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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 광주사태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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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도 |
국민 대다수는 1978년 이희성 중장이 1군단 군단장이셨고,
전두환 소장 그 예하부대 1사단 사단장이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이희성 중장이 저희에게는 직속상관이셨고, 전두환 소장은 매일 아침
6시면 사병들 선두에 서서 파주에서 금촌까지 구보하시는 모습을 제가 보았기에 광주사태에 관련하여 제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광주사태가 1980년 5월 18일에 터졌지만 그것은 훗날 그렇게 기록한 것이고, 그 당시에는 서울의 운동권조차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김대중 세력이 미리 작성해 둔 대자보가 있었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그 대자보가 예정대로 그 다음날인 5월 19일에 대학가 대자보에 붙어 있었습니다. 전두환 장군에 대하여 제가 아는 객관적 사실이 있었기에 저는 그 대자보에 써있는 거짓말들에 대하여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금껏 그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객관적 사실들을 수집해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처음 인지한 날자는 5월 21일 이후입니다. 그때 이미 보안사령관 임기는 사실상 끝나 있었고, 6월 중순에야 딱 한번 보고를 듣고 임기가 끝났습니다. 5월 21일 이후 최규하 대통령께서 광주사태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셨을 때 비로서 처음 들으셨을 것입니다. |
2009/02/03 | ![]() |
![]() 갈천 |
7회 공판 (1996년 5월 6일. 전두환에 대한
법정신문) 문 : 피고인은 5. 18. 오후 1시경 육군회관에서 이희성, 주영복,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피고인과 유병현 합참의장, 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사실이 있지요. 그 관계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 당시에 그러한 시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결과 광주에서의 시위를 방치하면, 그대로 좌시를 하면, 계엄확대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판단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투입해서 조속히 시위를 진압함으로써 다른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데 사실입니까 ? 답 : 18일이 본인이 일요일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후 1시경에 계엄사령관이 주최하는 군의 중요한 간부들의 오찬초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군만 가는 게 아니고 육, 해, 공군 다 계엄사령관의 초청을 받아서 갔는데 그 때까지 광주시에서 학생소요는 아주 소수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까 아마 다른 분들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논의가 됐다든지 하는 것은 그것은 조금 잘못 파악한 것으로 압니다. 광주의 시위는 그날 학생소요가 아주 소규모 학생시위였었기 때문에 본인이 책임자인데도 보고가 안 됐습니다. 보고에 차질이 생겨서 보고가 안 됐는데 본인도 소수학생이 시위를 했다는 것을 '오찬장에 가서 누구한테 들었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들은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소리로 다른 데는 다 평온한데 광주 학생들 소수의 시위가 있었다고 하더라. 이 정도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여 앉아서 점심 먹고 회의를 하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점심 먹고 바로 헤어졌습니다. |
2009/02/03 | |
![]() 역사학도 |
갈천님의 위의 7회 공판 자료는 광주사태 배후에 이종찬이 있었다는 심증을 더욱 굳게 하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5월 17일 밤에 발빠르게 목포 출신의 중정 수사관을 김대중 연행 현장에 먼저 보내 김대중의 범행 증거물들을 없애게 하면서 18일 조간에 김대중 연행이 대서특필되도록 각 언론사에 알린 인물도 이종찬이었습니다. 그런데, 괴전화가 광주 녹두서점의 김상집에 걸려와 군의 대책 동향을 알려준 때가 바로 18일 오후 한 시경이 조금 지난 때였으니까요. | 2009/02/04 | ![]() |
![]() 역사학도 |
김석기 총장이 용산사태가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불가능합니다. 1월 20일 화재로 6명이 죽는 용산참사가 일어나니깐 용산사태라는 말도 생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철거민과
전철연의 시위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훗날 김대중 세력이 용산사태는 1월 8일 농성자들 시위가 시작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용산사태를
1.8 용산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면 그 논리에서는 용산참사를 김석기 총장이 1월 8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광주사태도 5월 21일 반정부 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점령하니깐 광주사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의 김대중 세력이 그것을 광주사태라 칭하고 5월 22일 전국 대학가 벽보에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붙이니깐 비로서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그런 개념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5월 21일 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어도 그 시위가 5월 21일 발생할 엄청난 사건의 조짐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광주사태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때였습니다. 5월 18일의 시점에서는 오히려 5월 15일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 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 서울의 시위가 훨씬 큰 시위로 기억되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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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르던역사의 진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도대채 거짓이 진실로 둔갑해서 잘못알고있는것이 한둘이아니네요...
역사학도님의 진실을 믿습니다 숨겨진 모든 진실이 밝혀져 세상이 맑아지는 그날까지 응원 합니다
이런 역사들 어떻게 바로잡나요? 대중이 가슴쏙에 묻어두고 가겠지요.어리썩은 대한민국!!!!!!!
광주지역 촤초 계엄사령관은 정용 사령관입니다. 조기 수습이 안되어서 문제는 크케 진화되었고 그뒤 정용은 국회의원도 했으니 누굴 탓할수잇나요????
네, 그런데 정용이 아니라 정웅이었으며, 광주향토사단 사단장겸 광주계엄관이었습니다.
정웅 맞읍니다,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