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미술관 조순배
오랜만에 기다리던 비가 온다. 서둘러서 집안을 치우기 시작한다. 손은 일을 하는데 마음은 빗방울 떨어지는 거리를 헤맨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기를 든다. 비 오는 날을 좋아 할 친구를 생각하며 신호를 보내본다. 미술관에 가자는 내 말에 ‘비가 오는데’ 하며 다음에 가자고 거절한다. 둘이라는 사치스러운 낱말을 지워 버리고 비 오는 거리로 나선다. 소나기는 거리를 금방 물바다로 만든다. 우산은 들었으나 비바람에 온통 젖어 버린다. 젖은 옷차림으로 광화문에 있는 일민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소나기 때문인지, 늦은 시간 때문인지, 미술관 안은 텅 비어 있다. 미술관 안에는 1920년에서 2000년대까지의 시대상의 미술과 신문 속의 미술이 전시되어 있다. 신동아와 여성동아의 표지화된 작품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다. 화보 속의 미인들은 통통한 모습이다. 미인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 현대 미술의 대표적 작가 100여 명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유화, 표지화, 목차화, 수묵화, 채색화 시대별 시물 사조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제2부는 신문에 실렸던 연재소설의 삽화와 그리고 즐겨 보았던 고바우영감도, 두꺼비도, 나대로 선생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오십 년대의 가정집 안방과 육십 년대의 거리와 사무실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TV가 처음 나왔을 때는 고장도 잘 났었다. 주먹으로 쾅 치면 나오지 않던 화면이 나오기도 했다. TV가 있는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애국가 소리가 들려야 일어서던 사람들을 그때의 집주인들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라디오, 축음기, 둥근 전기다리미, 세숫비누[흑사탕 비누] 등 잃어버렸던 내 물건을 보는 듯 반가웠다. 칠십 년대의 쓰레기통, 공중변소, 광고물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판자 울타리,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 가 있는 기분이다. 지저분했던 재래식변소도 판자 울타리도 정겹게 느껴짐은, 어려웠지만 정에 살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미술관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본다. 벽에는 대문짝만한 70년대 영화 포스터들이 빙 둘러 붙어있다. 젊은 시절의 조미령, 황정순, 최은희, 허장강, 박노식 등이 웃고 또는 울고 있다. 왜 그리 낯설어 보이는지. 멋의 기준이 세월 따라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차를 한 잔 마신 뒤 미술관을 나서니, 거리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빗방울은 아스팔트 위를 두드리고 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나 마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고 거리에 서있다. 발걸음을 광화문 근처에 있는 성곡미술관으로 옮긴다. 전시실에는 현대로 가는 미술이라는 작품이 전시중이다. 1층에 들어서니 부서진 차가 한 대 있고 주위에 빨간 풍선들이 수없이 나뒹굴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풍선을 발길로 차며 한 바퀴 돈다. 다른 전시실에는 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넓은 그릇에 빛이 반사되며, 그 빛 속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벽면에 그림처럼 비친다. 그리고 흐르는 물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작가들은 모두 20대라 한다. 잘은 모르지만 빛과 소리와 그림을 하나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의 그림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 전 일민 미술관에서 보고 온 작품과 너무나 큰 차이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의 세계에 오지 않았나 두리번거린다. 짧은 시간 미술 세계의 다양한 변화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세대 차이를 피부로 느낀다. 전시실 문을 나서니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펴들고 미술관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바람에 나뭇잎은 세차게 흔들리고, 초록 잎이 빗물에 젖어 검은빛을 띤다. 동산 곳곳에 자리한 조각품들은 무방비 상태로 비를 맞는다. 벌거벗은 남자도, 소인지 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조각도, 넝마를 두른 인간 조각도, 작품들에게 생명이 있다면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의 기분은 어떠할까. 아무도 없다면 나도 그 옆에 서서 비를 맞고 싶다. 산책로 가운데 있는 찻집에 들어간다. 내리는 비에, 찻집 밖의 의자는 자유롭고 찻집 안의 의자엔 끼리끼리 마주 앉아있다. 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자기들 세계에 빠져있다. 차를 한 잔 주문 한 뒤 유리창 밖을 본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제멋 대로다. 아주 먼 곳을 여행하고 온 듯 피로가 몰려와서,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줄기차게 내리는 창밖의 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엔 신발도 벗고 머리도 풀어 헤친 내가 빗속을 뛰어 다니는 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