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운명
신강우
나는 고흥반도의 중간에 있는 과역면에서 태어났다. 고흥에서 살았지만 우리 집에서 바다로 갈려면 4킬로미터나 되었다. 그러니 바다를 모르고 살았다. 아침에 바다에서 정치망으로 잡은 고기를 팔려고 여러 아낙네들이 우리 마을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생선을 많이 먹었다. 어머니는 돈이 없으면 쌀이나 보리를 주고 고기를 샀다.
나는 우리 마을 가까이 있는 과역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마을 가까이 있는 과역중학교를 다녔다. 나는 중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반에서 언제가 1등이거나 2등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우리 집에는 내가 고등학교 갈 돈이 없었다. 그 당시 광주에는 명문고 2개가 있었다. 하나는 광주일고고, 다른 하나는 광주 고였다. 광주일고는 전남 각 중학교에서 1등이거나 2등이 들어갔다. 그만큼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과역중학교에서는 내가 11회였는데, 그때까지 한명도 광주일고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당시 광주고는 육군사관학교의 명문이었다. 숫자적으로 전국에서 1등이거나 2등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형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큰형은 농협에 다니고 있었고, 작은형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공무원의 봉급 적어 두 형은 겨우 먹고사는 형편이었다. 나의 학비를 도와줄 형편이 못되었다. 나는 광주고를 가고 싶었다. 그것은 육사 때문이었다. 내가 광주고를 졸업하여 육사에 간다고 하면 형들이 동의할 것 같았다. 나는 무난히 광주고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과역중학교에서 6명이 응시했는데, 나만 합격했다. 나는 형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다. 형들이 하나의 조건을 붙였다. 그게 광주고를 졸업하여 육사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형들에게 육사에 간다고 했다.
광주고에 입학하여 나는 교회를 다녔다. 내가 어렵게 학교를 다닌 것을 안 선배가 나에게 교회에 다녀보라고 했다. 나는 그 선배의 신앙에 감동하여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내가 그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교회를 다니고 언제 공부합니까?”
그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아직까지 수석을 놓친 적이 없어요. 교회를 다니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그 선배와 같은 집에서 자취를 했는데, 그 선배는 매일 새벽예배를 나갔다. 아주 열렬한 신자였다. 그 선배는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신문에서 그 선배가 조선대학교 법학과 수석졸업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 선배는 내가 볼 때마다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새벽예배를 보려 교회에 갔다. 언제 공부하여 법학과 수석졸업을 했을까 의문이 앞섰다. 나도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선배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그 선배를 만났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법학과 수석이면 고등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
“선배님, 신학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 선배는 웃었다.
“후배님,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양식과 정신적인 양식이 있어요. 나는 정신적인 양식을 택했지요. 육체적인 양식은 마음이 병들게 하고 욕심이 생기게 하지요. 그러니까 육체적인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지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럽습니까? 다 육체적인 양식으로 마음이 병이 들어 그런 거지요. 나는 성경이 정신적인 양식이라고 믿고 있지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안 부르고 마음이 깨끗해지지요. 후배님,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을 따르세요. 내 꿈은 정신적인 양식으로 병든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겁니다. 언젠가 나는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겁니다. 정신적인 양식을 파는 사람이 될 겁니다. 이게 나의 꿈입니다. 판사나 변호사보다 이게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법학과에서 4년 수석이었지요. 좀 노력하면 고등고시에 합격할 수 있겠지요. 나는 그것을 버렸지요. 후배님, 나를 따르세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으세요.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성경이 땅속에 묻힌 보석과 같지요. 보석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빛이 납니다.”
나는 선배를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이 선배를 도와주어 그런다고 생각했다. 나는 광주고를 다니면서 육사의 입학신체검사가 아주 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몇 가지 결함이 있어 육사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면서 학생부 서기라는 직책을 얻었다. 그것도 내가 광주고를 다니고 있어서 얻어진 것이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매주 토요일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 교회가 계림교회였다. 계림성당에 가까이 있는 기독교장로회에 속한 교회였다. 나는 학생회모임에서 여러 여자간부들을 만났다. 그때까지 나는 여자만 보고 음심만 품어도 간음과 같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었다. 그래서 모든 여자간부들을 멀리했다. 여자부회장의 이름이 광주여고를 다니고 있는 김근자였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웃어주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내가 웃으니 내가 자기를 좋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를 나에게 소개도 시켜주고 오빠도 소개해주었다. 어느새 나는 김근자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다. 광주일고를 다닌 학생이 남자부회장이었다. 그의 집은 계림성당 밑에 있었다. 나는 계림성당 가까운 집에서 자취를 했다.
몇 대학에서 시를 잘 써서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던 몇 명의 선배가 있었다. 나는 시를 써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니고 싶었다.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면 문학으로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시를 써도 내 시는 늘 뒷전에서 머물렀다. 형들이 육사가 어려우면 교육대학에 가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라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 시를 못 쓸 것 같았다. 그래서 교육대학 다닌 것을 포기했다. 광주 고를 졸업하고 집에서 몇 달 쉬다가 육군에 입대했다.
나는 육군에 입대하여 5사단 포병대대에서 근무하다 군종사병으로 차출되었다. 포병사령부 교회목사가 해남출신이었고, 군종사병의 책임자가 광주고 선배였다. 나는 그때 군인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나는 광주고 선배의 도움으로 포병사령부군종과에서 근무했다. 선임 군종사병은 극진히 나를 보살펴 주었다.
육군에서 연가휴가를 갈 때마다 나는 광주일고출신 교회 학생회부회장이었던 김현종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김현종의 여동생이 광주여고를 다녔다. 김근자에 대한 모든 소식은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그에게 전해졌다. 내가 2번째 정기휴가차 김현종의 집에 들리니, 김근자가 서독간호사로 가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하여 두고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김근자는 서독간호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 나의 대학비를 부담한다고 했다. 물론 대학에 입학하면 그녀와 결혼을 하는 조건이 있었다. 나는 김현종의 집에 있으면 가능하면 계림교회에 나갔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다. 김근자가 교회 근방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가부를 알려달라고 했다. 교회 근방에서 기다리는 김근자를 나는 그냥 지나쳐 돌아왔다. 이것은 김근자의 요구사항을 내가 거절한다는 뜻이었다. 여자의 돈으로 대학을 다닌 것을 나는 양심상 허락할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나는 김근자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김근자의 나에 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종은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바로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다. 나는 의대생의 공부를 김현종을 보며 알았다. 내가 그의 방에서 잠을 자나가 깨어나면 시간이 보통 새벽 4시였다. 김현종은 그 때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김근자는 서독으로 간호사로 가서 돈을 벌어 귀국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했다. 이상하게 결혼하고 몇 개월 후에 이혼했다. 김근자는 서독에서 독일남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 어쩌면 내가 김근자의 인생을 망친 것 같이 생각됐다.
군에서 제대하고 1년 넘게 집에 있으니 마을사람들의 인사가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자네, 아직도 집에서 놀고 있는가?”
내가 고등학교를 나닐 때 마을 사람들은 내가 명문고를 다닌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내가 제대하고 집에서 빌빌거리고 있으니, 인사가 비웃음 비슷했다.
나를 딱하게 생각한 작은형의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부산에서 너의 작은형을 만났다. 부산에서 잘 산 것 같더라. 한 번 찾아가 보아라.”
나는 작은형 친구에게서 작은형의 부산 주소를 받아들고 부산으로 갔다. 내 꿈은 부산에서 야간대학을 나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부산으로 떠날 때 어머니가 작은형이 돈이 없으면 부산에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내 학비는 논을 팔아서라도 보내준다고 했다. 부산에서 작은형을 만나니 작은형은 빈털터리였다. 나에게 자기는 돈이 없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다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을 전했다. 다음날 부산서면에서 자갈치시장까지 모든 학원을 찾았다. 부산에 여러 학원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배울 만한 것이 없었다. 내 사촌고모가 부산에 살고 있었다. 나는 사촌고모 집에서 잠을 자고 부산 시내에서 형님을 만났다. 고모가 내가 집을 나가려고 하니 말했다.
“영도에 좋은 학원이 있다고 하더라. 한번 찾아가 보아라.”
작은형에게 영도에 가보자고 했다. 영도입구에 한국원양어업훈련소가 있었다. 정문 경비원의 말이 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여기서 공부하고 3년 배를 타면 부산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어요.”
모든 게 국비였다. 1년 6개월 공부하면 면허증을 따서 배를 탈 수 있었다. 형님이 모든 게 국비이니 일단 입학하여 다음을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때까지 난 시인이 되는 꿈을 가졌다. 6년 정도 배를 타서 돈이 좀 벌리면 야간대학 국문과를 다니고 싶었다. 나는 대학국문과를 나와야 시인이 된 줄 알았다. 경쟁률이 6대 1이었다. 나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하여 훈련소생활을 시작했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하루 밤이 지나니 기숙사 내 옆방이 시끄러웠다. 그 훈련생은 고등학교 선생이었다. 그의 장인과 장모가 집에 가자고 했다. 동아대 공대 수석 졸업자가 원양어선을 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는 장인과 장모를 따라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교육을 받았다. 여러 번 그의 장인과 장모가 와서 그를 끌고 집으로 갔다. 그때마다 그는 장인과 장모를 따라 집에 갔다. 장인과 장모의 등살에 못 이겨 집으로 끌려가서 다음날 아침에 그는 첫 버스를 타고 훈련소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는 정시에 교육을 받았다. 나는 그의 형님이 원양어선을 탄 것을 알았다. 그의 형은 원양어선을 타서 큰돈을 벌었다. 이미 부산에 집을 2채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여 그렇게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래서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다. 동기들은 대부분 서울 명문대를 다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학비를 벌려고 훈련소에 들어왔다. 이미 영도에서는 우리들이 시내에 다니면 금이 굴러온다고 했다. 원양어선을 타면 돈을 잘 벌었다. 그때가 원양어선의 황금기였다. 선배들이 가끔 와서 원양어선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나는 어업과 공부를 했다. 정문에서 형님이 경비원에게 어업과가 무어고, 기관과가 무어냐고 물었다. 경비원은 어업과는 졸업하면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기관과는 졸업하면 기름을 묻히고 기계를 수리한다고 했다. 형님이 나에게 어업과에 가서 키를 잡는 게 기름이나 묻히는 기관부보다 낮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업과를 택했다. 훈련생 모집시험 응모마감이 2일 후였다. 나는 부랴부랴 입시응모원서를 작성하여 시험을 봤다. 6대 1의 경쟁률이었다. 나는 무난히 모집시험에 합격하여 어업과 공부를 했다. 어업과를 나오면 항해사가 되었다. 그 훈련소는 6개월 육상 공부, 1년 실습이었다. 나는 1년 동안 남테평양 사모아에 기지를 둔 참치 실습선을 탔다. 사실 실습선은 너무 힘들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동기들은 대부분 친척들이 원양어선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원양어선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동기는 훈련소를 수료하면 바로 원양어선을 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사모아에서 1년 실습을 마치고 귀국하여 면허를 취득하여 원양어선을 탔다. 내가 탄 배는 가다랭이를 잡는 일본 배였다. 운 좋게 처음으로 1항사로 배를 탔다. 그 배의 기지는 파푸아 뉴기니아에 있었다. 원양어선 1항사의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의 계약은 2년이었는데 피곤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승선 6개월 후에 선장에게 하선한다고 했다. 선장은 같이 2년 배를 타자고 했다. 나는 힘들고 어려워도 버티었다. 나는 원양어선이 나의 체질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해양대학에 6개월 과정이 있었다. 귀국하여 해양대학 전수과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상선면허를 취득하여 상선을 탔다. 배에는 면허가 2종류가 있었다. 그게 어선면허와 상선면허였다. 나는 어선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전수과를 수료하고 상선면허를 취득하여 상선을 탔다. 한 번 배를 타니 배가 나의 천직처럼 생각되었다.
상선을 타면서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니 자리가 나면 바로 진급되었다. 모든 선장들이 나를 좋아했다. 내가 진급하여 상선 1항사로 배를 타고 있으니, 여수 수산전문대학 출신 3항사 김현수가 승선했다. 그는 원양어선에서 밀려나 상선을 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광주의 명문고를 졸업하고 전남대를 다니다 공산주의에 빠져 결국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밤에 가끔 그의 어머니를 찾았다, 밤 내내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에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에게 확신에 찬 말을 했다.
“지금은 우리가 불리하지만 언젠가는 일어설 거야. 나는 믿어. 우리 공산주의가 한국을 결국 지배할 거야.”
그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의 이러한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밤 내내 그의 어머니는 공산주의에 대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밀리고 밀려 마지막에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그만 수산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회사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거의 죽어가는 해녀를 구해주었다. 그 여자가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여수까지 밀려온 해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리산에 숨어 살다 결국 사살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며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정직하게 살라고 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았다. 공무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수 수산전문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의 어머니는 진실한 기독교신자였다. 매일 기도하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강제로 교회에 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교회에 안가도 좋으니 성경의 말씀대로 살라고 했다. 그가 배를 타려고 하니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큰 성경전서를 주었다.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그를 보면 그는 언제나 침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어보곤 했다.
“왜 교회에 안 가니?”
그가 비시시 웃었다.
“교회는 하나의 형식이지요.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세계에서 제일 좋은 사상이라 했지요. 아버지는 공산주의라는 형식에 갇혀버렸지요. 아버지는 그 형식에 갇혀 죽었지요. 나는 성경을 여러 번 읽었지요. 성경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들어 있어요.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성경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3항사는 1년 승선하고 하선했다. 그는 나에게 특별한 3항사였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성경을 읽었다. 신자가 아니면서 신자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었다. 그는 하선하면서 나에게 한마디 했다.
“1항사님, 여수수산전문대학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수산전문대학입니다.”
3항사는 여수수산전문대학에 대한 말을 많이 했다. 그가 여수수산전문대학출신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후에 여수수산전문대학이 여수수산대학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수산전문대학이 몇 개 있었다. 수산고등학교에서 수산전문대학으로 마지막에는 수산대학교가 되었다. 3항사 김현수가 승선할 때는 이미 전남대 부설 여수해양수산대학교가 되어 있었다.
“내가 수산전문대학을 다녔던 것은 할아버지의 간곡한 건의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자기가 늙고 힘이 없으면 나더러 자기의 수산회사를 맡아달라고 했어요. 나는 어선을 잘 알아요. 내가 어렸을 때 자주 할아버지 회사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어요.
원양어선은 선장이 너무나 힘이 세더군요. 모든 일을 선장 마음대로 하더군요. 나도 원양어선을 2항사로 2년 탔어요. 그 배는 남태평양에서 참치를 잡았어요. 선장이 나의 여수수전 선배였지요. 선장이 너무나 돈을 많이 떼어먹더군요. 선원들이 먹는 것은 버려진 참치거나 쓸모없는 잡어였어요. 그러니까 선원들은 매일 변질되었거나 버려진 생선으로 만든 생선국을 먹었지요. 내가 자주 선장에게 건의를 했지요. 부식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했지요. 선장은 내가 승선 2년이 되자 나를 강제하선 시켰어요. 나의 계약은 3년이었지요. 귀국하니 나는 문제 2항사가 되어 있더군요. 모든 회사에서 나를 원하지 않았어요. 원양어선을 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해양대학 6개월짜리 전수과를 나왔지요. 1항사님이 나의 전수과 선배이기도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조그만 교회를 만들어 그 교회는 그의 할아버지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늘 칭찬했다. 그의 어머니를 그 교회의 제일 좋은 신자라고 했다. 그에게 할아버지가 자기 재산을 주려는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그의 어머니를 믿었다. 그의 모든 학비를 그의 할아버지가 부담했다. 그의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한 것이 그의 할아버지 수산회사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화물선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그게 선장들의 비행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선장들이 부식비를 자기 돈처럼 생각했다. 선원들의 부식이 형편없었다. 많은 화물선에서 선장과 선원들 간에 문제가 가끔씩 생겼다. 대부분 부식비 때문이었다. 선원들이 한국대리점이나 일본본사에 편지를 보내 문제가 있는 선장을 가끔 교체했다.
내가 5번째 배에서 만났던 선장은 이미 회사에서 경고를 받았다. 또다시 부식으로 배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다시 자기 회사 배를 탈수 없다고 했다. 그 선장은 승선하자마다 부식비를 떼어먹었다. 이게 알콜 중독과 같았다. 선장은 일본에서 빠징고를 좋아했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면 아침에 상륙하여 자정 경에 배로 돌아왔다. 몇 선원들도 빠징고를 좋아했다. 아침에 선장과 같이 상륙하여 같이 밤에 돌아왔다.
현문에서 당직을 서던 당직조타수가 선장에게 말했다.
“선장, 당신 부식비로 놀다왔지? 그 돈이 선원들의 피야. 선원들의 피를 빨아 먹어도 배가 불러?”
선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실로 올라갔다. 이미 배의 체계는 무너지고 없었다. 선장의 힘이 없었다. 나는 당직조타수의 말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시실이기 때문이었다. 배가 항해 중에 선장은 침실로 몇 명의 사관을 불려 밤마다 술을 마셨다. 값이 비싼 영국위스키였다. 술을 마시며 맨날 사관들과 다투었다. 선장은 늘 코너로 몰렸다. 선장이 나도 불렀지만 나는 그때까지 기독교신자였다. 그래서 술을 안 마셨다. 그래서 선장의 술 모임에 불참했다. 보다 못한 기관장이 참지 못하고 1기사를 통하여 선원들에게서 선장을 교체해달라는 탄원서를 만들어 사인을 받아갔다. 거의 모든 선원들이 그 탄원서에 동의한다는 사인을 했다. 기관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아주 잘했다. 기관장은 그 탄원서를 일본본사에 보내기 전에 일본본사로 전화하여 자세하게 선장의 비행에 대하여 말했다. 기관장은 탄원서를 2부 만들어 일본본사와 부산 대리점으로 보냈다. 그 탄원서를 받고 일본본사는 배가 일본에 도착하자 바로 그 선장을 교체했다.
새 선장은 아주 신사였다. 부식을 2항사에게 맡겼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했다. 배가 조금씩 체계를 잡아갔다. 선장도 위치를 찾아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전임선장은 이미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부식비를 자기 돈처럼 썼다. 전임선장은 경고처럼 그 회사 배를 못타고 회사를 옮겼다. 나는 그가 하선하여 3년 넘게 대기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선하여 나를 첫 번째 자기의 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1항사였다. 내가 자기를 배반했다고 했다. 전임선장은 나를 하선시키려고 했다. 회사간부들은 전임선장의 건의를 거절했다.
나는 잘 나간 1항사였다. 많은 빚을 내어 부산 서면에 있는 32평짜리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나는 이때부터 자리가 나면 배를 탔다. 빚을 갚기 위아여서였다. 나는 길어야 2개월 대기하고 다른 배를 탔다. 그래서 선장으로 진급을 포기했다. 선장으로 진급하려면 1년 이상 대기하여야 했다. 나는 그렇게 장기간 대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일본 배를 타고 있었다. 그 배가 싱가포르 사람에게 팔렸다. 새 선장과 기관장이 싱가포르에서 취업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강력한 건의가 있어 나는 계속 그 배를 탔다. 그 배를 타면서 선장과 기관장에게서 싱가포르로 와 선장이 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들의 추천으로 나는 싱가포르로 와서 싱가포르 배를 선장으로 탔다. 그 배는 나만 한국인이었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음식이었다. 나는 동남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버티었다. 나는 그때까지 많은 빚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김치가 먹고 싶고 우리나라 말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벽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우리나라 말을 했다. 그러면 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때부터 가능하면 외국어를 쓰지 않는다.
나는 선장이 되고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선장이 되어 이리저리 살펴도 내가 할 것이 없었다. 그때 시가 떠올랐다. 나는 실습선을 타면서 심한 뱃멀미를 했다. 바다가 꼭 지옥과 같았다. 나는 그러한 바다에서 문학을 한다는 게 불가능하가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학을 버리고 선장이 되는 꿈을 가졌다.
선장이 되어 나는 시인이 되는 꿈을 다시 가졌다. 10년의 공백은 너무 컸다, 띄어쓰기도 다시 배워야 했다. 나는 그때 홍콩에서 한국 일본을 다닌 배를 탔다. 배가 부산에 입항하면 남포동에 있었던 남포도서에 가서 내가 투고했던 잡지들을 보았다. 번번이 낙선이었다. 부산항을 떠나면서 울리는 기적소리가 꼭 내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마음으로 오래 울었다.
오랜 만에 한 잡지에서 초회천이 되었다고 등단작을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응모했던 시는 에멘 호데이다 항을 그린 시였다. 그때 그 배는 8월 에멘에 입항했다. 나는 조타실 문을 열었다. 밖이 너무나 더워 나는 조타실 문을 바로 닫아버렸다. 꼭 밖이 불바다 같았다. 그 에멘 풍경을 내 시가 잘 그린 것 같았다.
나는 초 회천을 받고 2년 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아무 연고 없는 나에게 시인의 길을 열어준 그 잡지 발행인에게 늘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다. 시를 아무리 열심히 써도 나는 거북이걸음이었다. 발전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장르로 가게 되었다. 그게 소설이었다. 나는 소설로도 등단하였다. 내가 소설을 쓴 것은 바다에 대한 특별한 체험 때문이었다. 소설도 어려웠다. 너무나 많은 훌륭한 소설가들이 있었다. 내 소설은 그들의 것과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러나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나는 소설에 힘을 쓰고 있다. 바다의 좋은 체험을 소설로 써보려고 한다. 바다에 대한 많은 체험은 나만의 것이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선장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싱가포르에는 한국선원협회가 있었다. 월남이 폐망하자 많은 월남교민들이 한국행을 거절하고 싱가포르를 택하였다. 그때 한국이 가난하여 한국에 가봐야 할 일이 없었다. 그때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에는 월남이 패망하자 싱가포르로 온 많은 한국 사람들이 취직을 부탁하려 들락거렸다. 그들은 육상에서 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영사가 대기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배를 타게 했다. 대부분 말단선원으로 배를 타게 했다. 전혀 배를 모른 많은 교포들이 배를 탔다. 모든 서류는 영사가 한국외무부를 통하여 만들었다. 그들이 내가 싱가포르에 왔을 때 선장이 되고 기관장이 되어 있었다. 배를 타면서 익힌 기술로 선장이 되고 기관장이 되었다. 한국 사람의 머리는 아주 뛰어났다. 여러 나라 선원들과 같이 배를 타면서 이러한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박 선장은 월남에서 싱가포르로 와서 나와 같은 회사 배를 선장으로 타고 있었다. 그는 장사를 잘했다. 말하자면 밀수 같은 것에 도가 터 있었다. 나는 모든 선원들이 박 선장을 싫어한 것을 알았다. 박 선장은 그 배를 2년 타고 또 2년 연장하려고 했다. 나는 부두에서 박선장의 배 선원들을 만났다.
“선장님이 계약을 연장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줄 겁니다.”
내가 물었다.
“왜 선장님을 그렇게 싫어합니까.”
“선장님이 너무나 부식비를 많이 떼어 먹어요. 이게 이유입니다.”
나는 그 선원의 말을 듣고 박 선장을 걱정했다. 박선장의 부인은 화교였다. 그래서 박 선장은 집에서 아내에게 중국말로 이야기했다. 해운회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싱가포르 중국계였다. 박 선장은 회사에 가면 중국말을 했다. 그러니 모두 박 선장을 좋아했다. 해무부장은 선원들이 박 선장을 싫어한 것을 잘 알았다. 박 선장이 일은 잘했다. 해무부장이 사장에게 강력히 요청하여 박선장의 요청대로 2년 계약 연장이 허락되었다. 사장은 박선장의 능력만 보고 2년 계약연장을 허락했다. 박 선장은 누구에게나 이번 배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했다. 배에서 내리면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다.
내 동료가 박 선장에게 물었다.
“박 형. 빈손으로 어떻게 사업을 합니까?”
박선장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동안 돈을 많이 모았어요. 은행에 저금한 돈이 사업자금으로 충분할 거요.“
박 선장은 계약을 연장하고 2개월 후에 배에서 선원들에게서 죽임을 당했다. 그때 박 선장 배는 싱가포르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자정 경에 갑판에서 총소리가 났다. 갑판에서 당직을 섰던 조타수가 해적이 올라와 선장 방으로 갔다고 했다. 선원들이 선장침실로 가니 박 선장은 손이 로프로 묶인 채 죽어 있었다. 배에서 아무도 해적을 보지 못했다. 당직조타수는 3명의 해적이 배로 올라와 선장침실로 갔다고 했다. 배가 싱가포르를 출항하자 선원들은 박 선장을 죽이기로 했다. 그래서 당직조타수가 갑판에서 총을 쏘았다. 이건 말하자면 해적이 총을 쏜 것 같이 했다.
박 선장의 배는 싱가포르를 출항하고 5시간 후에 다시 싱가로르로 돌아왔다. 배가 닻을 내리고 다음날 싱가포르 경찰들이 박 선장의 죽임에 대하여 조사했다. 박 선장의 침실 목욕탕에는 밖으로 조그만 창문이 있었다. 싱가포르 경찰들은 그 목욕탕 창문 밑에서 2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다. 이게 문제의 열쇠였다. 선원 2명이 목욕탕 창문으로 선장침실에 들어가 박 선장을 죽였다. 잠을 자고 있던 박 선장은 아무 반항도 못하고 목이 졸려 죽었다. 경찰들은 이려한 것을 회사에 보고했다. 회사 사장은 가능하면 빨리 문제를 해결하여 배가 출항하게 했다. 박선장의 소지품에서 저금통장이 발견되었다. 저금통장에 저금된 액수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았다. 박선장의 부인이 싱가포르로 왔다. 그녀가 화교라 모든 회사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다. 저금통장에 저금된 돈도 그녀 이름으로 해주었다. 박 선장은 한국 사람이었다. 싱가포르 경찰은 박 선장의 죽임에 별로 신경을 안 썼다. 박 선장 배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2일 후에 출항했다. 나는 같은 회사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박 선장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싱가포르에는 세계 각국의 선장들이 배를 타고 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선장들은 봉급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배를 타는 것이 급선무였다. 싱가포르 선장의 봉급이 자꾸 하락했다. 나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는 선장들이 한국에서 배를 타기가 아주 쉽다고 했다. 나는 싱가포르 배를 그만두고 귀국하여 부산 대리점을 기웃거렸다.
신성해운이라는 조그만 대리점이 있었다. 나는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여기에는 부장의 배려가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내가 광주고를 졸업했다니까 반색했다. 내가 광주고를 졸업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사장은 목포해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사장도 광주고가 명문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부산에는 광주일고와 광주고 선배들이 많이 해운회사의 요직에 있었다. 나는 광주일고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신성해운의 배를 탔다. 신성해운의 사장 이름은 이성식이였다. 딸이 6명이고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을 보기 위하여 많은 딸을 두었다. 큰 딸은 고대 법대를 나와 고등고시에 응시했다, 번번이 낙방이었다. 내가 승선할 때 큰딸은 이미 5번 고시에 낙방했다. 선장들이 자주 사장의 큰딸을 비난했다. 사장은 큰딸의 고시비용을 부담하느라 허리가 굽어 있었다. 큰딸은 고시 6번째에 운 좋게 합격했다.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사장의 큰딸은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바로 아버지에게 자기가 동생들의 모든 학비를 부담한다고 했다. 처음에 큰딸은 부산지검 판사가 되었다. 판사의 봉급이 적었다. 그래서 6개월 후에 판사에서 사임하고 서울에 있는 큰 로펌에 들어갔다. 봉급이 상당히 많았다. 이때부터 사장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사장은 이 변호사의 자랑에 열을 올렸다.
이 변호사는 로펌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로펌을 만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이 변호사가 재벌 회장의 아들과 결혼했다. 사장의 사위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재벌회사 회장이니까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 변호사는 교회에서 그를 만나 사귀다 결혼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변호사가 그녀의 아버지가 작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창피하다고 큰 아파트로 옮기라고 했다. 사장은 딸의 말대로 해운대에 있는 큰 아파트로 옮겼다. 이 변호사는 동생들을 하나씩 유학을 보냈다. 이 변호사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 변호사는 시아버지 회사 일을 받아 로펌을 키웠다. 이 변호사의 로펌에 근무한 변호사가 1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아주 큰 로펌이었다.
나는 신성해운 배를 선장으로 타면서 여수수산전문대학 출신 김현수를 다시 만났다. 그때 김현수는 이미 선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에게 늘 성경 말씀대로 살라는 그의 어머니의 말뜻을 그에게 교회에 가라고 한 것으로 생각했다. 김현수는 그의 어머니가 죽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만든 교회는 조그맣고 신자가 얼마나 되지 않았다.
내가 신성해운 배에서 만기 하선하기 6개월 전에 얼굴에 백반이 생겼다. 얼굴이 흉하게 되었다. 나는 배에서 만기 하선하여 나는 거의 1년 6개 월 가량 삼성병원에서 백반을 치료했다. 삼성병원 그 피부과 의사가 백반치료에 우리나라 1인자라고 했다. 나는 나이가 이미 65살이 이미 넘어 있었다. 내가 일을 잘하니 일본 선주가 나이가 많아도 승선을 허락했다. 선원의 정년은 60살이었다. 다른 해운회사에서 나를 나이가 많다고 꺼렸다. 당시 우리나라 많은 해운회사들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다. 회사가 부도가 나면 가지고 있던 배들을 외국으로 팔았다. 배가 팔려 자리를 잃은 많은 선장들이 부산에서 빌빌거렸다. 내가 탈 배가 없었다. 얼굴에 난 백반을 치료하느라 오래 집에 있으니 배가 싫어졌다. 그래서 마도로스에 종지부를 찍었다. 애들이 다 대학을 나오고 집사람이 공무원 5급으로 정년퇴직하여 연금이 많이 나왔다. 내가 돈을 안 벌어도 집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현수가 신성해운 배를 내리기 전에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 강력한 요청이 있어 배를 그만두고 그의 할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그는 심심하여 서울구경을 갔다. 그는 매일 TV에서 광화문광장을 자주 보았다. 김현수는 그때까지 서울을 구경하지 않았다. 김현수는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바로 광화문광장으로 갔다. 그날이 평일이라 광화문광장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조그만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죽은 학생들을 추모하는 조그만 추모소가 있었다. 그는 추모소에 들어가 추모의 묵념을 했다. 세월호 침몰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추모소 안 한편에서 학생복을 입은 한 여자가 슬프게 울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가까이 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세월호 침몰로 죽은 많은 젊은 학생들을 생각하니 슬퍼서 운다고 했다. 그녀는 대전에서 온 대전여고 3학년생이었다. 이름은 김영미였다. 그녀는 방학 중에 서울구경을 왔다. 친구 3명이 팀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왔다. 그는 그녀들에게 점심을 사주고 그녀들에게 서울을 구경시켜주었다. 모든 비용은 그가 부담했다. 그는 수중에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처음이라 서울을 잘 몰랐다. 택시를 타고 물어보면 운전수들이 서울 여러 명소를 말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그녀들이 대전으로 간다고 했다. 그는 그녀들을 서울역까지 같이 가서 배웅해주었다. 그는 김영미에 대하여 흥미가 생겼다. 사귀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영미도 그에게 그녀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는 광화문광장을 보려고 서울에 왔다가 대전여고생 때문에 덤으로 서울의 여러 곳을 보았다. 그도 밤기차를 타고 여수로 돌아왔다. 영미는 돈이 없어 대전여고를 졸업하면 집에서 가사를 돕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그에게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영미의 집은 세종 시에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종 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서울을 떠나고 며칠 후에 영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후에 대전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약속시간에 대전역으로 가서 영미를 만났다. 영미는 혼자 대전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영미는 그의 여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주 영미를 만났다. 영미는 기독교신자였다. 대전에서 만나면 같이 교회로 갔다. 같은 교인이라 모든 게 잘 풀렸다. 영미를 만나고 4년 후에 그는 영미와 결혼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게 그에게 떨어졌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조그만 수산회사를 힘을 다해 열심히 운영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만든 광성 교회도 맡아야 했다. 광성 교회가 조근만 하여 신자가 별로 없었다. 헌금으로 목사의 생활비도 부담하기가 어려웠다. 목사들이 자주 교회를 떠났다. 그는 방법을 찾았다. 그게 그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여 4년 후에 목사자격증을 얻어 여수에 내려와 광성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목사가 떠나면 임시목사가 되어 설교를 했다. 목사가 있으면 그는 신앙 간증을 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목사의 설교가 끝나면 신앙 간증을 했다. 그의 신앙 간증이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신도들이 그의 신앙 간증을 들으려왔다. 그는 수산회사를 아내에게 맡기고 교회의 일에 전념했다. 교회가 조그만 하여 들어온 헌금으로 목사의 생활비도 부담하기가 힘들었다. 목사들이 자주 교회를 떠났다. 그래서 그가 목사가 되어 광성 교회를 맡았다. 그는 그의 생활비를 그의 아내가 운영하고 있는 수산회사의 운영비를 썼다. 교회에 헌금으로 들어온 돈은 전부 교회를 위하여 썼다. 교회가 너무 낡아 조금씩 교회를 수리했다. 의자 전부를 새것으로 바꾸고 실내의 벽을 페인트 칠 했다. 들어온 헌금이 얼마 되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회를 정비하는 시간이 2년 이상 걸렸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았다. 광성 교회 신자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의 이름이 조금씩 여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그를 목사까지 하게한 그의 어머니에게 늘 감사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배를 탔다가 40년 넘게 내가 배를 탄 것이나 성경을 읽다가 목사가 된 현수의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위의 단편소설은 2021년 <한국문학인> 봄호에 게재된 작품이다. 이게 나의 자서전과 비숫하다. 말하자면 실화이다.
많은 이해를 구한다.
첫댓글 이사님! 대단하십니다.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한국문학이' 게재 축하합니다.
원고료 고료를 받았지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