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풍속들에 대한 소고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전만해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 지역의 각종 풍속을 숭배하며 자연을 믿고 인간을 신뢰해왔다. 이들 풍속은 서서히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작용, 세계의 각종 토속신앙(土俗信仰) 등 일부 종교의 발단(發端)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들 자연을 상대로 한 각종 풍습이 인간의 행운과 질병을 다스리는 것으로 믿고 이를 더욱 신뢰, 오랫동안 그 맥을 이어왔다.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에서는 이들 풍속중 양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양밥은 자신들의 편리나 안녕을 위해 남에게 액을 떠 넘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령 눈주위에 종기, 즉 다래끼라는 것이 났을때는 이의 치료를위해 세갈래길 가운데 돌을 얼기설기 쌓아 일명 까치집이라는 것을 짓고 그 안에 침을 뱉은 뒤 종기가 난 눈부위의 속눈썹 서너개를 뽑아 넣어두는 것이었다.
멋모르고 이곳을 지나던 사람이 실수나 고의로 이 까치집을 허물었을 때는 다래끼가 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으로 믿었다. 또 음력 정월14일 밤에는 직성이 든 사람을 상징하는 제웅을 만들어 길가에 버렸는데 직성이 든 해는 액운이 닥쳐 만사가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병에 걸리거나 큰 화를 입는 등 불운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믿었다. 때문에 직성이 든 사람은 짚으로 사람 형상의 제웅을 만들어 배나 허리부분의 속을 헤치고 돈과 쌀을 넣어 생년월일, 태어난 시를 적어넣고 짚으로 동여맨 후 마을 어귀 등에 버렸다. 그러면 지나가다 이 제웅을 줍는 사람이 액을 가져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직성이란 액년이 든 것을 말했고 여자는 11, 20, 29, 38, 47, 56세에 해당했으며 남자는 10, 19, 28, 37, 46, 55세에 해당했다. 또한 우리나라 일부 지방에서는 도둑을 맞았을 가마솥에 검은 고양이를 넣고 불을 지펴 고양이가 견디기 힘들 때 솥뚜꺼을 열면 그 고양이는 도둑을 찾아가 발톱으로 얼굴에 상처를 내 죽인다고 믿었고 또한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일부 지방에서는 가마솥에 물을 끓이며 도둑으로 의심 가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물이 튀어 오른다고 믿었다.
시골의 일부 가정에서는 귀신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문 위에 가시 돋힌 엄나무(속칭 엄개나무) 가지를 걸어두었는데 이는 억센 가시가 무서워 귀신이 근접치 못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으로 풀이된다. 동짓날에는 쌀로 빚은 새알을 넣고 팥죽을 끓여 가족들은 새해를 맞는 나이만큼 새알을 먹기도 했으며 팥죽을 집안 구석구석에 조금씩 뿌리기도 했다. 이는 나이만큼 자기의 몫을 담당해야 한다는 책임감 부여와 함께 집안의 잡귀를 몰아 내는 하나의 의식이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는 초가집이나 낡은 집에 득실거리던 노린재의 피해를 막기위해 부억 널판지 틈새 등에 소나무 잎을 꽂으며 “노리개 각시 밥주자”를 반복해 외치기도 했다. 삭은 이빨을 빼냈을 때는 윗니의 경우 큰채 초가지붕에, 아랫니는 사랑채 지붕 위에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너는 헌니 하고 나는 새 이 다오」하고 외치면 까치가 새로운 이빨을 생기게 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도 전파매체 하나로 안방에서 볼수 있는 지금, 나무가지가 귀신을 쫓고 돌무더기가 신체에 난 종기를 치료해주는 것으로 믿던 각종 풍속의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하나의 습속(習俗)으로 퇴색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뒷받침되는 일부 습속도 없지 않았다. 특히 산고(産苦)를 오래 치루는 여인들은 남편을 불러 마루에 앉히고 남편의 상투끝에 끈을 묶어 그 끈을 산모의 손목에 묶고 고통을 함께 하도록 했는데 이는 남편이 곁에 있다는 안도감을 심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또 때론 산모의 남편에게 ‘키’를 쒸우고 여인들이 잘라놓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크기로 묶어 남편의 입에 물리고 고통받는 산모의 문 앞에 쪼그리고 앉혀 대기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머리카락의 역한 냄새가 구토증세를 유발, 남편의 구토소리와 함께 부인의 아랫배에도 더한층 힘이 가해지기를 유도하는 등 과학적인 근거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며 과학발달과 함께 각종 의약픔 개발되며 모든 사람들은 매사를 과학적 근거에만 의존하는 습성이 생겨나며 각종 풍습들은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고 풍속이 사라져 가며 우리의 순수함도 사라져 이제는 인가사 모두를 과학에만 의존, 자연이나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삭막한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토속신앙
토속신앙(土俗信仰) - ‘토속신앙’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민족종교(民族宗敎)였다. 옛날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세상에는 토신(土神), 수신(水神), 목신(木神)을 비롯 미륵(彌勒)신(神), 장승신(長承神) 등 수많은 신들이 있었다는데..
토속신앙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민족종교(民族宗敎)였다. 옛날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세상에는 토신(土神), 수신(水神), 목신(木神)을 비롯 미륵(彌勒)신(神), 장승신(長承神) 등 수많은 신들이 있어 이들 신은 사람들의 복(福)을 들이기도 하고 또한 화(禍)를 쫓을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래서 정초(正初)에는 안택(安宅)을, 2월에는 영등(靈登) 할미를 모시는 할만네를, 6월에는 용신제(龍神祭)를, 7월에는 백중행사, 9월9일 선조들의 제사, 동짓날 잡귀 쫓는 행사 등 절기마다 신을 모시는 행사를 가졌다. 특히 정월초(正月初)에는 대부분의 가정마다 인근의 판수(점을치는 장님)나 무당(巫堂)을 불러 안택(安宅)을 하며 재앙(災殃)으로부터 이 집안을 보호해 줄 것을 빌었고 대부분의 어촌(漁村)에서는 마을 공동으로 수신제(水神祭)를 지내는 등 한해의 풍어(豊漁)를 기원했다.
또 개인의 소원이나 자식들의 출세 등 가정의 소원을 기원(祈願)할 때는 고목(古木)앞에 촛불을 밝히고 정화수(井華水)를 올리기도 했고 식구들의 몸이 불편하거나 하루의 꿈자리가 사나워도 우리의 선조들은 이들 토속신앙에 빌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또 장승(長承)을 세우거나 탑을 쌓으면 이곳에는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신령이 강림(降臨), 이 신령은 아들을 점지해 주는 등 인간의 소원성취는 물론 재앙이나 악귀로부터 병액을 몰고오는 악귀로부터의 수호(守護) 등 세상의 길흉(吉凶)을 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마을의 인근에는 수호신으로 장승을 세우거나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사람들은 장승을 해치거나 탑을 허물면 동티가 나서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된다고 믿고 고히 모셔왔으며 그 앞을 지날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악의(惡意)로 장승을 해치지 않을 때는 신효(神效)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때문에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여인이 장승의 코를 베여 달여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믿기도 했고 젖이 나지 않는 여인은 여장군장승(女將軍長承)에 자신의 젖가슴을 접촉 시키면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도 믿었다.
또 공(功)들여 쌓은 탑은 사랑을 맺어주는 효험을 발휘한다고 믿으며 특이 2월15일 중춘(仲春)에는 탑돌이 행사를 가졌다. 이때 청춘 남녀가 눈을 맞추고 감통(感通)할 때는 서로 짝을 짖기도 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신효를 얻었음인지 아기를 낳기도 했고 또한 젖을 얻기도 했으며 때론 사랑을 얻기도 하며 장승의 신효를 입어 아기를 얻은 여인은 장승첩, 젖을 얻은 여인은 장승유모로 불리기도 했다.
토속신앙은 우리 선조들의 절대적 믿음이었으며 또한 정신적 지주였다. 때문에 신령의 효험보다는 절대적 믿음이라는 효과가 사람들의 희망으로 이어져 병을 고치고 사랑을 얻고 또한 득남하는 신효를 얻는 것이었다. 토속신앙의 역사는 유구하다. 다른 신앙은 접어두고 장승 신앙만해도 수 천년에 이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기록상 장승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통일신라 90년후(759년)에 세워진 비석에서라는 정설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제는 천체(天體)의 신비가 서서히 벗겨져가고 DNA(deoxyribonucleic acid)라는 유전관계에 있는 하나의 물질로 동물의 원형 복제(複製)가 가능한 지금, 토속신앙을 믿으려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토속신앙이 지난날 우리의 민족에게 끼친 영향만은 망각(妄覺)할 수는 없을 성 싶다. 이는 ‘토속신앙’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우리 삶의 평화와 신뢰를 지켜온데다 또한 이는 우리민족 정신적 순화력의 밑바탕으로 작용, 그 맥(脈)은 영원히 이어져 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월 설날
설날 -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 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 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 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 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 차례: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또 마른 것은 왼편에 젖은 것은 오른편에 놓으며, 나물류인 김치·청장(淸漿)·숙채(熟菜)는 가운데에 놓는다. 세 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 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 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 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 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를 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 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 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 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畵像)을 한 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 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 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鐘 )가 귀신 잡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 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 해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 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 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 덩어리씩 떼어 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 때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
정월 대보름
정월대보름 -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정월(正月)은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고, 일 년의 운세를 점쳐보는 달이다.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천지인(天地人)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도가에서 이 날 은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정월 대보름(1월 15일)·7월 백중(7월 15일)·8월 한가위(8월 15 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명일(名日)은 보름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하면 태양을 '양(陽)' 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이에 반하여 달 은 '음(陰)' 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 의미로 자리매김한다.
정월의 절일로는 설과 대보름이 있다. 태고적 풍속은 대보름을 설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과 같이 온 집안에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세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대보름을 8대 축일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겼던 명절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이라 하여 신년의 기점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보름날을 신년으로 삼았던 오랜 역법의 잔존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보름의 풍속은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고대사회로부터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겠다.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군들은 휴식을 취하며 농사준비를 한다. 예컨대 가마니 짜기·새끼 꼬기·퇴비 만들기·농기구의 제작 및 수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휴식으로만 일관되지는 않는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세(占歲) 및 놀이가 행해진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제의로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하여 동제(洞祭)를 지낸다. 가가호호 성의껏 제비를 갹출하여 제비(祭費)를 마련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하여 풍요로운 생산과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동제인 것이다.
또한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놀이로 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줄 당기기라고도 하며 주로 농촌에 전승 되어온 점세적 농경의례(農耕儀禮)이다. 볏짚을 이용하여 암줄과 숫줄을 만든 후에 마을단위 혹은 군단위로 양편으로 나뉘어 줄을 당기게 되는데, 암줄이 승리를 해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도 풍농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정초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흥겹게 놀아주고 축원해 주는 것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마당 밟기·매귀(埋鬼)·걸립(乞粒) 등으로 불리운다.
이와는 달리 개인적인 의례로서,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스럼 깬다'하여 밤·호두·땅 콩 등을 깨물며 일년 열두 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축원한다.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 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아침 식사 후에는 소에게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오곡밥과 나물을 키에 차려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보름날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 혹은 '송액(送 厄)' 등을 써서 연을 날리다가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한다.
주부들은 단골무당을 청하여 가신(家神)과 여러 잡신들을 풀어먹임으로써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이를 안택(安宅)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밤에는 달맞이 풍속이 있다. 달맞이는 초저녁에 높은 곳으로 올라서 달을 맞는 것을 말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한다. 아울러 달의 형체, 대소,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달집태우기 풍속도 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는데, 횃불싸움 과 쥐불놀이 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서 쌓아 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을 맞이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볏가릿대 세우기, 복토(福土)훔치기, 용알 뜨기, 다리 밟기, 곡식 안내기, 사발점, 나무 그림자점, 달 붙이, 닭 울음점 등이 있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 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며, 복토 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을 기원하며,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다리 밟기는 12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곡식 안내기는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정초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이는 이시기에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속신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아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종자를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종자들의 행방을 보아 남아 있으면 풍년이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 그림자점은 한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 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달 붙이는 대보름 전날 저녁에 콩 12개에 12달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어 콩알이 붙는가 안 붙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닭 울음점은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소리를 기다려서 그 닭 울음의 횟수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대보름날에 행해지는 놀이로는 사자놀이, 관원놀음, 들놀음과 오광대 탈놀음, 석전, 고싸움, 쇠머리대기, 동채싸움 등이 있다.
대보름날의 절식(節食)으로는 햅 찹쌀을 찌고, 또 밤·대추·꿀·기름·간장 등을 섞어서 함께 찐 후 잣을 박은 약반(藥飯)을 준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 가 왕을 깨닫게 하여, 우리 풍속에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하는 날로 정하여 찹쌀밥을 지어 까마귀 제사를 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약반 절식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풍속이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잡곡밥·찰밥·농사 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또 대보름의 절식으로 복쌈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 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을 말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보름에 귀밝이술이라는 풍속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 생각컨데 섭정규(葉廷珪, 中國 宋代人)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춘분 전후의 무일(戊日)에 귀밝이술[治聾酒]을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에 행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
2월 영등 할미
2월 할만네 - 제 올리고 소원 빌던 사라져 가는 미풍양속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영등할미’의 전설이 전해지며 영등 할미에게 한해의 풍어(豊漁)와 농사의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전설에는 영등 할미가 음력 2월 초하루 날에 얼어죽었다 하기도 하고 또는 영등 할미가 있어 해마다 2월 초하루 날이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돌아보고 그 달 20일쯤에 상천(上天)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영등 할미는 세상에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내려오면 그 해 날씨도 좋고 만사 평온, 풍년과 풍어가 들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해는 반대현상이 나타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등 할미가 세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사람들은 부엌에다 대나무막대기의 끝을 쪼개 받침대를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종지를 얻고 정화수(井華水)를 올리기도 했으며 대를 꽂은 땅에는 황토를 뿌리고 동백나무가지를 꽂았다.
영등 할미는 세 사람으로 10일에는 상등할미가 올라가고, 15일에는 이등할미가, 20일에는 하등할미가 상천하며 세 번째의 마지막 할미가 상천 할 때는 대부분의 가정마다 제를 지내 안택(安宅)과 풍연을 기원했다.
거제를 비롯한 통영 고성 등 남해안일대 지역에서는 이때를‘할만네’라고 부르며 영등 할미가 상천 하는 날마다 팥밥을 해 먹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영등 할미가 상천 하는 날 정성껏 저녁상을 차리고 소지종이를 불살라 올리는 등 분신제를 지냈으며 특히 통영지역은 명정동 충렬사 앞마당에서 합동 분신제를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여자들은 동백가지를 담은 물동이에 명정 샘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충렬사 앞마당을 돌았으며 이때만은 유일하게 가정의 규수들과 총각들의 어울림도 허락돼 남녀가 함께 어울려 마당을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이때 부르던 노래들은 영등 할미를 우리의 삶과 연계시켜 소박한 소원을 비는 내용이었다.“영등 영등 할마시야 한 바구리 만 캐어다오/ 두 바구리 만 캐어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야/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갯물이 많이 나서/ 두 바구리 캐고 나면 바다 물이 들어오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등할마시 비나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 8-1. 8-2 수록)”
“영등 영등 할마시 한 바구리 만 캐어주소/ 두 바구리 만 되어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등 할마시 비나이다/(영등 할마시 나물 캐는 민요, 제보자: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 신만순, 1926년생)”
“영등 영등 할마시야 봄나물을 캐러왔소/ 많이도 하지말고 적기도 하지말고/ 한 바구리 만 불아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야(제보자: 거제시. 박또악. 1910년생)”
특히. 나물 캐던 노래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아낙네들이 이른 봄 나물을 캐며 아직 자라지 않은 나물들이 제대로 캐어지지는 않고 캔 나물들이 햇빛에 시들어 오히려 줄어들 때 나물 캐던 칼을 땅에 꽂아두고 그 앞에 앉아 안타까운 마음에 바구니를 돌리면서 불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래마저 채록(採錄)되지 않은 채, 뇌리에서 사라져 완벽한 곡조조차 알 길이 없어졌고 더구나 우리사회의 민도(民度)는 정치와 산업으로 치닫으며 문화에 대한 민도까지 더욱 낮아져 할만네의 세시풍속은 전설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하지만 할만네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역민이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고 또한 아름다운 마음씨와 숭고한 정신세계를 창조해 선조와 우리들 후손의 단결된 민족성(民族性), 또한 순하디 순한 정신세계도 이어지게 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성싶다.
2월 머슴 날
머슴 날 - 머슴 날은 농가에서 머슴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며 즐기도록 하는 날로, 노비일 또는 일꾼 날이라고도 한다.
머슴 날은 농가에서 머슴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며 즐기도록 하는 날로, 노비일 또는 일꾼 날이라고도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머슴들은 겨울 동안 크게 힘든 일 없이 평안하게 지냈으나 2월에 들어서면 서서히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고된 일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꾼들을 하루 쉬게 하여 즐겁게 놀도록 하는 것이다.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는데,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돈을 주어 쓰도록 한다. 많은 노비를 거느린 대가에서는 떡도 하며 많은 음식을 준비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에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려서 그 속에 넣었던 곡식으로 송편 등의 떡을 만들 머슴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고 한다. 크게는 손바닥만하게 작게는 계란 만하게 만드는데, 모두 반쪽의 둥근 옥 모양으로 한다. 콩을 불려서 속을 만들어 넣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넣어서 찐다. 푹 익힌 다음에 꺼내서 물로 닦고 참기름을 발라서 먹었는데, 머슴들이 이 떡을 나이 수대로 먹으면 좋다고 한다.
한편. 경상남도 의령군이나 양산군에서는 머슴 날이 성인식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였다. 소년들은 신체가 건강해도 어른들과 노동력을 맞 교환하는 품앗이를 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 해에 20세가 된 젊은이는 이 날 동네 어른들과 성인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 턱 낸다. 그러면 그 해부터는 어른으로 취급받아 성인과 품앗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20세가 되어도 머슴 날 성인들에게 한턱 내지 않으면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머슴 날에 이렇게 성인식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두레가 났을 때 하는 수도 있다. 이처럼 머슴 날은 평소에 대접받지 못했던 머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 그 해의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여는 농경 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 가면서 농촌을 떠나는 젊은이들로 인해 머슴이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우리 주위에서 사라졌으며 자연히 머슴 날이라는 풍습도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잊혀져 가는 풍습 중에 하나가 된 것이다. 또한 머슴이라는 단어도 요즈음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되어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 |
삼월 삼짇날
삼월 삼짇날 -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삼월 삼짇날의 어원을 살펴보면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쓴다. 삼짇날은 삼(三)의 양(陽)이 겹친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되어 파생된 것이며, 상사는 삼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삼짇날이 언제부터 유래하였는지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최남선에 의하면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명일(名日)로 여겼으나, 그 후 상사일이 들쭉날쭉함을 불편하게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또한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 해 상을 당하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이 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행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 각처에서는 한량들이 모여 편을 짜 활쏘기를 하기도 하며, 닭싸움을 즐기기도 한다. 사내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이를 즐기고, 계집아이들은 대나무 쪽에다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기기도 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시절음식을 즐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이 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 둥근 떡을 만들고, 또 그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진달래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가루에 붉은 색 물을 들여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제사상에도 오른다."라고 하여 화전과 국수를 시절음식으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시절음식으로 흰떡을 하여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 가지 색깔을 들여, 다섯 개를 이어서 구슬을 꿴 것같이 하는데, 작은 것은 다섯 개씩이고, 큰 것은 세 개씩으로 하는데, 이것을 산 떡이라고 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 떡이 있다. 또한 이날에는 부드러운 쑥 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 한다. |
한식(寒食)
한식(寒食 : 동지 후 105 일째 되는 날) - 한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의(字意)대로 풀이하면 '찬밥을 먹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한식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한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의(字意)대로 풀이하면 '찬밥을 먹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한식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한식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여러 세시기(歲時記)에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삼월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아침,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을 쫓는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상고하면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의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관한 기록된 문헌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서 제사 지내는 것을 채택했으므로 이른바 묘제는 이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한식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이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우리의 풍속에 맞게 사대명절에 속하게 되었다.
한식은 글자 자의대로 더운 음식을 피하고 찬 음식을 먹어 야 한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한식 또는 한식날이라 하였다. 한식의 유래에 대해 중국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중국 고사에 이 날은 비바람이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개자추전설(介子推傳說)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晉)나라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간신에게 몰려서 면산(綿山)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진 문공(文公)이 개자추의 충성을 알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도리 없이 면산에 불을 놓았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 을 쓰지 않기로 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을 지나면서 음력 삼월(三月)이 되면 동장군(冬將軍)이 물러가고 겨우내 얼었던 대지는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한다. 봄은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며 겨울 동안의 움츠림을 풀어헤치는 계절이다. 삼월의 절기로는 청명(淸明: 양력 4월 5일, 6일), 곡우(穀雨: 양력 4월 20일, 21일)가 있다. 이 무렵이 되면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농번기에 접어들어 농사일을 서두른다. 이 시기의 농사일로는 가래질, 논둑 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을 들 수 있다.
청명 무렵이 되면 논농사의 준비작업을 하는데, 겨우내 얼었던 논둑으로 논물이 새지 않게 가래질을 한다. 가래질을 마치고 쟁기로 논갈이를 하여 못자리를 만들면 곡우 무렵이 된다. 그 사이 볍씨를 일주일 가량 물에 담가서 싹을 틔우고 가래질과 못자리를 장만하면 논농사는 반은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숨을 돌리게 된다.
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며, 어느 해나 청명 안팎에 든다. 한식은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들기도 하는데,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늦다고 한다. 이에 대해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전하여 온다. 이 날 비가 오면 '물 한식'이라고 하여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또 한식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매우 꺼려한다. 한식의 유래와 관련하여 이 날은 더운 밥을 피하고 찬밥을 먹는다고는 하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한식은 조선시대에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사대명절(四大名節)에 속했다. 이 날 각 가정에서 는 제사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절사(節祀)라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성묘를 하기도 한다. 이때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고 봉분을 개수하기도 하는데, 이를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그러나 한식이 음력 2월에 들면 사초를 하지만, 음력 3 월에 한식이 들면 사초를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한식날이 되면 내병조(內兵曹)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고 그 불을 홰에 붙여 각 관아와 모든 대신 집에 나누어주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신화(新火)를 만들어 쓸 때에 구화(舊火)를 일체 금지하던 예속(禮俗)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어서 한식은 조상을 위한 제례와 환절기 불조심을 위한 금화(禁火)의 의미가 강하다. |
5월 단오
단오 -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삼짇날(3월 3일)·칠석(7월 7일)·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수리란 고(高)·상(上)·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불리워졌다 하며, 일설에 의하면 단오의 유래와 더불어 중국의 초(楚)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수뢰(水瀨)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 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 날이 5월 5일 이었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을 지나 음력 오월(五月)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 간다. 오월의 절기(節氣)로는 망종(芒種)과 하지(夏至)를 들 수 있다. 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기초를 둔 것이며,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망종은 보리나 벼와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거두거나 모를 내는 절기이며, 하지는 낮 시간이 가장 긴 절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농사력은《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오월조의 농사관련 부분에 잘 나타난다.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하오리라 /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 두드리니 잠농을 마를 때에 사나이 힘을 빌어 / 누에 섭도 하려니와 고치나무 장만하소 오월오일 단오날 물색이 생신하다. / 외 밭에 첫물 따니 이슬에 저 뮹만潁措齋穗? 자네하소 논 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마타내고 가지모 고추 모는 아이 딸 너 하여라. / 맨드람 봉선화는 네 사천 너무 마라.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일로는 5월 5일 '단오날'을 들 수 있다. 단오날은 고려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는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災厄)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또 단오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추 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오날 창포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단오날 중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한다. 말려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을 할 때에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시에 뜯은 약쑥을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 수 있다. 그네뛰기는 단오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 씨름대회가 있다. 씨름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 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된다.
한편.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강릉지방의 강릉 단오 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 굿, 경북 자인의 한 장군 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민의 축제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옥추단(玉樞丹)과 제호탕(題호湯)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궁중풍속이 전한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신다. 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놀이,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단오의 시절음식으로는 수리 떡과 약 떡이 있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 가루 속에 넣어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라는 풍속이 전한다. 이것이 바로 수리 떡을 가리키는 것이다. 약 떡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전하는 시절음식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떡을 하는 예가 잘 없으나, 떡을 할 경우에 5월 4일 밤이슬을 맞혀 두었던 여러 가지 풀을 가지고 단오날 아침에 떡을 해 먹는데, 이를 약 떡이라고 한다. 앵두가 제철인 단오 무렵이면 앵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하며,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옥수수나 쌀 등을 튀겨 주기도 한다.
또 이 날은 새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제주도에서는 보릿가루에 누룩을 썩어서 부풀게 만든 기루떡과 곤떡·새미떡·인절미·표적·율적·해어·실과 등을 제물로 사용한다. |
6월 유두
유월 유두 - 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의 약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물맞이'라고도 한다.
6월은 계절적으로 가장 무더우며, 삼복(三伏)이 들어 있는 때이다. 따라서 보양탕(補身湯), 삼계탕(蔘鷄湯) 같은 자양분이 많은 음식으로 몸을 보(補)하기에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더위에 지쳐 발병하기 쉬운 때이므로 재액(災厄)을 면하려는 양퇴귀(禳退鬼)의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러한 것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이 곧 유두이다.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특히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은 청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믿는 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풍속을 통해 불상(不祥)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처럼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 것은 물에 정화력이 있음을 인정하여 심신을 물에 담가 더러움을 떨쳐 버리는 세계의 보편적인 습속으로 중국의 상이계욕, 인도의 긍하침욕(河浸 浴)이 그 좋은 예이며, 종교적 의식에서는 불교의 관정(灌頂), 기독교의 세례(洗禮)가 모두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유두 무렵은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두의 풍속에는 조상과 농신에게 햇과일과 정갈한 음식을 차려 제를 지냄으로써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된 오늘날, 다양한 생산 양식에 의존함에 따라 그 풍속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두 풍속도 예외는 아니어서 의례적인 요소는 그 전승이 단절되었으며, 물맞이 풍속은 여름 휴가철 바캉스로 대치되었다.
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의 약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물맞이'라고도 한다. 유두의 어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유두를 신라 때의 이두식 표기로 보고, 이를 오늘날 유두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물맞이'와 관련시켜 해석하면 그 어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즉 유두를 달리 소두(梳頭), 수두(水頭)라는 한자말로도 표기한다.
그런데 수두는 곧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이니 그 본뜻은 물말이 곧 '물맞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도 신라의 고지(故地)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하는데, 이로 보아 유두는 신라 때 형성된 '물맞이'의 풍속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유두의 풍속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 미 유두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3세기 고려 희종(熙宗)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의하면,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厄)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유두 에 대한 기록은《중경지(中京志)》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고려사(高麗史)》권20 명종(明宗) 15년 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연(流頭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 (流頭宴)이라 한다.
조선의 풍속도 신라 이래의 옛 풍속으로 말미암아 유두를 속절로 삼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을 통하여 유두는 최소한 신라시대부터,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풍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풍속 편에는 여인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에서는 정릉 계곡, 광주에서는 무등산의 물통폭포,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의 성판봉(城坂峰)폭포 등을 적합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승만의《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정릉계곡 외에도 송림(松林)과 물이 좋은 악박골과 사직단이 있는 황학터(黃鶴亭:활터) 근방과 낙산 밑 등이 서울의 물맞이 장소로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유두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을 들 수 있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는 때인데, 유두천신이란 이 날 아침 각 가정에서 유두면·상화병·연병·수단 ·건단, 그리고 피·조·벼·콩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참외나 오이, 수박 등과 함께 사당[家廟]에 올리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당에 올리는 벼·콩·조 등을 유두벼·유두콩·유두 조라고 한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등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논의 물꼬 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그 다음에는 자기 소유의 논 ·밭 하나 하나마다에 음식물을 묻음으로써 제를 마치게 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6월 월내조(月內條)에는 피·기장·벼를 종묘에 천신한다고 하였으며,《예기(禮記)》월령(月令)에는 중하(仲夏)의 달에 농촌에서 기장을 진상하면 천자가 맛을 보고 먼저 종묘에 올리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유두는 조상신이나 농신만을 위한 날은 아니었다. 이 날 유두천신을 마친 후 일가 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가지고 간 햇과일과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철의 질병과 더위를 물리치는 액막이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문사(文士)들은 술과 고기, 음식을 장만하여 녹음 이 짙은 계곡이나 정자에 가서 시가를 읊으며 하루를 즐기기도 하였다. 유두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모내기를 끝내고 김매기를 할 때이다. 아울러 가을보리를 비롯한 팥 ·콩·조 등을 파종하며, 또 오이·호박·감자·참외·수박 등 여름 작물을 수확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교적 한가한 시기인 이 무렵에 유두라는 속절을 두어 조상과 농신에 대한 감사와 풍년의 기원을 행하고자 한 것이 바로 유두의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농사일로 바빴던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닥쳐 올 본격적인 더위를 이겨내고자 한 지혜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 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 건단, 수단, 상화병(霜花餠) 등이 있다. 특히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누구나 먹는다. 밀가루로 만드는 유두면은 참밀의 누룩으로 만들 경우 유두국(流頭국)이라고도 하는데, 구슬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인 후 세 개 씩 포개어 색실에 꿰어차거나 문에 매달면 재앙을 막는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원래 국수는 긴 까닭에 장수를 뜻해서 경사가 있을 때에는 잔치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오색 칠을 하는 것과 삼매(三枚)는 숫자가 기수(奇數)인 양수(陽數)라는 것과, 그것이 모두 축귀에 효과가 있는 숫자이며 대문 위에 걸어 두는 것도 잡귀가 드나드는 장소를 골라 벽사(벽邪)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유두면을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서 잡귀를 막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수단과 건단은 쌀가루로 쪄서 길게 빚으며, 가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들어 꿀물에 담그고 얼음물을 넣어서 먹는 것은 수단이고 얼음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이 건단이다. 상화병은 밀가루에 물 을 붓고 반죽하여 콩가루와 깨를 섞어서 꿀물에 버무려 쪄서 먹는다.
《경도잡지(京都雜誌)》6월 15일조에는 "분단(粉團)을 만들어 꿀물에 넣어 먹는데 이를 수단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유두조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긴 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그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으며, 제사에도 쓰는데 이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또 건단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찬 음식의 종류이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복(三伏)
삼복 - 삼복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 있는 속절(俗節)이다. 하지 후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庚日)을 중복, 입추 후 첫 경일(庚日)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이라 한다.
삼복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 있는 속절(俗節)이다. 하지 후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庚日)을 중복, 입추 후 첫 경일(庚日)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이라 한다.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린다. 그러나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복의 어원에 대해서는 신빙할 만한 설이 없다. 다만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 의하면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복은 원래 중국의 속절로 진(秦)·한(漢) 이래 매우 숭상된 듯 하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상고하면《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진덕공(秦德公) 2년에 처음으로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성 4대문 안에서는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방지했다고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이로 보아 삼복은 중국에서 유래된 속절로 추측된다. 삼복은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으로 이를 '삼복더위'라 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여름 과일을 즐기고, 어른들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간계곡으로 들어가 탁족(濯足)을 하면서 하루를 즐긴다. 한편으로 해안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기도 한다.
복날과 관계 있는 속신으로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속신때문에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복에 목욕을 하였다면 중복과 말복 날에도 목욕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복날마다 목욕을 해야만 몸이 여위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복과 중복, 그리고 말복에 걸친 삼복더위를 이겨내는 시절음식으로 개장국이 있다. 개장국은 더위로 인해 허약해진 기력을 충전시켜 준다. 허준이 저술한《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개고기는 오장을 편안하게 하며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와 무릎을 온(溫)하게 하고, 양도(陽道)를 일으켜 기력을 증진시킨다."는 기록이 있어 개고기의 효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복날에 개장국을 끓여 먹는 풍속은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도 나타난다. 이들 기록은 개고기의 효능과 복중에 개장국을 절식(節食)으로 즐기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의하면 "복날에 개장국을 끓여 조양(助陽)한다."는 기록이 있고,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장국을 먹으면서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쳐 보허(補虛)한다."고 하였다.
또〈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황구(黃狗)의 고기가 사람을 보한다고 하여, 황구를 일등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볼 때, 개장국은 우리 민족이 건강식으로 널리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 요리법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조리서에 나타난다. 조선시대 조리서에는 개고기 요리의 종류와 원리를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규곤시의방(閨 是議方)》에는 개장·개장국누르미·개장고지누르미·개장찜·누런 개 삶는 법, 개장 고는 법 등 전통 요리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부인필지(婦人必知)》에 의하면 "개고기는 피를 씻으면 개 냄새가 나고, 피가 사람에게 유익하니 버릴 것이 아니라 개 잡을 때 피를 그릇에 받아 고기국에 넣어 차조기잎을 뜯어 넣고 고면 개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우리 민족이 개장국을 건강식으로 널리 즐겼음은 분명하나 지방에 따라서 개고기를 먹으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금하기도 하였다. 또 특정 종교의 세계관에 의해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것을 금기시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개장국을 대신하여 삼계탕을 즐기기도 한다. 삼계탕은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대추, 찹쌀 등을 넣고 고은 것으로써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외에도 팥죽을 쑤어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초복에서 말복까지 먹는 풍속이 있다. 팥죽은 벽사의 효험을 가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더운 복 중에 악귀를 쫓고 무병하려는 데에서 나온 풍습이다. |
칠월 칠석(七月 七夕)
칠석 - 음력 7월 7일을 칠석(七夕)이라 한다. 이 날은 1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전설이 전하여 내려온다.
7월 7일을 칠석(七夕)이라 한다. 이 날은 1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온다. 하늘나라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하고도 놀고 먹으며 게으름을 피우자 옥황상제는 크게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건널 수 없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태우면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으니 그것이 곧 오작교(烏鵲橋)이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1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진다.
그래서, 칠석날 세상에는 까치와 까마귀는 한 마리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이 들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또 까마귀와 까치는 이날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지게 된다고 한다. 칠석날 전후에는 부슬비가 내리는 일도 많은데, 이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타고 갈 수레 준비를 하느라고 먼지 앉은 수레를 씻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물이 인간 세상에서는 비가 되어 내리므로, 이 비를 '수레 씻는 비' 즉 '세차우(洗車雨)'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벽에 비가 내리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비를 '눈물 흘리는 비', 곧 '쇄루우(灑淚雨)'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한대(漢代)의 괴담(怪談)을 기록한 책인《재해기(齋諧記)》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7월 7일 저녁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졌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성립되었다.
즉 천문학상의 명칭으로 견우성(牽牛星)은 독수리별자리[鷲星座]의 알타이어(Altair)별이고, 직녀성(織女星)은 거문고별자리[琴星座]의 베가(W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래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의 둑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黃道上)의 운행 때문에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고, 봄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며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보게 되므로 마치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최남선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보이는 것은 일찍이 중국 주대(周代) 사람들이 해마다 경험하는 천상(天象)의 사실이었는데, 여기에 차츰 탐기적(耽奇的)인 요소가 붙어 한대(漢代)에 와서 칠석의 전설이 성립된 것이라고 하였다. 칠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 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래는 칠석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의 부녀자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 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고 널리 행하던 중국 한대(漢代)의 걸교(乞巧)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이 풍속은 당대(唐代)에 와서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칠석 풍속은 중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수명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 이북지방에서는 이 날 크게 고사를 지내거나 밭에 나가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 성장의 기원을 부탁하는 것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무사 성장의 기원을 한다.
한편 7월이면 무더위가 한 풀 꺾이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김매기를 다 매고 나면 추수 때까지는 다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장마를 겪은 후이기도 한 이때, 농가에서는 여름 장마철 동안 눅눅했던 옷과 책을 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쇄서폭의( 書曝衣)라 하는데, 이 날은 집집마다 내어 말리는 옷과 책으로 마당이 그득하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7월 7일조에도 인가에서는 옷을 햇볕에 말린다 하여 이는 옛날 풍속이라 하였는데, 이 날에 내어 말리는 옷과 책의 수량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칠석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공민왕(恭愍王)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양한 생활주기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칠석의 풍속은 다만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동심의 세계에 꿈을 부풀리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칠석의 절식으로는 밀국수와 밀전병이 있다. 이 날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은 철 지난 것으로서 밀냄새가 난다고 하여 꺼린다. 그래서 밀국수와 밀전병은 반드시 상에 오르며, 마지막 밀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곧 칠석인 것이다. |
칠월 백중(百中)
백중 - 백중(百中)은 음력 7월 보름에 드는 속절(俗節)이며, 백종(百種)·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종(百種)은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백중(百中)은 음력 7월 보름에 드는 속절(俗節)이며, 백종(百種)·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종(百種)은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요, 중원(中元)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의 하나로서 이 날에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망혼일(亡魂日)이라 한 까닭은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 놓고 천신(薦新)을 드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입하(立夏)로부터 시작되는 여름은 '녀름짓다'라는 옛말처럼 밭매기와 논매기 등 농사일이 한창인 계절이다. 그러나 '어정 7월, 동동 8월' 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농촌의 7월은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을 추수를 앞둔 달이어서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백중'이라는 속절(俗節)을 두어 농사일을 멈추고, 천신 의례 및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로 인해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했다. 백중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불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불가의 중들이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는 큰 명절로 여긴다. 상고하면《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이르기를 중원일(中元日)은 승니, 도사, 속인들이 모두 분(盆)을 만들어 이것을 절에 바친다고 했다. 또 상고하면《우란분경(盂蘭盆經)》에 목련비구(木蓮比丘)가 오미백과(五味百果)를 갖추어 분 안에 넣어 갖고 시방대덕(十方大德)에 공양한다고 하였다. 지금 말한 백중일이 백과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려 때는 부처를 숭상하고 이 날이 오면 항상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었다. 오늘날 불당에서 재를 올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백중의 유래는 불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우란분회를 열어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의 영전에 바쳤다. 조선시대 때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승려들만의 불교의식이 되고 말았다. 또 조선 후기에 간행된《송남잡식(松南雜識)》의 기록에 의하면 우란분회 때 승려들이 발을 닦아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어 백종(白踵)이라 한다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편, 제주도에는 백중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성기의《남국의 민속》(下)에 소개되고 있는 이 설화에 의하면 백중은 농신(農神)으로 상정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목동이 곡식과 가축을 지키려고 옥황상제의 명을 어겼는데, 이로 인해 노여움을 받아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후 농민들이 그가 죽은 날인 음력 7월 14일을 백중일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렇게 볼 때 백중은 본시 우리 나라 고대의 농신제일(農神祭日)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우란분회의 영향을 받아 그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중에는 여러 풍속이 전해 온다. 각 가정에서는 익은 과일을 따서 사당에 천신(薦新)을 올렸으며, 궁중에서는 종묘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을 올리기도 하였다. 농가에서는 백중날 머슴들과 일꾼들에게 돈과 휴가를 주어 즐겁게 놀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날이 되면 머슴들과 일꾼들은 특별히 장만한 아침상과 새 옷 및 돈을 받는데 이것을 '백중돈 탄다' 라고 하였다. 백중돈을 탄 이들은 장터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이때 서는 장을 특별히 '백중장' 이라 하여 풍장이 울리고 씨름 등을 비롯한 갖가지 흥미 있는 오락과 구경거리가 있어서, 농사에 시달렸던 머슴이나 일꾼들은 마냥 즐길 수 있는 날이다. 지역에 따라 이 날 농신제(農神祭)와 더불어 집단놀이가 행해지는데 이를 '백중놀이'라고 한다. 이 놀이는 농촌에서 힘겨운 새벌논매기를 끝내고 여흥으로 여러 가지 놀이판을 벌여 온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일종의 마을 잔치이다.
이 날은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하루를 즐기는데, 이를 '호미씻이'라 한다. 호미씻이는 지방에 따라서 초연(草宴), 풋굿, 머슴날, 장원례(壯元禮)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장원한 집의 머슴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도롱이를 입히고 머리에 삿갓을 씌워 우습게 꾸며 지게나 사다리에 태우거나 아니면 황소 등에 태워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그 집주인은 이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니, 이날을 머슴날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을 어른들은 머슴이 노총각이나 홀아비면 마땅한 처녀나 과부를 골라 장가를 들여 주고 살림도 장만해 주는데, 옛말에 '백중날 머슴 장가간다' 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제주지방에는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하여 쉬지 않고 밤늦도록 해산물을 채취하기도 하고, 또 한라산에 '백중와살'이라는 산신이 있어 백중을 고비로 익은 오곡과 산과(山果)를 사람들이 따 가면 허전하여 샘을 낸다고 하여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신라의 풍속에 백중일을 기해서 부녀자들의 삼삼기 풍속이 있었다. 이에 대한 유래는 고려 중기에 간행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 3대 유리왕조의 삼삼기 풍속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이 6부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어서 두 왕녀에게 각각 한 패씩 거느리게 하고 7월 기망(旣望,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을 시켰는데, 그 공의 다소를 보아 진편이 이긴 편에 음식대접을 하고, 이어서 가무 백희를 하니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근래까지도 경남지역에서 '두레삼'이라 하여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남지역에서는 친한 부녀자들끼리 품앗이로 한 집씩 돌려 가며 삼을 삼는 풍속이 전역에 분포하는데, 이를 두레삼이라 한다. 이때 주인집에서는 음식대접을 하기도 하고, 혹은 편을 나누어 경쟁을 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 음식대접을 하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밭작물인 밀과 보리, 수수나 감자 등을 수확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들어 밀전병과 밀개떡을 해 먹으며, 또 수수나 감자로 떡을 만들어 먹으며 부침개를 해 먹기도 한다. 이때 호박이 제철이므로 호박부침을 별미로 만들어 먹는다. 경남 지역에서는 백중날 백 가지 나물을 무쳐 먹고, 백가지 풀을 고아 그 물을 먹으면 약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백중날에 백 가지 나물을 해 먹어야 하는데, 백 가지의 나물을 장만할 수가 없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희게 만든 백가지[白茄子]를 만들어 먹는다. 전남 어촌지역에서는 백중날 소라나 다슬기 등이 제철이므로 이를 시식으로 먹는다. 또 떡을 하는 곳도 있는데, 주로 밀개떡·밀전병을 하며, 시루떡을 해서 성주께 올리기도 하고, 찰떡이나 서숙떡·감자떡 등을 하기도 한다. 제주 지역에서는 빅개회를 먹는다. 빅개란 바닷고기로 7월에서 9월 사이에 어획된다. 가죽을 벗기고 잘게 썰어 양념하여 강회로 만들어 먹는다. |
추석(秋夕)
추석 -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추석은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로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正)'의 관형사형이고, 가위란 '가배(嘉俳)'를 의미한다. 이때 가배란 '가부·가뷔'의 음역(音譯)으로서 '가운데'란 뜻인데, 지금도 신라의 고토(故土)인 영남 지방에서는 '가운데'를 '가분데'라 하며, '가위'를 '가부', '가윗날'을 '가붓날'이라고 한다. 또 8월 초하루에서 보름께까지 부는 바람을 "8월 가부새 바람 분다"라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가뷔·가부는 뒷날 가위로 속전(俗轉)된 것으로 알 수 있으니, '추워서'를 현재에도 '추버서'로 하는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가위란 8월중에서도 정(正)가운데란 뜻이니, 정중심(正中心)을 우리가 '한가분데' 또는 '한가운데'라고 하듯이 '한'은 제일(第一), 큰(大)의 뜻 이외에도 한(正)의 뜻이 있음도 알 수 있다. 한가위를 추석, 중추절(仲秋節·中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한 것은 훨씬 후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즉 한자가 전래되어 한자 사용이 성행했을 때 중국 사람들이 '중추(中秋)'니 '추 중(秋中)'이니 하고, '칠석(七夕)'이니 '월석(月夕)'이니 하는 말들을 본받아 이 말들을 따서 합하여 중추(中秋)의 추(秋)와 월석(月夕)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8월 15일 을 '가위'라고 하고 '추석'이라고도 함은 고전 문학에서도 보이는데, 고려 때 가요인 '동동(動動)'에서는 "8月 보로 아으 嘉俳나리마 니믈 뫼셔녀곤 오날 嘉俳샷다 아으 動動다리"라 하고, 조선조 때의 가사인 사친가(思親歌)에는 "8月 秋夕日에 백곡이 풍등하니 落葉이 秋聲이라 무정한 節序들은 해마다 돌아오네 여기저기 곳곳마다 伐草香花하는구나(中略) 슬프도다 우리부모 추석인 줄 모르시나"라고 되어 있음을 보아 '가위'란 말보다 '추석'이란 말이 훨씬 후대에 와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추석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고대로부터 있어 왔던 달에 대한 신앙에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 있어 날마다 세상을 밝혀 주는 태양은 당연한 존재로 여겼지만 한 달에 한 번 만월(滿月)을 이루는 달은 고마운 존재였다. 밤이 어두우면 맹수의 접근도 알 수 없고 적의 습격도 눈으로 볼 수가 없기에 인간에게 있어 어두운 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만월은 인간에게 있어 고마운 존재였고, 그 결과 만월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만월의 밤중에서도 일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8월 15일인 추석이 큰 명절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만월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고 먹고 마시고 놀면서 춤추었으며, 줄다리기, 씨름, 강강수월래 등의 놀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에 만월을 갈망하고 숭상하던 시대에 이미 일년 중에서 가장 달이 밝은 한가위는 우리 민족 최대의 축제로 여겨지게 되었고, 후에 와서 의식화(儀式化)되어 명절로 제정(制定)을 보게 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가위의 기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두 패로 가른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는데, 밤 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살펴 가지고 지는 편은 술과 밥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이에 온갖 유희가 일어나니 이것을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고 하였고, 또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날 사람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으로는 벌초(伐草)·성묘(省墓)·차례(茶禮)·소놀이·거북놀이·강강수월래·원놀이·가마싸움·씨름·반보기·올게심니·밭고랑 기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 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명당에 쓰기 위하여 몇 십리 먼 곳에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추석을 맞이하여서는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이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벌초를 안 했으면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2) 차례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 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 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소놀이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 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 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의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 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소 놀이를 할 때는 당년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집 머슴을 상머슴으로 뽑아 소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시위하는 경우도 있다. 농사를 천하의 대본으로 여겨 온 농경 민족에게 있어 농사를 잘 지어 풍작을 거두게 하였다는 것은 큰공이니 위로하고 포상하는 뜻에서 소에 태우는 영광을 주는 것이다. 한번 상머슴으로 뽑히면 다음해 머슴 새경을 정할 때 우대를 받게 된다.
4) 원놀이·가마싸움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 되므로 서당은 며칠을 쉬게 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 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 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백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의 재판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이 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었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 되어 행하여졌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 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 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 다.
5)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 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6)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추석은 시기적으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한 때이므로 이즈음에는 여러 가지 시절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제찬을 준비하는데, 설날의 제찬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이라 햇곡식으로 밥과 떡, 술을 만든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로 쓰는 일도 있다. 이렇게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좋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좋다.
추석의 대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한, 임신한 여자가 태중의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 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나 솔잎의 붙은 곳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 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을 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
9월 중구(重九)
중구 - 음력 9월 9일의 중구는 9월중의 유일한 속절(俗節)이며 각 가정에서 국화전을 해 먹거나 국화주를 빚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산이나 계곡에 가서 단풍놀이를 하기도 한다.
음력 9월 9일의 중구는 9월중의 유일한 속절(俗節)이며, 중양(重陽) 또는 중광(重光)이라고도 한다. 중양·중광은 양(陽)이 겹친다는 뜻이며, 중구는 '9[九]' 수가 겹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삼짇날(3월 3일)·단오(5월 5일)·칠석(7월 7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양의 수가 중첩된다는 의미에서 다 중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중양이라고 하면 중구를 가리킨다.
중구를 비롯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한대(漢代) 이래로 중구절에 상국(賞菊)·등고(登高)·시주(詩酒)의 풍속이 있었고, 당송대(唐宋代)에도 관리들의 휴가일로서 추석보다도 더 큰 명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중구의 풍속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 중구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시가를 즐긴 듯 하며,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례화 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삼짇날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추석에 행하던 기로연을 중구로 옮기고 유생들에게 과거를 실시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9월 조에 의하면 "서울의 풍속을 보면 중구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먹고 마시며 단풍놀이를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중구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우리의 풍속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공(柳晩恭)이 지은《세시풍요(歲時風謠)》를 보면 중구에 대한 시(詩)가 있는데, 이 시는 중구의 풍속에 대한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금꽃을 처음 거두어다가 둥근 떡을 구워 놓고 상락주(桑落酒)를 새로 걸러 자그마치 술지게미를 짜냈다. 붉은 잎 가을 동산에 아담한 모임을 이루었으니, 이 풍류가 억지로 등고(登高)놀이하는 것보다는 낫다. <중양절(重陽節)의 술을 상락(桑落)이라고 한다>"
중구에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풍속이 전하여 온다. 예컨대 성주단지에 햇곡식을 갈아주며 제물을 차려 성주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기일(忌日)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며,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또 추석 무렵에 햇곡식이 나지 않아 차례를 지내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날에 차례를 지내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생산되는 햇곡식을 조상에게 바치고자 하는 정성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누런 국화를 따다가 찹쌀떡을 빚어 먹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 진달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를 화전(花煎)이라 한다. 지금의 국화떡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배와 유자와 석류와 잣 등을 잘게 썰어서 꿀물에 타면 이것을 화채라 하는데, 이것은 시절음식도 되지만 제사에도 오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중구의 시절음식으로 국화전과 화채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구에는 각 가정에서 국화전을 해 먹거나 국화주를 빚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산이나 계곡에 가서 단풍놀이를 하기도 한다. 부녀자·소년·소녀들은 제각기 무리 지어 하루를 즐기고, 문인들은 시를 짓고 풍월을 읊어 주흥을 즐긴다. 또 이때쯤이면 약초가 한고비를 이루는데, 구절초는 이때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하여 산이나 들에 나가 뜯기도 한다. |
상달고사
상달고사 - 상달고사란 음력 10월에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고사라는 말은 세시 풍속 상에서 안택(安宅)이라는 말과 혼동되어서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상달고사란 음력 10월에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고사라는 말은 세시 풍속 상에서 안택(安宅)이라는 말과 혼동되어서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점은 양자가 가정단위의 제사이며, 아울러 성주· 조상· 터주· 조왕· 삼신 등 모시는 대상 신들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사는 주로 상달고사를 말하며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강하고, 안택은 주로 정월에 행해지며 연초의 액막이 및 행운 기원의 의미가 강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사 혹은 안택이라는 이름은 중부를 포함한 중부이북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도신(禱神) 또는 도신제라 부른다. 최남선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고시레·고사·굿'을 같은 어원으로 보고 있다. 더불어 그 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의례를 '고시레'라하고, '고사'는 굿의 규모는 아닌 중간 정도의 의례를 말하며, 장구를 울리고 무악(巫樂)을 갖추어 춤을 추는 등 규모가 가장 큰 의례를 '굿'이라고 하였다.
상달고사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옛 기록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최남선은《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상달은 10월을 말하며, 이 시기는 일 년 내 농사가 마무리되고 신곡신과(新穀新果)를 수확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기간이다. 따라서 10월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게 되는 달로서 열두달 가운데 으뜸 가는 달로 생각하여 상달이라 하였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달에는 예로부터 무수한 종교적 행사가 전승되어 왔다. 고대에는 고구려의 동맹(東 盟), 예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등 추수감사의 의미를 내포하는 제천의식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팔관회(八關會)가 그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고사 혹은 안택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볼 때 상달고사의 유래는 고대 국가행사인 제천의식에서 가정의례로 변모하여 전승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고사를 지낼 때는 좋은 날을 가려서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서 집안으로 부정이 들지 않도록 금기를 지킨다. 제물로는 시루떡과 술을 준비하는데, 떡은 떡의 켜를 만든 시루떡과 켜가 없는 백설기를 만든다. 백설기는 산신(産神)인 안방의 제석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제물은 안방을 비롯하여 사랑방, 머슴방, 나락가리, 쌀뒤지, 장광 등 집안의 곳곳에 조금씩 차려 놓는다. 의례는 대개 주부가 담당하는데, 제물을 차린 후 배례를 하고 손을 모아서 빌거나 축원을 하며 기원한다. 기원하는 대상신은 집안의 풍요와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는 가신(家神)들이다.
가신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중요한 가신들로서 터주신·성주신·제석신·조왕신 등에게는 배례와 축원을 하고, 이 밖에 칠성신·측신·마당신·문신 등에는 제물만 놓는다. 가신이 아닌 마을수호신에게도 제물을 차려 배례와 축원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제물만 차려 놓는다. 이 때는 떡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상례이다. 고사를 조금 크게 행하고자 할 때는 무당이나 중을 청하여 행한다. 무당을 청하여 고사를 행할 경우는 제금만을 울리면서 축원을 하여 집안의 무사태평을 기원한다. 중을 청하여 고사를 행할 경우는 떡을 하지 않고 간단히 고사반(告祀盤)을 만들어 놓고 중이 염불을 왼다.
고사반은 그릇에 쌀을 수북이 담아놓고, 실타래를 감은 숟가락을 세워 꽂아 놓은 것을 말한다. 실타래는 수명장수 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어린이의 장수·건강을 비는 뜻이 강하다. 이때 부르는 염불을 또한 고사반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고사반으로는 '회심곡'이 있다. 고사와 더불어 가신들의 신체인 단지에 햇곡식을 갈아넣는 풍속이 있다. 이러한 신체는 지방마다 부르는 명칭과 모시는 장소, 시기 등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중부지방에서는 터주라고 하여 뒤꼍의 장독대 옆에 짚주저리를 씌운 단지 안에 곡식을 넣고 집터의 터신으로 섬기고 있다. 호남지방에서는 이것을 철륭단지라고 부르는데,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가택의 수호신으로 서 성주가 있는데, 이것은 대들보나 대공에 한지를 접어서 신체로 삼는 경우도 있고, 마루 한구석에 큰 독을 놓고 그 안에 철따라 보리와 벼를 갈아 담아 두기도 한다. 영남이나 호남지방에는 대 개 한지보다는 성주독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전북지방에서는 안방의 윗목 시렁 위에 조상단지를 모시고 있는데, 상달에 단지의 곡식을 갈아 담아서 조상숭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조상단지라는 말은 중부지방에 많이 분포해 있는데, 영남에서는 세존단지, 호남지방에서는 제석오가리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 단지에 햅쌀을 갈아넣을 때, 단지 내에 있던 묵은 쌀은 남을 안주고 식구들끼리만 밥을 지어 나누어 먹는다. 묵은 쌀을 꺼낼 때, 그것이 곰팡이가 슬거나 썩거나 하면 집안의 흉조이고, 깨끗하면 집안의 길조로 여겼다. 그래서 신곡으로 갈아 담을 때는 쌀을 잘 말리고 정성을 다한다.
10월은 다양한 곡물을 농가마다 풍성하게 보유하고 있는 시기로서, 예로부터 다양한 시절음식이 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절음식으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0월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 번철(燔鐵)을 올려놓고 소고기에 기름· 간장· 계란· 파· 마늘· 고춧가루 등 양념을 하여 화롯불에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煖爐會)라고 한다. 이 달부터 시작되는 겨울의 추위를 막고자 예로부터 난로회를 시절 음식으로 즐겼다. 또 쇠고기· 돼지고기· 무· 외· 훈채· 계란을 섞어서 장탕(醬湯)을 만드는데, 이것을 열구자신선로 (悅口子神仙爐)라 하였다.
상고하면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북경 사람은 10월 초하루에 술을 걸러 놓은 후 고기를 화로에 구우면서 둘러앉아서 마시며 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 한다고 하였다. 또 상고하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10월 초하루에 유사(有詞)들이 난로와 술을 올리라고 하면 민가에서는 모두 술들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를 했다고 하며, 지금의 풍속도 그와 같다. 10월에는 메밀이나 보릿가루로 만두를 만드는데, 채소· 파·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두부 등으로 소를 만들어 싸고 이것을 장국에 익혀서 먹는다. 또 밀가루로 세모나게 빚은 만두를 만드는데, 이것을 변씨 만두라 한다.
그것은 변씨가 맨 처음 만들었던 까닭에 그런 명칭이 생겼을 것이다. 생각하면 사물기원(事物記原)에 제갈공명이 남만국의 맹획을 정벌할 때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남만의 풍속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신에게 바쳐서 제사하면 신이 받아먹고 음병(陰兵)을 보내 준다고 했다. 이에 제갈공명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양고기, 돼지고기를 섞어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모양을 만들어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신은 이것을 받아먹고 군사를 보내 주었다. 후인들이 이것을 만두라고 한다고 했다. 만두는 큰 소쿠리에 넣어서 찌므로 증병(蒸餠) 혹은 농병(籠餠)이라 한다. 또 후사정(侯思正)이 먹었을 때 반드시 고기에 파를 잘게 썰어 섞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멥살떡, 꿩고기, 김치, 만두가 있으나 김치가 가장 조촐하고 소박한 시절음식이다. 그 근원을 살펴보면 제갈공명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요즈음 반찬 중에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다.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 여기서 포라는 것은 두부를 말하며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신하 회남왕(淮南王)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고하면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이르기를 솥을 닦고 여기(黎祁)를 지진다는 글 뜻의 주(註)에 촉인(蜀人)은 두부를 여기(黎祁)라고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지금의 연포가 곧 이것인 것이다. 아직 자라나는 쑥을 뜯어다가 쇠고기와 계란을 넣어 섞어서 떡을 만들고 볶은 콩가루를 꿀에 섞어 바르면 이것을 애단자(艾團子)라 한다.
또, 찹쌀가루로 동그란 떡을 빚고 삶은 콩을 꿀에 섞어서 불그스레한 빛이 나게 만든 것을 밀단고(密團)라고 하며, 이 음식은 거의가 초겨울의 시절음식이다. 찹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하여 크고 작게 썰어서 이것을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면 누에고치마냥 부풀어오르지만 그 속은 빈 구멍이 난다. 여기에 흰 깨, 검은 깨, 흰 콩가루, 파란색 콩가루 등에 엿물을 뿌려서 붙인다. 이것을 강정이라고 한다. 상고하면 송나라 남전여씨(藍田呂氏)의 가품명(家品名)에 원양소(元陽蕭)가 바로 이것이다. 또 상고하면 중국의 병이한담(餠餌閒談)에 수병은 콩가루에 설탕 혹은 깨를 발라서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호마병(胡麻餠)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것도 역시 같은 떡 종류이다.
또, 다섯 색깔의 물들인 강정도 있으며, 잣을 다시 잣가루에 묻혀서 칠한 것을 송자강정[松子乾 ]이라고 한다. 그리고 찹쌀을 불에 살짝 튀겨 꽃 모양을 만들고 엿으로 붙인 것을 매화강정[梅花乾 ]이라 한다. 서울 풍속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 등으로 김장독에 김장을 담근다. 여름철의 장담기와 겨울철의 김장을 담그는 것은 사람들이 일 년 중의 중요한 행사계획이다." 당시의 시절음식은 이렇듯 다양하나 사회 문화적인 변화로 인해, 오늘날 먹거리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장은 오늘날 여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다양화되고 있다. |
손돌풍
손돌풍 -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혹은 손석풍이라 한다. 이는 이때가 되면 계절풍이 불고 몹시 추워지므로, 여기에 손돌의 이야기가 붙어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0월 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혹은 손석풍이라 한다. 이 손돌풍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 배경설화인 '손돌풍 설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 손돌목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손돌목전설·손돌전설이라고도 하며, 이는 음력 10월 20일께 부는 차가운 바람신인 손돌신의 신화이며, 경기도 김포군과 강화군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의 지명유래담이다. 손돌설화의 기본형은 손돌목·손돌무덤이 있는 강화·인천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손돌풍 설화의 전형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이 죽은 뒤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충성스럽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으므로, 그 뒤 이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풍이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게 되었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닷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가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부는 날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부들은 이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돌풍에 관해서는《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그 기록이 보이며《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0월 조에는 "강화도로 가는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그곳을 손돌목이라 한다. 그리고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막힌 곳을 목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란 자가 있었는데, 10월 20일 이곳에서 충성스럽게 죽었으므로 그곳에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불고 추위가 매우 극렬하므로 뱃사공들은 경계를 하고,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기후로 봐서 이때가 되면 계절풍이 불고 따라서 몹시 추워지므로, 여기에 손돌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서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
동지(冬至)
동지 -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고 한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 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고 한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다.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중국의《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다.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옛 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중국의《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동지팥죽은 절식이면서 동시에 벽사축귀逐鬼)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팥은 붉은 색깔을 띠고 있어서 축사(逐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疫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 데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린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 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한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한다. 이에 대해《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11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옛부터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전하여 온다. 전통사회에서는 단오가 가까워 오면 여름철이라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여름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되면 책력을 선사하는 풍속이 성하였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동지에는 절식(節食)으로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이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 오랜 풍속이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1월 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죽을 쓸 때 찹쌀로 새알모양으로 빚은 속에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먹는다. 또한 팥죽은 제상에도 오르며,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제거하기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쑨다. 이 단자를 '새알심'이라고 한다. 팥죽을 끓여서 먼저 사당에 올리고, 그 다음에 집안 곳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은 후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팥죽을 먹는다. 이 때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는데, 여기서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 라는 옛말이 비롯되었다. |
제석(除夕)
제석 - 일년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날 밤을 제석(除夕) 혹은 제야(除夜)라고 하는데, 이는 한해를 마감하는 '덜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일년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날 밤을 제석(除夕) 혹은 제야(除夜)라고 하는데, 이는 한해를 마감하는 '덜리는 밤'이라는 뜻이다. 제석의 풍속으로는 먼저 궁궐에서 지내는 '연종제(年終祭)'와 '묵은해 문안', 그리고 민간에서 행하는 '묵은해 세배'·'수세(守歲)'·'세찬(歲饌)' 등이 있다. 연종제와 묵은해 문안:연종제란 궁중에서 한 해가 끝남을 기념하여 지내는 의식으로, 조선조 말기까지 궁중에서 이 연종제 행사를 행하여 왔다.
이때 악귀를 쫓는다고 하여 여러가지 가면을 쓰고 제금과 북을 울리면서 궁안으로 두루두루 돌아다니는데, 이를 나례(儺禮)라고 한다. 이것은 1년 동안의 묵은 잡귀를 쫓아내고 새해를 깨끗하게 맞이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또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하였다. 지방 관아에서는 소총을 쏘고 징도 울렸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 정종(靖宗)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인데, 조선조 말기까지 궁중에서 행하여 졌다. 이에 대한 기록은《고려사(高麗史)》(卷六十四)에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조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실록 卷一三三) 동계대나의(冬季大儺儀)조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학자 성현(成俔)의《용재총화》(卷一)에 의하면 구나(驅儺)의 일은 관상감이 주관하는데, 섣달 그믐 전날 밤에 창덕궁·창경궁의 대궐 마당에 들어가서 하는 행사로, 그 제도는 악공(樂工) 1명이 창사(唱師)가 되어 붉은 옷에 가면을 쓰고, 방상씨 4명이 황금빛 네 눈으로 곰의 껍질을 쓰고 창을 잡아 서로 치고 지군(指軍) 5명은 붉은 옷, 가면과 화립(畵笠)을 쓰고, 판관(判官) 5명이 푸른 옷, 가면과 화립을 쓰며, 조왕신 4명은 푸른 도포·복두·목홀(木笏)로 가면을 쓰고, 소매(小梅) 수명은 여삼(女衫)을 입고 가면을 쓰되, 윗저고리 아래치마를 모두 홍록(紅綠)으로 하고, 긴 장대기(旗)를 손에 잡고, 12신은 각각 그 귀신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어 자신(子神)은 쥐의 형상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의 형상의 가면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며, 악공 10여명은 도열을 가지고 이를 따르는데, 아이 수십 명을 뽑아서 붉은 옷 붉은 두건(頭巾)으로 가면을 씌워 진자(振子)로 만들고, 창사(唱師)가 불러 이르기를, "갑작 (甲作)은 흉( 凶)을 먹고, 불주(佛胄)는 범을 먹고, 웅백(雄白)은 매(魅)를 먹고, 등간(騰簡)은 불상 (不祥)을 먹고, 남제(攬諸)는 고백(姑伯)을 먹고, 기(奇)는 몽강양조(夢强梁祖)를 먹고, 명공(明共) 은 폐사기생(集死寄生)을 먹고 위함(委陷)은 츤을 먹고, 착단(錯斷)은 거궁기등(拒窮奇騰)을 먹고, 근공(根共)은 고(蠱)를 먹을지니 오직 너희 12신은 급히 가서 머무르지 말라. 만약 더 머무르면 네 몸을 으르대고 너의 간절(幹節)을 부글부글 끓여 너의 고기를 풀쳐내고 너의 간장을 뽑아 내리니 그때 후회함이 없도록 하여라" 하는데, 진자가 "그렇게 하겠나이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복죄(服罪)하면 여러 사람이 "징을 치라" 할 때 이를 쫓아낸다 하였다.
결국. 대궐과 관아에서의 이와 같은 풍속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관상감에서 행하였던, '대나 (大儺)'라는 의식의 유속(遺俗)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선조 말기까지 섣달 그믐날 조관(朝官) 2 품 이상과 시종(侍從) 신하가 대궐에 들어가서 묵은해 문안을 올린다는 기록이《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전한다. 대청소·세찬 만들기. 제석 다음 날이 바로 설날이다.
그래서 제석에는 설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데, 이를 세찬(歲饌)이라 한다. 이 세찬은 살림살이의 정도에 따라 또는 차례를 지내는 집과 안 지내는 집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흰떡은 옛날에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자루 달린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떡가래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떡 방앗간에서 뺀다.
한편 옛날 제석에는 상사나 친척 또는 친지들에게 세찬으로 쓰는 생치(生雉)·전복·어란(魚卵) ·육포(肉脯)·겸자( 子)·곶감·대추 등을 선물하여 문안하였고, 지금은 주로 고기·생선·과일 ·술 등을 보내서 인사한다. 주부들이 세찬을 만들 때 남자들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외양간을 청소하고 거름도 퍼내며 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렇게 하면 묵은해의 잡귀와 액은 모두 물러가고 신성한 가운데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섣달 그믐날 저녁에 사당에 절하고 설날 세배를 하듯 어른들에게 절을 하는데 이를 '묵은세배'라 한다. 그런데 이 묵은세배는 가까운 사이에만 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시집간 딸들이 친정 부모나 친척집에 가서 세배를 하는 것을 '망년과세(忘年過歲)'라고 한다. 전라도 진도 지방에서는 설을 앞두고 '몇뱃기'라 하여 자손들이 시부모나 친정 부모에게 음식을 차려 가지고 '名日이바지'를 한다.
이 날 밤에 방, 뜰, 부엌, 곳간, 변소 할 것 없이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 놓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수세(守歲)라 한다. 이는 잡귀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며, 부뚜막 솥 위에 불을 밝히는 것은 조왕신을 위한 것이다. 이 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밤새도록 윷놀이를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운다.
충북에서는 한 해가 마지막 가는 밤이니 집에서는 저녁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며, 바느질하던 것도 해를 넘기지 않게 한다. 전북에서는 이 날 밤에 잠을 자면 굼벵이가 된다고도 하며, 시루떡을 해서 방안에 놓고 밥그릇에 쌀을 담아서 등잔불을 켜 놓아 불똥앉는 것을 보며 재수를 본다. 또 샘에다 바가지에 참기름 불을 만들어 띄운다.
옛날 궁중에서는 제석날 70세 이상 되는 조관(朝官)과 명부(命婦)에게 쌀과 생선 등을 하사하였다. 이 날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벽온단( 瘟丹)이라는 향을 만들어 임금께 진상하면 설날 이른 아침에 그 향한 심지를 피웠다. 항간에서는 간혹 잘 만든 빨간 주머니에 이 향을 넣어서 차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석에는 한 해의 마지막 가는 날이므로 그 해의 모든 빚을 청산한다. 그래서 이 날은 빚을 갚고 또 빚을 받으러 다니는데, 만일 이 때 청산하지 못한 빚이 있으면 정월 보름까지는 갚지도 않으며, 갚으라고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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