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108)葛庵 李玄逸<中>
嶺南학파의 主理사상을 개발 선도한 대철학자 葛庵 李玄逸은 인조 5년(1627) 지금의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張氏부인은‘집안에 오색 서기가 서린 가운데 신선 같은 노인이 나타나 토끼 한 마리를 주면서“이것이 하늘의 토끼이니라.”하고 사라진’꿈을 꾸고 난 뒤 玄逸을 낳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태몽이 암시하듯 그는 6살에 사람의 두 눈썹을 보고 周易의 곤괘(坤卦)와 같다고 말하니 그의 아버지 石溪 李時明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9세 때 뜰에 핀 모란꽃을 보고 춘흥을 노래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花王詩이다.
「花王發春風/ 不語階壇上/ 紛紛百花期/ 何花爲丞相」(꽃 중의 임금 꽃이 봄바람에 피어서/ 아무말없이 계단위에 서 있네./ 분분하게 일백종류의 꽃이 피지만/ 어느 꽃이 정승 꽃에 해당하는가?)
어릴 때부터 재상의 기질을 보인 그를 본 중형 李徽逸이「너는 커서 무엇이 될 의향이냐?」고 물었다.
李玄逸은 서슴지 않고「나는 훌륭한 장군이 되어 오랑캐(여진족)를 무찌르고 요동 땅을 찾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청군이 물밀듯이 밀려와 우리의 백성을 도륙하고 국토를 유린하면서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사실을 슬퍼한 그는 납매시 한 수를 읊은 후부터 중국 병법의 대가 손무·오기 등의 병서등 육도삼략과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
15세 때는 마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八陣圖 모양으로 배치하고 그 스스로 대장이 되어 자유자재로 지휘하니 어른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18세 때 외할아버지 張興孝와 李徽逸의 영향으로 과거 등 출세위주의 공부에서 성현의 인품을 본받는 수양과 우주철리를 규명하는 성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서 그는 20대 초반에 아버지 명에 의하여 초시(初試)에 두 번 합격했으나 복시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장수가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어릴 때 품은 생각은 퇴색되지 않은 채 그의 내면세계가 완숙됨에 따라 훌륭한 자주국방 사상으로 영글어 갔다.
뒷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펼친 그의 국가보위관은 시들어가는 사회기풍을 진작하여 절의와 충의 정신을 숭상하는 애국적 전통을 고취하는 데 있었다.
먼저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보여준 이름 없는 충신열사들의 행적을 기려 포상케 하여 불의에 항거하고 순절하는 정신을 계승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현실비판으로 나타나 당시 군부의 타락을 통렬히 비판, 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가 숙종왕에게 올린 상소문 陣三事에서「나라가 태평한 때일수록 전쟁을 잊게 된다면 반드시 위태할 때가 있다. 그러니 평소에 좋은 장재를 구하여 양성해 두어야 하며, 지금 군부에는 무능한 장수들이 권세가에게 조종당하여 아부로 승진만 꾀하고 있는 병폐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했다.
한편 그가 40세 때 孝宗이 서거하자 그의 복제(服制)문제를 싸고 기호학파 중심의 서인과 영남학파 중심의 남인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 측은 인조의 계비인 趙大妃의 상복(喪服) 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남인은 孝宗이 비록 둘째이기는 하나 왕권을 계승했으므로 마땅히 3년상을 치러야 한다며 맞섰다.
어느 설이 옳든 그르든 간에 현대인의 눈에는 망국의 원인이었던 예론(禮論)이었지만 그때의 정치는 바로 예문(禮文)정가 일변도였다. 따라서 각종 예설(禮說)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논쟁은 학파·지역·문벌사이에서 사활을 건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발단된 예설논쟁은 경신대출척·기사환국 등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아무튼 이때 영남유림은 총궐기하여 서인의 영수 宋時烈이 제창한 1년설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릴 때 문안을 작성한 사람이 李玄逸이었다.
이것을 보면 그가 40대 초반부터 영남유림사회에 명망을 얻어 앞으로 영남학파의 종사가 될 수 있는 기초가 쌓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肅宗이 왕위에 오르자 李玄逸의 높은 덕망과 깊은 학문을 듣고 벼슬로 수차 불렀었으나 그때마다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朱子書등 性理學에 전심전력하였다.
48세에 그는 寧海에서 지금의 英陽군 石保면 做南동에 이거하여 南嶽亭을 지어 후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李玄逸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서생이 많았다.
그가 평생 동안 가르친 문도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금양문도록에 의하면 3백 69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어차피 벼슬길을 포기하여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았지만 당시 남인의 영수 眉叟 許穆이 그를 칭찬하여 학행으로 천거하니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헌직에 오른 그는「승보학제(陞補學製)와 도회잡과(都會雜科)를 혁파하고 程子가 세운 학교제도와 공거(貢擧)에 대한 이론을 모방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덕행이 근본이 되고 문예가 주장이 되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라고 청했다.
이 상소문이 그의 정치사상과 철학적 체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陞補學製란 것은 성균관장이 매년 12월에 4학(四學 = 서울의 중앙·
동·서·남쪽 4곳에 세운 학교)의 유생을 모아 12일 동안 시(詩)와 부(賦)만으로 시험을 보여 합격한 사람에게 생원진사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제도였다.
都會雜科는 각 문중의 유래를 기록한 보학이었다.
이 같은 제도가 있는 한 유생들은 본질적인 학문이나 마음을 선하게 하는 덕성 공부를 소홀히 하는 대신 시·부등에 편중하여 지엽말단적 공부만하는 기풍을 조장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도학 특히 朱子學과 맥을 같이하는 李退溪學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철학체계를 근간으로 하여 도덕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데 있었다.
* 참고문헌 = 劉明鍾 교수 논문·梁大淵 교수 논문·南嶽亭誌·洪範衍義 해제.
* 도움말 = 李應學氏(48). <呂源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