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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후 묘(여주 향토유적 6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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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을 오르면서 바라 본 민진후선생 묘역 좌측 모습. 드물게 있는 상하 봉분입니다. |
민진후(1659~172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이고 본관은 여흥이다. 그리고 그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이며, 송준길(宋浚吉)의 외손자이다. 숙종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민진원(閔鎭遠 : 노론의 영수)의 형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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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입구에 갈림길이 나옵니다. 신도비의 좌측은 사찰이 나오고 우측의 산길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
송시열의 문인으로서, 숙종 12년(168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어 활동하였으나,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척출되면서 함께 물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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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길로 접어들어 좌측으로 오르면 민익수(선생의 아들)의 묘가, 그 위에는 선생의 묘, 민익수 묘 하단에는 6대손인 민영익의 묘 |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로 희빈 장씨가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로 등용되었다. 이어 승문원 벼슬을 거쳐 북평사(北評事)로 나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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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이 아닌 일반인의 상하 봉분은 거의 다 부후(祔後) 묘인데, 부하(祔下) 묘는 광나루도 드물게 봅니다. |
이어 부응교(副應敎), 승지,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다시 외관에 나아가 강화부 유수를 지내고 서울에 돌아와 형조참의를 거쳐 숙종 29년(1703)과 숙종 31년(1705)에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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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 묘이기 때문에 남자의 봉분이 있는 곳에 묘비가 있습니다. |
숙종 32년(1706)에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서 소론계(少論系)의 유생 임부(林溥)와 남인계(南人系)의 유생 이잠(李潛)이 세자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하여 일어난 옥사를 함부로 다루었다고 소론 측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 해에 다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승진하였다. 그후 소론의 탄핵으로 면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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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있는 부인의 봉분에서 바라 본 모습과 문인석 |
동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판돈녕부사 · 예조판서를 지내고 숙종 41년(1715)에 한성부판윤을 거쳐 숙종 44년(1718)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를 받았다. 뒤에 내국(內局) 제조(提調)로서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거절하고 개성부 유수로 재직중에 죽었다. 시호는 문충이며, 글씨를 잘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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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우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묘역 뒤에서 보는 위치로 부좌(남편 좌측), 부우(남편 우측), 부후(남편 뒤), 부하(남편 앞) |
묘역은 다른 묘역 같이 호화스럽지 않고 사대부 묘역과 같은 규모로 좌측에 팔작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대리석 묘비를 놓았고, 부인 이씨와 합장된 봉분 앞에는 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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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면에서 바라 본 상하 봉분. 봉분이 합장, 쌍분일 경우 대부분이 부좌이고, 드물게 상하 봉일 경우는 부후가 대부분임 |
신도비는 묘소 동남방 200m 지점 마을 가운데 거대하고 귀부도 웅장하게 되어 있다. 화강암 이수 중앙에는 타원형의 기공(氣孔)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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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진후선생 봉분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선생의 봉분 위치가 한 단 높다 보니 앞에 부인의 봉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
비신의 재료는 대리석이며, 높이 229cm, 폭 123cm, 두께 42cm의 규모이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이관명의 글씨로 민진원이 전서 하였으며 영조 8년(1732)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민진후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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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치 지점에 민진후선생 묘가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여주군 가남면 안금리 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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