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9세 데뷔해 2065곡 부른'엘레지의 여왕,나라 잃고 베고픈 설움 노래로 달래다.>
가수 이미자가 '노래인생60년,나의 노래 60곡을 발표했다(1월21일).
가수생활'환갑'을 맞이하면서 모은 60곡이다.60주년 기념앨범은 '감사.공감.순수'의 타이틀을 붙인 3개의 CD로 이미자의 대표곡과 신곡에 전통가요를 버무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1번 CD의 첫 곡'내 노래,내 사랑 그대에게'이다.
60주년을 기념해 새로 만든곡이다.그 뒤를 이어 50주년 기념곡'내 삶의 이유 있음을'45주년 기념곡'내 영혼 노래가 되어'등이 수록돼 있다.물론 국민적 사랑을 받은 대표곡도 포함돼 있다.
그는"성량이 예전만 못 해 조금 부끄럽지만 20대부터 70대까지 목소리를 통해 지나온 세월과 변해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미자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했던 것은 무었일까,그는 3대 히트곡인'동백 아가씨'를 비롯해'섬마을 선생님'과'기러기 아빠'가 금지곡으로 묶였을 떄를 꼽았다.
각각 '왜색이 짙다' '다른 노래와 몇 소절이 같다' '너무 처량해서 비탄조다'등의 이유였다.
"1964년 동백 아가씨가 KBS 음악방송에서 35주간 1위를 했는데,하루아침에 차트에서 없어졌다.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고,무대에서 부를 수도 없었다.목숨을 끊어놓은 기분이었다.그러나 팬들 덕에 큰 힘이됐다.
이미자는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을 1959년 데뷔,1973년 베트남 위문공연,2002년 평양 단독 공연 등 최초의 순간을 꼽았다.그러나 이미자 앞에는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아픔이 있다.이미자는 "가장 기뻐야 했을 떄 항상 붙어다니는 꼬리표 떄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당시 세간에는 이미자의 노래를 '천박하다''술집에서나 부르는 노래다'등과 같이 평가했기 떄문이다.서구풍 발라드를 부를까도 생각했었다.
그는"당시 참았고,견뎠다.60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 와서는 절제하면서 잘 지내왔구나 하는 마음에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이번 앨범은 감사.공감.순수를 테마로 3장의 CD에 각20곡씩 담은 앨범이다.그간 발표된 560장의 앨범과 2100여곡중에서 추려내는 것만도 대작업이었다.첫번쨰와 두 번쨰 CD가 기념곡과 히트곡 위주라면 세 번쨰는 온전히 가요계 선배들을 위한 장으로'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눈물'등을 담았다.
이미자는"우리 가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래를 들으며 나라 잃은 설움,배고픔의 설움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그 시절 고마운 곡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곡"이라고 설명했다.이미자는 후배들을 향해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그는"가요의 뿌리가 사라져 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사 전달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슬프면 슬픔을 전달해주고,기쁘면 기쁨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게 가요다"라고 말했다.이어"하지만 서구풍이 많이 몰려오다 보니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발음을 정확하게 들을 수도 없다.그 부분이 제일 안타깝다.우리 가요의 뿌리가 남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한국 가요의'살아있는 전설'이자'국보급 가수다.
그가 활동한 기간이 한국 가요계의 역사다.작은 체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애절하면서도 고운 음색은 연구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특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쉽게 부르는 것 같지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관객의 마음을 울고 웃게 했다.
이미자는 1941년 10월30일 용산구 한남동에서 이점성과 유상례 사이에서 2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두 살 되던 1943년 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가 어려운 생활을 하게됐다.1945년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다.어릴적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어 1957년에 방송하던 노래자랑 KBS의<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위를 차지했다.1958년 HLKZ TV 방송이 개최한 아마추어 노래 콩쿨인 예능<로타리>에 출연해 1등에 선정됐다.당시 유명한 나화랑 작곡가에게 스카웃되어"열아홉 순정"으로 가수의 첫발을 내디뎠다.
애절한 목소리로 어려운 시절을 함꼐 한 연주자 정진흡과 첫 번쨰 결혼을 했다.
임신 9개월쨰 스카라 극장 목욕탕 2층 건물에서 혼신을 다해 국내 가요사상 최초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35주 동안 1위를 기록,25만장이란 엄청남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음반업계가 불황이었지만 "동백 아가씨"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하지만 왜색조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령을 받고 설상가상으로 남편 정씨와 이혼했다.여기서 평생 콤비가 된 박춘석씨를 1965년에 만났다.
박춘석은 패티 김.최양숙.남진 등을 발굴한 최고의 작곡가였다.
흑산도 아가씨로 히트했다.1966년 KBS라디오 주제가'섬마을 선생님'도 발표한 지 일주일만에 빅히트를 기록했고, 3대 히트곡인 '기러기 아빠'도 박춘석이 작곡한 노래다.전성기를 누리던 1966년 2월5일 강릉공연에서 22년만에 생모를 만났다.하지만 짧은 만남후 어머니는 영주로,이미자는묵호로 공연을 떠난후 어머니와는 마지막이 되였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고 이미자의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분류됐다.
그가 그만 두려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기회가 있을 떄 마다 해금을 요청했고 결국 전두환정부인 1987년에서야 금지곡 족쇄에서 풀려났다.1967년 영화주제가'그리움은 가슴마다''아네모네''여자의 일생' 등 서정적인 분위기로 히트하며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며, 대한민국 대표가수의 맥을 이어갔다.이미자는 1960대 패티 김과 함께 가요계를 주름 잡았다.1967년 영화<엘레지의 여왕>이란 애칭을 얻었다.
1970년에는 TBC 동양방송 드라마 주제곡"아씨"가 큰 인기를 끌었다.
그해 KBS 방송위원이었던 김창수와 결혼했다.1979년에는 대한극장에서 데뷔 2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했다.1985년(주)민주음악협회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공연을 개최,공연에 앞서 한일공동기획으로 한국연가의 계보를 듣는다'라는 2장짜리 독집 음반을 출판했다.1989년에는 뉴저지 등에서 미국 공연을 개최했고 가수생활 30년을 기념하여 '노래는 나의 인생'을 발표했다.
대중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기념 30주년공연을 개최했다.
2003년에는 북한 초청으로 MBC평양특별공연을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세종문화회관 30주년 공연이 조선일보 주최로 약 35곡을 열창했고,끝난후 쭁 파티에서 조선일보 회장에게 이미자씨가 금지곡을 풀어준데 대한 감사인사를 하였다.내가 조선일보 회장님의 배려로 파티에 참석한 것도 영광이였다.내가 만날 수 없는 인사들과 만나는 계기도 만들어 주셨다.
이미자씨가 부른 노래 2065곡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적인 숫자다.
1995년에는 화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트로트의 여왕'이라지만 본인은 전통가요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14년에는 데뷔 55주년을 맞이하여 전국 투어 콘서트와 디너쇼를 열었다.2015년에는 가수 장사익과'이미자-장사익 특집 콘서트'를 개최했다.KBS 1TV에서 방영되어 20.1%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2019.3.8 (한마디: 2016년 이미자의 공연을 10년간 진행한 공연기획사가 대구지방국세청에"이미자가 공연 출연료를 축소 신고하도록 해 세금을 떠안는 피해를 봤다"고 제보해 불거졌다.무려 44억 원이다.이미자 역시 태평양을 통해 "정해진 출연료만을 받던 75세의 가수에게 탈세"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표현"이라며 "허위 사실을 갖고 오랜 세월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행동과 언론을 이용한 명예훼손에 매우 가슴 아프다"고 밝혔다.결과가 밝혀지겠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엘레지의 여왕의 최근 공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