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관한 시모음 23)
봄비 /청현 류을혁
바람 곱게 불면
바람에 안겨 오니라
가벼웁게 몸은 두고
마음만 살짝 오니라
와서 내 메마른 裸身을 적시라
봄비야 /임영준
마음껏 스며들어라
당겨진 시위보다 더
깊숙이 들어와 박혀라
지은 죄가 하도 커
씻어내기 어렵지만
온몸을 관통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여라
어울렁더울렁 품고 가서
누구의 뿌리던 되어라
첫 봄비 앞에서 /서지월
무슨 罪 많아서
저리도 많은 할 말들이 이제서야
고개들어 걸어오고 있는 것일까요
참았던 하늘이 비로소 내보이는 것은
옷섶의 단추가 길 위에 떨어져 뒹굴 듯
진흙 묻은 얼굴빛이란 말인가요
참 많았던 봄비 가운데 유독
첫 봄비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은
그간 부족했던 나무아미타불!
먼 절간 밖에서 살아온 罪일까요
우산도 없이 늘 그대로인 내게
하염없이 걸어오고 있는 것은
길을 가다 나도 몰래 들꽃 한 송이
꺾어버린 일 그게 선잠 깨워
이토록 나를 뒤흔들어 보이는 것인지요
봄비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月谷嶺 三十里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강마을의 봄비 시름을
장독뒤에 더덕순
담밑에 모란움
한나절 젖어드는 흙담안에서
호박순 새넌출이 사르르 펴난다.
봄비 /권경업
정 많아 쉬 흔하시던 내 어머니 눈물
총총 거두어 밤길 잡아 가신 그곳에
칭얼대는 쉰둥이
홀앗이로 넘던 보릿고개
차마 있으라구요
꽃샘 잎샘 차마 있을라구요
쉰이 다 되어 풀석이는
내 영혼의 회갈색 메마른 산비알
촉촉히 적시는 저 영롱한
시(詩)의 방울 같은 봄비가
당신 먼 나라에서 보내 오신,
꽃다운 젊은 날의 그 흔하시던 눈물
정녕 아닐 테지요
번지는 연두빛 어룽어룽
산이 어린애마냥 조잘댑니다
봄비 /이원식
4월이 떠나갑니다
입술 깨문 벚나무
눈물 배인 꽃잎을
하나 둘 떼어냅니다
해마다 그러했듯이
하얀 시(詩)를 남길 겁니다
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봄비에 /임영준
그렇게 두루두루
보살필 것까지 뭐 있나
딱한 곳만 골라 흠뻑
적셔주면 될 것을
아무리 사근사근 다독여도
결국은 저 잘난 줄 알고
될 대로들 되어버리는 걸
그 깊은 마음을 몰라주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것들에겐
너무나 아까운 은총이야
봄비에 젖는 마음 /유일하
먹먹한 내 마음에
아릿하게 스민 안개여
망각의 저편 기억 속
가물가물 사라진 날
차갑게 흔들려도
고삐 풀린 소같이
이젠 울지 않으며
더 이상 찾지도 않으리
꽃망울 붉게 맺힌
진달래 동공처럼
마음에 앉혀놓은
허황된 추억들까지
언젠가 펼쳐 보일
숨은 사랑 오롯이
산자락 안개 쓰고
사알 살 옷 벗으리
봄비 사랑 /오보영
그간 네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너 오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네가
전혀 반갑지가 않구나
내 가까이로 오는 네가
오히려
부담스럽기까지 하구나
보이는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네 맘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나니
네 가슴에
다른 이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덜 반갑구나
봄 비 /이병금
꽃 진 길 위를
하루와 함께 걸었습니다
가랑비를 지팡이 삼아
낡은 옷 속
길 밖의 날들이
솜이불 되어
스스로 길이 되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해묵은 한숨을 피워올립니다
젖은 몸을 들어올려
두 눈에 차오르는 맑은 샘물을 바라봅니다
봄비 /최영희
이른 아침
봄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그 소리에
먼저,
풀밭에 어린 싹이
발딱 일어나 걸어 나온다.
봄비 /양광모
세상에서
가장
슬픈
회초리
푸른
멍
가슴에
우거지네
봄비 /김시천
그대로 인하여
나는 비로소 나를 소망하게 되었다
내 안에 따뜻한 불을 피우고
그대를 위하여 차 한 잔을 준비하는 일이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일인 줄
나는 몰랐다
그대가 내게로 오는 하염없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내가 소망하는 것을 또한 그대가
함께 소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가 내게 그러하듯이 나 또한 그대에게
단지 그리워하는 일만으로 평생을 산다 하더라도
그대와 내가 서로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한다
그것이 비록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대를 향한 그 간절함으로 나를 일으켜
하나의 꽃이 되고자 한다
그대로 인하여 오늘
나는 비로소 나를 소망하게 되었다
봄비는 사랑비 /정심 김덕성
이미 가슴에 들어 와
촉촉하게 적시며 자리 잡은 연인
봄비가 사랑으로 내린다
사랑스럽게 내리는 봄비
삶의 진실을 사랑의 언어로
다정다감하게 속삭이며 내린다
새싹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는 봄비
생명의 부활을 낳는다
계곡엔 안개로 온기 더하고
꿈꾸던 초록빛 수목들을 적시는데
삶의 원동력을 되찾는 봄비 스미며
생명의 약동을 맛본다
사랑 노래로 화답하면서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내리는 봄비
사랑비로 되살아나 생기 얻으며
새롭게 창조하는 희망의 봄
너의 목소리(봄비 소리) /오세영
너를 꿈꾼 밤
문득 인기척 소리에 잠이 깨었다.
문턱에 귀대고 엿들을 땐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 고쳐 누우면
지척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매깃 소리.
아아, 네가 왔구나.
산 넘고 물 건너
누런 해 지지 않는 서역 땅에서
나직이 신발을 끌고 와
다정하게 부르는
너의 목소리,
오냐, 오냐,
안쓰런 마음은 만릿길인데
황망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
밖엔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소리,
후두둑,
댓잎 끝에 방울지는
봄비 소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