역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함께 세웠다. 목사가 되면서 언젠가는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1997년 개척한 뒤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학교를 설립하겠다던 계획이 구체화했다.
2004년 초, 김승태 장로님께 연락 드렸다. 예영커뮤니케이션 대표였던 김 장로님은 기독교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다. 2014년 불의의 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장로님이 지금도 늘 그립다. 당시 나는 김 장로님께 학교를 통해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장로님. 우리 교회가 ‘드림 빌더스’(꿈을 키워주는 사람)가 됩시다. 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장로님께서 학교 설립 준비위원장을 맡아주세요.”
장로님도 흔쾌히 허락하셨다. 지금의 광성드림학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1년간 연구한 뒤 학교에 대한 청사진이 나왔다. 마침 2005년 새 예배당으로 이전하면서 공간이 생기자 학교 설립이 급물살을 탔다.
학교는 2006년 3월 개교했다. 초창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책임자가 몇 차례 바뀌기도 했지만, 경험 많은 교장이 부임하면서 이내 안정됐고 꾸준히 성장했다. 학교는 좋은 소문이 나야 한다. 교육의 질이 가장 중요하다. 동시에 학부모들 사이에 입소문도 중요하다.
우리 학교 학부모들은 학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세 명의 자녀를 모두 광성드림학교에 보내는 가정도 있다. 어머니들은 수시로 기도 모임을 열고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아버지들도 토요일 오전 학교에 모여 기도한다. 특히 아버지들은 한 반의 모든 아이의 자리를 돌면서 축복기도를 한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축복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반 아이들 모두에게 전하는 셈이다.
2014년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사실 지금도 교육청 인가를 받은 대안학교는 많지 않다. 그사이 교사도 마련했다. 교회 건너편 7080㎡(2142평) 부지에 6673㎡(2018평)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학교는 꾸준히 성장했다. 올해부터 고등학교 과정도 신설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과정을 모두 갖췄다. 566명 학생이 재학 중이며 교직원만 100여명이다.
학교 규모가 커지면서 사립학교로 등록하자는 요구도 있지만, 대안학교를 유지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지 않기로 했다. 기독교교육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설립 목적대로 기독 인재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성경을 줄줄 암송한다. 수업도 기도로 시작한다.
광성드림학교는 어느새 명문 학교가 됐다. 입학을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장로님 손주들과 부목사 자녀들도 입학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입학할 때 특혜는 없다. 학생을 선발할 때는 교사와 지원 학생이 1박 2일간 함께 보낸다. 이렇게 아이들의 인성을 지켜본 뒤 당락을 결정한다.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겠다는 바람, 이 꿈이 하루하루 크게 자라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5)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목회 여정에 마침표
개척 때 세운 내규대로 만64세에 은퇴, 퇴직금 헌금… 해마루촌 수도원 세워 통일 위해 기도
정성진 목사(왼쪽 세 번째)가 2019년 11월 24일 은퇴예식 후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7년 교회를 개척하면서 내규를 만들었다. 개혁적인 조항들을 담았다. 그중에서도 담임목사 65세 은퇴와 원로제도 폐지, 6년마다 신임 투표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장로도 6년만 시무하도록 했다. 내규는 교회와 성도를 성숙하게 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
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무엇보다 평신도 중심 사역을 하며 이들의 지도력을 키운 게 큰 보람으로 남았다. 평신도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이런 소신을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적용했고 성과를 거뒀다. 여러 복지재단을 운영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광성드림학교를 설립해 기독교교육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교회 성장에 매몰되지 않고 교회를 항상 분립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 목회 여정이었다.
시간은 쏜살처럼 흘렀다. 점점 은퇴할 때가 다가왔다. 일생 조기 은퇴를 당연하게 여겼고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도 나의 결정을 밝혔다. 이토록 당당했던 나였지만, 은퇴가 다가올수록 허전한 마음이 생겼다. 혼란스러웠다. 은퇴를 앞두고 복잡한 마음을 시에 담았다. ‘은퇴 유감’이라는 제목의 시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면도를 하다가 갑자기 어디로 가지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을 베이고 말았다/ 슬픔을 길어 올리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고 왔는데 ‘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왜 섭섭해, 시원하지’/ 호기 있게 당당하게 말했는데 가슴 깊이 숨어있던 미련이 울컥 솟아 나온다/ 아, 이래서 그랬구나/ 놓지 못해 욕먹었던 분들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직 부르는 곳도 많은데 오래 있었던 그 자리가 나를 끌어당긴다/ 스스로 앞당겨 내려놓았어도 가슴 한편에 아쉬움이 쌓여 섭섭함이 되고 슬픔이 된 것임을 알았다/ 어디로 가지”
실제로 그랬다. 오래 있던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내 결정을 뒤집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늘 노력했다.
2019년 11월 24일, 은퇴의 날이 됐다. 이날 나는 만64세로 교회를 은퇴했다. 막상 떠날 날이 되니 미련이 사라졌다. 떠난 뒤에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거룩한빛광성교회 교인도 아니다. 초청받을 때만 가는 사람일 뿐이다.
은퇴 예우도 특별할 게 없었다. 퇴직금도 1억원으로 결정했고 받은 날 다시 교회에 헌금했다. 대신 교회는 서울 종로구에 ‘크로스로드’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지원했다. 물론 이 기금은 10년 동안만 사용할 수 있다. 기한이 되면 교회에 돌려줘야 한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 해마루촌에 수도원을 세웠다. 거창한 공간은 아니다. 작은 집이다. 이곳은 장로님과 교인들이 십시일반 후원해 마련해줬다. 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이다. 나는 이곳에서 매일 통일을 바라며 홀로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6) 교회가 걸어온 개혁의 여정 ‘성공적 평가’에 가슴 벅차
목회의 비전이 교회 안에서 공유되며 지역 사회 진심으로 섬기는 교회로 평가
거룩한빛광성교회 교인들이 2017년 교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린 뒤 케이크를 자르며 자축하고 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는 늘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은퇴하면서 교회가 걸었던 개혁의 여정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노력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회상해 본다.
2012년 교회 창립 15주년을 맞아 ‘거룩한빛광성교회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목회사회학연구소 소장이던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가 중심이 돼 진행한 연구였다. 이 보고서에는 나의 목회 비전을 담았고 우리 교인들의 의식을 조사했다. 지역조사도 진행해 교회의 역할과 책임도 점검했다. 이를 위해 교인과 주민을 각각 500명씩 심층 인터뷰도 했다. 한국교회에선 흔치 않은 연구보고서를 만들었다.
연구보고서를 통해 광성드림학교가 지역 주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거룩한빛광성교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학교였다. 평신도의 지도력을 키우고 다음세대를 기독교 신앙으로 키우겠다는 나의 바람이 실현되는 것 같았다. 우리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더욱 많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확신도 갖게 됐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회는 2014년 교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토론회’도 진행했다. 여기에는 150명의 교인이 참여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교회를 분립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앞으로 3년 동안 전인적 소그룹을 시스템처럼 만들어 소그룹 자체가 하나의 작은 교회가 돼 언제든지 교회를 분립 개척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평신도 지도력을 키우는 데 더욱 매진할 예정입니다.”
이날도 조성돈 교수가 발표했다. “거룩한빛광성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많은 걸 포기한 교회로도 유명하죠. 목회의 비전이 교회 안에서 공유되는 교회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토론 문화가 살아 있고 지역 사회를 진심으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가슴 벅찬 평가였다. 이날 나는 교인들과 함께 한국교회 비리와 그릇된 신앙관을 다룬 영화 ‘쿼바디스’를 봤다. 그런 뒤 교인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교회 개척 15년을 넘어서면서 이런 시도를 한 건 무엇보다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500여년 전 부패한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뛰쳐나온 우리는 개혁교회 교인들이다. 개혁이란 완성되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개혁하고 또 개혁하는 걸 말한다. 안주하는 순간 우리도 부패하는 것이다. 개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다. 그토록 큰 고통을 이겨낸 뒤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개혁인 셈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이 크다. 우리는 지금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안주하는 순간 개혁교회는 본래 정체성을 잃고 만다. 정체성을 잃은 공동체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 개혁의 기치를 다시 들고 자신의 묵은 가죽을 벗겨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7) 목회현장의 생생한 경험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개척하며 배우고 터득한 노하우, 선교단체 ‘크로스로드’ 사역으로 젊은 목사들에 실전 훈련시켜
정성진 목사가 지난해 12월 9일 서울 종로구 크로스로드 회의실에서 열린 개원예배에서 인사하고 있다.
한국에는 목사도, 교회도 많다. 목사 중에는 담임목사도, 부목사도 있다. 담임목사들은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사명을 갖고 있다. 부목사들은 잘 배운 뒤 때가 차면 담임목회를 꿈꾼다.
최근 들어 교세가 급감하면서 모든 게 어려워졌다. 개척 성공 1% 시대라는 말도 있다. 섣불리 개척을 권유할 수도, 개척을 시작할 수도 없다. 우리 때는 개척하면 10%는 자립 후 성장할 수 있었다. 그때도 여건이 좋지만은 않았다. 교회 개척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곳도 없었다. 돌아보니 나도 맨땅에 헤딩한 것 같다.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만 하면 목회에 성공할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부목사는 부목사일 뿐이었다. 담임목회는 완전히 달랐다. 결정해야 할 것들과 책임의 크기를 비교할 수조차 없다.
교인들의 은사를 발견해 봉사할 부서에 배치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백인백색이라고 했던가. 모든 걸 조율해야 했다.
부딪혀가면서 배우고 터득하는 게 교회개척이다. 목회하면서 깨지고 터득하며 얻은 노하우를 후배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은퇴하면서 이를 위한 선교단체를 만들었다.
지금의 ‘크로스로드’ 사역이다. 지난해 12월 9일 크로스로드를 개원했다.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에 뒀다.
무조건 개척을 돕는 게 목적은 아니다. 우선 젊은 목사들에게 실전 훈련을 시켜주고 싶었다.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현장의 생생한 경험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선배 된 도리라 여겼다.
이곳에서는 정기포럼과 목회 아카데미, 독서모임과 콘퍼런스 등을 진행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다소 위축됐지만, 여전히 온라인강의를 통해 후배들을 교육하고 있다.
지난 2월 ‘제1회 개척 목회 콘퍼런스’가 출발이었다. 콘퍼런스에서는 나를 비롯해 개척을 통해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12명의 목회자가 강사로 나서 자신의 경험을 전했다. 당시 나는 후배들에게 교회 개척 성공의 길을 말하려던 건 아니었다. 야성을 키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나가 목회할 때 필요한 용기를 주고 싶었다.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라고 권했다. 그래서 강의의 제목도 ‘다윗의 물맷돌’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렸던 다윗처럼 자신만의 무기로 개척하는 지혜를 심어 주고 싶었다.
“교회 개척을 위한 정해진 모델이란 건 애초에 없습니다. 다양한 케이스가 있을 뿐입니다. 목회자의 성향과 지역사회의 성격에 맞는 여러 사례를 통해 내게 맞는 교회의 유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헌신하기로 작정한 동지들입니다. 맡겨진 사역을 함께 감당합시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읍시다. 자신만의 무기를 발견하는 시간 되길 바랍니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8) 갈라진 이 땅 하나 되는 날 꿈꾸며 기도의 집 마련
신학도 때부터 관심 컸던 수도원 영성… 은퇴 후 해마루촌에 터전 삼고 한반도 평화통일 위해 기도와 묵상
정성진 목사가 지난달 경기도 파주 ‘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 해마루 수도원’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은퇴 후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 파주 해마루촌이다. 홀로 기거하며 기도하고 노동한다.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갈라진 땅을 다시 이을 수 있는 건 주님의 능력뿐이다.
해마루촌은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다. 고양 일산보다 북한의 개성이 더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때 실향민들을 위해 조성된 평화 마을이다. 20년 동안 적지 않은 주민이 세상을 떠나면서 나 같은 일반인도 입주할 수 있게 됐다.
60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내가 머무는 집은 과거 서울의 한 교회 소유의 기도처였다. 세월이 흘러 결국 나에게 왔다. 평소 통일에 관심이 많아 ‘주빌리 통일 구국기도회’ 공동대표 겸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다. 은퇴 후 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꾸미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1997년 교회 내규를 만들면서 원로목사를 하지 않기로 해 은퇴하면 갈 교회가 없었다. 겸사겸사 해마루촌을 터전으로 삼는 게 좋다고 결론지었다.
덜컥 계약금을 건넸다. 하지만 중도금과 잔금 치를 돈이 없었다. 고민하며 기도하는 걸 안 30여명의 장로님과 여러 교인이 십시일반 도움을 주셨다. 그 돈으로 지금의 이 공간을 마련했다.
기도의 집 이름은 ‘해마루광성교회’다. 내가 마음속으로 지은 이름은 ‘통일을 위한 기도의 집, 해마루 수도원’이다. 나는 이곳의 수도사다. 신학생 때부터 수도원 영성에 관심이 컸다. 서울장신대 졸업논문 주제가 베네딕트수도회였다.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학우회장을 할 때는 은성수도원 설립자 엄두섭 목사를 사경회 강사로 초청했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훗날 은성수도원이 장신대 경건훈련원이 됐다. 신학도일 때의 꿈을 은퇴 후 이룬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소박하게 먹고 묵상하며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산다.
갈라진 나라가 하나가 되는 건 요원한 일이다. 지난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영상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통일을 향한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이후에 점진적인 통일의 길로 갈 것이다.
국민 모두가 나서서 통일을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하다.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로 평화통일의 탑을 쌓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졌다. 해마루, 이 기도의 집에는 그동안 수집한 세계 여러 나라의 십자가가 많이 있다.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십자가도 있다. 나는 십자가를 좋아한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과 하나님이 화해한 증거가 아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 잔혹했던 사형 틀이 변해 화해와 사랑의 도구가 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한다. 갈라진 이 땅이 하나 되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무릎을 꿇는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29) 희망 잃은 젊은이들에게 늘 “야성을 가져라” 당부
야성이란 세상 헤쳐나갈 수 있는 영성… 당당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낙담치 않고 목표 향해 달려가야
정성진 목사가 2018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린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야성(野性)을 가져라.”
목회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서 희망도 봤고 때 이른 좌절도 엿봤다. 힘이 빠진 이들에게 늘 야성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야성은 힘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영성을 의미한다. 가진 게 없어도 부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형편이 보잘것 없더라도 왕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야성이다.
금수저와 흙수저란 비교는 결국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흙수저라고 해도 다른 제3세계에서는 금수저가 될 수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인간은 만인만색이다. 대기업 임원이나 대형교회 목사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소중한 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꿋꿋하게 걸어가면 된다. 그 여정의 끝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나도 흙수저였다.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야성을 가지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유다. 아버지는 굉장히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내가 자랄 때는 집안이 완전 망했다. 교회 관리집사였던 어머니와 청소를 하며 교회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에는 학업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긴 세월 무술에 심취했었다. 취업을 위해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정작 취업을 제때 하지 못했다. 무려 여덟 차례나 고배를 마신 뒤 환경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야 겨우 동아제약에 입사했었다. 뒤늦게 진학했던 방송통신대는 무려 11년 만에 졸업했다. 신학대에 입학해서도 난관이 많았다. 민중신학에 심취했던 나는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서울장신대를 졸업한 뒤에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던 광산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이론으로 배웠던 민중신학을 목회 현장에서 적용해 보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 학우회장을 할 때는 학내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학 재단사무국장이었던 장로와 갈등을 빚었던 일이 있다. 이 장로가 시무하던 서울의 한 교회를 찾아가 장로를 만나는 과정에서 드잡이까지 했는데 훗날 이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열렸다. 그때 일을 기억하던 장로들이 내가 안수 받는 걸 반대하고 나서면서 큰 위기에 봉착했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매 순간 험난한 삶이었다.
내 삶은 빛나던 순간보다 그렇지 못했던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한순간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런 용기가 나를 키웠다. 내세울 이력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멋지게 사용하지 않으셨던가.
낙담하면 안 된다. 젊은이답게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이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개척하는 야성을 키워야 한다.
***[역경의 열매] 정성진 (30·끝) 목회의 시작은 자기 비움… 나부터 다 내려놓아야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마음으로 교회 개척하며 만든 내규 소신껏 지켜
정성진 목사가 지난달 경기도 파주 해마루촌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객에게 소개하고 있다.
2019년 4월 첫 주에 ‘바통 터치’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거룩한빛운정교회까지 분립 개척한 뒤 거룩한빛광성교회 담임목사로서 마지막 설교를 하는 날이었다. 시인 조병화는 자신의 시 ‘의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이 시를 마음에 품고 설교했다.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고백을 설교에 담았다. 때로는 흔들렸다. 심지가 다 된 촛불이 마지막 사그라들기까지 흔들리며 요동치듯 나도 그랬다. 하지만 검은 점 하나 남긴 채, 다 사라진 촛농을 보면 기분이 맑아지듯 그렇게 불태우고 떠나겠다 다짐했다.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떠났다.
조기 은퇴에 대한 생각은 1990년부터 했다. 장로회신학대 신대원을 졸업한 뒤 83기 동기회장을 맡았을 때 ‘삶의 자리’라는 회지를 발행했다. 나는 당시 ‘목사의 신임 투표제 및 65세 은퇴’ ‘장로 65세 은퇴’ 등을 언급했다. 교육전도사이던 내 주장이 주목받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파격적인 주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비슷한 시기 손병호 목사님도 이런 주장을 펼치다 부산장신대 학장에서 쫓겨나는 곤욕을 치렀다.
다행히 젊었을 때의 소신을 지켰다. 97년 일산에 개척하면서 교회 내규를 만들었고 파격적인 내용을 모두 녹여 담았다. 목사와 장로가 동시에 권한을 줄이자는 안에 대해 반대할 명분은 많지 않았다. 만약 내 권한을 그대로 두고 장로의 권한만 줄이자고 했다면 혼란만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부터 다 내려놓았다. 목회의 시작이 자기 비움이었다.
나를 죽여 교회를 세웠고 키웠다. 내가 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남을 살릴 수는 없다. 하나를 버려야 다른 걸 얻는 게 세상 이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나도 부족한 게 많고 거룩한빛광성교회와 이 교회를 통해 분립한 24개 교회 모두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개혁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뒤 보이는 문제와 부족함을 쉬지 않고 다듬고 개선하는 과정이 개혁인 것이다.
우리는 500여년 전 로마가톨릭의 부패에 항거하며 뛰쳐나온 개혁교회의 일원이다. 개혁교회는 쉬지 않고 개혁해야 한다. 개혁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쉼 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수백 년 전 개혁이 완성됐다고 착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나는 개혁의 작은 불씨를 놓았을 뿐이다. 이제 나의 빈 자리를 찾아온 후배들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나는 그저 후배들의 목회를 도울 뿐이다. 한국교회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나를 녹여 후배들의 길을 밝히는 새 사명이 내게 주어졌다.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