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31 / 부활, 다시 사는 것 (요20:1-18)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죽는다는 것일 겁니다.
죽음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떠나도록 강요합니다. 뭔가 못다 한 일이 있는데도, 뭔가 더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들이 아직 있는데도 죽음은 그것들과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 볼 방법들을 찾곤 했는데, 종교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종교조차도 그 창시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종교가 죽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무엇으로도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죽음이기에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는 것이 인생의 당연한 운명이라 하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만 있는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만 부활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에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가 마치 자기들도 하나님을 믿는 것인 양 포교를 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마호메트가 쓴 경전을 믿을 뿐입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집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랍비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율법의 전통을 믿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각종 사이비나 이단들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전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으면 안 됩니다. 특히나 기독교인 대부분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떤 이유로도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특정 종교의 신 내지는 창시자나 교주가 아니십니다.
기독교는 생존이며 생활입니다. 살면서 복이나 기원하고 죽으면 낙원이나 극락에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매 순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걸린 현실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자면 종교가 말하는 신앙은 ‘소원’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비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믿는 것’입니다.
이때, 비는 것이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믿는 것은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비는 것이 앞으로 ‘이러이러하길 바란다’는 ‘현재의 희망 사항’이라면 믿는 것은 미래에 있게 될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는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현재의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타 종교에서도 우리 역시 그런 확신을 갖고 믿는 것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어 주는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모든 종교는 죽음 앞에서는 중단이 되고 말기에 종교들은 도나 법이나 가르침 내지는 기복 신앙은 될 수 있어도 믿음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만 있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부활 축복’입니다.
오늘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일 년을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축복하심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부활절은 그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5~2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니,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은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 당연히 죽습니다.
그렇다면 믿어도 죽는다면 성경의 ‘죽어도 살겠고’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은 거짓인 걸까요?
.....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제자 훈련 때 배운 ‘생명’과 관련한 내용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헬라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에는 ‘조에’와 ‘푸쉬케’가 있습니다.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푸쉬케는 ‘사람과 동물이 가진 일반적인 생명인 혼의 생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있게 된 생명은 어떤 것이라고 했었나요?
처음 흙으로 지어질 때의 사람의 생명은 흙의 속성인 ‘푸쉬케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7절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걸맞은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푸쉬케의 생명만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만의 영원한 생명인 ‘조에’를 불어 넣어 주신 것입니다.
이후, 그렇게 창조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실제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 뭡니까?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는데도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인 걸까요?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죽되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조에가 죽은 것이고 그로인해 사람에겐 다시 육신의 생명인 푸쉬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이 죽고 없기에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당장엔 사람이 살았으나 때가 되면 육신의 생명마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언제고 육의 생명인 푸쉬케마저 죽게 될 것인데, 그러면 영의 생명인 조에는 이미 죽고 없기에 그렇게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은 살아 있다고 해도 조에가 죽은 사람이라면 창세기 3:17~18절에서 보듯이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사람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기에 사람은 평생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그 소산을 먹게 되는 고달픈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믿어 사람이 얻게 되는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 바로 죄로 인해 잃었던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사람에게서 죽었던 ‘조에’가 다시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이 조에가 있고 없음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과 운명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이 죽게 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심판하실까요?
이미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를 보십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에게서 천국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심판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죽어 하나님 앞에 선 자에게 예수님을 믿어서 받게 된 조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죽어도 살겠고’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도 육의 생명인 푸쉬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죄로 인해 죽었던 조에가 회복될 것이기에 그의 인생에서는 끊어졌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통로가 뚫리는 것이고 막혔던 하나님의 축복 동산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육의 생명인 푸쉬케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얻은 조에로 인해 천국에서 다시 살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육의 생명인 푸쉬케가 살아있는 동안일지라도 믿음으로 얻은 조에로 말미암아 인생의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죽겠다’ 싶은 상황에서도 ‘살았다’의 형편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천국! 살아서는 복 받음!’
이게 부활이 주는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수많은 설교가 실려 있지만 정작 장례식장에서의 설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에 가실 때마다 그 장소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장소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도 거기를 생명과 기적의 장소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눈물이 있든, 슬픔이 있든, 아픔이 있든, 가난이 있든, 실패가 있고, 죽었다 싶고, 죽겠다 싶어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죽어서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의 부활이 있게 되는 겁니다. 부활이 예수에게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현재의 부활을 가능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부활을 현실의 축복으로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부터 부활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거나 그간 잘 못 믿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다시 잘 믿게 된다면 그것이 ‘믿음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인생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인생에는 네 개의 방향밖에는 없습니다. 동서남북뿐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전후좌우에서 밀려오거나 능력 부족과 각종 문제들로 인해 인생이 사면초가가 될 때면 엄청난 고민과 고난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면 인생에 동서남북 외에도 또 다른 ‘제5의 방향’이 있게 됩니다. 즉 ‘위로 향하는’ 방향 또는 ‘위로부터의’ 방향입니다.
흔히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구멍이 과연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솔직히 그런 게 있고 또 어디 있는지를 알기만 하면 인생이 괴롭고 힘들고 가난하고 아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활 신앙은 ‘인생의 솟아날 구멍이 예수님께는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푸쉬케만이기에 인생을 땀 흘리고 수고하여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처지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조에를 덧입기만 하면 그게 인생을 다시금 살게 하는 ‘부활’인 것이고, 나의 인생을 다시 살게 하는 ‘부활의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생이든 예수님만 계시면 죽겠어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이른 새벽 다들 잠든 시간에 혹은 잠 못 이루는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리아의 예수님 만나기 전과 후가 어땠나요?
예수님께 올 때는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가지고 왔지만, 예수님을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기쁨과 웃음과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같은 시간에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로마 군인들이 자기들도 잡으러 오지는 않을는지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두려워하느라 문을 걸어 잠근 채 잠 못 들고 근심하며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같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인데도 같은 시간에 마리아와 제자들은 왜 이토록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인가요?
예수님이 계시고 안 계시고의 차이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기에 베드로도 다른 제자와 함께 서둘러 예수님이 계신 무덤에 왔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땠나요?
빈 무덤을 보더니 ‘어? 비었네?’ 하곤 그냥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계셔야 할 예수님이 계시지를 않자 누가 내게서 예수님을 빼앗아 갔느냐며 서럽게 통곡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질문입니다만 본문의 제자들과 마리아 중에 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까요?
당연히 마리아입니다. 왜냐하면 절실하게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13절을 이전의 개역 한글 성경 버전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왜 예수님 없이 인생을 힘들게 살려 합니까?
왜 예수님 없이 매사에 근심하며 살아가고,
왜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도 않은 채 죽지 못해 산다고만 하려 합니까?
이젠 울어도 예수님께 와서 울고, 사는 게 죽겠어도 예수님 앞에 가서 죽으리라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을 만나 인생 제5의 방향 즉 위로부터 열리는 축복의 방향이자 살길이 열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부활하게 되면 예수님이 주시는 복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과 생활도 부활하게 됩니다.
예전에 어느 분이 ‘부활은 좋은데 그 앞에 십자가가 있어서 망설여진다.’고 농담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 말씀을 정정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부활로 나가려고 하느냐고. 믿음은 ‘부활에서 십자가를 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구약 요셉의 인생을 놓고 본다면 여러분은 이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실 겁니다.
부활을 먼저 믿어야 인생의 각종 십자가가 해결이 됩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고난과 괴롬과 아픔 등을 상징하지만 우린 다른 종교인들처럼 그런 십자가들 앞에서 막연한 희망 사항이나 비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답게 미래의 부활을 확신하며 오늘의 십자가를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에 우리에게 인생의 십자가들 즉 가난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아픔이나 문제 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십자가를 하나님이 내게도 있으리라 약속하신 부활의 자리에서 바라볼 줄 아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 생명이 푸쉬케인 한 세상이 주는 고난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믿어도 고난은 그대로 있겠지만, 그러나 믿으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생의 십자가를 인생 성공과 승리라는 부활의 자리에서 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에게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할지라도 그때 그것들을 극복해서 이기게 하는 부활의 믿음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나에게도 부활은 있다는 확신을 갖고 현재의 십자가를 인내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의 부활은 죽으면 천국이고 살아서는 복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맞이한 부활절을 매년 오는 연례행사쯤으로만 여기지 말고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을 부활의 믿음으로 인해 부활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