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압록강에 다다른 국군
조 흥 제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북한군의 큰 저항 없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국군과 미군의 선두다툼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이 먼저 평양에 들어갔다. 백선엽 장군은 평양이 고향으로 지리를 잘 알아서 장병들을 얕은 곳으로 건너게 해서였다.
동부전선에서는 국군만 있었기 때문에 북진의 속도는 더욱 빨랐다.
김종오 장군이 이끄는 6사단 장병들은 동해안 쪽에서 진격하다 북한군 장교들을 잡아 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민간인이라 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40대로 보였다.
“민간인이 왜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지?”
사단장이 물었다.
“나는 서울에서 잡혀 온 소설가입니다.”
“이름이 뭐요?”
“박계주입니다.”
“대표작이 뭐요.”
“구원의 정화입니다.”
“순애보는 어느 신문에 연재했지요?”
“조선일보입니다.”
그러자 사단장은 포로 장교의 손을 덥석 잡고
“선생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순애보는 지고지순한 소설이었지요.”
“사단장님이 제 소설의 애독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단장은 신원보증서를 써 주고 평양 사령부에 전해 주라고 부관을 시켜 박계주 소설가를 평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했다. 사단장은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 순애보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 나도 어렵게 그 책을 구하여 읽어 보았다. 평소에 사모하다가 남자가 부상을 입어 불구자가 되어 숨은 것을 여자가 찾아 부부의 연을 맺어 알콩달콩 사는 내용이다. 작품을 잘 쓰면 죽음에 닥쳤을 때도 살아날 수가 있다.
10월27일 6사단은 압록강에 도착했다. 김종오 사단장은 찦차를 타고 험한 산길을 가다 차가 전복되어 중상을 입었다.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에 도착해 수통 두 개에 물을 담았다.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른 하나는 육군 본부에 전달하라고 하고는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압록강 물은 중공군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리고 대신 임진강 물을 담아 압록강 물이라고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단장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9사단을 맡았다. 9사단이 한국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철원-금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주’에서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미군들조차 군신(軍神)이라고 일컫는 유명한 장군이 됐다. 김종오 사단장은 한번도 패하지 않은 작전의 달인이었다. 6.25 사변 첫날에도 중부 전선인 춘천 쪽을 맡았는데 방어를 잘 하여 내리 밀리지 않았다. 철의 삼각주는 드넓은 철원평야를 아우르는 곡창지대여서 양군이 생사를 걸었다. 김일성이 백마고지를 빼앗기고는 3일간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울었다는 백마고지 안내 군인의 해설이었다.
기세 좋게 진격하던 유엔군을 멈추게 한 것은 중공군이었다.
중공군과 유엔군의 첫 격돌은 압록강 철교를 폭격할 때였다. 압록강 철교는 반은 중공 쪽이기 때문에 그 쪽을 건드리면 안 되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B-29 폭격기가 다리 위에 높이 떠서 폭탄을 투하하려하자 중공 쪽에서 미그전투기가 날아 왔다. 폭격기를 경호하던 미군전투기들과 공중전이 벌어져 중공기들은 물리쳤으나 철교 폭파는 실패하었다.
그 후에도 중공 정부는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수차례 발표했다. 유엔군이 북진하는 동안 중공군은 몰래 결빙이 된 압록강을 건너 전력이 약한 한국군 쪽으로 달려들었다. 국군에게는 그들의 포로가 많이 잡혔으나 미군은 국군의 제보를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평안도 운산에서 밤에 자다가 꽹과리를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벌떼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져 남하하기 시작했다. 국군의 제보도 믿어야 하는데 미군은 너무 자만한 것이 탈이었다.
중공 정부는 한국전에 참가한 군인이 정규군이 아니라 의용군이라고 했다. 의용군이라고 하면 죄가 덜 되는 모양이었다. 북한군도 남한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군인을 삼고 의용군이라고 한 것을 보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루트인 만주를 폭격하자고 했으나 트루만 대통령은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 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면서. 결국 그 문제로 티격태격하다가 맥아더는 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