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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료 일반 스크랩 참된 예배에 대한 성경적 고찰
서재생 추천 0 조회 20 15.12.13 16: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참된 예배에 대한 성경적 고찰

 - 박 양 수 -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사람은 예배의 의미를 알지못하고 교회당에 간 것이다. 신자가 교회당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3-24절 말씀은 신자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참된 예배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은 참된 신자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과제이다.

한국교회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성장의 둔화와 지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해 오는중 열린예배 혹은 음악예배가 여기에 가장 합당한 대안으로 자리맥임을 하여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또 다른 물결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예배 형태를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새들백 교회)직,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예배갱신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여기에 몇몇교회들이 이러한 예배형태를 21세기 교회성장 혹은 예배 갱신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열린예배의 수용여부는 상당한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기에 필자는 성경을 중심으로 성경적 규범들을 가지고 논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1. 예배의 정의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를 정의한다면 조물주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신자가 존경과 경외감을 가지고 최상의 존재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소유(몸과 마음과 물질)를 드려야 한다. 만약에 무엇을 얻고자 하여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에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 없다면 그 사람 마음 속에는 불만과 불평이 가득체워져 돌아 갈 것이다.

이렇게 예배의 의미를 잘 못알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가끔 교회에서는 분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이 말씀에서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신 그 분에게 예배하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다. 그러면 신령은 무엇이며 진정은 무었인가? 여기서 신령과 진정의 의미를 분명히 알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신령이란 말씀은 신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성령과 말씀에 감동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진정이란 말씀은 인적인 요소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처드리는 예배이다. 신자가 예배를 드릴 때 신령한 제단과 같이 되는 것이다. 제단은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곳이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서 하나님의 제단앞에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예배하는 사람이 모형적 제물이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참된 예배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이렇게 영적예배, 즉 신령한 예배는 예배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드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의 재물로 돌아가신 것처럼 예배하는 사람이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고 지엄하시고 경의로우시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매우 엄숙하고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은혜(영적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차 후에 있을 일이고 먼저는 이 일을 생각하기 전에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

주1) 열린예배란?

일명 구도자예배라고도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든간에

그들이 좀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스타일을 말한다.

 

2. 신령과 진정이 없는 예배

요한복음4장 22절에 예수님께서“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라고 말씀하신다.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는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잘 알지못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인 예배였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가 있었을 것이다.註2) 요한복음4장 22절 하절에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 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유대인의 태도는 사마리아인들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마6장1-8절을 보면 그들은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였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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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의 성전은 B.C 125 년에 파괴되었지만 그들의 예배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은 겨우 400명정도의 사마리아인들이 생존해 있지만 그들의 성일에 그리심산으로 가면 모세의 율법시대에 행했던 것과 꼭같은 방법으로 동물들의 배를 가르는 것을 볼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열광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지식이나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참된예배, 죤맥아더 지음, 두란노서원)

 

3.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4장 24절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신령으로 예뱌하는 방법에 대해 몇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려면, 1)성령에 사로잡혀서 드려야 한다.

고전2:11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으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셔서 우리 마음을 자극하고 우리 마음을 움직이며 우리 마음을 깨끗이하며 우리 마음을 가르치지 않는 다면 신령한 예배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령께서 예배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배하기 전에 성령님께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신령한 예배를 드리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2)진리에 사로잡혀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는 것으로부터 예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포하는 설교(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처서 힘써서 드리는 것이다.

3)회개하고 드려야한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죄를 마음에 품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회개한 후에 드려야 한다.

 

4. 열린예배란?

“열린”이란 말은 한국의 전환기적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해주고 있는 말이다. 군사독재시대를 벗어나 6,29선언 이후 민주화를 맞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열린 정부로 “열린”이라는 말은 사회 전반에 걸처 통용되고 열린교회는 물론 심지어 열린슈퍼 열린약국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열린이란 말은 문턱을 낮추고 대중 속으로 전염병처럼 파고들면서 흙백이 희석되는 회색지대를 산출해 내면서 거룩성을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거룩한 교회 로써는 상당한 혼란과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열린예배는 풀러신학교를 중심한 몇몇 성장을 목표로하는 교회들(빈야드,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새들백)이 예배 형태를“구도자예배 로 드리는 것을 한국의 몇몇 교회가 받아드리면서 시작 되었다. 이 열린 예배는 현대문화의 수용을 통한 예배형식의 대중성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근본 동기는 선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즉, 현대의 대중문화와 음악을 통하여 불신자들을 쉽게 교회에 접하게 함으로써 복음전파를 하는 선교방법의 하나로써 경배와 찬양 안무와 율동 전통가락의 수용, 드라마,다중매체를 예배에 사용하는 형태를 총칭하여“열린예배”라고 부른다. 註3) 이처럼 한국의 시대상황과 교회 성장의 침체속에서 교회 성장의 또 다른 대안으로 열린예배가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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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1997년 4월호 특집(열린 시대를 위한 열린예배론)

가운데 김만형의 글 “구도자 예배란 무엇인가”(p40-46 참조)

 

5. 예배개혁의 필요성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청교도들의 외침속에서 예배 개혁은 언제나 교회개혁의 중심에 서있다.한마디로 교회개혁은 예배개혁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교회개혁은 중세기 교회의 예배의 남용과 오용으로부터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예배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다. 웨스터민스터 요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불러내신것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였고, 우리를 사망에서 불러내신것도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성도의 할 일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리며 예배를 드릴것이다.(계4:10-11절)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예배가 어떻게 드려져야 바른예배를 드릴것인가를 생각하고 염려할 때 예배개혁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존엄하고 지고한 행위이며 최고의 행위이기 때문에 예배의 목표를 교회부흥과 성장에 맞춰서는 안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급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드려야할 예배의 법칙(모범)을 주셨다.註5) 이 법칙은 천지는 없어져도 세세무궁토록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자기백성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예배개혁은 교회성장 쪽으로 목표를 정하고 개혁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처주신 법칙(말씀)쪽으로 목표를 정하고 개혁되어야할 것이다. 원칙을 벗어난 예배는 혼란을 가져오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인본주의와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를 가져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 사데교회와 같은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딤후3:5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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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서 1장은 번제장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로 구원받는 과정과 오늘날 성도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당한지를 가르처주고, 2장은 소제장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순수한 봉사의 자세를 가르처주고, 특히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처 주고 있다. 3장은 화목제장으로 화합과 친교의 성격을 가지는 장이다.

이 제사는 즐거운 축제이며 경건한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자원하여 바치는 감사와 찬양의 제사이며 하나님과 평화의 교제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제사이다.그러므로 화목제는 오늘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목사와 화목하고 성도끼리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는 원리를 가르처주고 있다. 4장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은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 제사로써 제사장을 위한 속죄, 회중을 위한 속죄, 족장을 위한 속죄, 평민을 위한 속죄로 4가지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속죄제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서 벗어난 모든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기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5장14절 부터는 속건제의 규례인데 이는 사람이 살면서 부지중 또는 무심중에 지은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도 이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이다.

 

6. 개혁자(청교도)들의 예배

청교도들의 예배는 칼빈주의 또는 언약신학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이 신학은 윌리암 퍼킨스(1558-1602)註5)와 그의 제자 윌리암 에임스(1576-1633)註6)그리고 윌리암 에임스의 제자인 존 카튼( 1584-1652)註7)과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164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註8)에서 공식화 되었다.

청교도들은 오직 성경이 최고의 유일한 예배의 표준이라는 주장에 있어서 칼빈을 따랐다. 이에 대한 두가지 이유 중 한가지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전통들과 고안한 방법들은 성경의 명령에 위배되는 완전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예배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항들과 교훈들은 성경에 담겨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성경은 믿음과 구원과 도덕의 부분적인 규칙이 아니라 완전한 유일의 규칙이라고 했다. 예배는 말씀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하며 그렇치 않으면 예배를 드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특히 코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척도에 따라서 드려야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경을 통해서 예배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것도 예배에 포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고 불로 태워 죽였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제사” 하였기 때문이다.(레10:1-2)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인간의 고안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코튼은 예배에 인위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 예배를 개혁코자 하였다. 신약의 예배는 외형적인 장엄한 의식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한다.

왜냐하면 신약의 예배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대속사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신약의 예배는 율법의 그림자나 세상적인 화려함, 또는 육체적인 우수성“과는 무관하며, 오히려“질서와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구약적인 예표와 상징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코튼은 예배의 영적인 면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도덕적이며 영적인 의무들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코튼은 인간의 고안에 의하여 예배를 드리거나 외적인 의식을 예배의 본질로 생각하는 자들의 예배는“예배가 아니다”라고 했다. 더구나 이러한 예배는 “진리의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지 않고 다만 거짓된 예배일 뿐 이라”고 했다. 또한 이같은 예배는 신비주의적이며 상장적인 의미와 그림자뿐인 미신에 불과하며 성경에도 맞지 않는 예배라고 했다.

코튼은 초대교회 예배를 소개하면서 간단한 예배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는 초대교회성도들이 드리던 예배는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를 취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단순한 예배 모범을 뉴잉글랜드에 소개 했다. 기도로 예배를 개회하고, 시편찬송을 부른 후, 성경을 봉독하였고, 봉독한 성경으로 설교했다. 설교를 통하여 본문울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도록 권면했다.

그리고 설교에 대한 질의 문답이 있었고, 연보가 있었고, 축도함으로 해산했다.코튼은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철저히 지키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게 가르치고 보급했다.개혁자들의 예배는 설교중심이였다. 예를 들어 1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40-50분을 설교하는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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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퍼키스 목사는 영국 청교도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지성을 갖춘 뛰어난 신학자로 그리스도 대학의 연구원이자 세인트 앤드류 대학의 강사였으며 설교는 명쾌하고 실제적이며 매우 능력이 있었다. 註6)1579년 그리스도 대학에 진학하여 1601년 졸업과 동시에 대학 연구원으로임명되고 1607년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그 대학 강사로 임명된다.

그는 영국교회의 문제가 중세의 사변적인 신학을 고수 하면서 미신적인 에배를 드리고 있는데 있다고 보고 강의와 설교를 통해서 교회안에 남아있는 로마 카로릭교회의 잔재를 제거하고 성경적인 예배를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註7)1584년 12월 4일 영국의 더비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하여 1602년 학사, 1606년 석사학위를 받고 그대학 선임연구원이 되었고 임마누엘 대학 강사가 되었다.

1610년 목사안수를 받고 설교하는 일에 전력했다.그의 설교는 양심에 호소하며 신앙과 생활의 일치와 생활의 변화를 촉구했다. 박해를 피해 1633년 9월 4일 신대륙 메사추세츠의 보스톤에 도착했다. 註8)영국 웨스터민스터에서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22일 동안 계속된 개신교회의로써 여기에 파송된 총대는 잉글랜드에서 120명이였고,스코트랜드에서 파송된 총대는 6명이였다.

특히 스코트랜드에서 파송된 총대중 4명은 목사이고 2명은 장로였는데 길레스피,핸더슨, 로버트 베일리,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였으며 장로총대로는 메이트란드와 아카발드 존스톤이였다. 특히 사무엘 루터포드와 길레스피 핸더슨 목사는 잉글랜드에서 파송한 120명의 총대를 압도하면서 회의의 주도권을 잡고 대,소리문답을 작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들은 존 낙스의 후예인 언약도들 이였다. 註9)"청교도예배" p33-34 (홀튼 데이비드 저, 김석한 역 1999,6,30 기독교문서선교회) 註10) 코튼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을 성수 하였다. 토요일 저녁 식사 후 가족 예배를 드렸는데 그 날은 다른 날 보다 성경 강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했다.

예배 후 자녀들과 하인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첬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예배를 드렸고, 서재로 돌아가서 교회 종소리가 날때까지 거기 있다가 재 종소리가 나면 강단으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서재로 돌아가 서재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후 저녁 예배 종이 울릴 때까지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보냈다.

저녁 예배가 끝난후 작은 기도실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저녁 식사뒤 가족 예배를 다시 드리고, 이 때 부르는 찬송은 시편찬송이였다. 침실로 가기전 다시 서재로 돌아가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첬다. 이 같은 일을 계속 하면서 주일을 성수하였다.“청교도와 교회개혁”오덕교 지음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1994,10.31, pp228-241참조

 

7. 개혁자들의 예배와 설교

개혁자들의 예배 중심은 설교(말씀)중심이였다. 그들은 매우 균형 잡힌 설교를 했다. (1)본문에서 성경이 직접 강조하도록 설교했다. 이들은 본문이 결정되면 성경을 이것 저것 끌어내어 복잡하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강조했다.

예를 들면 죠나단 에드워드의 “하나님의 손안에 든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할 때는 천국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설교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과, 예수는 믿어도 육신 본의로 잘 못 믿는 사람들을 회개 시키기 위해서 한 설교이기 때문에 시종일관 지옥과 지옥 불과 지옥에 고통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다.

(2)설교 속에 교리를 주입시키므로 체계를 이루도록 했다. 모든 설교 속에 핏줄처럼 교리가 숨어있으며 신앙을 바로 세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이단과 사설로부터 굳게 서게 했다. (3)바른 생활로 실천 할 수 있도록 했다. 균형잡힌 교리가 들어있는 설교는 균형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설교 내용은 미래지향적인 설교였으며 예언자적이였다.다시 말하면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설교하지 않고 닦아올 세계와 그 세계를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장차 가야할 천국에 대한 꿈과 소망으로 심령에 가득하도록 설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속에서 실천 하면서 정직과 성실과 청렴하게 살도록 가르첬다.

그들은 자신이 검증되지 않은 설교는 하지 않했으며 자신이 실천 불가능한 설교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히 앞선자로써 신앙과 행위에 모범을 보이며 설교와 생활을 일치시켜 성도들도 그 같이 행하도록 설교 했다. 그렇게 한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본문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성경적이 아니라 성경의 방법으로 행해야 성경적이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서 땅에것을 설교 하고 있는지 하늘에 것을 설교 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엄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설교의 기법으로는 평이체(Plainly)설교를 했다.

다시 말하면 쉬운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했다. 개혁자(청교도)들은 대부분 목사이면서 대학(옥스포드나 캠브리지)교수 였으며 헬라어나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유치하고 단조로운 문장으로 설교를 했으며, 다만 그들의 설교는 매우 논리 정연하여 설득력이 있고 보편적 이였다. 왜 그런 방법을 선택 했을까? 그 이유는 영혼을 사랑하고 구령열정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아이, 어른 유,무식한 사람 노인 빈부귀천 할것 없이 모두 하나님으로 받은 영혼이 있는데 범죄한 영혼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에는 어른만 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가족과 교회 구성원은 다양하기 때문에 이렇게 쉬운 설교방법을 선택해서 아이들까지도 설교를 이해하고 들을수 있도록하여 거듭나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의 설교 방법을 통해서 볼 때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고 자기들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교회들이 단지 구원 중심의 십자가적 구원 사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실천하는 성화적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구원 설교에 치중하여 윤리적인 삶에 치중하지 못하고 은사 중심적인 신앙과 초자연적인 기적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자기중심 기복신앙을 부추겼기 때문에 성도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어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교회사 속에서 설교

죤 코튼은 교회 역사를 설교사로 해석 하면서 크게 3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던 초대교회 시대이며, 둘째는 말씀의 빛이 감추어져 무지와 미신이 왕 노릇 하던 중세시대, 마지막으로 말씀이 다시 부흥하여 모든 교회와 국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게 될 교회 개혁시대라고 했다. 코튼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충만한 시기였다. 성도들은 기도를 통하여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말씀으로 양육되었다.

설교자들은 단단한 말씀으로 교회를 양육했다. 이같은 설교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같은 설교자들에 의하여 계승 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에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어 로마 천주교회가 성도들을 지배하면서 말씀의 암흙기가 시작되었다. 스콜라 철학자와 교회 법학자들과 수도사와 수도승들이 이교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교회에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점차적으로 어두어졌다. 이와 같이 무지는 중세 1000년을 지배하면서 미신과 우상숭배로 모든 것을 그릇되게 인도했다. 그러나 교회개혁과 함께 강단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면서 복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주: 오덕교, <청교도와 교회개혁>, p, 172) 그러므로 코튼은 교회개혁은 설교의 개혁이라고 했다. 코튼의 이러한 입장은 마지막 때에 성령에 의하여 설교운동이 일어 날 것이라는 칼빈주의 신학의 증거이기도 하다.

2)교회를 세우는 수단으로써의 설교

설교는 교회를 세우는 수단으로써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설교를 통해서 흙 암의 권세가 물러가고 그리스도의 빛이 마음속에 임하여 거듭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므로 성령의 전이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친히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치셨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시하기 위한 방법 이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재료는 이적과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있다. 교회를 세우는 주체는 말씀이고, 이적과 기적은 말씀에서 파생된 장식품이다.

코튼도 교회사를 설교사로 해석하면서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했다. “요계시록16장 17절 이하에 일곱 대접을 쏟을 때 번개와 음성과 지진이 있는데(18) 이러한 현상이 바로 적 그리스도의 권세를 얽어매는 설교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우박을 설교로 해석하고 지진과 천둥과 번개를 설교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향력이라고 했다. 우박이 적 그리스도의 진영에 떨어져 그 정체를 밝혀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진진과 번개 모양으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어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혀냄으로써 적 그리스도의 사상과 의식으로 오염된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주: Ibid, p,175)

설교는 무지와 미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창출한다. 코튼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일곱 번에 걸처 진노의 대접을 적 그리스도의 보좌에 쏟으실 것이고 그의 택한 백성을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구원하는 역사를 전개 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접을 공중에 부으면 공중에서는 무서운 뇌성과 번개가 있을 것이며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이 인간의 마음속에 울려 퍼져 사람들은 떨며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을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권세로 무서울 정도로 놀랍고 두렵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역을 시작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시무시한 뇌성과 지진과 번개로 누가 죄악을 도모하는 사람이며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나게 하시고 성도의 악한 원수들은 혼란 하게 하실 것이다.” (주: Ibid, p, 176)

설교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적인 설교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을 구원 할 뿐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심성을 고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서 바르게 선포 될 때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찔림을 받아 각성하게 되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썩지 아니 할 영광스러운 형태로 고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도의 생활을 개혁하는 동기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생활 개혁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게 되고, 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 같이 설교는 성도의 삶을 각성케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근본 문제인 중생의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 코튼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씨앗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문이 아닙니다. 영입니다(벧전1:2) 말씀과 성령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잉태 할 때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씨 뿌리는 일을 할 때 사람이 거듭나게 됩니다.” (주: Ibid, p, 176) 라고 했다.

결론으로 예배를 정의한다면 조물주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참된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데 시24편 3-4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명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참된 예배자의 중요한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구원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했으니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말씀(설교)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예배의 중심을 말씀에 맞추었다. 말씀을 통해서 참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산출해 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4장 23절에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구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 말씀이다. 거듭나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모범은 성경말씀에서 가르처 주고 있다.

바른 예배를 통해서 바른교회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건실하게 존재 할 것을 소망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서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개혁자들의 말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지만 물량쪽으로 개혁이 될것이 아니라 말씀쪽으로 늘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개혁은 예배개혁으로부터 시작되고, 예배개혁은 설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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