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축구의 문화와 역사
브라질에는 ‘말란드루’(malandro)'란 말이 있다. 근세기 브라질 민담의 주인공이다. 흑인이고 노예라고 한다. 그러나 주눅들지 않는 사람이었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으며 권세가들에게 이따금 머리를 굽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영혼을 저당 잡힌 게 아니라 상대방의 가슴팍을 들이받기 위한 자세였다고 한다. 춤과 칼과 무예가 오묘하게 섞인 카포에이라의 고수였으며 그 이상으로 연애에도 능했던, 한마디로 브라질 사람들이 형상화한 가난한 자들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말란드루는 처음에는 실존 인물에서 비롯된 형상이었지만 오랜 식민과 저개발과 수탈의 역사 속에서 브라질 사람들의 꿈이 투영되면서 점차 다양한 개성이 결합된 인물로 전승되어 왔다.
뛰어난 재주와 낙천성과 유머를 가진 말란드루,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대번에 호마리우와 히바우두와 호나우두와 호나우지뉴와 호빙유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그 맨 앞에는 펠레와 토스탕과 가린샤와 자이르지뉴가 서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브라질 스타들의 타고난 재주와 낙천성(특히 호나우지뉴)을 그저 인심 좋은 사람들의 평범한 낙천성, 곧 낮에는 공을 차고 밤에는 삼바 축제 하면서 평생 웃고 떠들며 놀고 먹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정말로 곤란하다. 그들의 낙천성은 슬픔을 견디고 시련을 이기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같은 남미 국가 우루과이의 작가 갈레아노의 고견을 들어보자. 아르헨티나에는 탱고가 있다. 현지 발음으로 ‘땅고’라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이렇게 말한다. “탱고의 밑바닥에는 내륙지방 목동들의 운율과 선원들의 뱃노래가 있고, 아프리카 흑인과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음악이 깔려 있다. 탱고를 연주하는 기타는 스페인에서, 반도네온은 독일에서, 만돌린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왔다. 합승마차의 마부는 뿔나팔로, 이민 노동자는 고독의 친구인 하모니카로 탱고를 연주”한다고 말이다.
브라질 축제의 한 장면.
그렇다면 브라질의 삼바는? “삼바는 검고 가난하고 경찰의 쫓김을 받는 자들의 피난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혹을 받는다. 그러나 영혼을 애무해주는 삼바 리듬에 한번 몸을 맡기면 경멸 따위는 눈 녹듯 스러진다.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왕이 되고, 모든 불구자가 성한 자가 되고, 모든 따분한 자가 아름다운 미치광이가 되는 축제에서 세상은 삼바 리듬을 따라 숨 쉰다.”(불, 3-175)
갈레아노의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우리가 그동안 삼바 군단이니 탱고 사단이니 하면서 저 남미의 역사와 문화와 특히 축구를 터무니 없이 그 겉 모습, 피상적인 이미지로만 이해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
브라질은, 적어도 축구에 관한 한 ‘보편과 특수’의 창조적 결합을 성취한 나라다. ‘제국 vs 식민’이라는 근대 이후의 세계사는 이른바 구미 선진국의 체제, 이념, 문화가 ‘보편’의 이름으로 제3세계 곳곳으로 강제되거나 수입되는 역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제3세계 내부에 크고 작은 찰과상을 많이 남겼다.
브라질의 축구도, 처음에는 19세기말 영국과 네덜란드 선원들이 이식한 것이었다. 유럽의 선원들에 의하여 북동쪽 해안의 백사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880년대 안팎의 일이다. 첫 공식 경기는 1894년에 치러졌고 1898년에는 상파울루의 철도 및 난방회사와 은행이 공동으로 팀을 만들었다. 브라질에서 태어난 영국인 찰스 밀러가 영국에서 커피로 큰 돈을 벌어 축구를 가지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이 큰 자양분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상파울루 리그가 형성되었으며 1908년에 아르헨티나와 첫 국제 경기가 치러졌다.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 찰스 밀러.
이렇게 이식된 축구 문화지만, 그것이 브라질의 토양에 뿌리내리는 순간, 마치 브라질 사람들은 태곳적부터 그것을 익숙하게 해온 듯 곧장 전국적인 리그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아이들을 공을 차면서 미래를 꿈꿨으며 그 기반으로 순식간에 세계 무대에 가담하였다. 수많은 ‘말란드루’들이 카포에이라 대신 축구공을 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질서 대신 무질서를 택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정말로 ‘무질서’한 혼돈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리블을 했고 패스를 했고 슛을 했다. 골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특히 흑인이나 혼혈인이 축구장에 쏟는 감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브라질의 축구는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백인 구단주에 백인 감독에 백인 선수로 구성되었다. 브라질 최고의 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해안가에서 거주하는 주류 백인들이 축구를 거머쥐고 있었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산지의 파벨라스에 몰려 사는 가난한 아이들은 골목에서 그리고 모래밭에서 공을 찼다. 그들 중에 뛰어난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색인은 경기장에 들어설 수도 없었다. 흑백 혼혈인 카를루스 알베루투는 1916년 플루미넨스 경기에서 흰 쌀가루를 얼굴에 발라야만 했다. 1921년 페소아 대통령은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 출전하는 모든 브라질 선수들을 백인으로 구성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1923년에 가서야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혼혈 선수가 포함된 바스코 다 가마가 리오챔피언쉽에서 우승을 했다. 그러자 대도시 리우의 백인들이 흑인이나 유색인의 참가 조건을 더욱 엄격하게 제한하려 했고 그것이 사회의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결국 1933년, 프로 선수 제도 도입과 더불어 인종 갈등이 누그러지면서 브라질 축구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바스코 다 가마 모습.
그리고 펠레가 등장했다. 펠레는 축구를 미분하면 결국 ‘개인’이 남는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한 선수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축구는 자신의 아버지인 럭비의 유전자를 많이 털어내지는 못했다. 선수들은 가급적 정해진 포지션을 지켰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우루루 공을 따라 몰려다녔다. 그런데 펠레의 등장으로 포지션과 개인기의 화학적 결합이 이뤄졌다. 그는 뛰어난 개인기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니었더라면 브라질 축구사의 으뜸별이 될 수도 있었을 위대한 동료들과 함께 패스에 의한 공간 창조가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그들이 한 것이 바로 축구였다. 현묘한 드리블과 예측 불가능한 패스에 의한 그들의 축구는 ‘킥 앤 러시’의 잉글랜드 축구와 함께 축구라는 세계를 양분했다.
브라질 축구는 언제나 승패라는 ‘숭고한 노이로제’에 얽매어 있는 현대 축구를 가볍게 흔들어준다. 그들 역시 경기에 몰두한다. 이겼을 때 환호하고 졌을 때 침통해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브라질 선수들의 약동하는 에너지와 독특한 육체성은 축구가 반드시 승리와 패배라는 냉혹한 낱말로 규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 팀이나 선수들이 더러 그들의 전술이나 기교를 배우거나 흉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과 표정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독일이나 러시아의 그 어떤 선수가 호나우지뉴처럼 웃음기를 띠면서 공을 찰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유전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브라질 축구는 현대 축구의 한 축을 떠맡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창조성의 세계를 갖고 있다.
브라질 선수들의 약동하는 에너지와 독특한 육체성은 축구가 반드시 승리와 패배라는 냉혹한 낱말로 규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래밭에서 드리블을 배웠다. 1970년 브라질 월드컵의 대표팀을 맡았던, 그러나 군부 독재자 에밀리우 메시디 대통령을 미움을 사서 정작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주앙 살다냐 감독은 “브라질 축구는 음악처럼 리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2002한일월드컵의 결승전, 히바우두와 호나우두의 합작 골을 통해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이탈리아의 광기 어린 영화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유럽 축구 스타일은 산문이며 브라질 축구 스타일은 시“라고 말했다. 표적의 중심을 꿰뚫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 인물이 바로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 곧 펠레다. 아버지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을 존경해서 에드손이라는 붙였다고 한다. 펠레는 어려서 바우루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에 빌레라는 골키퍼가 있었다. 펠레의 친구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에드손을 펠레라고 불렀다. 처음에 펠레는 그 말이 싫었으나 축구공이 없어서 코코넛으로 드리블을 하고 거리에서나 모래밭에서나 그 비좁은 데서, 열 명 이상 뒤엉킨 곳에서, 홀로 살아나왔을 때 모두가 ‘펠레!’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라도나와 펠레를 비교하면, 당연히 브라질 사람들은 펠레를 추켜세운다. [월간 포포투] 2009년 4월호를 보면 브라질을 대표하는 명장 마리우 자갈루 감독은 “두 명의 마라도나라 해도 펠레 보다 뛰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동료 토스탕은 ”마라도나는 공을 지닌 예술가일 뿐이었다. 예를 들면 서커스 광대처럼 말이다. 그러나 펠레는 기술, 축구관 그리고 축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고 평가한다. 현대 사회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가족의 부재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80년대의 스타 소크라테스는 ”서커스의 공중그네를 생각해 보라. 펠레는 위에서 동료들을 잡아주는 사람이었고 마라도나는 놀라운 공중제비를 선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펠레는 만약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그 스스로가 공중제비 묘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찬사를 보낸다. 소크라테스는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히베이라우 프레투 극장을 건립하여 재정도 빈약하고 시설도 형편 없는 주립학교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다.
브라질 축구인들이 펠레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좀더 깊은 맥락이 있다. 펠레는 한 때 브라질 정부의 체육부 장관이었다. 외신을 통하여 그런 소식을 접한 우리는 그저 국제적으로 유명한 축구 스타의 정치 입문 혹은 유명 스타를 활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전략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브라질의 현대사는 결코 ‘체육부 장관 펠레’가 단순한 사안이 아님을 웅변한다.
영원한 축구 스타, 펠레.
20세기 후반, 브라질은 최악의 부패 국가였다. 그때 축구계도 엉망이었다. 축구계는 ‘큰 모자’를 쓴 지배자들이 지배했다. ‘큰 모자’를 ‘카르톨라스’(cartolas)라고 부른다. 부패한 축구계 권력 집단(협회 수뇌부, 구단주, 조직폭력과 연계된 클럽 간부들 등), 곧 카르톨라스 세력으로부터 싸우며 브라질 축구를 구하려 한 사람이 바로 펠레다.
물론 펠레는 전성기 시절에 그리고 은퇴한 직후에는 이들과 관계가 없지 않았다.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저 힘 없는 선수로서 펠레가 카르톨라스 형님들과 겨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상징 권력을 갖게 된 이후 펠레는 이들과 결탁하지 않고 오히려 맞섰다. 이 카르톨라스의 최상위 권좌에는 브라질축구협회(CBF)와 국제축구연맹(FIFA)를 주무른 주앙 아벨랑제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무명 변호사 출신이면서도 브라질축구협회(CBF)의 회장 직을 맡아 브라질 축구를 음모와 협잡과 부패와 뇌물로 얼룩지게 만든, 그럼에도 그 이권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히카르두 테이세이라가 있었다. 그가 무명 변호사에서 지금까지도 브라질 축구의 최고 권력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장인 어른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주앙 아벨랑제다. 이 ‘큰 모자’ 형님들의 세금 포탈과 권력 남용으로 클럽은 도산 위기에 빠져 2002년에 리우의 명문 클럽 플라멩고는 100만 달러의 부채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9년, 리우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1천 번째 골 터트린 후 펠레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아이들을 생각하세요.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고 호소했다. 그런 심성을 가진 펠레는 ‘큰 모자’ 클럽에 가입하지 않고 그들과 맞섰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진보적인 사회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페르난두 카르도수(그는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투옥과 고문을 당한 적 있다)가 1985년 군사 정권 붕괴 후 정치 일선에 나서서 1994년에 대통령 당선된 것이다. 카르도수 대통령은 축구계의 부패 권력과 싸워온 펠레를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최초의 흑인 장관이기도 했다. 펠레는 축구협회와 각 클럽의 회계를 투명하게 하고 무엇보다 실제로 ‘노동력’(경기)을 제공하면서도 그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카르도수 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했고 그 뒤를 룰라 대통령이 이어받아 지금의 브라질을 만들어냈다. 그런 기사회생에 펠레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펠레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의 신통력 넘쳤던 ‘파울’ 보다도 못하다고 놀려대서는 안 될 것이다. ‘파울’이라는 그 문어 보다 펠레가 승리 팀을 못 맞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펠레가 축구, 그것도 브라질 축구와 사회에 공헌한 업적은 한낱 문어의 승리 팀 맞추기 보다는 훨씬 힘들고 따라서 고결한, 진실로 인간적인 위엄을 보인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 고결한 업적은 브라질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는 그 놀라운 웃음 띤 표정으로 비롯된, 진정한 낙천성의 아름다운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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