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일성재단
일성재단(一星財團)은 충남 예산의 외곽에 있었다.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대지 천여 평 위에 세워진 사층 건물로 조경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이 세워진 것은 십여 년 전이지만 인근 주민들도 이곳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정문을 보면 그 이유가 그대로 드러난다.
정문에서부터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데다가 일반인들의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두어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은 멀리 떨어져 있는 정문의 경비실만 불이 켜져 있을 뿐이어서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은 야산의 중턱에 몸을 숨긴 채 일성재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빛은 별빛 같은 신광이 감돌았다.
한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 호흡이 길고 가늘기 때문에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오제문이 해경선에서 그에게 먹였던 황금빛의 액체는 탁월한 공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내외상(內外傷)을 기적처럼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던 잠력, 전대의 천외천부주 검혼 이영덕의 진원 중 절반 이상을 그의 내공과 합일시켜주었다. 그리고 현재도 검혼의 진원은 빠른 속도로 그의 내공과 합일되고 있는 중이었다.
검혼의 진원이 그의 삼단전에 녹아들면서 그의 천단무상진기도 십성을 지나 십일성의 경지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가 피부 호흡이 가능해진 것은 수일 전이었다.
덕분에 지금 그는 코로 숨을 쉬지 않아도 되었다.
일성재단을 내려다보는 그의 뇌리에 헤어지기 전 오제문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혼이란 분은 왜 저를 선택했던 겁니까?
오제문과 마주친 한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동안 영문도 모르는 일이 그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타인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이 뒤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믿을 수 없는 능력이 대가로 주어지는 일이라 해도.
너의 무(武)에 대한 자질이 특별했으니까. 나는 백두대전 이후 스승님의 뜻을 따라 최고의 자질을 가진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천부의 정수, 무상문의 절예를 익혀낼만한 후계자를 찾으라는 것이 스승님의 뜻이었지. 그렇게 헤매다가 발견한 것이 너였다. 너를 본 스승님도 만족하셨다. 너의 성취는 내 예상보다 두 배 이상 빠른 것이다. 스승님이 남긴 내력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와 같은 성취는 돌아가신 스승님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내게 사실을 말씀하시고 무상진결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아저씨도 아시는 것처럼 당시의 나는 비록 어렸지만 무술에 인생을 걸고 있었고, 진결을 익히라는 제안을 받았다면 분명 거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위험했다. 너도 위험했지만 나도 위험했다. 당시는 호국회의 추적이 멈춘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너와 진결로 읽히는 것은 호국회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다. 만약 내가 그때 너를 가르쳤다면 내가 호국회와 발각되는 최악의 상황에 닥쳤을 때 너도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과 나는 만약의 사태를 염려 했다.
그분이 내게 진결을 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천부의 뜻을 받들어 호국회와의 전쟁에 인생을 걸기를 원한 겁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현재의 상황이 그분의 원뜻이 아니라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한의 어조에 어린 차가움을 견디기 힘든 듯 오제문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분은 진결을 전하며 네가 진결을 수습한 후 그것을 안전하게 후대에 전하기를 바라셨다. 네가 어느 정도 진결을 수습할 때까지 내가 안전하게 회의 추적을 벗어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네게 말할 예정도 갖고 있었지. 그것이 그분의 원뜻이셨다.
네가 회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정면으로 부딪치는 상황은 그분뿐만 아니라 나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예상했던 일도 아니었다.
한은 오제문의 말 속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오제문은 지금 현재의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아저씨도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겁니까?
한의 말에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오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한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오제문과 같은 사람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천외천부의 후예 중 살아남은 누군가가 있는 겁니까? 아저씨의 윗분이?
오제문은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이 맞다. 스승님이 남기신 안배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너를 통한 진결의 보존이었고, 다른 둘은 호국회의 힘을 어떤 식으로든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신께서 천부의 부주로 취임하셨을 때도 천부의 무력은 붕괴되어 가는 중이었다. 당신은 백두대전이 일어나 기 수십 년 전부터 호국회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안배를 하셨다.
오제문은 잠시 말을 멈추며 생각에 잠겼다. 말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듯했다.
당대 은자림의 림주는 은현진인이라는 분이시다. 반선지경(半仙之境)에 든 초월자지. 스승님은 은현진인과 교류가 있으셨다. 천부에 속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은자림에 소속되어 계셨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할 만큼 그 성향이 은자적인 분이셨거든. 당신은 은현진인에게 부탁을 하셨다. 천부의 힘이 소멸된다면 세상에 호국회의 힘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은자림밖에 없고, 서약에 매여 있는 은자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 한다면 호국회는 그 힘을 무제한으로 행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당신이 은현진인에게 부탁한 것은 서약에 매이지 않는 힘을 키워달라는 것이었다. 은현진인은 번민을 거듭했지만 스승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스승님의 부탁을 수락하셨다.
은자림에서 회를 상대하기 위한 세력을 키웠단 말입니까?
오제문은 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그 힘은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다. 그것도 그 힘의 주재자가 네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지.
제 주변에서요?
처음에는 은현진인이 키운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나도 몰랐다. 얼마 전 청운의 집에 침입자가 있기 전까지는. 너도 아는 사람이 그 세력의 주재자다.
그게 누굽니까?
이수진이라는 꽃집의 주인이다.
오제문의 대답을 들은 한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은자림에는 봉원대법이라는 힘을 봉인 해제하는 무예가 전해진다. 그것을 시행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설사 회와 친부의 무예를 익힌 사람이라도 그들의 힘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 대법이 천수백 년 동안 은자들의 존재를 세상 속에서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 너는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이수진을 만나야 한다. 그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회와 싸울 수 없다. 네가 곽병량을 병신으로 만든 이상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네게 힘을 투사할 것이다. 회의 전력(全力)이 너를 향한다면 너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
오제문의 음성은 강했다. 한은 오제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망호의 선상에서 만났던 곽병량 같은 자가 일곱 명이 더 있고, 그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회주 양천종이 그를 상대하려 한다면 회와의 전쟁에서 그가 이길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더 낮았다.
스승님이 남기신 마지막 안배는 내 사형이다.
사형?
그렇다. 나는 그분의 지시를 받고 있다.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도 모른다.
예?
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제문의 말은 상식 밖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분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한 번 뵙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지. 하지만 그분은 스승님의 유일한 아드님이다. 스승님과 헤어질 때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형은 태어나면서부터 회를 제어하기 위해 키워지셨다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그분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내가 그분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지. 나는 그동안 너를 지켜보았고 그 모든 것을 사형에게 보고해 왔다.
내가 회와 조우할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셨겠군요.
그렇다. 네가 김상욱이라는 자를 만날 때도 나는 네 주변에 있었다. 그의 입에서 대명회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나도 놀랐지. 나는 바로 사형에게 보고했고, 사형은 상황을 지켜보라고 하셨다.
한의 시선에 의문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오제문은 말을 이었다.
나는 무예에 대한 자질이 다른 사형제들보다 많이 떨어졌다. 너에 비한다면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네가 무상진결을 제대로 수습한다면 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요유운보와 암향부동신법을 익히는 데 내 전 역량을 다했다. 그 덕에 네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얼마 전부터는 너도 무언가를 느끼는 듯하긴 했지만 결국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오제문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떠올랐다. 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아저씨가 제 앞에 나타나신 것도 사형이란 분의 뜻입니까?
그렇다. 사형의 지시다. 그분의 지시가 없었다면 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은 무거운 얼굴이 되었다. 갈등이 그의 마음속을 헤집고 있었다. 비록 그에게 전해진 힘이 안배에 따른 것이었다고는 하나 천부가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상 상대의 행동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저는 회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저씨와 그 사형이라는 분이 원하지 않아도 그들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저는 검혼이라는 분을 스승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닌 힘이 제 뜻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다. 네게 스승님과의 사제지간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동안 내가 전한 진결로 인해 네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희생해 왔는지를 아니까.
오제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은 서서히 평소의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상에 괸 강재은의 손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천부의 역사를 들으며 궁금한 점이 생기더군요. 왜 천부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고려나 조선을 돕지 않은 겁니까?
고려와 조선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통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오제문의 반문에 한은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표정을 되찾아가던 그의 안색에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내가 한 이야기를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은 듯하구나. 아니 제대로 들었다고 해도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있으니 발상을 전환하기가 쉽지 않겠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민족은 통일된 국가를 이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고조선이 멸망하며 갈라진 제 부족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언어와 문화적 전통이 달라졌다. 현재에 전해지는 중국의 사서들은 그들을 모두 다른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고, 분명 한국과는 다른 면이 많은 전통 속에 살고 있기에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고조선의 영역 내에서 이천 년이 넘게 함께 살았던 하나의 민족이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함께 어울려 살았던 사람들이 다른 민족이 될 수 있겠느냐? 한의 사서들이 그들을 여러 민족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조선을 이루었던 것은 각기 다른 민족이 아니다.
한의 사서들은 고조선을 이룩한 사람들을 조선족이라 부르고 고구려는 고구려족, 백제는 백제족, 발해는 발해족이 건국한 나라라고 말한다. 그들이 모두 다른 민족이더냐! 흉노와 몽고, 동호, 숙신, 선비, 거란 이 모든 족속은 그 당시 민족이 아니라 부족이었다. 고조선의 변방을 지켰던 부족들. 하지만 한족은 그들을 각기 다른 민족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당의 장수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역사서들을 불태우고 일제 강점기에 20여만 권에 달하는 그처럼 많은 서책들을 불태운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모두 진정한 역사를 숨기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당나라는 천하의 중심이 고구려라는 것을 인정 할 수 없었고 그렇게 기록된 모든 사서들을 불에 태웠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자신들의 뿌리가 한(韓國)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었기에 역시 사서들을 불에 태우고 왜곡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러 곳에 단군조선과 그 이후 명멸했던 기마민족의 기록은 남아 있다.
흉노와 유연, 말갈, 거란, 몽고를 비롯한 중원 북방의 기마부족들이 일어선 지역을 생각해 보아라. 그들이 일어섰던 곳은 모두 단군조선이 이천 년 이상을 지배했던 강역이었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자들이 다른 민족일 수가 있겠느냐?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
대륙의 역사를 한족의 역사로 착각하지 마라! 현재 중국사라고 불리는 역사가 대륙의 역사인 것도 아니다. 중국이라는 단어가 국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인지는 아직 백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손문이 1912년 사용한 중화민국이 최초이고 이후 마오쩌뚱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확립된 국가 명칭이지. 알겠느냐! 기나긴 중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륙사나 아시아사가 존재할 뿐.
관점을 바꾸어 보아라. 동이를 한족의 변방으로 보는 고정관점을 깨라!
한족이 중원을 지배한 세월을 모두 합한다 해도 이천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지난 이천 년만을 본다면 한족이 중원을 지배한 세월은 후한과 송, 명을 모두 합해 계산해도 천 년이 채 되지 않지. 하지만 그들이 동이라 부르는 우리 민족이 중원을 비롯한 대륙을 지배한 역사는 단군조선이래로만 따져도 삼천 년이 넘는다. 한족이 세운 국가는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지방 정권에 불과했고, 그것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망하기를 여러 번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지난 십여 년간 그처럼 고구려 이전의 역사를 중국사로 바꿔치기 하려는 후안무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최근 얼마 천부터 다민족 통일족국가론을 말하지만 한족 중심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지금의 한족 중심의 중국이 성립된 것은 그 역사가 백 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얼마나 웃기는 말이냐! 다민족 통일국가라니. 현재의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가 중국사라니. 그렇다면 땅을 일은 민족은 역사조차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니냐. 저들은 다민족 통일국가라는 말 속에 나라를 갖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나라를 갖고 있다 해도 저들에 대항할 힘이 없는 타민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중화패권주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다민족 통일국가 운운하지만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한족이고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는 것 또한 한족이다. 희한한 이론 속에 한족의 존재를 뭉뚱그려 희석시키려고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에 불과하다.
중국이 고구려 이전의 역사를 끌어안으려 하고 일본이 단군조선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의 의미는 동일하다. 중국은 단군조선을 끌어안지 않고는 자신들의 대륙지배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고, 일본은 단군조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일본 민족의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두 나라의 역사 왜곡은 결국 같은 맥락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단군조선의 존재는 아시아대륙 역사의 태풍의 핵이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손을 대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저들의 의도를 막는 것이다.
이 나라의 국사책에는 단군조선이 있었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사학계는 단군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전에 그들이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인했던 것은 그 실증사학이라는 웃기는 관점에 따라 그때까지 발굴된 청동기의 탄소측정 연대가 서기전 10세기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 요서지방의 하가점에서 발굴된 청동기의 탄소측정 연대가 서기전 4세기를 넘어가는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그 문화는 단군조선의 문화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사이에 단군조선의 유적과 유물은 중국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으로 탈바꿈하고 있고 우리의 역사는 중국사로 편입되고 있지. 개탄스러운 일이다.
기억하거라. 서기전 24세기에 청동기를 사용하며 중원의 국가들이 예를 구하던 높은 문화를 보유했던 강력한 기마민족. 그 기마군단을 바탕으로 아시아를 지배한 국가. 그것이 단군조선이다.
단군조선의 실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날 아시아의 역사, 나아가 세계사가 다시 쓰여야 한다. 그것이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다.
오제문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너는 고려와 조선이 정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분명 이 나라가 맞지만 청이 멸망할 때까지 한족이 말하는 동이는 청과 조선, 몽고, 일본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중 가장 강성한 것이 청이었고. 천외천부가 발해를 도운 것은 당연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국가였으니까.
그럼 고려를 돕지 않고 몽고를 도운 것은 왜였을까? 고려와 조선은 생존을 위해 중원에 세워진 국가에 사대정책을 취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천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지.
천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사대를 한다는 말이더냐!
게다가 몽고는 북부여가 일어섰던 곳이고, 현재의 몽고족은 역시 고조선의 갈래로 북부여의 후예다. 몽고가 동아시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칭기즈칸 이후다. 그 이전에는 그들은 몽올, 타타르, 달단 등으로 불렀지. 하지만 온갖 이름으로 불려도 그들의 기원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군조선의 서방 변경을 지키던 부족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께서 태어나신 곳도 그곳이고. 성왕은 그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에 고구려를 세우셨지.
그럼 만주족이 세운 청은 어떠하냐! 만주족의 전신은 여진족이고, 여진족은
말갈족의 후예다. 말갈은 고대에 읍루 혹은 숙신으로 불리던 부족으로 역시
고조선의 동북방을 지키던 부족이다.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를 세운 여지족의 완안아골타는 자신이 신라의 후예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吏)에도 기록되어 있는 일이지.
천부가 원과 청을 도운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너나 현재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원과 청을 끌어안지 못하지만 천부는 그들을 모두 한 형제로 생각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스승이신 검혼께서도 한민족의 일원이시지만 너희 식으로 생각하면 이민족이다. 검혼 이영덕님의 조상이시고 천외천부를 설립하셨던 다섯 분 중의 한 분인 이희온 님은 말갈족이셨으니까.
하지만 이제 단군조선의 적통을 이을 자들은 남북으로 갈라진 너희밖에 없다.
몽고는 힘을 잃었고, 만주족은 뿌리조차 찾기 어렵다. 일본을 이룩했던 한(韓)은 기마민족의 기상을 잃고 섬나라 근성 속에 함몰되어버렸다. 모두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 잊어버렸지. 현재 단군조선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이 나라뿐이다.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 이외의 것에 대한 배타성과 속좁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날 그 강대했던 기마민족의 자부심과 포용력을 되찾아야 한다.
중국이 역사를 제멋대로 바꾸며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이룩한 금과 윈, 청을 자신들의 역사 속에 끌어안는 지금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갈라진 민족을 끌어안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의 역사를 축소하고 소극적으로 안주하려 한다면 그나마 남은 단군조선의 적통은 그 맥이 끊길 것이다. 스승님께서 이 나라에서 진결의 후예를 찾으신 그 깊은 뜻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렵기만 하구나.
오제문은 탄식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천외천부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조선 이후 갈라져 이미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린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옛적 우리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를 회복하는 겁니까?
천외천부는 호국회와는 설립목적이 다르다. 호국회는 한족 중심의 천하를 만들려고 설립되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국가의 운명에 개입했고, 지닌 바 힘으로 타민족을 억압했다. 하지만 천외천부는 그럴 의도를 갖고 출발하지 않았다. 발해와 원, 청을 도왔던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호국회가 그들을 노리고 있었고 천부가 그런 호국회를 견제하지 못했다면 발해, 원, 청은 나라로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해, 원, 청이 존재하지 못했다면 대륙은 한족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은 천 년 이상 빨리 현재의 한국처럼 미래도 불투명한 소극적이고 나약한 민족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호국회가 소멸한다면 천외천부도 당연히 해체되어야 한다. 그것은 천외천부를 만드신 분들의 뜻이다. 돌아가신 스승님도 나도 그리고 사형도 천외천부의 힘으로 조상들이 이룩했던 영토를 되찾을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천부의 힘이 그 일을 하는 데 보태져서는 안 된다. 역사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천부는 그들을 보호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다.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부는 영원히 음지에서 활동하다가 호국회와 더불어 사라야 하는 조직이다. 천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며,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천부의 힘을 이은 자는 민족과 역사를 지키는 데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그것이 천부가 설립된 진정한 목적이다.
민족과 역사?
그렇다. 먼 훗날 인류가 민족 구분이 필요 없는 정신적 성취를 이루어 전 인류의 구성원들이 차별 없는 이상향이 온다면 몰라도 그때까지 민족은 지켜져야 한다.
세계를 보아라. 힘이 없는 민족이 힘 있는 민족에게 얼마나 박해받고 있는가를.
가까운 중국 내의 수십 개 소수 민족이 한족에게 얼마나 차별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문화대혁명 당시 사라진 소수민족의 숫자가 얼마인지, 티베트가 점령당할 때 학살당한 사림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아느냐? 한족 중심의 아시아가 펼쳐진다면 그들은 주변 민족을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고도 남을 놈들이다.
한족 중심의 중화패권주의의 전통은 일이백 년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평화롭기만 하다면 식민지가 되어도 좋다는 놈들이나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일개 주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놈들이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나라다. 모두 자기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부심을 잃었다. 제 민족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은 민족의 존망에 관한 문제다. 어떤 국가도 어떤 민족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잃은 자들이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한 전례는 역사 속에 없다.
이 나라의 역사를 잃어 간 과정에 천부가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호국회와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사서와 유적을 지키려는 노력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은 천부의 관심에서 언제나 멀리 존재했다.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자들에게 천부의 수뇌부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네게 마땅한 변명으로 들리지는 않겠지.
현재는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 더 이상 한 국가의 영토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가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나라의 영토가 제아무리 넓어도 그 안에 사는 자들이 보잘 것 없다면 빠르게 도태되는 세상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민족의 정체성이고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다. 그 때문에 민족의 역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민족구성원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천부가 지켜내지 못한 역사를 복원시켜야 하는 것이 천부의 힘을 얻은 자의 책무다.
민족을 지키고, 잃어버리고 왜곡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살아남은 천부의 후예로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
천부는 당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미래를 위해 존재해 왔고 또 존재할 것이다. 호국회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변치 않을 진실이다.
오제문의 말이 끝난 후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다. 오제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선택은 이제 한의 몫이다.
창밖을 향했던 한의 시선이 다시 오제문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이 흐른 지 삼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선 살아남아야 하고 또 회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하겠군요. 그들을 멸절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니 그들의 세력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고, 그들의 힘이 약화되었을 때 천부의 힘을 회복해야 하고 말입니다.
결심을 한 것이냐?
기대에 찬 눈으로 오제문은 물었다.
하지만 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의 말씀 중 많은 부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천부의 후예임을 인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제게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과의 전쟁은 아저씨와 그 사형이라는 분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될 겁니다. 그것은 호국회와 천부의 전쟁이 아니라 대명회와 저와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오제문은 한의 말에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한에게 천부에 대한 말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한의 성격상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회의 주력과 부딪치기 전에 너는 반드시 두 가지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게 무엇입니까?
은현진인이 키운 힘을 얻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 힘을 얻는다면 적어도 이 나라에서만이라도 너는 회를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한은 생각을 멈추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날이 밝을 것이다.
한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 하더니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이 밝은 자가 보았다면 한줄기 검은 번개가 일성재단의 담 밑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담장 위에 설치된 CCTV의 사각을 통과해 담을 넘은 한은 재단의 정원에 납작 엎드렸다. 그의 신형이 지면과 닿을 듯 말 듯 붙은 채 바람처럼 재단의 건물로 움직여 갔다.
그렇게 움직이던 한의 신형이 멈춘 곳은 재단 건물 바로 앞에 놓여진 정원석의 뒤였다.
그의 눈엔 미미한 놀람과 긴장, 그리고 기대했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 같은 것이 복합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한은 사방을 경계하며 정원석에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곽병량이라는 노인에 버금가는 기운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회의 장로라는 자가 있다는 말인가?
한이 전진을 멈춘 것은 재단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기운은 건물의 세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재단 건물 내에 기를 사용하는 무공을 익힌 자가 최소한 세 명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미약한 것은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잘 갈무리된 정순한 기운이었고 한이 대망호의 선상에서 만났던 곽병량이라는 노인에 비해 못하지 않은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건물을 바라보는 한의 눈이 번뜩였다.
경계를 하지 않는 기운이다. 회는 이곳에 대한 정보가 아직 내게 들어간 줄 모르고 있군.
곽병량에 버금갈 정도의 고수들이 경계심을 갖고 기운을 숨기려 한다면 한의 능력으로도 그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재단 건물 내에 있는 자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안에 있는 자들의 경계심이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대어였다.
국정원의 권오상에게서 일성재단 임직원의 프로필이 담긴 자료를 받고, 대망호의 선상에서 그 프로필에 담겨 있던 사진 속의 인물인 진대희를 만나면서 한은 일성재단이 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살아난다면 반드시 일성재단을 조사할 것을 결심했는데 지금 재단에 들어서자마자 무서운 기파(氣波)를 흘리는 초고수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한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흐느적거리는 듯하더니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양손의 끝만을 이용해 건물의 외벽을 타기 시작했다. 마치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것처럼 그의 신형이 부드럽게 수직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움직이던 한의 신형은 삼 층의 한 창문턱에서 멈추었다. 그는 한손으로 창문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위로 끌어올려 창가에 눈을 붙였다.
초고수자들이 건물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한 이상 무상신안결을 사용하는 것은 발각될 염려가 있었다. 신안결은 기를 사물에 투사하는 형태의 무예이기 때문에 진정한 고수라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들여다본 곳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네 개의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에는 몇 개의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한은 턱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의 왼손이 자물쇠가 있는 부분의 유리에 닫자 잠시 후 안쪽의 자물쇠가 소리 없이 돌아가더니 잠금이 풀렸다.
한은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움직임에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유령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움직일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만큼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 회의 장로급 고수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돌아가는 것은 그의 염두에 없었다.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회는 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것이고 그들의 흔적은 점점 더 추적하기 어려워 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일성재단에 그들의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은 사무실의 출입문에 몸을 붙였다. 이런 사무실에 회가 자료를 남겨두었을 리는 없었다. 자료를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출입문을 열고 나서자 어둠에 잠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는 붉은 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과 천장은 나무 무늬의 고급 재질로 되어있어서 인테리어에 많은 투자를 한 빛이 역력했다.
복도를 걷는 한의 두 발을 자세히 보면 그의 두 발은 양탄자 위 1센티미터 정도의 허공을 걷고 있었다. 절세의 암향부동신법(暗香不動身法)이 극성으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사무설과 복도 곳곳에는 정교한 CCTV들이 장착피어 사물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한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가 CCTV의 사각을 움직인 때문도 있지만 CCTV의 사각에서 사각으로 이동하는 그의 속도가 너무 빨라 기계로는 그의 잔상도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허공을 가로지르던 한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복도 벽에
달라붙었다. 그의 안색은 진중하게 굳어 있었는데 건물의 구조상 중심부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접근할수록 그가 정원에서 느꼈던 세 게의 기파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군.
한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시퍼런 빛을 뿌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복도에서 멈추었던 그의 신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심을 한 것이다.
그의 신형이 다시 멈춘 것은 상임고문 이원길이라는 아크릴 팻말이 출입문에 붙어 있는 사무실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는 복도가 꺾이는 부분에 몸을 밀착하고 상임고문실을 응시했다.
그가 느꼈던 기파가 상임고문실에 접근할수록 강렬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는 한의 입가에 한줄기 횐 선이 그어졌다. 그의 무심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오른손 밑으로 흐느적거리는 푸른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정도(無情刀)였다.
내 운명은 전쟁의 연속으로 규정된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싸울 일이 널렸으니.
그가 원했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원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희망은 물 건너간 듯했다. 내키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그는 현실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살다 보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길을 가야만 한다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설사 중도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정면을 뚫고 간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타고난 무인인 것이다 비록 그가 사는 21세기와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상임고문실을 바라보는 한의 눈이 정적에 뒤덮였다. 그렇게 석상처럼 서 있던 그의 신형이 한순간 복도에서 사라졌다.
콰쾅!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상임고문실의 출입문이 안쪽으로 터져나갔다.
산산이 부서진 파편을 뚫고 장대한 그림자가 번개처럼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의자에 기대어 극비로 분류된 서류를 보고 있던 강우림은 경악했다. 난데없이 사무실 출입문이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부서져 나가며 허깨비를 연상케 하는 그림자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덮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의 장로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초강자였다. 그의 반응은 눈부셨다.
부서진 문을 뚫고 들어온 그림자가 7~8미터에 달하는 그와의 거리를 단숨에
건너뛰며 그의 가슴으로 뛰어들자 그는 수중의 서류를 가슴에 집어넣고는 의자에서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아무런 반동도 없이 의자에서 바람처럼 솟아오르는 그의 모습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호국회에 전승되고 있는 고대의 신법 중 일학충천(一鶴沖天)의 변형이다.
한의 손에 들린 무정도의 시퍼런 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강우림이 앉아 있던 의자를 수평으로 양단했다.
쑤와아악!
얼음처럼 매끄럽게 양단된 의자의 윗부분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떨어질 즈음에야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무정도의 가공할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무정도는 의자를 자른 후에도 힘을 잃지 않았다. 한은 무정도의 날을 허공으로 향하게 방향을 바꾼 후 수직으로 그어 올렸다. 신도합일(身刀合一)된 그의 신형이 무정도와 함께 강우림의 밑에서 비스듬히 날아올랐다.
허공에 떠 있던 강우림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물었다. 푸른빛
도신(刀身)이 그의 사타구니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공처럼 둥글게 말리며 앞으로 구름처럼 미끄러졌다. 무정도를 피한 그의 몸이 다시 펴지며 강우림의 양손이 무서운 속도로 한을 향해 열십자로 그어졌다.
그 손길을 따라 일어난 막대한 암경(暗勁)이 무거운 철퇴의 형상을 이루며 한에게 날아들었다. 강우림의 이대(二大) 성명절기(盛名絶技) 중 하나인 염왕소혼장법(閻王消魂掌法) 중 절초 운리건곤(雲裏乾坤)이다.
책상을 밟으며 신형을 돌린 한은 어느새 자신의 가슴에 거의 도달하고 있는 암경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그의 손에 들린 무정도에서 무시무시한 푸른빛 섬광이 일어나며 강우림의 암경을 갈랐다.
강우림은 상대의 손에 들린 도가 자신의 암경을 소멸시키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웨.
웬 놈이냐고 말하려던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의 암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낸 상대는 그와 어떤 대화도 나눌 생각이 없는 듯 책상을 박차며 다시 그를 밀쳤던 것이다.
상대의 손에 들린 도에서 삼 미터에 달하는 산악과도 같은 도기(刀氣)의 폭풍이 일어나 그를 휩쓸어 왔다. 상대의 도기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보나마나였다. 아마도 잘 다져진 어육이 될 것이다.
계속 수세에 몰린 강우림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시뻘건 눈으로 한을 응시하며 정면에 다시 왼손을 세차게 뿌렸다. 앞서 일어난 암경을 능가하는 강력한 기운이 일어나 한의 도기와 거세게 맞부딪쳤다.
쿠쿵!
강대한 두 기운이 맞부딪치며 일성재단의 건물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책상과 벽에 서 있던 책장을 비롯한 사무실 내의 집기들이 두 사람이 쏟아낸 무서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모래처럼 으스러졌다.
한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지금의 충돌로 다케다 마루의 칼에 맞았던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다시 충격을 받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세를 늦출 수는 없다. 한순간의 틈은 강우림과 같은 고수에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된다.
강우림의 손에서 뻗어 나온 암경을 해소한 후 허공에서 움직이던 한의 신형이 갑자기 사무실 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한 손으로 바닥을 집고 측면으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의 신형을 따라 한줄기 백색 선이 허공을 난자했다.
강우림의 오른손엔 언제 뽑아들었는지 날에서 서늘한 흰빛을 발하는 10센티 남짓한 칼이 들려 있었다. 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비수라고 하기에는 약간 긴 기형의 도였는데 그의 애병인 염왕비(閻王匕)였다.
염왕비는 치 떨리는 살기를 뿌리며 한을 노렸다. 하지만 염왕비를 든 강우림을 보는 한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은 있을지언정 두려움은 없었다. 지금 그의 능력은 십여 일 전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가 들고 있던 무정도의 도첨(刀尖; 도신의 끝부분)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염왕도법(閻王刀法)의 삼대 절초 중 하나인 염왕참(閻王斬)을 전개하던 강우림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도강!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한의 손에 들린 무정도의 도신은 오십 센티 정도 길어져 있었다. 마치 한 자루의 칼이 더해진 듯했는데 길어진 도신(刀身)은 이 세상의 빛이 아닌 듯 찬연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도강이었다.
한은 검혼 이영덕이 남긴 진원을 자신의 내공과 합일하면서 마침내 움직이며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강우림은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왔는지는 불가사의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채지 못할 회의 인물은 없었다.
임한.
하지만 더 이상 그가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한의 자세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염왕참의 공세를 소요유운보를 이용해 피한 한은 두 발을 바닥에 밀고 무정도를 하단에 향한 채 강우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우림은 한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세가 빠르게 증폭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기세는 빨리 제지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이를 악문 강우림의 손에 들린 염왕비가 폭발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한의 눈앞이 백색 섬광으로 가득 찼다. 염왕비의 끝도 오십 센티 정도가 길어져 있었다.
강우림은 회의 핵심 무력 집단 원로원의 장로다. 그는 당연히 강기를 사용할 줄 아는 고수였다.
염왕비가 뱉어 낸 백색 섬광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한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쏟아졌다. 그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方位)가 염왕비의 공세 아래 놓였다.
위기를 느낀 강우림이 염왕도법 최후의 절초, 염왕폭(閣王暴)을 펼친 것이다.
한이 있던 자리가 염왕폭으로 난자되는 듯한 순간 사무실 안에 한줄기 푸른빛의 번개가 쳤다. 광풍처럼 몰아친 번개의 폭풍은 한의 전면을 휩쓸었다. 그에게 다가서던 백색 섬광이 속절없이 스러졌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쿨럭. 천단무상검! 이 정도라니.
말과 함께 한 움큼의 피를 토한 강우림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토한 핏속에 살점들이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으스러진 오장육부가 피에 섞여 토해진 것이다.
그는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안간힘을 쓰며 한을 보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허벅지에서부터 잘려나가 있었다.
그는 명치 부위에서부터 하단전까지 길게 갈라진 복부에서 꾸물꾸물 삐져나오는 내장을 한손으로 쓸어 담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선 한마디를 할 때마다 핏덩어리가 뚝뚝 떨어졌다.
이미. 지난날의 검혼에. 필적하는구나!
그의 얼굴은 자신의 상처나 목숨에 대한 걱정보다 상대가 보여준 능력에 대한 경악으로 가득했다.
한은 말없이 강우림에게 다가섰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과 상체는 피투성이였다.
그의 왼쪽 뺨엔 코에서부터 턱밑까지 사선으로 그어진 긴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 가슴과 양팔에도 십여 개의 적지 않은 도상(刀傷)으로 찢어진 옷 속에서 살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의 창백했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서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원로원의 장로이자 대한호국회 오대고수(五大高手) 중의 한명인 생사판(生死判) 강우림을 정면으로 상대해 패배시킨 것이다.
오제문이 보았다면 아마 기절초풍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한은 움직이며 도강을 펼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천단무상검도의 뇌전일격세(雷電一擊勢)를 역시 움직이며 펼칠 수 있는 능력도 얻었다.
그 두 무예의 경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어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미숙한 점은 있었다.
그는 무상검도에 도강을 실어 쳐낼 수 있는 경지는 이룩했지만 아직 도강을 쳐내며 무상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의 오른손에 쥐어 있는 무정도에서는 아직도 도강이 사라지지 않았다. 강우림의 능력은 무서워서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한과 강우림의 두 눈이 부딪쳤다.
강우림의 눈은 깊은 한(恨)이 느껴졌다. 일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한은 잠시 그 눈을 바라보다 무정도를 한 번 휘저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손놀림이었다.
무서운 푸른빛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강우림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어 날아오르며 붉은 피 기둥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툭.
털썩.
강우림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상체도 쓰러졌다. 부릅뜬 채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이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세의 고수이자 한족의 영원한 번영을 꿈꾸던 민족주의자 중 한명이 백안시하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명을 다했다.
한의 안색은 무심했다. 더 이상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슴 아파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그의 인식이 변화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는 천부의 후예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회와의 전쟁은 받아들였다. 그와 회와의 싸움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누가 죽든 어느 한쪽이 멸할 때까지 이어지는 그런 전쟁. 그 전쟁 속에서 상대의 목숨에 대한 동정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었다.
한은 무정도를 다시 거두고 쓰러진 강우림의 품을 뒤져 책자를 찾아냈다. 그가 사무실에 뛰어들 때 강우림이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품에 집어넣던 책자였다.
평범한 내용이 적힌 책자였다면 강우림이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었다.
책의 전면에는 비전(秘傳)이라는 한문이 적혀 있었다. 책자를 뒤적이던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떠올랐다.
책자는 절반 이상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책자는 강우림이 흘린 피에 젖어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강우림의 가슴을 벤 그의 도강이 책자의 일부를 베며 그 여파로 책자의 앞부분 일부만을 남긴 채 절반 이상을 부서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책을 상세하게 살펴볼 시간은 없었다.
책자를 손에 든 한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건물 밖에서 그가 느꼈던 기파는 세 개였고, 그 기파의 주인 중 한 명이 쓰러졌지만 아직 두 개의 주인이 남아 있었다.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압력으로 터져나간 사무실 유리창 밖으로 벗어남과 동시에 사무실로 뛰어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강 장로!
형님!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하경운 장로였고, 다를 한 명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육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초로의 사내였다. 혈색이 감도는 얼굴엔 주름이 없어서 그리 늙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오십 대로도 보였는데 날카롭게 뻗어나간 눈썹과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냉철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하경운이 강우림의 머리맡에서 발길을 멈춘 것과는 달리 초로의 사내는 무서운 속도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창문턱을 한 번 걷어찬 사내의 몸은 단숨에 일성재단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섰다.
그의 눈에 사오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막 산등성이를 넘어 사라지는 인영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불길을 토해 내는 눈으로 그 신형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암향부동(暗香浮勳)!
사라진 인영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느리지 않았다.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경운이 그를 보며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진 아우, 그자는?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너무 멀리 갔고, 믿어지지 않는 경신술의 소유잡니다.
임한이라는 자 같습니다. 사라져간 신법이 암향부동입니다.
대답하는 진영충의 안색도 하경운과 다르지 않았다.
천외천부! 임한, 네놈이 감히! 강 장로가 죽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하경운은 이를 갈며 넋이 나간 얼굴로 강우림의 머리를 들어 가슴에 안았다.
강우림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아직 멎지 않았다. 그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강우림의 성격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독선적인 부분이 있어 하경운은 그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강우림에 대한 그의 신뢰와 존경심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강우림은 그와 평생을 전장에서 함께 한 친우였다. 성격상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등을 돌리기에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와 진영충이 삼 층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의 충돌을 느낀 후 각자 있던 장소를 벗어나 상임고문실에 도착한 것은 3~4초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강우림은 시체로 변했다. 한과 강우림의 공방이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부가 사라진 후 십여 년 동안 편하게 지내는가 싶었더니 그것이 자네의 전부였는가?
하경운은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두 눈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강우림의 이마에 떨어지며 톡 소리를 냈다.
진영충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지난날 백두대전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던 그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강우림이었다. 겉으로는 냉혹한 듯해도 회의 후배들에 대한 강우림의 애정은 두터웠다.
진영충은 앞으로 다시는 강우림의 그 카랑카랑했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강우림을 해친 자에 대한 살기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통곡과 함께 멀리서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