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0422781_thumb.jpg)
대릉원을 나오면 펼쳐지는 환상적인 경주의 풍경
경주는 시내를 걷기만 해도 다양한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흔치 않은 도시다. 한국의 도시들은 과거의 모습을 보존하기보다 현대식 콘크리트 고층 빌딩을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 옛 모습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500년 조선 왕조의 수도인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구 일대의 궁궐들은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멀리서 바라볼 때 궁궐의 위치조차 짐작하기 힘들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46563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46606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46657_thumb.jpg)
지방의 도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옥마을이 잘 보존된 전주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순천 외진 곳에 있는 낙안읍성을 제외하면 조선 시대 모습이 잘 보존된 상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풍경은 찾기 힘든 것이다. 대구 또한 경상도의 중심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대구 읍성은 도로를 낸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전부 철거되고 말았다.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또한 몇몇 유적지를 제외하면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힘들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407387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407502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407616_thumb.jpg)
하지만 경주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소외된 지방 도시가 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도 화려한 문화가 많이 남아있었기에 도시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주 시내는 고도 제한이 있어 높은 빌딩을 건설할 수 없어 경주 역사유적지구의 풍경을 크게 해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김포 장릉의 경관이 아파트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음을 생각하면 고도 제한이 문화재 보존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된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32640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32881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32895_thumb.jpg)
경주 역사유적지구의 진면목인 월성 지구는 대릉원 후문으로 빠져나오면 만날 수 있다. 대릉원의 봉분의 신비한 모습을 뒤로하고 문 너무 풍경을 바라보면 저 멀리 신라 왕궁이 있는 월성이 보이고, 신라 김 씨 왕조의 시조인 계림, 신라 과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천문관측대인 첨성대가 나온다. 잘 정비된 잔디밭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월성 지구는 경주 시내 관광의 정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17 - 경주 월성
월성은 신라의 비밀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천년 왕궁이다. 월성은 신라왕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월성〔月城〕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모양이 반달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월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의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데, 파사왕 22년 (1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또는 재성〔在城〕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신라의 궁성 역할을 담당하게 된 월성은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으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22549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22868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22897_thumb.jpg)
월성에는 여러 개의 문과 연못, 그리고 만파식적을 보관했던 보물창고인 천존고도 있었으나 지금은 옛 모습들을 찾을 수 없다. 월성의 옛 모습을 밝히고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 12월부터 월성 내부를 A-D까지 4개 지구, 월성 바깥쪽의 해자 지구로 나누어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A지구에서는 월성의 서쪽 성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성벽에서는 성벽을 쌓을 당시 인신공희 (人身供犧)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생각되는 인골 2구가 발견되었다. 중앙 건물지를 발굴하고 있는 C지구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 건물터 17동이 확인되었고, 다량의 기와와 실무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벼루 등이 출토되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인 해자에서는 동물의 뼈와 식물의 씨앗 등이 확인되어 신라시대 당시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토우 및 목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첨성대와 계림, 그리고 월성
대릉원을 보고 난 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첨성대일 것이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302773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49648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49613_thumb.jpg)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 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 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41689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41836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1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41881_thumb.jpg)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32644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32642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32620_thumb.jpg)
첨성대에서 월성 방향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김 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인 계림이 있다.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13937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14172_thumb.jpg)
탈해왕 9년(65년), 왕은 한밤중에 금성 서쪽, 시림이라는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낸다. 조그마한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총명함을 더했고, 이름은 알지,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김이라 성씨를 붙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왕위를 받지 않았으며, 김알지의 육대손에 와서 김 씨가 왕이 된다. 이 때문에 신라인들은 닭은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을 알리는 동물로 매우 신성한 존재로 여겼으며, 황금상자는 권력을 상징하는데 토템과 금 숭배 사상을 짐작케 한다.
계림 안에 있는 고분은 신라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내물왕은 김 씨로는 두 번째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로 김 씨에 의해 세습이 유지되었다. 왕의 칭호로 ‘마립간’을 썼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159598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200131_thumb.jpg)
계림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신라 궁궐이 있었던 월성이 등장한다. 월성은 멀리서 보면 흙으로 쌓은 언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이는 신라 시대에는 축성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양식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151733_thumb.jpg)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145790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2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145180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2145226_thumb.jpg)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 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1612321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1612638_thumb.jpg)
월성 지구라는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곳의 중심은 궁궐이 있었던 곳인 월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첨성대와 계림을 보는 사람은 많아도 월성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경주에서 유명한 쌈밥 거리와 황리단길이 월성과 반대편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월성에 남아있는 건물은 조선 시대에 건설한 석빙고가 전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조 건물로 지었을 왕궁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버틸리는 만무하고 이미 망한 국가의 궁궐을 후대 국가가 재건하는 것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런 연유로 월성에는 신라 궁궐의 터만 남아있어 휑한 느낌마저 든다.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1552589_thumb.jpg)
![제17화 - 신라 도읍 경주의 중심지, 월성과 첨성대3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9%2F23%2F20220923171552753_thumb.jpg)
그래도 월성 안에서 신라 궁궐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가능하다. 발굴 조사를 통해 궁궐 건설에 사용되었던 주춧돌과 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재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각 건물 터에는 조사를 통해 확인된 건물의 용도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를 전해주는 표지판이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재미처럼 월성에서 신라의 옛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왕궁이 위치한 월성을 해자로 둘러싸고 성벽을 높여 방어를 견고히 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성벽 위에서 왕궁 북쪽에 자리한 화려한 도시였던 경주에 위치한 수많은 무덤을 바라본다. 지금은 작은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라인들의 불심을 읽기 위해선 경주 남산으로, 그들이 살아온 모습을 상상하려면 바로 이곳 경주 역사 유적지구로 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