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본의 원로 정치인들을 만나고, 일본어 통역으로 일본 사람들과 즉문즉설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전은 휴식을 취하며 숙소에서 업무를 보다가 11시 30분이 되어 도쿄 시내로 나갔습니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도쿄 시내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일본 원로 정치인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한·일친선협회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있는 분들인데, 한국과 일본 간의 교류와 협력,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고,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가 높아지고 있는 이때 스님은 현재 북한과 유일하게 대화의 통로가 열려 있는 일본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 정부가 어떤 입장을 갖는 것이 좋을지,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시대에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협력하면 좋을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스님은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나갈 때 한국과 일본 간의 친선 유지가 더 오래 지속되고 강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스님은 일본어 통역 즉문즉설 강연을 하기 위해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도쿄의 기타구(北区)에 위치한 문화 센터인 호쿠토피아(北とぴあ)입니다. 17층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도쿄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전망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오늘은 비가 내려서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도쿄 타워가 보였습니다.
오후 4시에 강연장에 도착하여 니와노 평화재단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관계자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전에 니와노 평화상 내년도 수상자에 대한 결정이 끝났다며 수상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인 중에서 니와노 평화상을 받은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스리랑카의 닥터 아리아라트네 박사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산다 스님, 타이완 자재공덕회 설립자 증엄 스님, 태국의 술락 시바락사 박사님이 있습니다. 그 후에 2020년에 법륜스님께서 수상을 하셨습니다.”
니와노 평화재단에서는 4년 전 37회 수상식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스님을 수상식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한 점이 아쉽다며 다시 스님을 초청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온라인으로 니와노 평화상 수상식을 진행하여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법륜 스님을 포함하여 온라인 수상자들을 다시 초청하여 심포지엄을 겸해서 수상식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스님께 일정이 괜찮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일 년 전에 미리 일정을 알려주시면 제가 시간을 비워 놓겠습니다.”
니와노 평화재단 관계자들은 스님이 진행하는 인도 성지순례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인도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 다 함께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강연장을 찾아온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강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이 미국 워싱턴 D.C. 를 방문하여 미국 의회, 정부, 싱크탱크 관계자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큰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스님과 통역자가 무대 위에 나란히 섰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과 함께 즉문즉설의 취지와 원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일본어로 통역해서 여러분과 대화하겠습니다. 제가 불교 승려이긴 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마련된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주제에 제한 없이 대화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제가 승려니까 불교에 대해서 조금 안내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웃음)
불교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둘째, 철학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중요합니다. 셋째,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이것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대화하려는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닙니다. 오늘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중심으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어떤 신적인 존재처럼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소원을 빌면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인 부처님은 어떤 종교적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안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인간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안내했습니다.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합니다. 제가 하는 즉문즉설도 부처님이 했던 대기설법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다가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의문이 풀어지고, 괴로움이 사라져 버리는 대화를 ‘담마 토크( Dharma Talk)’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슬피 울겠구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일을 소개해 드릴게요. 할머니 한 분이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굉장히 부잣집 할머니인데 열렬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 우산도 안 쓰고 눈물을 흘리며 찾아왔어요. 그래서 ‘부인, 어쩐 일이요?’ 하고 부처님이 물었습니다. ‘부처님, 오늘 아침에 제가 너무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손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이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내가 너무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좋소? 두 명이면 더 좋소?’
그러자 할머니가 ‘두 명이면 더 좋죠’ 하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부처님이 ‘두 명이면 좋소? 세 명이면 더 좋소?’ 하고 물었고 ‘세 명이면 더 좋죠’ 하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 쉬라바스티(사위성)에 사는 사람만큼 그 수가 많다면 어떻겠소?’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이 쉬라바스티에는 하루에 몇 명이나 죽겠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한 명, 아니 두 명, 아니 열 명은 죽을 겁니다. 아무리 안 죽어도 하루에 한 명 이상은 죽습니다’ 하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슬피 울겠구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어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아직 못 깨달은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는 부처님의 말을 듣고 탁 깨달았어요. 아직 눈물은 흐르는데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손녀가 죽었지만 슬픔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어두운 방 안에 불을 켜면 즉시 밝아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손녀가 죽었는데 슬픔이 가셨다면 남편이 죽어도 슬픔이 가실 수 있고, 사업이 부도가 나도 슬픔이 가실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깨달음을 얻으면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아직 못 알아들은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설명해 볼게요. 할머니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너무너무 아끼는 손녀가 죽어서 슬프다고 말했죠. 그러자 부처님이 그 말을 받아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매일 한 명씩 죽겠죠.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매일 울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매일 우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요. (웃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슬프다는 것이 맞는 말 같지만 그 말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지적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모순을 스스로 깨닫자 슬픔이 사라진 겁니다.
즉문즉설, 대화를 통해 괴로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
원래 불교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서 자세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대화하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의문이나 괴로움이 저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즉문즉설입니다. ‘괴로워요’ 하면서 질문을 했는데 ‘별일 아니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런 깨달음을 ‘니르바나(열반)’라고 말합니다. 니르바나는 ‘괴로움이 없는’ 이런 뜻입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극락에 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니르바나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즉, 괴로움 없이 사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괴롭습니까? 괴롭다면 그것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눠보자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차례대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첫 번째 질문자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화가 계속 난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직장 동료에게 계속 화가 납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죠?
“私はあまり人に腹を立てるってことはないんですけれどもちょっとコロナの後から職場が変わって、違うどころに行って、人生で二人目にすごく腹が立つ方に会って毎日仕事をしてるのがちょっと苦痛になってきてるんですけれども、腹が立ってずにごの人とうまく行くのには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か.”
(저는 별로 사람에게 화를 내는 편은 아니지만, 코로나 이후 이직을 해서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화를 자주 내게 됩니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굉장히 화나게 하는 분을 만나서 매일 같이 일하는 것이 조금 고통스러워지고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고 이 사람과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자가 화를 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질문자를 화나게 한다는 거예요?”
“はい、私がです.”
(네, 제가 화를 냅니다.)
“질문자는 왜 화가 납니까?”
“人のはなしを遮ったりとか、六人でいるチームなんですけれども一番目上のチームのリーダーに対しても被せて話をするとか"自分が自分が"っていうどころがすごく見えてしまうのでまず私たちの話を聞いて、チームリーダーの話を聞いてっと思うんですけれども自分が正しいっていうところをすごく押し付けてくるところにちょっと腹が立つというか不愉快な思いになります.”
(남의 이야기를 가로막는다든가, 여섯 명이 일하는 팀인데 가장 높은 직급의 팀 리더한테도 끼어들어 이야기를 한다든가, ‘제가요’ 하며 본인의 얘기를 하려는 모습이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거나, 팀장님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신이 옳다는 것을 강요해서 불쾌합니다.)
“네. 우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집니까?”
“いいえ。一年見てますけど辞めないって思うんですけど(笑う) それが一年四月からまたチーム編成でちょっとまた変えてきてるんですけれども、それが更に強く出てきてるところがあって、前は一週間に一度ぐらい立ったのが最近はもう二日にいっぺんくらい腹立たしいことが起こってくるんですね.”
(아니요. 1년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거슬리는 행동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웃음) 그것이 1년째 이어지고 있고, 지난 4월부터 팀 편성이 바뀌면서 조금 달라지고 있지만, 그런 행동이 더 강하게 나오고 있어서,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화가 났던 것이 최근에는 벌써 이틀에 한 번 정도 화나는 일이 생깁니다.)
“화가 나면 그 사람에게 나쁩니까? 나한테 나쁩니까?”
“自分にとって悪いっていうのはすごく感じます。相手は全く感じ取っていなくて自分だけがかっかかっかしてるので人に腹を立ててる自分も腹が立つと思うところもあると思うんですけれども...”
(나에게 나쁘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습니다. 상대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신만 화가 나기 때문에 남에게 화를 내는 자신도 화가 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사람이 남의 말을 끊고 얘기하는데, 질문자가 왜 화가 나요?”
“自分を正当化するところですかね。。。私が正しいみたいな.”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일까요? 내가 맞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시 물어볼게요. 사람마다 말할 때 조금씩 다른 버릇을 갖고 있죠. 그 사람은 제 버릇대로 말하는 것인데 왜 질문자가 화가 나느냐는 거예요. 화를 내서 나한테 돈이 생긴다면 괜찮아요. 화를 내서 건강에 좋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화를 내면 나한테 나쁘다고 방금 질문자가 얘기했잖아요. 그 사람은 습관대로 말을 할 뿐인데, 거기에 대해 내가 화를 내서 나를 나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한 거예요? 내가 그를 보고 화가 나는 거예요?”
“わたし自身には害は与えてることのほうが少ないと思うんですけれど目上を立てないとか人の話を。。聞かないっていうところに。。周りに対しての態度に腹を立ててるんですよね。自分にはあまり害はないんですけど。周りに対してきついのが腹が立てるっていうところですね。自分にはあまり害はないんですね、職場の中では.”
(그 사람이 저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못한다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거나, 이렇게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화가 나는 겁니다. 저한테는 별로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주위를 힘들게 하는 것이 화가 납니다.)
“제가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고 ‘오늘은 달마저도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이렇게 시를 읊었어요. 좋은 시죠. 그런데 조금만 한번 살펴봅시다. 달이 나를 슬프게 했습니까? 내가 달을 보고 슬퍼했습니까?”
“私が月を見て悲しくなった.”
(제가 달을 보고 슬퍼졌어요.)
“그 사람이 말을 길게 하는 걸 보고 내가 화를 냈습니까? 그 사람이 말을 길게 해서 나를 화나게 했습니까?”
“私がイライラしています.”
(제가 짜증을 내고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이익이 있었습니까?”
“ありません.”
(이익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왜 그렇게 합니까?”
“分からないんですけど、なんでしょうね、仕事をしているうちにやっぱり遮ってしまうのとか。自分に害がないのになんでか腹が立つんです.”
(일하다가 끼어들어 버린다든가, 저한테는 피해가 없는데, 왠지 모르게 화가 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해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지금 자기를 해쳤으니까 어떤 사람이에요?”
“自分に自分が害を与える、バカな人だと思います.”
(자신에게 자신이 해를 끼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럼 '나는 바보다' 이렇게 세 번 외쳐보세요.”
“私はバカだ. 私はバカだ. 私はバカだ.”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나는 바보다.)
질문자가 말을 끝내고 크게 웃자, 청중들이 응원의 마음을 담아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도 모르게 바보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한테 아무런 이익이 안 되고 손해가 되는 짓을 나도 모르게 할 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른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을 뜻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금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사띠’라고 합니다. '내가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하고 자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즉, 화가 일어날 때 '화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를 안 내겠다' 하고 각오를 하거나 결심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화를 안 내겠다고 결심하면, 화를 내버리고 나서 자책감이 듭니다. '나는 안 돼' 이런 자책이 들어요. 이것은 화를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지 말고 그냥 '화가 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화를 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지금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만 하면 점점 화가 사라집니다. 이번에 놓치면 다음에 또 해보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는 것을 부지런히 연습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화가 날 때마다 '어, 화가 나네' 이렇게 알아차리세요. 화를 내면 내가 나를 해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고 생각하니까 화를 정당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한 게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나의 상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뭘 해야 된다’, ‘뭘 하지 말아야 된다’ 이렇게 각오하고 결심하는데,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편안한 가운데 다만 알아차리는 겁니다. '화가 난다'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그러니 화가 나는 줄 알아차리기만 해도 뇌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어리석은 행동으로 가버립니다. '화를 안 내야지!' 하고 각오하지 말고 '화가 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세요. 계속 한번 해보세요.”
“分かり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