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112)甁窩 李衡祥
永川시 城內동(금호강의 원류)가에 선 浩然亭은 甁窩 李衡祥이 숙종 26년(1700) 나이 48세 때에 짓고 만년을 머문 곳이다. 李衡祥은 원래 仁川사람이었으나 이때부터 永川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 후손과 후학들이 이곳을 중심이로 터를 잡게 되었다.
李衡祥이 이곳에 살터를 잡은 것은 당쟁으로 점철된 정계에 염증을 내고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곳을 정했기 때문이다.
더욱 이곳은 산수가 아름답고 성리학의 원조로 떠받들리는 圃隱 鄭夢周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30여년을 오로지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상의 연결은 쉽지 않다. 그의 학문은 기호학파에 근접된 듯이 보이며 동시에 실학적인 자취가 저술에 많이 나타난다.
그런 만큼 그는 영남학맥상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浩然亭에 머물면서「樂學便考」「樂學拾零」「江都誌」「南宦博物誌」「耽羅巡歷圖」등 저서 2백 25책(冊) 1천 8백여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樂學便考」등 16종의 저서는 국학분야의 저서로 종래의 학설을 뒤덮을 만한 충격적인 자료를 많이 담고 있다.
「耽羅巡歷圖」「南宦博物誌」등은 그의 실학을 대표하는 저서들이다. 이들 저서중 상당수는 이미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영인본으로 발간됐다.
또한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과 유물은 일괄 보물 제652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총 1백 42종의 저술은 현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이 연구의 전모가 밝혀진다면 그는 한국의 실학과 국학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甁窩 李衡祥(1653-1733)은 효종 4년 인천 죽수리(竹藪里 : 대숲골)「석바우」마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全州 ‧ 자는 仲玉. 그는 숙종 3년에 진사에 뽑히고 6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慶州府尹의 벼슬을 지내고 영조때에 타계했다.
그는 6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다. 9세 때에 학우들과 글짓기 모임을 가졌다. 글제는「鴻門宴」이었다. 홍문연은 중국 陝西省에 있는 지명이다. 옛날 한나라의 고조 유방과 초왕 항우가 홍문에서 만나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때 항우는 범증의 권에 따라 유방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유방은 장량의 꾀로 도망쳤다.
이런 고사를 담은 글제를 놓고 李衡祥은 대뜸「호랑이가 산동지방에 으르렁거림에 바람이 만리에 뻗쳤으니 달리는 사슴이 이미 홍문연 잔칫술의 안주가 되었구나.(虎嘯山東風萬里 走鹿己肴鴻門酒)」라고 썼다. 이 자리에 모인 학동들은 그의 재주 앞에 붓을 던져야만 했다고 한다.
앞의 대귀에도 나타나지만 그는 자못 웅대한 기국과 영특한 재주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3세 때 벌써 예서와 사기를 익혔다. 그는 28세 때 급제했다. 그러나 의리에 집착하고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그의 성격 때문에 등용의 길은 험했다. 종5품의 벼슬인 승무원 부정자(副正字)로 있을 때 마침 높은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혐의사실이 있어 그 자리에 李衡祥을 앉히려 했다.
유례없는 월등한 승격이었다. 그러나 李衡祥은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인사시행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왕에게「법을 고쳐서라도 이 자리에는 李衡祥을 앉혀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이형상을 막무가내였다. 마침내 숙종은 크게 화를 내어 李衡祥의 직책을 삭탈하고 하옥을 시켰다.
그래도 굴하지 않자 임금은 결국「李衡祥의 뜻은 나도 어쩔 수 없군. 법 고치려던 일을 중지하고 앞으로는 법을 어겨가며 시행하는 일은 없게 하라.」고 유시를 내리고 그를 副正字의 벼슬에 그대로 복직시켰다. 이 에피소드는 원칙에 어긋나면 비록 자신에게 이로운 높은 벼슬이라도 마다한다는 李衡祥의 높은 기개를 드러내준 대표적인 예이다.
李衡祥은 그 후 아홉 고을을 전전하며 수령의 직을 수행했다. 그의 애민사상은 투철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미담을 많이 남겼다. 그중 몇 가지만 들어 본다.
그가 星州목사로 있을 때였다. 세금이 과중하고 공평하지 못함을 바로잡기 위해「田政變通牒」이란 글을 올려 전지등급과 과세기준을 논했다.
그 글에는「經國大典」에 정해진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의 기준을 무시하고 관의 편의에 따라 조세를 거두었기에 그 누적된 피해가 영남지방에 극심함을 숫자를 들어 낱낱이 설명하여 개혁할 것을 상신하고 있다. 그의 실학적인 면모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성주 향교에 학관을 세 채 지어 관마다 50명씩(1백 50명) 고을 수재들을 모아 관비로 공부를 시켜 교육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운주산의 산적들을 잡으라는 특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졸과 관군을 산에 풀지는 않고, 목패에다 한쪽에는「譏察」이라 쓰고, 또 한쪽에는「使押」이라 써서 장대 끝에 매달고 시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돌게 했다.
譏察은 검문검색을 철저히 하라는 뜻이며, 使押은 빠짐없이 잡으라는 뜻이었다. 한달 후「토포사(討捕使)」가 내려와 이 사실을 알고「공은 도둑 잡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래 목패로 도둑을 얼마나 잡았소?」하고 따졌다.
그러자 李衡祥은「목패는 도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에서 한 것이오. 보시오. 내가 오기 전에는 하루 4-5건의 도난이 발생했지만 지금은 한건도 없소.」라고 말하고「저들은 배고픔을 못 참아 잠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인데, 목패로 위압하니 작당을 할 마음을 못 먹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각자 생업에 돌아가면 모두 양민이 되는데 하필 잡아 죽여야 할 까닭이 어디 있소?」하고 말했다. 討捕使도 이 말에 크게 감복했다고 한다.
濟州牧使가 됐을 때 역시 선정을 베풀었다. 임기완료 후 돌아오는 행장에는 다만 백록담 가에서 말라죽은 단향목으로 만든 거문고 하나와 시초(詩草) 몇 권 뿐 이었다. 그는 영조 3년(1727)에 호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浩然亭을 짓고 永川에 머물렀다. 그는 특히 지방 목민관의 치정(治政)에 관해 올바른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의 당파싸움은 그의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만년에 벼슬을 포기하고 永川에 머문 것은 그러한 당쟁에 염증을 냈기 때문이다. 그는 사후 淸白吏의 영광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거소 城南書堂은 城南書院이 되었다. 이 서원은 지금의 五樹동 남쪽 遊鳳山 아래 있었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략 60여호 정도 되며 주로 부산과 대구에서 살고 있다. 그의 10대 종손 李秀昌씨(69)는 永川시 雙溪동에 살고 있다.
* 찬고문헌 =「甁窩年譜」「永川의 傳統」「嶺南人物考」
<李夏錫 기자>
첫댓글 太宗-孝寧大君(補)-瑞原君(𡩁)-淸渠守(蕙)-密山副守(信孫)-璉-應生-承器-師閔-長馨-柱厦-衡祥(甁窩)-壻 金徵慶(夢荷,文科)-壻 李恒中-壻 鄭夏瀾-壻 李鼎休-壻 李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李集-之直-禮孫-克堅-摯-德符-遵慶-熙復-潤雨(石潭)-道長(洛村)-元祿(朴谷)-基命(兵曹佐郞)-世珩(生員)-恒中-壻 鄭夏瀾-壻 李鼎休-壻 李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鄭襲明-燮均-謙牧-麟信-之泰-宗興-林-仁彦-光厚(判書,文科)-瑋(司正)-文裔(生員,敎導)-從韶(文科,司成)-以揮(文科,牧使)-次謹(宣務郞)-允良(魯寸,參奉)-世雅(湖叟)-宜藩(生員)-好禮(藥山,縣監)-時諶(大護軍)-碩達(涵溪)-重器(梅山)-一鑽-夏瀾-壻 李鼎休-壻 李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李世貞-宗衍-稇-培-允芳-春彦-權-崇禮-壽會-蕃-彦迪(晦齋)-應仁(守庵)-宜潜(守拙堂)-白+肅-㙾-德祿(東皐,生員)-湜中-憲敎-鼎休-壻 李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李禹偁-昌赫-?-元英-根仁-小鳳-日善-午-介智-孟賢-璦-殷輔-涵(雲嶽)-時明(石溪)-徽逸(存齋)-檥(梧村)-之熤-宗遠-宇泰(省庵)-光獻-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金周元-身-紫絲-東靖-英堅-堅雄-徵祐-陽-上琦-仁存-永錫-閎-革升-弁-守精-雄-繼貂-光乙-錘-自南-錙-龜石-由岳-光熱(縣令)-順命(月峯,文科)-會宗(郡守)-萬始-一冀(道菴,兵馬同僉節制使)-徵慶(夢荷,文科)-壻 李恒中-壻 鄭夏瀾-壻 李鼎休-壻 李相烈(海山)-壻 南夏朝(鶴皥,妻高祖)
여러가문과 혼맥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라의 임금도 어쩌지 못하는 대단한 청백리 입니다
병와 이형상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지역민에게 성리학을 전파하고 주민을 교화시킨 공적이 있습니다.
'탐라순력도'는 당시 주민의 생활상을 그린 귀중한 자료이며 최근 후손에 의해 제주도로 이관 됐습니다
일전에 제주도 여행을 간적이 있습니다.
사려니숲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병와 이형상을 얘기하니 문화해설사는 병와선생을 잘 알더군요.
유교를 장려하면서 제주도 문화를 가장 많이 헤친 분이 병와 이형상이다.
그러나 가장 제주도 문화를 많이 남긴 사람 역시 병와 이형상인데 그것은 부임하면서 각종 제주도의 풍속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었다고 하더군요. 그 그림이 '탐라순력도'라는 것입니다.
'탐라순력도'는 후손에 의해 보존되다가 약 10여년 전에 제주도 박물관으로 이관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