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 해주오씨 오정방 묘역(어머니의 위대한 힘)과 고택
1. 해주 오씨
해주오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로 향파와 경파가 있다. 향파는 오총이 500년경 중국에서 건너와서 경남 함양에 살다가 귀국하고 그 24세손 오현보가 1216년(고려 고종) 거란군을 격퇴한 공로로 해주군(海州君)에 책봉되고 향파의 기세조가 되었다. 경파는 송나라 대학사 오인유가 984년(고려 성종) 해주(황해도)에 정착하고 기세조가 된 계파이다. 양파는 통합을 시도 하고 있으나 서로 연결시킬 상계를 찾지 못 하여 통합을 이루지 못 했으나 인구와 급제자수 등 통계는 합쳐서 계산하고 있다. 인구는 46만(2015년), 상신2, 대제학2, 문과급제99, 무과267명이다.
2. 정무공 오정방 가계
* 해주오씨 중 현달한 인물이 많은 파는 경파이고 그 중에서도 오인유의 14세손 추탄공 오윤겸과 역시 14세손인 정무공 오정방의 후손이다. 두 사람의 상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6세손 오효충이 오사렴과 오사운을 낳았는데 오사렴의 후손에서 오윤경(영의정, 후손 중 오도일, 오명항이 유명)나고 오사운의 후손에서 오정방이 나왔다.
* 정무공파는 문과18, 무과107, 음서143명을 배출하였으니 세도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번성의 발복처는 어디인가? 선영은 안성 칠곡리 고성산 동남쪽에 있고 세거지는 바리봉 아래 오정방 고택일원이다.
* 14세손 정무공 오정방(吳定邦,1552~1625, 貞武公, 오수천의 아들인데 숙부 오수억에게 양자)은 무과와 문과에 급제하고 임란 때 의병 수천명을 거느리고 영흥전투에서 승전하였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인조때에 복직되고 74세로 졸(卒)했다.
후손 중 증손 오두인(1624~1689, 형조참판, 숙종때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중 사망)과 고손 오태주(1668~1716, 부마)가 유명하고 오태주의 아들 오원과 손자 오재순은 모두 대제학이고 성리학자 가계로 유명하다.
* 전후 가계를 보면, 10세손 오계종(吳戒從, 사천현감)---오현경(?~1525 吳賢卿, 전생서주부)외---오경운(?~1525 吳慶雲, 사온서직장, 配 풍산심씨?~1568)---오수천(1516~1586, 충무위부호군), 오수억(1519~1594, 무과급제, 경상좌도수군우후)---14세손오정방(吳定邦)---오사겸---오숙(1592~1634,경상도관찰사), 오빈---오두인 외---오태주(1668~1716, 부마) 외.
3. 오정방 묘역(안성 양성면 덕봉리 산47-1)
* 오정방 묘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정무공파의 종산으로 많은 묘가 쓰여있다. 이 묘역에 제일 처음 들어온 묘는 정무공의 증조 오현경과 조부 오경운인데 그 연유는 입구에 있는 오경운의 부인 풍산심씨에 관한 은공(恩功)비문에 적혀 있다. 요약하면, 풍산심씨는 1525년 시아버지 오현경과 남편 오경운이 유세창 역모에 몰려 견남 산청에 유배중 사망하자 당시 10세와 7세된 두 아들(오수천과 오수억)을 데리고 산청에 내려가 시신을 거두어 친정의 고향인 안성 덕봉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두 아들을 잘 교육시켜 효부 열녀 자모의 역할을 다 하였다.
* 묘역의 중국지도---심씨 부부묘, 시아버지 묘가 있다.
* 묘역 소국---오정방은 중등초급이고 오두인은 초등급이며 나머지는 모두 평범하다. 오빈(진주목사)의 묘를 좋게 평하기도 하는 데 후손의 발복이 다른 형제보다 뛰어나지 않는다.
* 오정방 묘---혈처에 비하여 객산인 안산이 더 웅장하고 화려하므로 조화롭지 않다. 당판이 변경되어 정혈을 알기 어렵다.
4 오정방 고택(덕봉리246)
* 1515년 건립된 이래 병마절도사 오정방, 오사겸(1573~1627 증좌찬성), 오숙(1592~1634 경상도관찰사) 4형제, 오두인(1624~1689 증 영의정명사)를 배출했다. 덕봉리252에 건립된 것을 지금 위치로 옮겼다. 여기서는 서쪽 대이산이 보여야 좋으므로 현 위치가 좋고 오빈의 묘에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격이 떨어진다.
* 아래에 있는 선비마을은 선비의 기상이 있고 가까이에 비옥한 농토가 있어서 살기 좋은 명당이다.
* 추탄공 오윤겸이 용인에 세거하게된 것과 정무공 오정방이 덕봉에 자리잡은 것은 모두 외가의 덕택이다. 해주오씨들은 원래 무관의 집안이었는데 추탄공과 정무공 때부터 문인으로 전환하여 요직에 올랐다.
5. 발복처는 어디인가?
* 오정방을 배출하기까지는 심씨 할머니의 정성이 기반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고택이 발복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2024,6)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현경묘소가 고성산의 정룡인 돌혈로 보이는데 👀
오현경 묘는 높은 봉우리에 맺혔으므로 돌체로서 주위에 바위가 있거나 가지가 몇 가닥 있어야 됩니다. 높은 곳에는 비룡혈이 제격이 인데 오현경 묘는 봉우리가 너무 순합니다. 이건 저의 의견입니다.^^
오사겸묘가 오정방묘보다 좋아보였는데 공부가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어느 묘가 좋다는 느낌이나 식견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첫 계단을 밟고 올라 선 것입니다. 아마 안산이 오사겸 묘보다 아버지 오정방 쪽이 좋은 듯 보였고 기운도 오정방 쪽으로 내려온 것 같아요.
님은 내가 풍수계의 꿈나무로 점찍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 정진하세요 ^^ 대성하려면 프로로 데뷔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