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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청백리(淸白吏) 김겸광(金謙光)
○ 1419년(세종 1)∼1490년(성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 자(字)는 위경(撝卿). 시호는 공안(恭安),
○ [문과]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3위 급제,
○ 본관은 광산(光山). 증조부는 고려조 대사헌(大司憲) 김약채(金若采), 조부는 고려문과 김문(金問), 부친은 증영의정 김철산(金鐵山)이다,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이고, 부인은 한견(韓堅)의 딸이다.
○ 본관소재지는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자 신라의 비운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 지금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함으로서 광산김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태조가 그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으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광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세종실록 편수관 명단 통사랑 행 예문 검열(通仕郞行藝文檢閱) 신(臣) 김겸광(金謙光),
○ 문종실록 편수관 명단 무공랑(務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겸광(金謙光),
단종 1(1453)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9품)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정6품),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정6품)을 지냈다,
○ 세조 1년(1455) 12월 원종공신 2등에 녹훈(錄勳) 되었다,
○ 세조 3년(1457) 병조 좌랑(兵曹佐郞-정5품)이 되어 재임중이던 6월 호조(戶曹)의 의막(依幕)에서 동료들과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셔 국문을 받았다, 이어서 병조 정랑(兵曹正郞-정5품)이 되고,
○ 세조 6년(1460) 5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정4품)에 올랐다, 7월 북정(北征)할 계획으로 신숙주(申叔舟)를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江原咸吉道都體察使)로 삼아 출정하였는데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건주위(建州衛)의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병기,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을 만들고 관리하던 일을 맡아보는 군기감 정(軍器監正-정3품)에 올랐다,
○ 세조 7년(1461) 3월 전라도(全羅道)에서 새로 제조한 조선(漕船)이 견고하지 못하다 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 되어 살피고 돌아 왔다, 이어서 좌의정(左議政) 신숙주(申叔舟) 등과 《북정록(北征錄)》을 교정(校正)하도록 명을 받았고, 5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7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10월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를 개유(開諭)하여 적로(賊虜)가 빼앗아 간 인축(人畜)을 쇄환(刷還)하게 하고, 또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해서 쇄환하도록 청하고자 하였는데, 북방에 왕래하였으니 야인의 정상(情狀)을 잘 알 것이라 하여 파견 되어 활약하였고,
○ 세조 8년(1462) 1월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4월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 세조 9년(1463) 6월 임금이, 평안도(平安道)를 출입하여 오래 정상(情狀)을 아는 까닭으로 제수한다.~ 하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종2품)로 제수,
○ 세조 10년(1464) 7월 어머니에 병으로 상경하였다가 오고,
○ 세조 11년(1465) 4월 호조 참판(戶曹參判-종2품)이 되었다,
○ 세조 12년(1466) 경기절도사(京畿節度使)를 거쳐 4월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고, 5월 가정 대부(嘉靖大夫-종2품)로 승진 하였다,
○ 세조 13년(1467) 6월 여러 번 척후(斥候)를 보내지 말라는 유시를 받고도 봉행(奉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 당하고, 국문을 받았다, 한달여가 지난 7월 겸 의금부 지사(兼義禁府知事)로 복직하고, 9월 예조 판서(禮曹判書-정2품)에 올랐다,
○ 세조 14년(1468) 2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 예종 1년(1469) 2월 경상도에 기근(饑饉)이 들어 곡식을 풀어 진휼(賑恤)하기를 청하고, 추등(秋等), 동등(冬等)과 금년 춘등(春等)의 염초(焰硝)는 정지하고 보리가 익은 뒤를 기다려 달라 청하는 등 진휼(賑恤)에 힘을 쏟았다, 4월 행 중추부 첨지사(行中樞府僉知事)를 거쳐 8월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 성종 2년(1471) 3월 좌리 3등 공신(佐理三等功臣)에 책록 되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12월 자헌 대부(資憲大夫-정2품)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고,
○ 성종 6년(1475) 10월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북경[京師]에 갔다가
○ 성종 7년(1476) 3월 돌아 왔다,
○ 성종 13년(1482) 2월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황해도 진휼사(黃海道賑恤使)로 파견되고, 이어서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를 겸하였다,
○ 성종 14년(1483) 5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 성종 15년(1484) 10월 정헌 대부(正憲大夫-정2품)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로 승진,
○ 성종 16년(1485)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례를 주관하였으며, 세자궁(世子宮)의 조성 제조(造成提調)가 되어, 창경궁과 세자궁 중수의 책임을 맡아 처리하였다,
○ 성종 16년(1485) 6월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7월 홍문관에 탄핵을 받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 성종 17년(1486) 3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한차례 연임 되고, 4월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정2품)이 되었다,
○ 성종 21년(1490) 7월 20일 졸하였다,
○ 성종 242권, 21년(1490 경술 / 명 홍치(弘治) 3년) 7월 20일(경오) 2번째기사,
광성군(光城君) 김겸광(金謙光)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 예장(禮葬)을 전례(前例)와 같이하였다.
김겸광의 자(字)는 휘경(撝卿)이요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경태(景泰- 명나라 경종(景宗)의 연호) 계유년(1453 단종 원년) 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뽑혀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쳤고, 천순(天順-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경진년(1460 세조 6년) 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야인 정벌(野人征伐)에 종군하여 공이 있어서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뛰어 올랐고,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옮겼다가 곧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우승지(右承旨)에 이르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올랐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 세조 11년) 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다가 병술년(1446 세조 12년) 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옮겼는데, 이때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의 자리가 비자 세조(世祖)가 특별히 불러서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려서 제수하였고, 곧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정해년(1467 세조 13년) 에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옮기었고, 무자년(1468 세조 14년) 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기축년(1469 예종 원년) 에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금상(今上- 성종) 이 즉위하자 순성 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광성군(光城君)으로 봉(封)하여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에 옮겼다.
계묘년(1483 성종 14년) 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이듬해〉 갑진년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를 가하여 좌참찬(左參贊)에 제수되고 정미년(1487 성종 18년) 에 다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는데,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72세였다.
김겸광은 천성(天性)이 순후(純厚)하고 일을 처리함이 주밀(周密)하였다. 시호(諡號)는 공안(恭安)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좋아하고 화(和)하여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 안(安)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겸광은 재물을 탐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집 재산이 대단히 많았다. 하루는 집에 불이 나서 재물이 모두 탔는데, 김자행(金自行)이 가서 위로하기를, ‘영공(令公)은 한스러워하지 마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 티끌일세[百年貪物一朝塵]」라고 한 것이 있오.’라고 하여 자못 기풍(譏諷- 슬쩍 돌려서 비방함) 하는 뜻이 있었는데, 김자행도 역시 청렴하지 못한 이름이 있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임기가 차서 돌아오려고 할 적에 관중(官中)의 재물을 모두 취하여 짐을 다 꾸려가지고 장차 실으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미워하여 불을 질러 모두 불태우니, 어떤 사람이 기롱하기를, ‘6년 동안 탐한 물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다.[六年貪物一朝灰]’라고 하였으니, 이때 사람들이 명담(名談)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원문
○光城君金謙光卒。 輟朝、弔祭、禮葬如例。 謙光字撝卿, 光山人也。 景泰癸酉, 中文科, 選補藝文館檢閱, 歷司憲府監察, 司諫院正言、兵曹佐郞ㆍ正郞。 天順庚辰, 司憲掌令, 從征野人有功, 超拜軍器寺正, 遷知兵曹事, 尋拜承政院同副承旨, 轉至右承旨, 陞嘉善平安道觀察使。 成化乙酉, 拜戶曹參判, 丙戌, 遷開城府留守。 時平安道節度使缺, 世祖, 特召陞嘉靖授之, 尋陞資憲。 丁亥, 以事罷, 俄拜知中樞府事, 轉禮曹判書, 戊子, 出爲慶尙道觀察使, 己丑, 還拜禮曹判書。 上卽位,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封光城君, 遷判漢城府尹。 癸卯, 拜議政府右贊參, 甲辰, 加正憲授左參贊, 丁未, 復封光城君。 至是卒, 年七十二。 謙光天性純厚, 處事周密。 諡恭安: 敬事供上恭, 好和不爭安。
【史臣曰: “謙光貪財無恥, 家累鉅萬。 一日家失火, 財物盡燒, 金自行往慰之曰: ‘令公勿恨也。 昔人有云: 「百年貪物一朝塵。」’ 頗有譏諷意, 自行亦有不廉之名。 爲羅州牧使, 秩滿將還, 盡取官中財物, 治任將載, 州人惡而火之盡燒, 有人譏之曰: ‘六年貪物一朝灰。’ 時人以爲名言。”】
세조의 신임을 받아 건주위야인 토벌을 비롯하여 평안도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내면서 세조의 국방정책에 기여한바 컸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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