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춘추> 들마루
어릴 적 살던 시골집 마당에는 들마루가 있었다. 그 때 우리집은 제재소를 하고 있어서 그 들마루는 솜씨 있는 목수들이 좋은 목재로 만든 멋진 것이었다. ‘들마루’라고 써놓고 보니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니어서 낯설다. 마루가 없는 아파트에 산 지 몇 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들마루’보다 ‘베란다’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국어사전에서는 들마루를 ‘방문 앞에 잇따라 들인 쪽마루’라고 하지만, 우리집에서는 마당에 있는, 온 가족이 모두 방에서처럼 둥글게 앉을 수 있도록 만든 사각형의 널찍한 마루를 ‘들마루’라고 불렀다. 우리는 방문 앞에 잇따라 놓인 마루는 그냥 ‘마루’ 혹은 ‘툇마루’라고 불렀고, 집채 안에 방 한 칸을 널빤지로 깔아놓은 공간은 ‘대청마루’라고 부르긴 거북하여 ‘마루방’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마루도 참 여러 가지가 있다.
겨울밤에는 온돌 안방에서 가족들이 한 이불 밑에 발을 넣고 삶은 고구마를 먹거나 땅에 묻어둔 겨울 무를 깎아 먹으며 놀았지만, 여름밤에는 마당 한 가운데에 놓인 들마루에 걸터앉고 올라 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겼다. 어머니와 6남매, 그리고 가끔씩은 멀리서 찾아온 이모나 외할머니가 그 마루에 함께 앉았다.
우리는 여름밤 들마루에 앉아 시간을 잊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날의 동네 소식과 학교에서 있었던 일, 이웃 사람들 흉내 내기들이 주된 소재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옛날 호랑이, 도깨비 이야기보다는 그 날 마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셨다. 막내인 나는 엄마와 누나와 형의 얘기를 이 들마루에서 들으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야기가 지루해지면 노래를 불렀다. 첫째 누나는 노래를 잘 불렀고, 셋째 누나는 피아노를 잘 쳤다. 들마루엔 피아노가 없어서 가끔 아코디언이나 하모니카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냥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그 때 학교에서 배우던 ‘스와니 강’, ‘메기의 추억’과 같은 미국 민요와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들이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들마루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똥별과 반딧불이가 새까만 하늘을 마구 날고 있었고, 별자리들은 학교에서 이름을 가르쳐주기 전부터 이미 거기에 있었다.
오랜만에 시골집을 찾았다. 가족들도, 들마루도 없어졌다. 집은 허물어졌고 제재소 마당엔 잡풀이 덮였다. 오늘 밤에 아내와 아들 둘을 아파트 거실에 불러다 앉히고 옛날 시골집 들마루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한 번 얘기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별도 보이지 않고, 노래도 할 수 없는 아파트에서 자칫, 숙제 검사 하고 방청소 안 한 것 꾸지람 하다가 아이들과 갈등이나 생기지 않을까 좀 걱
정된다.
이상현 대구시교육청 장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