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날 때마다 궁금했다. 비상 통로 너머엔 뭐가 있을까?
우리가 수백 번은 족히 지나왔을 터널. 그런데 이 안을 한 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아마 대부분 창문 올리고 휙 지나가기 바빴을 거다.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터널 안에는 어떤 게 있고, 또 비상구는 어디로 이어질지. 그래서 직접 가봤다. 기왕 보는 김에 지난해 완공된 우리나라 최장 도로 터널, 인제양양터널(10,965m)을 찾았다.
터널 양쪽으로 솟은 성벽
터널 관계자의 협조를 구해 가장 깊숙한 터널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했다. 여기서 터널 내부를 살펴보고 탈출까지 시도해볼 계획. 약 11km 길이 터널의 한가운데라니, 여기서 탈출하려면 어디로 가든 5.5km는 걸어야 할 판이라 벌써 폐소공포증이 도질 지경이다. 터널에 내려선 첫인상은 축축했다. 시원하고 습한 건 자연 동굴과 비슷한데 자동차 배기가스가 뒤섞여 어딘가 찐득하다. 온몸에 배기가스 미스트를 듬뿍 뿌리는 느낌이랄까.
터널 속에선 걸어야 했다. 차는 교통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갓길로 걸어 다녔냐고? 천만의 말씀, 그러다 저승길 걷는다. 운전할 땐 미처 몰랐겠지만, 터널 양쪽엔 성벽처럼 높이 솟은 ‘점검로(또는 공동구)’가 있다. 약 1m 너비에 SUV 보닛만큼 솟은 시멘트 길로 보행자와 차를 분리하는 곳이다. 만약 사고가 난다면 가장 먼저 몸을 피해야 하는 곳. 직접 올라보니 이게 뭐라고 도로와 분리된 기분이 든다. “높이가 더 높았으면 안전할 것 같다”는 기자의 바보 같은 질문에 관계자는 “유사시 사람이 바로 올라가야 할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똑똑히 답했다.
사고 시 점검로에 올랐다면 이제 뭘 해야 할까? 바로 후속 조치다. 갓길 쪽 점검로엔 소화전이 50m마다 빽빽이 늘어섰고, 200m마다 전화기와 기점 표지판이 마련됐다. 모두 불 끄고 신고할 수 있는 시설들이다. 평소 터널 소화전함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열어볼 기회가 왔다. 먼저 전화기부터. 긴급 전화함엔 수화기 하나만 덜렁 걸려있다.
관계자의 허락을 맡고 수화기를 들자 곧바로 터널 담당자가 받는다. 집 현관에 붙은 인터폰처럼 터널 관리센터와 직통 연결됐기 때문. 재미 삼아 “살려주세요!”라고 외쳐보고 싶었지만, 동행한 관계자한테 혼날까 봐 미리 시킨 대로 “점검 차 연락드렸습니다. 수고하세요”하고 시시하게 끊었다. 기자의 통화품질 평가는 ‘귀소감명도 삼삼.’ 만약 실제 상황이라면 이 전화에 대고 기점 표지판 숫자(예를 들면 133.6)만 읽어주면 신속히 위치를 알릴 수 있다.
소화전함엔 어떤 게 있을까? 말 그대로 불 끄는 장비들이 있겠지. 만약 불이 나면 이렇게 깊숙한 터널은 지옥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예상대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소화 호스와 소화기 두 개가 비치돼 있다. 그리고 산소호흡기와 방연마스크, 비상손전등까지 화재 종합 선물세트가 들었다. 그런데 소화기를 들어보니 밑에 저울 같은 게 슬쩍 움직인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소화기를 들면 터널 관리센터로 연락이 가는 센서란다. 이미 우리가 소화기 들고 떠드는 모습을 감시 카메라로 다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조금 전 엉덩이 긁던 손이 괜히 머쓱해진다.
탈출은 또 다른 터널로
후속 조치를 마쳤다면 이제 몸을 피할 차례. 고대하던 비상구를 탐험할 때가 왔다. 11km 터널 한가운데에서 비상구로 나가면 대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그런데 비상구로 가려면 먼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비상구가 1차로 쪽에 있어 도로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 기자는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안전히 건넜지만, 만약 화재가 발생한 상황이라면 어떨까? 연기가 자욱한 상황에서 비상구 불빛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차라도 튀어나온다면?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윽고 보행자 비상구 앞에 섰다. 법적으로 200m마다 하나씩 마련돼 어디로 가든 찾을 수 있는 통로다. ‘미시오’라는 문구를 따라 검은 먼지가 찐득하게 붙은 손잡이를 밀자 문짝 가운데를 축으로 90°까지 회전한다. ‘문 여는 감각이 묵직하고 고급스럽군’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문짝이 또 하나 나타난다. 이 문과 문 사이가 보행자가 잠깐 쉴 수 있는 피난처다. 그런데 구석에 있는 저 진갈색 물체는 뭐지? 하, 똥이다. 여기를 어찌 알고 누가 똥을 싸놨다. 참 대단하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닙니다” 관계자가 한숨 쉬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 문짝까지 열었더니 반대편 터널이 나왔다. 맞다. 결국 기자가 궁금해하던 비상구건너편 풍경은 그저 역방향 터널이었다. 밖으로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 탈출로라도 기대했건만 실망이 크다. 터널 탈출 시나리오에 따르면 한쪽에서 불이 나면 재빨리 반대쪽으로 피하는 방식이라고. 허무함에 빠져있을 무렵 갑자기 뒤에서 문이 쓱 닫혔다. 화재 시 연기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모든 비상구엔 약 1분 후면 알아서 닫히는 기능이 달렸단다.
마찬가지로 자동차 비상구도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다만 큰 차체가 지나가기 위해 문짝이 양문형 슬라이드 방식이고, 자동 닫힘 기능을 막는 고정 장치가 달렸다. 차가 지나는 도중 문이 닫히면 차가 손상될 테니까. 자동차 비상구는 법적으로 750m마다 하나씩 마련돼 있으며, 인제양양터널엔 특별히 대형차 비상구도 여섯 개 마련됐다. 화재 시 소방차 회차로 등으로 요긴하게 쓰일 통로다.
밖으로 나가다
기자가 생각하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답답한 굴속을 지나 바깥으로 속 시원하게 탈출하는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했는데 산산이 무너졌다. 그렇게 실망하고 있을 무렵 관계자가 말했다. “건너편으로 탈출하는 건 가장 빠른 기본적인 대피 방법이고,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 있는 한 개의 외부 탈출로가 있습니다.” 탈출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생겼다. 그 탈출로는 터널을 지을 때 중장비를 터널 가운데로 넣을 수 있게 만든 ‘사갱’이다. 지금은 환기 통로 및 비상시 대피로로 사용되고 있다.
사갱 입구는 터널 중앙 갓길 쪽에 붙어있다. 문 여는 방법은 자동차 비상구와 같고, 들어서면 산소 공급 장치가 있는 비상 안전구역이 먼저 펼쳐진다. 그리고 이 구역을 지나면 드디어 사갱 시작이다. 사갱 길이는 1.4km. 아치형으로 지어졌으나, 공기가 들어오는 곳(급기)과 나가는 곳(배기) 절반으로 나뉘어 있다. 탈출은 공기가 들어오는 급기구로만 할 수 있다. 화재 시 배기구로 가다간 나가기도 전에 연기에 질식돼 죽을지도 모르니까.
기자는 내심 1.4km를 걸으며 차근차근 통로를 관찰하고 싶었으나, 퇴근 시간이 임박한 관계자들을 붙잡고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결국 잠깐 걸어볼 수 있었는데, 바깥바람을 맞이하는 급기 터널답게 맞바람이 불고, 공기가 상쾌하다. 자동차 흡기구에 앉은 벌레가 된 기분이 이럴까? 걱정과 달리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진 않고(맞바람이 불어 땀이 흐를 겨를도 없다) 중간중간 반대편 차를 비켜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특히 바깥에서 유입된 산속 안개가 나름 분위기까지 돋운다.
잠깐 걸어본 후엔 차를 타고 달렸다. 터널을 탈출하는 영화에서처럼 출구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는 그림을 기대했지만, 실내에도 불이 켜져 있는 탓에 그런 느낌은 아주 조금 밖에 못 받았다. 출구에서 철문을 열고 드디어 탈출. 따뜻한 햇볕과 싱그러운 풀 내음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사갱을 나와 보니 인적 없는 산 중턱이다. 차타고 나왔다면 그대로 갈 길 가면 되고, 걸어서 나왔다면 구조를 기다리면 되겠다. 도로는 깔끔히 닦여있으니 길 잃을까 걱정은 마시길. 이로써 터널 탐험 끝이다.
걸어서 돌아본 터널은 그동안 수백 번을 지나왔음에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새로웠다. 이렇게 안전 장비들이 많고 다양한데도 다들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 본문에 설명한 것들은 사갱이나 대형차 비상구 등을 제외하면 보통 터널이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보편적인 시설이다. 이런 걸 직접 체험까진 어렵더라도 적어도 운전면허를 얻는 과정에서 똑똑히 알려준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다음 장에 인제양양터널 특수 안전시설 소개와 함께 터널 사고 시 정확한 행동 요령을 공익 차원에서 준비했다. 재미는 없겠지만 운전자라면 한 번씩 봐두길 바란다.
취재에 협조한 터널 담당자가 사고 시 행동요령을 꼭 소개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의 투철한 직업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1. 일단 차를 세우는 게 우선이다. 할 수 있다면 2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비상 주차대 또는 갓길에 세운다.
2. 차에서 내릴 때는 시동은 끄되, 키는 반드시 꽂아놓는 게 포인트. 사고 처리가 더욱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
3. 휴대전화 또는 터널 내 긴급전화로 신고한다. 112, 119는 물론 1588-2504 도로공사 콜센터로 연락해도 좋다.
+ 만약 불이 났다면 끌 수 있을 것 같을 때는 소화전함에 소화 호스나 소화기를 이용해 끄고, 도저히 불이 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밖으로 내달리는 게 우선이다. 이때 연기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게 중요하며 보통 터널 내 바람은 주행 방향으로 분다. 터널 출구가 너무 멀 때는 본문에 소개된 것처럼 비상구를 통해 반대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4. 본문에 있는 점검로를 통해 터널 밖으로 신속히 이동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사고처리를 기다리면 끝. 참고로 한국도로공사 긴급견인을 이용하면 가까운 안전지대까지 무료 견인도 해준다.
1. 비껴갈 수 있다면 신속히 터널 밖으로 이동해야 한다. 괜히 구경한다고 속도 줄이지 마시길.
2. 사고로 길이 막혀 통행이 불가하다면 비상주차대나 갓길에 차를 대고 키를 꽂아둔 채 시동을 끈다. 이어 신고 후 부상자를 돕거나 비상구 또는 연기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면 된다.
1. 도망치는 게 우선이다. 연기가 어마어마하게 발생할 테니. 차는 키를 꽂아둔 채 세우고, 신고한 후 건너편 터널 또는 가까운 출구로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본문에서 소개하지 않은 인제양양터널의 생소한 시설들.이 외에도 4,440개의 물 분무 설비, 염소 및 암모니아를 감지하는 독성가스 감지 설비, 연기 방향을 제어하는 고압 미세 물 분무 장비 등 특수한 시설들이 마련됐다.
차량 과열 알림 시스템
터널로 달려오는 차들의 온도를 센서로 파악하는 기술. 과열이 감지되면 전광판으로 안내하며, 과열된 차가 온도를 낮출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비상 차량
도로가 갓길까지 완전히 막혀 구급차나 소방차 등 긴급차량이 통행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최후의 보루. 점검로 위에서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는 전기차로, 어릴 때 갖고 놀던 ‘미니카’처럼 옆에 롤러가 달려있어 점검로 위를 힘차게 달린다. 뒤쪽엔 유류 화재에 대응할 수 있는 포소화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승차감은 최악이라고.
전용 소방대
국내 터널 최초로 전용 소방대를 갖췄다. 구급차 1대, 소방차 1대가 배치돼 불나면 즉각 출동한다. 소방차가 노란색인 이유는 유류 화재까지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고감지설비
이건 다른 터널도 있는 시설이지만, 신기해서 소개한다. 카메라가 터널 내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기술로 보행자나 역주행 차, 정지한 차들이 있으면 알아서 포착해 담당자에게 알려준다.
비상안전구역
사갱 입구에 마련된 노약자 및 부상자 대피 공간. 이중 도어 사이에 산소를 공급해 연기를 차단한다. 한쪽 구석엔 소방관으로 변신할 수 있는 수준의 장비(공기 호흡기, 마스크, 손전등)를 갖춘 비상 구급함도 마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