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양심의 위기>를 쓴 지 얼마 후, 한 친구가 나에게 <양심의 위기>가 씌여지기 전의 아주 비슷한 제목의 책 한 권을 빌려주었다. <양심의 회의(懷疑)> 작가 찰스 데이비스는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로마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카톨릭 교회는 나를 성숙한 삶으로 인도해 주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변화할 수 없는 현실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나의 인생관을 지배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15세부터 그는 인생의 목표로서 교회의 성직자로서의 천직을 추구했다. 비록 우리의 종교유산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광활한 천주교 바다와 대조적으로 작은 연못을 닮은 여호와의 증인.—내가 물려받은 종교에 대해 그와 아주 똑같은 감정을 품었던 나는 상호간의 경험의 유대감을 느꼈다. 찰스 데이비스는 20년 넘게 사제 생활을 했고,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영국과 해외에서 강의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그런데 1966년, 그는 그의 모태 신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나의 경험과 어떤 점에서 비슷하든, 그가 이 주요한 단계를 취한 이유를 읽었을 때였다.ㅡ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던 신념체계와 종교직을 포기한다는 것ㅡ 에서 나와 아주 유사하다는 친밀감을 느꼈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지금도 물론 그리스도인이지만, 현재 존재하는 교회가 내가 알고 존경하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며 성장시키려는 가치의 원천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과 반대 속에서 살고 일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헌신은 사람들에 대한 진실 그리고 관심과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대표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공식적인 교회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권위에 대한 관심이 진실을 희생하면서, 비인격적이고 자유가 없는 시스템의 작용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례에 대해 나는 늘 슬퍼한다. 나아가, 과연 성경적, 역사적 근거에 맞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존재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가장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은 워치타워 조직의 가르침 안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나를 가장 크게 불안하게 한 것은 주로 워치타워 조직에 흐르는 영(spirit)이었다. 나는 그(=찰스 데이비스)와 비슷하게도 "진실을 희생하면서까지 권위에 대한 애착"과 그에 수반되는 "비인격적이고 자유가 없는 조직의 힘이 사람들에게 가해진 데미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권위에 대한 애착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거의 가려버렸다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회의하게 만들었다. 워치타워 조직은 양을 돌봄에 있어서, 단순히 양떼의 숫자의 일부로서, 도움, 보살핌, 보호가 필요한 양에 대한 목자의 진실한 관심을 보여주지 못하고, 예언자 에스겔이 한 묘사를 떠오르게 한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 34:4, 새번역)
회중의 장로들이, 어려움, 질병, 우울증, 낙담 등에 빠진 양들과 함께할 시간은 거의 없으면서, 조직이 강조하는 야외 봉사 활동을 추진하는 데는 기꺼이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은 슬픈 진실이다. 이들은 "너무 바빠서" 양떼에게 도움을 주거나 격려를 주는 데에는 시간을 못 내지만 위법 행위가 의심될 경우는 번개 같이 신속한 조치를 취하고 조사나 심의를 위해 많은 시간을 기꺼이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조직은 제명자의 수로 기록을 세운다. 1985년 단 한해 동안 36,638명의 제명자가 발생했으며, 1986년에는37,426명의 제명자가 발생하였다. 청년들 사이의 문제는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 이들을 선도하기 보다는 거의 모든 경우에, ´해결책´이란 사법 청문회로만 구성되며, 제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이다. 숫적 증가에 대한 집착은 1980년 연감(11페이지)의 성명에서 "제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79년에 거의 1.5%가 아니라 거의 3.5%가 증가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즉, 그 해에 전체 회원의 2%가 제명되었다는 뜻이다.) 정말 마음 아픈 점은 조직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요인이 ´잃어버린 양´의 어려운 처지가 아니라 보고된 증가율이 낮아졌다는 점을 훨씬 강조한다는 점이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걱정 속에 기꺼이 남겨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구출하기 위해 나서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목자와는 얼마나 다른 태도인가. 워치타워 조직이 양을 돌봄에 있어서 어떤 태도로 일관하는지 한 예를 보도록 하자:
그녀의 남편이 침례 받도록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 "무활동"이 된 여성 증인이 통치체에 보낸 편지를 기억한다. 그 부부는 도박 카지노로 유명한 한 도시로 휴가를 갔고 남편은 도박 게임에 약간 빠져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로들은 그를 청문을 목적으로 소환하였다. 그들은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명했다. 아내는 통치체에 보낸 편지에서 남편이 "상습적으로 도박을 하는 도박꾼은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녀는 이것을 이전에 부부간의 불성실 행위를 저지른 적이 있다고 스스로 시인한 자신의 상황과 비교 설명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한 일에 소름이 끼쳤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녀는 또 그랬다. 그리고 이제 분명히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장로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고, 회개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책망"을 받았다. 장로들은 그녀에게 영적인 힘을 얻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매달 그녀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6개월이나 기다린 후 마침내 한 장로에게 다가가 이 방문 약속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 장로의 대답은 "너무 바빴다"면서도 조금만 기다리면 그녀와 함께 상담할 시간을 낼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 인격에 대한 ´사법적 조치´를 취할 태세는 도움 제공이 더딘 것과 매우 대조를 이루며, 이는 모든 회중들 전체에 흐르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봉사부 위원회가 이 편지를 통치체의 봉사 위원회에 보내자 "그들이 정말로 탐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는데도 도박이란 이유로 제명이 되었다"는 코멘트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또 "도박에 관해서 탐욕이 왜 제명을 당하게 하는 범죄의 명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따금 도박꾼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도박꾼보다 훨씬 더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탐욕스러운 사람인지에 대해서 또는 그들이 사법위원회 앞에 소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또 다른 예로서 30년 이상 장로로 지냈던 한 증인은 1988년 8월 30일 브루클린 본사에 편지를 썼다. 그는 ´사랑에 찬 도움´과 ´새 힘´의 원천으로서 장로들이 양떼를 치라는 조직의 설명과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슬픔을 토로했다. 그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버지니아 주 워렌턴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는 동안, 나는 주임 감독자 함께 이웃의 회중 장로들로부터 전화를 통해 회중은 다른 지역이지만에, 혼수상태인 노부인을 생업으로 돌보고 있는 나이가 든, 무활동의 과부인 자매의 비행 혐의를 듣고 그녀를 조사하기 위해 갔다. 우리가 도착하자, 그는 자매에게 그녀가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비행에 대해 물었다.[그 혐의는 순전히 추측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남편이 죽은 지 7년이 넘었다. 나는 무활동이 되어 몇 년 동안 집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장로 한 명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제명 시킬 단계를 밟기 위해서 이리로 달려왔다. 도대체 형제 여러분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관련 장로(예를 들어, 언급된 증인 장로)가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동정심이나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점에 대해서 대부분의 장로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거의 믿을 수 없지만, 때로는, 따르는 조치들은, 종교 조직이 개인이 결정해야 할 양심의 행사를 대신 맡게 될 때, 얼마나 슬픈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개인의 감정에 미치는 무감각하고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설명하여 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 예를 들어 제5장에서는 그가 그곳에서 말한 의도와는 반대로 율법적 방법으로 쓰이거나 잘못 쓰이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회중 내의 극단적 부도덕(심지어 이방인들도 비난하는 도덕기준이 방치됨)에 근거하여 이것이 전체 회중에 미치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편지에서, 음행하는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약탈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사귀지 말라고 쓰는 것은, 신도라 하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 .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고전 5:9-11,13)
그의 말은 때때로 부도덕한 행위나 탐욕, 주정뱅이 또는 이와 유사한 비행을 저질러 왔던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재에도 부도덕하거나 탐욕적이거나 주정뱅이 기타 등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사람이 한 번 술에 취한다고 해서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와 마찬가지로 한번의 부도덕한 행위가 자동적으로 ´음행자´나 ´부도덕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도의 말은 분명히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특징적이고 구별되는 요소인 삶의 계속적인 행로와 관련이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초대된다면, 그가 우리 가족, 우리 아이들의 도덕성과 그리스도인 믿음에 분명한 위험, 부패적 영향력을 미칠 사람이 맞는지가 결정의 요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워치타워 정책에서 이러한 사도의 교훈은 그것을 복잡하고 형식적인 율법적 권한의 행사근거로 전환시켰으며, 영적으로 양떼를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흔히 영적 경찰, 심지어 형사, 검사, 법원 판사, 교도관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행세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세상의 법 집행과 사법 제도를 본떠서 만들어진 워치타워 제도는 초기 판결과 상소제도가 있고, 정해진 절차, 선고나 보호관찰 등의 마련이 있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율법주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점이다. 이 조직의 정책은 사실상 모든 심각한 죄를 고백해야 할 "아버지 고백자" 역할을 하는 장로들과 그들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누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고해성사(a confessional arrangement )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들은 또한 "정보 제공자"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각 성원은 어떤 성원이든 조직 규범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할 의무를 가진다. 장로들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는 길 잃은 양들이 회복하도록 도움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방침이 잘 지켜졌는지의 여부이다. 비록 장로의 행동 결과가 분명 좋았지만, 조직 방침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그는 조직적인 관점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상태가 되어 눈 밖에 나게 된다. 조직의 방침이 사실상 모든 행위 분야에 침투하기 때문에, 장로들 또한 신자들의 의지에 관계없이 회중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어떤 측면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느끼거나 때로는, 심지어 의무감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것은 증인 부모들이 가장 잘 판단하여 자녀들을 징계하고 회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장로들에 의해 선제적, 심지어 독단적, 통제와 결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종종 발생시킨다. 부모들은 외부의 도움을 요청할지 말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잘못을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장로들은 ´부모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며, 또 다르게는 그 문제를 처리할 사법부 역할을 한다. 부부의 침실에도 비슷한 사법적 권위가 종종 끼어든다. 더욱이, 짜증날 정도로 잦은 그들의 개입은 도움과 치유를 제공하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거의 무제한으로 수사, 심문, 증언 소환을 할 수 있는 영장의 권한을 위임받은 검찰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소의 근거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비행자는 3명의 장로로 구성된 종교재판정(이하 "재판소"라 칭하겠다)에 앞서 사법청문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비밀로 진행되며 ´사법위원회´에서 인정한 사람 이외의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다. 이것이 비행자인 당사자의 사생활에 대해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가 모든 사람이 증거를 관찰할 수 있도록 공개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듣기를 희망하더라도, 이것은 조직의 방침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또는 그녀)가 원하는 요소가 전혀 아니다. 만약 제명처분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형제 또는 자매로 취급되지 않는다. 제명된 "상태"가 지속될 것인지 종식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장로들로 구성된 사법위원회에 달려 있다. 만일 어떤 열여섯 살의 젊은이가 성과 관련된 부도덕적 행위 때문에 제명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는 "복귀"에 필요한 단계나 제명처분 "상태"의 종식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성적 부도덕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중에 결혼하고, 아버지 그리고 자식들이며, 그리스도인의 원칙에 따라 살기를 추구하는 충실한 남편, 좋은 아버지,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입증더하라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 부패한 세력, 거짓종교와 어울리는 사람, 심지어 가족까지도 교제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제명된 상태"를 해제하고 공식적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에 적합하다고 선언된 것으로 조직에 의해 규정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방탕한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워치타워 식으로 살아왔다면, 반가와서 뛰쳐나가 그를 끌어안는 것보다 방탕해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먼저 자신의 반가운 애정과 사랑의 속내를 제대로 표현할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3인의 사법 위원회에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닌 문제점은 어떤 사람이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인지, 집으로 초대해도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자신의 지성과 판단력을 행사할 권리도 박탈당한 채, 종교적 권위가 우선적으로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된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서 죄인을 자비롭게 초청하여 그와 화해하게 하시며 그 죄가 비록 주홍색 같을찌라도 눈처럼 희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의 잘못은 용서될 것이며, 그들의 죄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워치타워 조직은 방대한 양의 난처한 정보를 담은 많은 파일을 수년간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이 죽었는 데도 주의 깊이 보관하고 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냉정한 조직인가! 워치타워 조직은 조직 방침의 지지를 위해서 편리하다면 흔히 모세 율법이나 그 율법절차를 인용하지만, 그것은 여기 제시된 원칙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이다. 워치타워 조직은 공청회가 이루는 ´신중함과 정의´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모든 ´사법위원회´ 의 청문은 조직방침에 의해 ´비밀스런 불공정한 청문´의 형태로 치러지는 것이 현실이므로, 사실상 위원회 자체적으로만 이루어진 결과라는 점이다. 회중에서 발표된 결정이 정당한지는 오로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바울이, 문제의 개인과의 교제를 중단하도록 촉구한 동기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고린도 회중의 성원들과 달리,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 회중의 성원들은 그 정보에 대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 상상과 추측, 소문은 종종 위원회의 비밀스런 결정에 의해 야기된 공백을 소문으로 메우게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소문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울리는 벨을 끄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일단 결과가 발표되면, 이러한 비밀 청문회로 인해 야기된 소문은 개인의 명성에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워치타워 조직은 제명이나 이탈로 인해 공개적으로 대화소통에서 제외된 사람들에 대한 매우 극단적인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를 지지하기 위해 "이방 사람이나 세금 징수원같이 여기십시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마 18:19). 1981년 9월 15일 파수대는 예수 당시의 그러한 사람들의 전통적 바리새인들의 행위에 대해 역사적 자료에 의존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현대 워치타워 정책으로 이를 개조시켰다:
1) 니듀이, 첫 번째 범죄로. 이로 인해 목욕물, 면도기, 식탁에서 즐겁게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금지되었고, 또한 교제나 성전 출입을 제한했다. 그것은 30일, 60일 또는 90일 동안 지속되었다. 2) 만약 범법자가 여전히 완고함을 유지한다면, 그에 대한 저주(헤렘)가 심의회(10명의 구성원)에 의해 정식으로 그에게 선고되었고, 그는 공동체의 지적, 종교적, 사회적 생활로부터 격리되어 회중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3) ´샴마타´는 아마도 ´니듀이´와 ´헤렘´ 모두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용어일 것이다. 그것은 요한 9:22; 12:42; 16:2에서와 같이 "회당에서 추방하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에서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예수 당시의 행해졌던 유대인의 관습의 배경으로 볼 때, 우리는 조직의 규정된 절차가 과거의 유대인 관습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단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정신의 표출이 주목을 끈다는 점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성경은 기존의 유대인 제도의 영향이 테러리즘적이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권위에 대한 경계심을 크게 심어 주었다. 징계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대신에,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부패시키고 믿음을 쇠약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예수께서 완고하게 반항적인 죄인을 "이방인"이나 "세금 징수원"으로 보라는 말씀이, 제명된 사람들에게 보내는 차가운 경멸과 극도의 혐오스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워치타워의 가르침을 정당화 시키지는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모형을 제시한다. 파수대 (1981년 9월 15일자와 좀 더 최근에 나온 1991년 4월 15일자 모두 참조)는 예수 시대의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이방인들과 세금 징수원들을 향해 깊은 편견과 경멸적인 태도를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기사에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경시 되었으며" 심지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와는 크게 대조되게도, 히브리 성경은 수세기 동안 매우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한때는 그들도 이방인이었으므로, 동일한 입장에서 이방인을 동정심으로 대해야 했다. 이방인은, 망명의 권리가 있었으며 때때로 이스라엘 자손을 종으로 부릴 수 있었으며 성전에서 기도할 권리가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워치타워 조직은 제명된 자를 회피하는 행위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설명할 때, 이러한 예는 숨기고 예수께서 그들과 어울린 것은 그들이 오로지 좋은 소식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로서만 주장하면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는 예들은 배제시킨다." 그들은 죄인이 회개한 시점이 예수의 도움을 받기 전이 아니라, 후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예수께서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점에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이 죄인, 심지어 매춘부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 회중에서 "좋은 평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한 ´새롭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인 관심자´로서 잠시 동안은 그들의 비행을 증인들이 묵인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은 유대인 회중에서 전망 있는 개종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유대인 공동체인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민족(아마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의 행동으로 자신들을 ´지목´되게 하였고, 때로는 사실상의 "제명된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지목하고 제명시킨 사람들은 유대인 공동체의 "유대인"이었다.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이 증인 공동체에서 이들과 비교가능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은 조직의 "그들을 회피하라´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제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증인 공동체의 누군가가 예수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은, 조직 규범을 준수하는 것에서 멀어진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화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복적인 죄에 빠져 제명을 당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워치타워 조직의 방침에 어긋난다. 한 사람에게 일단 ´제명´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그의 가족들조차 어떤 영적 토의라도 끊기게 된다. 1981년 9월 15일 파수대(이 파수대지에서 우연히 나에게 제명처분을 취하게 된 근거를 제공했다)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제명처분 방식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추방된 사람과 심지어 ´안녕´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전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리고는 그 기사에서 요한2서 9-11절까지 낭독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넘어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가지지 않고 여러분에게 오면, 그를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인사하지도 마십시오.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 기사에서의 요점은 조직에서 추방된 자들에게 "안녕"이란 단순한 인사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어떤 의사소통도 배제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요한의 말들이 결코 워치타워의 그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쟁점이 되는 것은 어떤 종교운동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는 그의 가르침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육신의 그리스도라는 근본적인 그리스도인 신앙 고백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머지 구절에서는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진실로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인간을 위해 생명을 바쳤으며 부활하였다는 진지한 믿음과 그의 가르침과 교훈을 실천으로 옮기는 성실한 믿음이 침례의 기준이 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이 적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안녕하세요´나 ´처음 뵙습니다´와 같은 단순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성공을 기원함으로써 그의 인격이나 명분을 수용하거나 동의를 암시하는 말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를 "환영"하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할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사람에게 단순히 대화하는 것 자체가 인정, 동의,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반박하거나 그의 잘못된 관점을 설득해주려고 노력한다면, 그가 하는 나쁜 일에 그의 파트너가 되지 않음은 확실하다. 오히려, 성경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워치타워 조직은 제명된 사람들과의 대화, 특히 영적인 내용의 대화를 배제시키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후서 3:14, 15에서 바울의 권고를 다룰 때, 문제에 직면한다. 신세계역에서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누구든지 이 편지에 있는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고 더는 그와 교제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겨 계속 훈계하십시오.(데살로니가 후서 3:14)
이 조언에 따른다면, 워치타워의 셔닝 방침을 완전히 지지하지도, 이에 부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은 제명처분과 관련된 사례보다 덜 심각한 경우에 대한 조치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다소 완화된 조치와 태도를 가지도록 "지목"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여기서 논의되는 신자들의 처신은 고린도전서 5: 9-11의 처신과는 구별되는 다른 것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여기서 문맥은,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진 사도의 편지 내용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처신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워치타워 조직은 증인들이 만일 선언된 조직의 방침이나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지목´에 해당된다는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1985년 4월 15일자 파수대 31면(파85 6/15 24면,한국어)은 성경 본문을 설명하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그와의 교제를 중단하라"고 한 다음 이렇게 기술한다:
형제들은 그 사람을 완전히 멀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형제같이 권하라”고 충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의 사교적인 교제를 제한함으로써 형제들은 그가 부끄러워 하게 하고. . . .
워치타워가 인정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바울이 ´---와 교제를 중단하라´에 사용했던 그리스어 구절(시나나미그 니스트하이)이 고린도 5장 11절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어구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세계역은 "---와 어울리지 말고"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왕국 행간역의 행간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두 본문 모두 용어에 실린 힘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 5장 또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설명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자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충고의 범위는 그 정도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