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단종비 정순왕후
Ⅱ. 비운의 단종 Ⅲ. 충신
글 작성 및 정리 : 엄유호
시류에 편승하고 개인의 출세와 부귀 영달만을 쫓는 물질만능 사회와
불의, 위선, 갑질이 판치는 세태속에서
"정몽주, 성삼문, 엄흥도" 같은 충신들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와 교훈을 배웁니다.
2020,7 방문
단종이 그의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정순왕후 송씨부인과 영원히 이별한 영도교(永渡橋)
(여전히 다리위에는 잡상인들 판 )
정업원 구기 (청룡사)
영조친필 현판 前峰後巖 於千萬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여라.
동망봉 언덕 아래 - 동묘방향 주변에는
정순왕후를 신(무속신앙)으로 모시는 곳과 유명한 점집 등이 많다
숭의공원 내 그림판
(탐욕의 수양대군(세조)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단종 (聖君 세종의 친손)
동망각 (숭의공원)
(2020, 7, / 2016, 1, 동망봉 현지 방문)
청백리 류관(柳寬) 집터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단종왕)
Ⅰ. 단종비 정순왕후 청룡사 (2016, 1, 26 방문 외)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왕후 !
단종비(妃) 정순왕후는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서 60여 년을 홀로 지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망부(亡夫)의 한을 안고 서러운 삶을 살았던
절개와 충절의 상징이다.
단종(端宗, 1452~1454)
조선 6대 임금, 聖君 세종대왕의 직손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탐욕의 세조에 의해 17세에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궁궐에서 추방당한 정순왕후 송씨부인 (단종보다 1살 위)은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8세에 과부가 된 송씨는 머리를 깎고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 동안 아침저녁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하여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정에서 마련한 거처도 거절하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지 않고 살았다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서울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한 지봉인 동망봉에 위치한 청룡사(靑龍寺)의 전신이다.
(참고 : 동쪽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
우백호(右白虎) 에서 유래)
영조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부터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산이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절벽만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정업원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는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송씨
(定順王后 宋氏, 1440∼1521)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碑)로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웠다.
관련사진 : 현지촬영 (다복)
단종과 정순왕후
(다녀온 길 / 전철 1호선 동묘 환승 6호선 1정거장 지나 창신역 하차,
오른쪽 언덕 200 m 청룡사)
코스 : 청룡사(정업원) - 비우당 (자주동샘) 청룡사 윗길 우측 300m 쌍용2차 APT 정문 옆
명신초교 원각사 아래) - 200m 낙산공원 <마을버스 3번>
동쪽방향 >> 청룡사 좌측 200m 동산 - 동망정 - 동묘 - 여인시장터 - 영도교(청계천 7가)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에 젖은 정순왕후(송씨부인)
(숭의공원내 그림판)
단종이 죽은 후 그녀는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집근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는데
그녀의 울음소리가 산 아래 마을까지 들렸고
마을 여인네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동묘앞역에서 본 동망정 ○표
동망정
단종을 그리워하며 동망봉에서 동쪽 영월을 바라보던 절개와 충절의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매년4월 추모제)
지금은 숭의공원 / 체육공원(동망봉 정상)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염색을 하던 곳(낙산공원 방향 200m 청룡사 좌측 윗길)
자주동샘 빨래터 (비우당 뒷편)
18세의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하면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단종 비(妃)의 애환이 서린 곳.
서울 낙산 동쪽 비탈에 위치한 비우당(庇雨堂)이는 조그만 초가집, 근근이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이 집에서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지었다.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집을 들러본 후 청빈함의 사표(師表)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청백리 3인방 - 류관(유관), 맹사성, 황희정승
비우당 (쌍용2차 옆)
가끔씩 재벌가의 재산다툼, 총리, 장관 후보들이 富도 모자라 名譽慾으로
청문회에서
과거 부정하게 치부(致富)했던 치부(恥部)가 들어나 패가 망신 !
비우당의 검소한 삶과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당시 여인 시장터 / 현재 동묘 벼룩시장
2016, 1,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부인이 영원히 이별했다는
영도교(永渡橋)
만남의 의미 오작교의 반대 격 / 청계천 7가, 동묘 아랫길,
다리위에는 잡상인들만 ...
단종과 송씨부인(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이별의 장소 "영도교" 다리 아래엔
마침 무심하게 청둥오리 한쌍이 다정하게 유영하고 ...
단종과 송씨부인의 넋이 환생한 것은 아닐런지...
18세 꽃다운 정순왕후의 64년간의 어린 단종(17세)을 그리며
한맺힌 인고의 세월을 보낸후 82세에 눈을 감음 !
(영도교 아래찍음)
남양주의 정순왕후 사릉 (思陵) / 금곡역 하차, 23, 55, 77 버스
평생 단종만 생각하여 사릉 !
* 너무나 안타깝게 생 이별한 "단종과 정순왕후" 죽어서도 합치지 못하고 !
강원도(영월)와 경기도(남양주)에 각각 멀리 떨어져 있는 안타까운 현실 !
(지자체간의 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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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자 천지이벌 (惡行者 天之以罰)
악행 삼총사 의 말로 - 역사적 교훈
1. 세조 (世祖) / 두아들 요절 / 문둥병 병사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두 아들이 요절하고,
말년에 악몽에 시달리고 악성 피부병(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사망 (천벌)
2. 한명회(韓明澮) / 두딸 요절 / 부관참시
수양대군의 모사(謀士)꾼으로
그 중 셋째 딸은 세조의 아들 예종에게 시집갔는데,
17세에 요절(夭折), 넷째 딸은 세조의 손자 성종비로
19세에 요절 하였다.
한명회 사후 연산군 때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에
부관참시 (剖棺斬屍)
무덤에서 꺼내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거는 형)를 당했다. (천벌)
3. 한확(韓確) / 객사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내놓게 한자로, 그 누이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동생은 명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
그가 외교통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 우겨서
명나라의 세조 왕위 승인을 받아오는 중도에서 "노상객사" (천벌)
(조선왕조실록 편 참조) !
** 권력 앞에선 예나 제나 부모 형제도 친구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실,
Ⅱ. 비운의 왕 단종 / 충신들 (성삼문, 정몽주, 엄흥도)
"조선과 고려의 대표적 충신 "
★ 조선 성삼문(成三問)
하늘에서 세번 불러서 낳았다는 성삼문 (이룰-성, 석-삼, 부를-문)
아호 - 매죽헌(梅竹軒), 충절의 표상 "사육신" 의 중심 인물 !
매화나무의 지조와 대나무처럼 올곧은 절개를 지켜, 聖君 세종대왕의 고명을 받들어
탐욕의 세조 일당의 회유를 뿌리치고 세종의 직손 단종을 끝까지 따르다
순절한
조선 충절(忠節)의 대명사 !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남아 정신적 귀감이 된 인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임금이 있을수 없다"
" 忠臣 不事二君 ! ”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조 성삼문 !
★ 고려 정몽주 아호 - 포은(圃隱) 정몽주의 단심가 (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성삼문의 단심가 (丹心歌)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성삼문의 忠節의 詩> "북소리 치며 이목숨 재촉할때 고개드니 해는 서산에 지누나 황천길에 한주막도 없다하니
오늘밤은 어디서 쉬리," (끝까지 어린 단종에게 충절을 지키다 새남터에 끌려가며
죽기직전 지은 최후의 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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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엄씨가헌
조선 6대 임금인 단종(端宗1452~1454)이 영월로 유배된후
복위운동이 일어나자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세조에 의해 17세에 사약을 받고
영월 동강에 버려진다,
★ 엄흥도(嚴興道):
당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자는 3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월 호장으로
忠과 義를 생명처럼 여기는
엄흥도에 의해 영월 동을지산(현재 장릉)에 장례를 치렀다,
그후 그의 아들셋과 함께 영월을 떠나 문경으로 막내는 울산으로 흩어져 이런 이유로
영월엄씨들이 강원도 영월과 지금의 경북 문경지역에 많이 살게된다.
훗날 엄흥도는 200여년이 지난 1668년에 송시열의 상소로 복관되어 그의 자손들이
비로서 등용될수 있게 되었고 영조때
萬古忠臣으로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지고 공조참판에, 고종때 공조판서에 추증이 되었다.
엄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
본래 중국인으로 고려말 사신 대표로 왔다가
본국에 정변이 일어나 귀국치 않고 왕의 권유로 영월에 정착, 본관을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조 최대 슬픈 역사인 단종 ! 성군 세종의 직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
엄씨가헌 : “좋은일을 하여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
(爲善被禍 吾所甘心)
유훈을 엄씨 가헌으로 남겨 후손들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엄씨 상징 : 동양 最古의 은행나무,
수령이 1,200년(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영월엄씨 상징, 높이 36m, 둘레 18m,)
엄문3절; 영조조에 충신 ★ 엄흥도 효자 ★ 엄민도,
남편이 죽자 함께 죽어 절개를 지킨 열녀에 목치중의 처 ★ 엄씨 부인 !
시문의 대가; 중종때 시문에 능한 “엄흔”의 가곡원류”,
“선으로 패한일 보며 악으로 이긴일 보았는가 이 두즈음에 취사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한일 아니하면 자연 유성하리라.”
그의 현손 “엄집”은 문과급제 판서,, 좌참찬, 정2품의 청렴의 대명사였다.
육영사업: 조선조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은의 생모, 고종의 순헌황귀비 엄비는
개화기 교육자로, 사학명문 - 양정, 진명, 숙명학원 설립.
엄비(嚴妃): (1854 ~ 1911)
순헌황귀비 엄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의 생모이고
상궁에서 귀인으로 1903년에 황귀비가 된다
2019, 10 영월방문
독립운동: 안중근의사와 함께 경흥에서 왜군을 격파한 엄인섭,
친일거두 이영로를 사살, 순국한 열사 엄순봉, 등, 독립운동 가문,
엄씨특성; 인구조사에 의거, 전체 0.3% 로 총 249성씨중 제49위로 비록 적은 성씨지만 정직,
청렴, 온순한 반면 불의는 참지 못하는 강직성이 특성이다.
엄씨 후손의 좌우명,
<배는고파도 정신이 고파선 안된다.>
아무도 나서지않는...동강에 버려진 어린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에 뭍고
한밤중에 어린아들 셋과 부인을 이끌고 병약하신 노모를 지게에 지고 눈물을 머금고
영월호장이라는 작은 직분도 버리고 영월 고향 삶의 터전을 떠나
(삼족을 멸한다는 멸문지화의 어명을 피하여...)
천리길 제천- 문경 으로 떠난 엄흥도 어르신의 참담한 당시의 마음을 생각하며,,
200여년간 후손들이 숨어지내다 영조조때 충신으로 복관 되어 등용 !
(출처: 한국성씨 총람 / 정리 문과공파26대 손 다복 엄유호)
기타 :
한양도성 사적 제 10호
낙산(駱山)은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125m)이라
불리기도 했다. 낙산은 태조 3년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네 산 가운데 하나로, 동쪽 경계인 낙산의
능선을 따라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 성벽을 쌓아 한성을 감싸고 있다.
창신역 - 청룡사 - (비우당, 자주동샘) / 쌍용2차 APT 앞) - 낙산공원 <3번 마을버스>
비우당에서 200m 언덕 정상의 낙산공원에서 본 남산
낙산공원에서 본 북한산
서울 랜드마크 "남산"에 이어 야경 명소 "낙산" (남산, 북악산 인왕산을 볼수있다)
서울의 4 진산(鎭山)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쪽의 북악산 (北岳山)을 주산(主山),
남쪽 남산 (南山)을 안산(案山), 동쪽 낙산 (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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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死六臣)의 대표
“성삼문”이 출생한 홍성 노은리(洪城 魯恩里)집터 "성삼문 유허지" 와
"엄찬"고택(嚴璨古宅):
1670년경 조선 후기의 양반주택으로 성삼문의 둘째 딸의 아들 엄찬(嚴纘,
서울 출신, 성삼문의 외손이며 충주목사(忠州牧使 역임, 1642-1713)
(역사현장 관련장소 현지 3회이상 방문, 실록, 야사 문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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