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106) 松月齋 李時善
일생동안 벼슬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사림의 은사(隱士)로서 학문탐구에만 전념하다 일생을 마친 松月齋 李時善은 奉化가 낳은 대표적인 유현(儒賢)중의 한 사람이다. 李時善은 인조 3(1??)년(1625)에 출생하여 숙종 41년(1725?? 1715)에 사거할 때까지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의 4대에 걸쳐 활약한 진일(眞逸)의 선비였다.
본관이 全州이고 字가 子修인 李時善은 태종의 제3왕자<문집에는 제7왕자로 됨> 溫寧君 程의 後孫이어서 말하자면 왕족의 후예였다. 李時善의 가문이 奉化로 이거한 것은 溫寧君 程의 7대손이며 李時善의 父인 秋巒 李英基때의 일이다. 입향조인 李英基 또한 뛰어난 기절(氣節)과 우국지사로 이름 높았다.
원래 李英基 가문은 한양에 뿌리를 둔 사족이었으나 임진란 직후 지금의 奉化군 酉谷(닥실)으로 이거하게 됐다. 그가 奉化로 이거하게 된 사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이 난마처럼 얽혀 벌이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그의 문집을 보면 소북의 영수로서 한때 실권을 장악한 柳永慶과 芝峯 李粹光이 그의 탁월한 인품과 기국(器局)에 끌려 그에게 관직에 오를 것을 누차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취임하지 않은 사실이 기록돼있다.
또 그는 아들 5형제에게 과거공부는 남아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못되니 과거를 위한 공부는 그만두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奉化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스스로 참모장이 될 만큼 뛰어난 우국지사이기도 했다.
오늘날 全州 李氏들의 집성촌인 奉化군 法田면 楓井리는 바로 그가 처음 터를 잡고 개척한 곳이거니와 그는 이곳에 오기 전 酉谷(닥실)에 잠시 우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酉谷에서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꼽히는 冲齋 權벌의 증손녀와 이무렵 혼인하게 됐다. 또 후일 李英基는 鶴峯 金誠一의 손녀를 둘째 자부로 맞게 됐고 넷째(李時善)자부 또한 尙州의 대유(大儒)인 月澗 李㙉의 손녀를 맞아들였다. 이것을 보면 李英基가 고향인 한양을 버리고 산설고 물선 타지에서 일가 독립했을지라도 영남 북부지방의 토착 사대부 가문에 뒤지지 않는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터를 잡고 개척한 奉化군 法田면 楓井리에는 그가 자제와 후진의 강학을 위한 서원으로 지은 俟德亭이 지금도 남아있다.
松月齋 李時善은 바로 이 입향조 李英基의 5남중 제4남으로 楓井리의 白雲峯이 올려다 보이는 시듬물에서 태어났다. 李時善은 일생에 한 번도 관직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도 당초에는 입신양명을 꿈꾸고 과거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父의 훈도대로 잘해야 공과반반(功過半半)이요, 진흙수렁에서의 명리 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길이 못된다고 하여 일찌감치 과거를 단념했다. 관직이 있어야 행세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관직에 전혀 오른 일이 없는 그의 청명(淸名)이 후대에까지 길이 전해진 것은 그의 독특하고 탁월한 학문과 걸출한 효도와 우애 있는 행실이 당대 사림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李時善의 생애에서 유년 시절이나 성장과정을 전해주는 글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정조때 왕명으로 蔡弘遠등이 편집, 간행한 嶺南人物考에는 李時善이 사방에 주유하기를 즐겨서 俗離山, 金剛山, 智異山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과 平壤, 慶州, 開城 등 옛 영웅들이 활약했던 통읍도회(通邑都會)의 사적지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나약한 유생이 아니라 호연(浩然)한 기국을 갖춘 선비였음을 짐작케 한다.
전국을 두루 탐방하고 돌아온 李時善은 향리의 숲속에 서재를 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와 학문탐구에 전념했다. 그가 이 서재의 당호로 지은 松月齋는 그대로 그의 호가 됐다. 남달리 검박하고 근면했던 그는 松月齋에다 사면에 서가를 두르고 책상 하나만을 들여 놓은채 독서에 몰두했는데 잠은 언제나 한식경<一更>만 잤고 음식은 흰죽으로 조석으로 두 끼만 먹었다. 李時善은 이때의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靑山六七丈/ 白屋二三間/ 中有一오士/ 平生述與산」「청산은 예닐곱 길/ 인가는 두세 채/ 그 가운데 한 선비 있어/ 평생토록 글 짓고 또 지우네」
한 겨울이 돼도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무더위가 닥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이루었으나 그 방법과 내용이 독실하고 치밀해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잡스러움이 없었다.
그의 독서방법을 보면 언제나 먼저 외부에서 일어나는 잡된 욕망<嗜慾>을 끊고 안으로 정신<眞精>을 집중시킨 다음 독서에 들어갔다. 그는 난해한 서적을 대하면 한번 읽을 때마다 빈 바가지에 팥알을 던져 넣어 바가지에 팥이 가득 차도록 거듭해서 책을 읽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李時善은 학문을 하되 六經, 四子와 성리학을 최우선으로 하고, 한편으로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를 섭렵하여 횡으로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그는 특히 당시 외면 받던 老莊 ‧ 風騷 ‧ 諸子와 같은 古秦의 학문에 통달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그는 또한 병서와 지리서적도 버리지 않고 심지어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嶺南人物考의 저자는 그의 학문을「微와 顯에 유의하고, 新과 奇에 출입하여 그윽하고 숨은 것이 모두 드러나서 한 구절도 티끌과 점의 흔적이 없었다.」고 평했다.
고금의 서적과 학문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는 또한 남달리 활발한 저작활동을 보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려진 저술로는 史略補, 歷代史選, 漆圓口義, 書傳參評, 詩傳濫課, 傳義騈枝와 손수 편집한 자신의 문집<荷華編>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출한 것은 中國의 역사를 上古時代부터 明나라까지 서술한 歷代史選이다.
모두 70권으로 서술한 이 역대사선은 정작 본고장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규모면에서 대작으로 꼽힌다. 그는 이것을 다시 35권으로 축약하기도 했다. 역대사선과 함께 또 한 가지 특출한 것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역을 한글로 옮긴 주역언해본이다. 이 주역 언해본은 최근까지 전해졌으나 관리부실로 없어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평생에 명리다툼을 멀리 한 그는 성품 또한 고고하여 사귀는 벗은 언제나 일시의 명류(名流) 두어 사람뿐 이었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스승의 지킬 바는「不愧心」<부끄럽지 않은 마음이라는 뜻> 석자에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대로 그의 평생의 신조이자 위학정신(爲學精神)이기도 했다.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은 영남사림에 널리 알려져서 그는 83세에 호군이란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그는 남달리 건강하여 91세라는 수복을 누렸는데 90세가 가까워 와도 피부가 더욱 살찌고 정신은 더욱 맑았다고 한다. 그는 운명하던 날 자제들에게「몸가짐을 삼가고 벗 사귀는 일을 살펴서 하고 婚嫁는 제때에 하라.」고 가르친 다음, 中庸 首章과 주역의 건괘(乾卦)를 조용히 외면서 운명했다. 그의 사후 묘갈명은 玉川 趙德鄰이, 행장은 蒼雪 權斗經이 지었고 행장은 星湖 李瀷이 지었다.
직계손으로는 11대 종손 李南宰씨(38 ‧ 慈仁중 교사)가 있으며 李英基 ‧ 時善 부자가 터를 잡은 奉化군 法田면 楓井리 일대에 약 3백 60여호가 집성부락을 이루고 있다.
*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
* 도움말 = 李南宰씨. <呂恩暻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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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大王-溫寧君(䄇)-牛山君(踵)-韓山君(挺)-信陽守(淮)-敏-成立-榮基(秋巒)-時善(松月齋)-瑾-仁債-壻 朴熙運(妻陳外 8代祖)
李彦林-惟孝-陽升-元邦-英粲-厚-吉-舒原-垠-堰-壽川-兆年-琢-守仁-㙉(月澗)-一圭-壻 李時善(松月齋)-瑾-仁債-壻 朴熙運(妻陳外 8代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