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창원군의 지역의 정치변화
지역에 미군정이 완전히 장악한 것으 11월에 들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8월15일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에는 이미 지역에 인민위원회, 치안대, 산업체 관리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이 결성되어 각자의 임무에 들어갔다. 각자의 임무란 인민위원회는 행정, 치안대는 질서 유지, 산업체 관리(자주관리 조직)위원회는 일제가 남기고 간 공장의 재산을 지키고 가동시키는 일, 노동조합은 정치적인 노선 설정, 농민조합은 일제가 남기고 간 토지의 수확과 보상문제와 소작료의 책정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결성되었다. 물론 중앙정치의 차원에서는 지하 공산당 운동을 한 박헌영, 건국준비위를 꾸린 여운형, 임시정부의 김구와 이승만 등의 해외세력 등이 있었고, 지역에도 이에 상응하는 세력이 결성되고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겪지만, 적어도 1945년도에는 지역은 서울 만큼 파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벌써 1946년에 접어들면, 북한에서 시작한 농지개혁(완전한 농지개력이라기 보다는 몰수한 토지에 대한 무상분패 형식)에 자극받아 남한에 북한에서부터 대거 이주하고, 이들이 반동세력하는 양상이 들러난다, 물론 농지개혁에 대한 지역내 갈등을 1949년에 매우 심각해 지지만 이때 부터 그 싹을 키워나간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당시 창원군지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극진적인 사상과 조직이 일찍이 발달한 지역으로 지적된다. 즉 인민위와 치안대의 조직이 면, 리 단위까지 조직되었고, 1946년 10월 6-7일의 폭동시기에도 12명의 민간인이 죽고, 경찰도 죽고 많은 이들이 다치고, 파출소의 상당수도 불탄다. 약 6천여명이상이 참여한 시위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인구를 6만명 미만으로 친다면, 전체거주자의 10% 정도, 아니 성인인구의 20-30%정도가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성인 남성인구로 따진다면 거의 반수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마산의 10월 폭동열기는 죽은 이들 숫자만 따져본다는 진주와 같지만, 대구 폭동의 열기를 5일후에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가열찬 투쟁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마산, 창원, 진해, 함안지역이 다른 경남 지역에 비해 급진적인 사상과 조직이 잘되어 있는 지역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아직 초보적이다.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도시화, 이에따라 북한, 일본에서의 인구이동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앞선 선진적인 사고방식과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정세를 파악하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이들에게는 당시로서는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삶을 살아갔다는 점에서 극진적인 사회비판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에 나타난 많은 조직의 대표자나 임원의 명단이 나중에 연결되지 않는 점을 보면 당시에 극진적인 조직에 가담한 이들은 이어지는 정치정세 속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군 40사단이 경남을 지배했고, 하리스 사단장이 경남지사의 역할을 하였으며, 지역의 군수와 시장에는 일제시대에 관료들을 대부분 임명하였고, 창원군수에는 일제시대 김해군수가 임명되었다. 마산을 대표하는 미군정의 자문회의에는 명도석선생님이 뽑히셨다. 명도석 선생님의 기념비는 수출자유지역에서 봉암다리 가는 방향에 왼편에 커다란 비석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이미 1945년 10월경부터 우익인사들은 따로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명단은 남아있고, 이들은 나중에 마산시장 등의 중요보직을 맡은 사람들이 많다. 신흥방직에 근무한 사람의 구술록에 따르면, 신흥방직은 산호리에 1만여평의 규모로 20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미 자치관리 조직에서 관리를 하고 있어서 이를 물리치고 미군정에 새로인 관리인을 뽑은 것으로 되어 있다. 1946년에는 신흥방직에도 노동자들이 들고 있어나 위기가 있었으나, 우익 조직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무마된 것으로 기록한다.신흥방직에는 대부분 한국말도 잘 못하는 일본에서 건너온 젊은 처녀들이 일을 한 것으로 증언한다.
해방공간 그리고 미국의 지원하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시공간에서 창원군 지역(마창진, 함안)에서 벌어진 계급간 갈등을 보기로 하자. 해방공간은 한마디로 일본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성하던 커다란 축이었던 대규모 지주와 자본가계급이 사라지고, 그 대신 조선족 위주의 소규모 자산가와 소작인과 자유 노동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으로 급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해외에서 들어온 남한 전체 인구의 10% 이상에 달하는 해외 귀환민들(만주와 일본)과 이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있다. 해외 귀환동포들 역시 홀몸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고, 이북의 피난민 역시 그곳에서는 지주였을지 몰라도, 일단 남한에서는 무산자계급올 바뀐 사람들이다. 이에 더하여 식민지 치하에서 대자산가 계급을 이루었던 일제에 대항하여 상당수의 소규모 자산가 계층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있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이들 역시 해외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공장이나 군대나 조직에서 일한 경험을 갖고 있고 국내인들보다는 세계적인 정세나 정보를 보다 보편적으로 갖고 있던 사람들이다.
농지개혁이 북한에서는 1946년도에 적산이나, 친일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시행되었다면, 남한에서는 1948년도에 일단 적산에 해당하는 토지에 대한 정리가 시작된다. 물론 일반적인 농지 개혁은 1950년 봄에 시행된다. 적산 농지에 대해서는 마산부(마산시)에서 12월달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산호동에 있는 수만평의 일본인 소유 토지에 대해서 마산 부호 김모 구모씨가 40여명의 소작인의 토지를 가지려다가 드러난 사건이다. 당시에 적산 토지에 대해서는 토지행정처에서 관할하고있었고, 원칙적으로 토지는 경작하던 이에게 불하하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적산 불하를 둘러싼 사건이라고 볼수 있다.
1948년 11월에 들어서면 토기개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사 시작되고 이에 대항하는 운동도 본격화된다. 마산에서는 11월 27일에 회원동 거주 권승달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한민국 지주권 옹호동맹이 결성되어 선언문을 발표한다. "헌법에 기재된 자유 평등의 민주주의적 현제도를 반대하며, 지주 등의 특권 계급의 존재를 주장하고, 토지국유화는 절대로 반대하고, 토지매상에 대하여 공정을 기해야 할 것, '뺏기고 죽으나 굶어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해보자! 해보자!"고 주장한다. 이후에 구인옥, 김성동 등이 추가하여 지주들을 모으다가 1949년 1월에 발각된 사건이다. 따라서 마산에서도 토지문제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적산 토지를 둘러싼 문제도 심각할 수 있지만, 농지 문제에 비해서는 사회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949년 12월이 되어서야 귀속재산 처리법이 제정되었고, 이미 신흥방직이 노동자 관리에 있었으나, 이미 상공부직속으로 바뀌고 상대적으로 다른 적산 공장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산 기업중 현재까지 존속중인 것은 산읍 주조가 무학주조(당시에는 대표로 이병각), 산전 장유가 몽고 장유(사장 김홍구)정도가 이름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최근까지 남아 있던 이름은 복정 장유가 불로장유(대표 최우열), 조선물산이 고려모직(대표 한태일) 등이 있었다.
창원군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익 활동이 활발했다고 볼수는 없다. 즉 1948년의 2월 7일 구국파업, 4월 3일의 제주 사건, 10월의 여순반란사건을 위시한 군인들의 반란, 이 과정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구성된 남부군 등의 한국사의 역사에서 본다면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편이다. 그러나 남조선 노동당의 흔적은 조금씩 보인다. 대검찰청 좌익사건 실록에 기록된 것은 2건이 보인다. 1948년에 남로당 마산시 경양고무공장(고무신 공장?) 세포사건, 그리고 1949년 2월에 발생한 창원군 창원면 소계리에서 발생한 남로당원의 불온 비라 살포 사건이 있다. 그리고 49년 12월 7일 오전 10시에 부림 극장에서 보도연맹 마산지부 결성식이 거행된다. 실제로는 이들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가입되거나 아니면, 비료와 밀가루 배급을 미끼로 가입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상식적으로는 1948년 11월부터 발효된 국가 보안법이 1949년 1년 동안 11만여명 이상을 검거한 상황에서 좌익이라고 스스로 가입하였다는 것은 좀 무리한 사고방식인 것 같다.
1949년 11월 18일에는 마산 형무소(구 한국은행 자리)의 죄수 100여명이 양덕동에 소재한 형무소 작업장인 벽돌공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오후 4시 20분경, 죄수 68명이 간수들에게 덤벼들어 무기를 탈취하고, 내서면 안성리 뒷산과 북면에 있는 2금강산(현재 하이트 소재한 산)으로 도망쳤다. 이에 당시 보병 356부대장 김종원 육군 중령이 경찰, 지방 청년단과 합동작번을 펼쳐서, 사살 3명, 체포 28명, 무기 장총 2정을 빼았았다고 한다. 결국 37명은 그대로 도망에 성공한 것 같다. 이들 죄수에 대해서는 김종원 중령은 "대부분이 좌익 극렬 분자의 주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확하게 이들을 알수는 없지만, 당시에 전체 검찰의 검거자 80%이상이 국가 보안법 위반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튼 국가 보안법 위반자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김종원 중령은 1949년초(아니면 1948년 말)에 마산에서 창설된 16연대 부연대장으로 등장한 사람이다. 김종원은 1949년초부터 시작된 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일본군으로 근무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기관총을 단 짚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반민 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권총으로 쏘아 죽이겠다"고 말하던 사람이다. 반민 특위는 1949년 5월 27일에 반민특위 김지홍 조사관이 진해에서 일제시에 "다년간 고등형사로서 동족을 울리고 갖은 형벌로 극형을 감행했던" 오갑수를 체포하고, 29일에는 마산 출신으로 일제시에 사법형사로 재직하고, 퇴직후에는 일경관과 내통하여 부민을 밀고한 장자관의 피해자 증언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면 1949년 상반기에 김종원은 피체포를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후에 194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 이미 반민특위는 흐지부지해지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하부 상호 감시조직으로서 민보단이 1948년 12월에 결성된다. 공식적으로 국사 책에는 1948년 5월 선거를 앞두고 향보단이 설립되고, 민보단은 1950년에 설립되었다고 되어있는 신문 기사에는 마산에 민보단이 1948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와서 이것이 옳을 것으로 본다. 각종 정당이나 정치 하부 조직외에도 대한청년단이 1948년 말에 세워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국민운동조직 또는 정권의 전위조직으로서 행정과 사법을 넘어서는 활동을 하는 조직이다.1949년 12월 12일에 나온 기사는 대한청년단 창원군 대산면 단장에 대한 것인데, 주로 주민 착취, 특히 좌익 색채가 있는 주민을 대상으로 소를 빼앗는다거나 협박하여 쌀보리, 현금, 나락 등을 빼았는 방법으로 착취를 일삼고, 또한 청년단의 운영비명목, 구전금 명목으로도 착취하고, 정부를 대신하여 나뉘어주는 세농민을 위한 구호미도 횡령한다. 현금만 대강 계산하여도 10개월간 540여만원을 착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48년에 대통령 월급이 5만원이었던 상황, 그리고 소 한마리가 7만원 정도엿던 것으로 보면, 80여마리의 소를 착휘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의 청년단장의 위세를 알 수 있다.
1950년 초에 농지개혁이 이루어 진다. 이 농지개혁은 불완전하다는 평가가 붙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지주계급의 정치적 기반이 몰락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지주계급은 민족주의와 당시에는 이승만에 대결하는 세력이었다. 강력한 지주계급 세력에 대항하여 이승만은 친일분자, 새로이 등장하는 상공인 세력을 등에 엎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1948년, 1950년 5월 3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아직도 이승만이 다수를 점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