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우리 식구들
“작년보다 조금씩 더 심었으니 올해는 우리 차지 좀 있겠지?”
아빠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은근히 설레어 있는 것 같아요. 주말이라 가족 모두 돌아가신 할아버지 시골집에 왔어요.
“꺅~ 뭐야? 누가 땅콩밭을 온통 파헤쳐놨어!”
차를 세우고 텃밭으로 가던 아빠가 우릴 보고 소리쳤어요. 뒤따르던 엄마와 나는 놀라서 뛰어가 봤어요.
“누가 몰래 와서 땅콩만 캐 갔나 봐.”
엄마가 많이 놀란 것 같아요.
“아니야, 사람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아빠는 땅콩밭을 세심히 살펴보며 범인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어요. 밭이 여기저기 파헤쳐 있고 뿌리도 밖으로 드러나 있어요.
“두더지 아니면 너구리 짓 같은데.”
아빠는 동물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아냐, 두더지나 너구리는 땅콩을 먹지 않아.”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아냐, 그놈들 짓이 분명해.”
아빠가 동물들 짓이 확실하다는 듯 말했어요.
“걔들은 땅콩을 먹지 않는다니까. ‘유 씨 가족의 시골살이’라는 유튜브에서 보니까, 너구리나 두더지는 들쥐나 뱀 같은 작은 동물이나 벌레를 먹는다고 했어.”
엄마도 자신있게 대꾸했어요.
“너구리는 고구마도 먹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준수가 좋아하는 거라 신경 써서 심었는데….”
아빠와 엄마는 서로의 말이 맞는다며 다투고 있어요. 나는 유별나게 땅콩을 좋아해요. 봄에 아빠가 심은 땅콩을 누군가 알맹이를 쏙쏙 다 뻬 먹었대요. 그래서 그 옆에 한 이랑을 더 심었대요. 그때를 생각하니 화가 많이 나나 봐요.
“작년에는 새들이 옥수수를 다 쪼아 먹어버려 올해는 미리 양파망을 씌웠는데, 이번엔 땅콩을 또 누가 파먹었네.”
어쩐지 저 끝에 있는 옥수수밭 송이마다 빨간 것이 키 큰 칸나꽃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빨리 묻어줘야겠다.”
아빠는 호미를 가져와 흩어져있는 땅콩을 묻어주고 정성껏 물을 주면서,
“죽지 말고 살아나거라. 그래야 우리 준수가 좋아할 거야.”
아빠 옆에 있던 나는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빠는 내가 속상해할까 봐 신경이 쓰이셨나 봐요.
아빠와 엄마는 올해 2년 차 초보 농사꾼이에요. 작년에는 뿌린 씨앗의 절반도 수확 못하고 고생만 했대요. 텃밭에 검은 비닐을 씌우고 땅콩을 심었는데, 가을에 수확한 건 한주먹도 안된다고 엄마가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울타리를 쳐야겠어. 산 옆이라 짐승이 내려오는 것 같아.”
아빠는 우리 텃밭을 지키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으신 것 같아요.
“그래야 할 것 같네. 아직 수확이 끝나려면 한 달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다 먹어버리면 어떡해? 우리 준수 먹을 건 남겨놔야지.”
엄마가 아빠 말에 호응하자 분위기가 다시 부드러워졌어요.
다음 날, 우리 가족 모두 울타리 만들 재료를 사러 읍내에 나갔어요. 마침 장날이라 서울의 큰 시장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빠, 나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귀찮기도 하고 시골장에 내가 볼거리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앞으로 시골 내려와 살텐데, 시장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게 같이 가자.”
“그래, 혼자 있으면 뭐 해?”
엄마가 거들었어요.
“알겠어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부모님을 따르기로 했어요. 실은 차에서 혼자 게임을 하고 싶었거든요. 아빠와 엄마는 차에 혼자 두는 게 걱정이 되나 봐요.
시장엔 신기한 것들이 무척 많았어요. 시골이라 낫, 호미, 괭이, 그 외 이름모를 농기구들이 엄청 많았고 무, 배추, 고사리, 초록 나물들, 버섯까지 먹을거리도 산처럼 쌓여있어 도시의 큰 시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이것 봐라. 준수야, 이게 뭔지 아니?”
한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아빠가 나무로 된 끈으로 중간을 묶어 둥그렇게 휜 것을 들어 보이며 물었어요.
“처음 보는 건데요. 그게 뭐예요?”
아무리 봐도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는 물건이었어요.
“아빠도 이걸 본 지 꽤 오래됐거든.”
아빠는 한참 만에 보는 거라 무척 반가웠나 봐요.
“나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는데, 이게 뭐야?”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이건 ‘코뚜레’라고 하는 거야. 옛날에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요했거든. 지금은 거의 기계로 하고 있지만. 엄마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는 것과 비슷해. 기다란 끈을 코뚜레에 연결해 밭을 갈며 소를 몰고 가는 거야. 종을 달아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 종을 워낭이라고 해.”
아빠가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낯선 코뚜레에 친근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신기해요. 그런데 코를 뚫을 때 소가 많이 아팠겠어요.”
나도 모르게 코를 만지면서 말했어요.
“그랬겠다. 엄마도 귀 뚫을 때 무척 놀라고 아팠거든.”
엄마는 귀를 만지면서 말했어요.
시장에는 이름도 모르고 처음 보는 물건이 많았고, 산이나 밭에서 나는 농산물도 많았어요. 모든 것이 낯선 모습이었지만, 부모님과 오랜만에 시골 빈대떡과 떡볶이를 너무 맛있게 먹은 장날이었어요.
“뭐야? 너희는 누구냐?”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마당으로 들어서던 아빠가 누구를 보았는지 소리를 질렀어요. 덩치가 큰 두 마리와 새끼 두 마리, 사슴 가족 네 마리가 후다닥 달아났어요.
“야, 이번엔 고구마밭이다. 저 녀석들이 고구마 잎을 따먹고 갔네.”
아빠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어요. 고구마밭으로 가 보니 위가 가지런하게 고구마잎이 없는 거예요.
“엄마, 칼로 자른 듯 깨끗하게 따 먹었어요. 사슴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요?”
“이젠 사슴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고, 무서워서 이 집에 못 살겠다.”
엄마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는 듯 겁에 질려 얘기하고 있어요.
“사슴이 아니야. 고라니라는 녀석들이야.”
아빠가 자신있게 얘기하는 걸 보니 분명 고라니가 맞는 것 같아요.
“고라니는 야생동물보호를 받는 동물이라 함부로 잡을 수 없으니 빨리 울타리를 쳐야겠다. 이러다간 우리가 농사지은 걸 저 녀석들이 다 먹어 치우겠는데.”
아빠는 서두르며 엄마와 협동해 텃밭 주변으로 울타리를 치면서 빈틈을 없애려고 애쓰고 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아빠와 엄마를 보고 있으니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얼마나 힘드셨을지 떠올랐어요. 시골 일은 힘도 많이 들고 할 것도 많은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요. 식구들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어제 못다 친 울타리를 마무리하려고 마당엘 나갔어요.
“어머나, 또 어떤 놈들이 땅콩밭을 휘젓고 있어. 두더진가?”
이번엔 먼저 나가시던 엄마가 놀라서 고함을 쳤어요.
아빠와 함께 가 보니 후다닥 달아나는데 여러 마리였어요.
“두더지다. 저놈들은 울타리를 쳐도 땅속을 누비고 다니니 어쩐담? 아이구, 이번엔 많이도 망쳐놨네. 저놈들을 그냥~.”
아빠가 또 화가 나셨나 봐요. 나무 그늘에있는 테이블에 가 앉으시더니 한숨을 길게 쉬셨어요.
“전에 할아버지께서 이곳엔 들짐승들이 많아서 도시 사람들은 살기 힘들 수 있다면서, 자연 속에서 살려면 그들과도 더불어 살아야 할 거라는 말씀을 하신 적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 같다.”
아빠는 내게 들으라는 듯이 말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것 같았어요.
“여보, 차 한잔해.”
아빠가 많이 놀란 것 같은지 엄마가 차를 한잔 내 와 아빠께 드렸어요. 나는 아빠가 저렇게 깊이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가 아빠를 보다가 나를 보더니 빙긋 웃으면서
“더불어 사는 거 좋지. 하지만 짐승은 짐승이야. 우리는 사람이고. 나는 지렁이도 파리도 싫어. 시골 내려와 살기 정말 싫단 말이야.”
엄마는 시골 내려와 살자는 아빠말에 항상 반대하던 차라, 이 기회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가 전에 늘 말씀하신 게 있어. 촌에서 살려면 주변의 모든 것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짐승들은 아니야!”
아빠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톡 쏘아붙였어요.
“농사지은 걸 우리가 다 먹지도 못하는데 이웃에 나눠 주기도 하고 우리 텃밭을 드나드는 고라니나 두더지, 새, 쥐들과도 나눠야 한다고. 그들도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라고.”
엄마는 아빠 말에 반대하려고 눈치만 보는 것 같아요.
“아버지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양반 말씀이 맞는 거야. 여기가 산골이라 우리만 있는 줄 알았고,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희들을 깜빡했다. 우리 말고 또 다른 식구들이 있다는 걸 말이야.”
아빠는 누구에게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술술술 혼잣말을 이어갔어요.
“그래, 그래. 너희가 먹고 남으면 우리가 먹을게. 대신 다 먹지 말고 조금만 남겨라. 너희들 때문에 내 농사 실력도 늘었고 수확도 늘었으니까.”
아빠는 뭔가를 깊이 깨달은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그러더니,
“당신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고 부모님이 사시던 곳이니 당장은 아니어도 이곳에 내려와 살도록 하자. 그때까지 지금처럼 농사짓는 법도 익히고 시골살이도 조금씩 적응하고…, 그러다 보면 정이 들 거야.”
아빠는 먼 하늘을 쳐다보다가 엄마의 얼굴도 힐끔 쳐다 보면서 은근한 말로 엄마를 설득했어요.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아니야. 나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엄마는 아빠가 안쓰러웠는지 조심히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엄마의 말을 듣던 아빠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만세를 부를 것처럼 좋아하셨어요.
“우리 그럼 저 울타리 당장 헐어 버리자. 우리 밭에 들어오는 짐승들과 나눠 먹지 뭐. 설마 저 밭에 있는 걸 다 먹어 치우기야 하겠어?”
아빠 마음이 갑자기 돌변했나 봐요.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높이 들며 텃밭으로 걸어갔어요. 엄마가 하신 말 때문에 아빠가 힘이 나나 봐요.
“쟤네들이 다 먹어버리면 내년엔 우리가 더 많이 심지 뭐.”
엄마도 아빠말을 듣고 마음이 변했는지 아빠를 따라가면서 동조했어요. 오랜만에 아빠와 엄마가 한마음이 된 것 같아 나도 신이 나서 뒤따라갔어요.
“아빠, 저도 도와드릴게요.”
파란 하늘이 시원한 바람을 날려주며 우리 식구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있어요.
첫댓글 계속 읽으면서 퇴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