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다른 식구들
“작년보다 더 많이 심었으니 올해는 우리 차지 좀 있겠지?”
아빠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설마 올해도 동물들이 다 먹었겠어요?”
나는 밭일은 잘 못 하지만, 아빠와 시골집 텃밭 가꾸는 재미에 빠졌어요.
“꺅~ 뭐야? 누가 땅콩밭을 온통 파헤쳐놨어!”
차를 세우고 밭으로 가던 아빠가 소리쳤어요. 뒤따르던 나는 얼른 뛰어가 봤어요.
“누가 몰래 와서 땅콩만 캐 갔나 봐요.”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아니야, 사람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아빠는 땅콩밭을 세심히 살펴보며 범인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어요. 밭이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고 뿌리도 밖으로 드러나 있어요.
“두더지 아니면 너구리 짓 같은데.”
아빠는 동물 짓이 확실한 것처럼 말했어요.
“준수가 좋아하는 거라 많이 심었는데….”
나는 유별나게 땅콩을 좋아해요. 봄에 아빠가 심은 땅콩을 누군가 알맹이를 쏙쏙 다뻬 먹었대요. 그래서 그 옆에 한 이랑을 더 심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요.
“작년에도 새들이 옥수수를 다 쪼아 먹어버려 올해는 미리 양파망을 씌웠는데, 땅콩을 또 누가 파먹었네.”
어쩐지 옥수수밭이 송이송이 마다 붉은 칸나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묻어줘야겠다.”
아빠는 호미를 가져와 흩어져있는 땅콩을 묻어주고 나는 얼른 가서 물을 받아왔어요. 아빠가 정성껏 물을 주면서,
“죽지 말고 살아나거라. 그래야 우리 준수가 좋아할 거야.”
나는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빠는 내가 속이 상할까 봐 신경이 쓰였나 봐요.
엄마는 귀농을 반대하는데, 아빠는 귀농을 고집하는 올해 2년 차 초보 농사꾼이에요. 귀농 얘기만 나오면 티격태격하지만, 평소에는 사이좋은 잉꼬부부랍니다.
작년에는 아빠가 뿌린 씨앗의 절반도 수확 못하고 고생만 했대요. 텃밭에 검은 비닐을 씌우고 땅콩을 심었는데, 가을에 수확한 건 한 그릇도 안 된다고 엄마가 제게 그랬거든요. 나는 시골집이 좋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방학이 되면 시골집 마당에서 강아지들과 뛰어놀았고, 할아버지가 에어 풀에 물을 가득 받아주셔서 수영장놀이도 했거든요. 밤에는 마당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면 강물처럼 흐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어요. 지금도 할아버지와 별 보기를 하던 생각이 떠오르면 할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울타리를 쳐야겠어. 산 옆이라 짐승들이 내려오는 것 같아.”
아빠는 우리 텃밭을 지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으신 것 같아요.
“난 못해. 당신이 알아서 해.”
엄마는 단호히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아직 수확이 끝나려면 한 달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다 먹어버리면 어떡해? 우리 식구 먹을 건 남겨놔야지.”
아빠는 엄마 말은 들은 체도 않고 혼잣말만 했어요.
다음 날, 우리 가족 모두 울타리 만들 재료를 사러 읍내에 나갔어요. 마침 장날이라 서울의 큰 시장만큼이나 사람이 많았어요.
“아빠, 저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귀찮기도 하고 시골장에 내가 볼 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앞으로 시골 내려와 살 텐데, 시장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게 가자.”
아빠는 나를 차에 혼자 두는 게 걱정이 되나 봐요.
“아직 결정된 것도 없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해?”
엄마가 아빠 말을 칼처럼 잘랐어요. 엄마는 계속 아빠를 따라다니면서도 마음이 불편해 보였어요.
“알겠어요.”
부모님이 계속 싸울 것 같아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렸어요. 실은 혼자 남아 캔디 크러쉬 게임을 하고 싶었거든요.
시장엔 신기한 것들이 무척 많았어요. 낫, 호미, 괭이, 그 외 이름 모를 농기구들이 엄청 많았고 배추, 시금치, 상추, 파, 버섯 등 먹거리도 많았어요. 어느 할머니 앞에는 팔려고 데리고 온 강아지 세 마리가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강아지들이 엄마와 떨어지다니 불쌍한 생각에 한 번씩 안아줬어요.
“야~이것 봐라. 준수야, 이게 뭔지 아니?”
강아지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아빠가 끈으로 중간을 묶은 둥그런 것을 들어 보이며 물었어요.
“처음 보는 건데 이게 뭐예요?”
아무리 봐도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는 물건이었어요.
“아빠도 이걸 본 지 꽤 오래됐거든.”
아빠는 한참 만에 보는 거라 무척 반가웠나 봐요.
“나도 모르겠는데….”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이건 ‘코뚜레’라고 하는 거야. 옛날에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요했거든. 지금은 거의 기계로 하고 있지만. 코를 뚫어 이걸 끼우는 거야. 그래서 코뚜레야. 기다란 끈을 코뚜레에 연결해 소를 몰고 가며 논밭을 가는 거야. 종을 달아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 종을 워낭이라고 해.”
아빠가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낯설었던 코뚜레에 친근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신기해요. 그런데 코를 뚫을 때 소가 많이 아팠겠어요.”
나도 모르게 손이 코를 만지고 있었어요.
“그랬겠다. 엄마도 귀 뚫을 때 무척 놀라고 아팠거든.”
엄마는 귀를 만지면서 말했어요. 부모님과 처음 시골장 구경을 하면서 빈대떡과 떡볶이를 맛있게 먹은 날이었어요.
“뭐야? 너희는 누구냐?”
울타리 칠 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마당으로 들어서던 아빠가 누구를 보았는지 소리를 질렀어요. 덩치 큰 두 마리와 새끼 두 마리, 사슴 가족 네 마리가 사이좋게 무엇인가 맛있게 뜯어먹고 있었어요.
“이번엔 고구마밭이다. 저 녀석들이 고구마 잎을 따먹고 있네.”
아빠가 어이없다는 듯 말을 하며 쫓아가는 동안 사슴 가족이 재빨리 달아났어요. 쫓아가 보니 위가 가지런하게 고구마잎이 없는 거예요.
“엄마, 칼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따 먹었어요. 사슴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요?”
“이젠 사슴이 마당으로 들어오고, 무서워서 정말 이 집에 못 살겠다.”
엄마는 겁에 질려 있어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아요.
“사슴이 아니야. ‘고라니’라는 녀석들이야.”
아빠가 힘 있게 얘기하는 걸 보니 분명 고라니가 맞는 것 같아요.
“고라니는 야생동물보호법으로 보호받는 동물이라 함부로 잡을 수 없으니 빨리 울타리를 쳐야겠다. 이러다간 우리가 농사지은 걸 저 녀석들이 다 먹어 치우겠는데.”
아빠는 서두르며 텃밭 주변으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그런 아빠를 보고 엄마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엄마 눈치를 보고 있던 나는 얼른 아빠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아빠, 저도 도와드릴게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요. 식구들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어제 못다 친 울타리를 마무리하려고 마당으로 나갔어요.
“어머나, 또 어떤 놈들이 땅콩밭을 휘젓고 있어.”
마당으로 나가던 엄마의 외침이 들렸어요.
아빠와 함께 가 보니 후다닥 달아나는데 여러 마리였어요.
“두더지다. 저놈들은 울타리를 쳐도 땅속으로 누비고 다니는데 어쩐담? 아이고, 이번엔 많이도 망쳐놨네. 저놈들을 그냥~”
아빠가 어이없는지 마당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길게 쉬셨어요.
“전에 할아버지께서 콩을 심을 땐 한 알은 나를 위해서, 한 알은 이웃을 위해서, 한 알은 동물들을 위해 세 알을 심으라고 하시면서, 자연 속에서 살려면 그들과도 나누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맞는 말씀 같아.”
아빠는 잘 들으라는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어요.
“어제 어미 고라니가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고구마를 먹이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어. 하지만 나는 우리 가족, 내 자식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에 외면했거든. 오늘 또 두더지 가족을 보니까 할아버지 말씀이 정말 맞는 것 같아. 곰곰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울타리를 치지 말아야겠어.”
나는 아빠가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엄마가 나를 보다가 아빠를 보더니
“더불어 사는 거 좋지. 하지만 짐승은 짐승이야. 우리는 사람이고. 이래서 시골이 싫단 말이야. 나는 지렁이도 파리도 싫어.”
엄마는 시골 내려와 살자는 아빠 말에 늘 반대하더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가 전에 늘 말씀하신 게 있어. 시골에서 살려면 주변의 모든 것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짐승들은 아니야!”
아빠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톡 쏘아붙였어요.
“농사지은 걸 우리가 다 먹지도 못하는데 뭘.”
아빠는 엄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양반 말씀이 맞는 거야.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내가 너희들을 깜빡했다. 우리 말고 또 다른 식구들이 있다는 걸 말이야.”
아빠는 누구에게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술술술 혼잣말을 했어요.
“그래, 그래. 너희가 먹고 남으면 우리가 먹을게. 대신 다 먹지는 말고 조금만 남겨줘라. 너희들 때문에 난 농사 실력도 늘었고 올해는 작년보다 수확도 늘었으니까.”
아빠는 누군가 들으라는 듯 허공에 대고 말했어요. 그러더니,
“당신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고 부모님이 사시던 곳이니 내려와 살고 싶어. 무엇보다 준수가 좋아하잖아. 지금처럼 농사짓는 법도 익히고 시골살이에 조금씩 적응하고…, 그러다 보면 정이 들 거야.”
아빠는 먼 하늘을 쳐다보다가 엄마의 얼굴도 힐끔 쳐다보면서 은근한 말투로 엄마를 설득했어요.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할게. 지금도 노력하고 있잖아.”
엄마는 아빠가 안쓰러웠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있어요. 엄마의 말을 듣던 아빠는 만세를 부를 것처럼 좋아했어요.
“그럼, 우리 저 울타리 당장 헐어 버려요. 설마 저 밭에 있는 걸 다 먹어 치우기야 하겠어요?”
나는 아빠 엄마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마다 중간에서 무척 불안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거들었어요.
“그러자. 망설이면 뭐해?”
아빠가 벌떡 일어나 텃밭으로 걸어갔어요.
“쟤네들이 다 먹어버리면 내년엔 더 많이 심지 뭐.”
아빠 마음이 확실히 바뀌었나 봐요. 엄마 말씀에 아빠가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나도 신이 나서 뒤따라갔어요.
“아빠, 저도 도와드릴게요.”
파란 하늘이 시원한 바람을 날려주며 우리 식구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첫댓글 읽어볼 때마다 고칠 곳이 생기네요. 반복하는 퇴고의 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