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앞에 올렸던 것인데 사진이 첨부가 되지 않아 다시 한 번 올리게 되었음. 그리고 내용이 많고 특히 사진이 많아 두 번으로 나누어 올리고자 함.
7~9세기 고구려 유민과 신라 구법승 및 유학생 거주유적지 답사
-中國 陝西省 西安地域을 중심으로-
李椿浩(중국 호남사범대학)
Ⅰ. 서론
Ⅱ. 7~9세기 한중 양국 간의 교류
Ⅲ. 고구려 유민 집단 거주지와 장안 성내의 거주 유적지
1.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高麗曲'
2. 고구려 유민의 중국 내지 천사와 '東北工程'에 대함
3. 고구려 유민의 장안 성내의 거주 유적지
Ⅳ. 해동삼국 출신 구법승의 활동과 그 특징
Ⅴ. 신라 구법승․유학생과 그 유적지
1. 원측과 흥교사
2. 자장과 신라왕자대
3. 의상과 지상사
4. 혜초와 玉女潭 거북바위
5. 최치원과 법문사의 불지사리
6. 김가기와 마애각문
7. 예빈도
8. 진덕여왕과 그녀의 석상
9. 신라사와 신라사종
Ⅵ. 결론
Ⅰ. 서론
中國의 地形圖를 펼쳐 보면 중심부에 東西로 넓게 펼쳐진 秦嶺山脈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대륙의 南․北方을 나누는 자연분계선이기도 한 이 산맥의 바로 위쪽에 우리의 기억에도 새로운 關中평원이 자리하고 있다. 函谷關(동)․散關(서)․武關(남)․蕭關(북) 등 네 개의 관문으로 둘러싸인 관중평원은 동서(약 300km)가 길고 남북(약 75~100km)은 상대적으로 짧은 마치 옆으로 누운 작은 웅덩이 모양을 하고 있다. 관중평원의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渭河 남쪽에 우리에게는 西安보다는 長安으로 더 익숙한 도시가 있는데, 중국 역사문화의 기초를 닦았던 秦․漢과 이를 더욱 발전시켜 전성기를 구가한 隋․唐의 수도로서 우리는 장안을 기억하고 있다. 隋唐시기에는 東都로 불린 洛陽과 대비되어 西都 혹은 上都로 불렸으며, 秦․漢․隋․唐 외에 周․前趙․前秦 등 13개 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두었는데 그 기간은 무려 1160여년에 이르고 있다.
秦․漢은 북방유목민족과의 대결 속에서 '華夏族'을 중심으로 형성된 漢族의 고유한 역사문화를 창조하고 그 기초를 닦았으며, 隋․唐은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 북방유목민족의 질박하고 거센 문화와 한족의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문화를 서로 융합시켜 秦․漢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中國文化'를 창조할 수 있었다. 따라서 秦漢과 隋唐이 모두 통일왕조임에 틀림없지만, 이렇듯 상호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隋는 秦과 비교되듯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이후 唐이라는 '世界帝國'을 만들어내는 기초를 닦은 왕조였다면, 우리는 唐에서 중국 역사문화가 이전 시기와 전혀 다른 새로운 면을 갖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唐의 수도로서 당시 중국의 政治․經濟․文化․交通 등의 중심지인 長安은 秦․漢 이래 중국에 전래된 외국 문화와 중국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여 중국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鎔鑛爐'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장안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 및 활동 면면에서 이러한 문화적 특징이 현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안은 바로 中外 文化交流史上 시대의 획을 긋는 활동무대였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외 문화교류사상 당시의 韓民族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장안 및 관중지역에는 어떤 족적을 남겼던 것일까?
서안 시내와 그 주위 곳곳에는 우리 한민족의 고귀한 발자취가 대단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자취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설 때 늘 그들의 훈훈한 체취를 가슴 뿌듯이 느끼곤 한다. 우선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그 유민이 강제로 관중평원으로 천사되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유적지, 그리고 장안 성내에 주택을 소유하였던 고구려 후손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또한 求法僧과 유학생의 신분으로 장안에 머물면서 한중문화교류 및 중국의 문화발전에 공헌했던 한민족, 특히 이들 중 신라인들의 행적에 커다란 동질감과 함께 그들이 머물고 갔던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보고서는 중국 역사문화의 뿌리를 이루었던 陝西省 西安지역에 산재한 우리 한민족의 발자취를 찾아 이를 새롭게 정리하여 如何의 평가를 가할 근거로 삼으며 더 나아가 현재를 사는 역사문화의 공허함으로 내몰린 우리 젊은이에게 '他山之石'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다. 21세기 韓中 양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비약적인 발전 속에서 우리는 이번 답사를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천삼 사백 년 전 한중 양국 간의 관계가 이미 상당히 성숙된 발전단계에 있었음도 확인하게 된다. 중국의 문명고도 서안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몇몇 관광명소에만 현혹되지 말고, 한민족의 체취가 밴 곳들을 찾아가 참뜻을 새기고 기리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참된 도리는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Ⅱ. 7~9세기 한중 양국 간의 교류
7세기로 접어들면서 高句麗는 동북아 지역에서 세력을 계속 확대하는 과정 속에 百濟․新羅를 더욱 압박하고 동시에 隋․唐과도 자주 충돌하였다. 백제․신라는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으로서 양국 간의 동맹을 모색하고 또한 수․당과의 사이에 수차에 걸친 왕래를 통한 우호관계를 맺는데 전력하였다. 한편 隋 煬帝에 의한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다량의 경제․군사적 손실을 가져와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는데, 隋의 멸망 후 등장한 唐은 한국 국내의 미묘한 역학관계의 변화를 이용하여 신라와 연합하고 고구려․백제를 견제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즉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南下를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후 백제와의 동맹이 깨지면서 고구려․백제와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신라는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함께 대외적으로 唐과 연합하여 삼국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백제를 멸하고(660년), 이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며(668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세력을 끌어들인 불완전한 통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후 韓民族은 통일왕조를 형성하며 각 시대에 걸 맞는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며 오늘에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한중 양국은 전쟁과 충돌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협력과 교류라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전면적인 관계정립을 이룩하게 되었다. 즉 신라와 당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한중교류사상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를 함께 열어갔던 것이다. 특히, 敎育文化 방면에서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신라의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장안에 머물며 중국 전통문화의 精髓인 儒家經典을 비롯한 교육제도 및 그 사상들을 공부하고 이후 한국의 교육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長安은 唐의 정치․경제․상업․무역․문화․종교 등의 중심지로서 중국 국내의 수많은 墨客․學僧․商人들이 이곳에 결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外國使節․留學生․求法僧 등도 이곳에 모여들어 당시 세계최고의 국제적 개방도시로서 결코 손색이 없었다. 한편 당은 외국 유학생들을 상대로 賓貢科라는 과거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외국인이지만 재주가 뛰어난 자들을 계속 당에 머물게 하여 당을 위해 헌신하게 한 조치로 생각할 수 있다. 賓貢科에 급제하여 당에서 벼슬을 한 사람으로 대표적으로 孤雲 崔致遠을 들 수 있다. 그는 12살 때 당에 유학하여 長安에 체류하며 학문에 정진하였고, 그 후 18살 때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溧水縣尉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적지 않은 신라의 구법승들이 동북아 '불교문화의 산 고장'인 長安 및 終南山 일대에 모여들어 불경연구 및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는데, 이곳에서 활동한 구법승 중 확인이 가능한 자들은 약 180여명 정도로 추정되며 대표적으로는 慧超․圓測․慈藏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구법승들과 관련된 사찰로는 興敎寺․至相寺․仙游寺․西明寺 등과 미확인 사찰 및 유적지를 포함해 수십 곳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들 유적지들은 한국 구법승들의 고귀한 체취가 아직도 역력하게 느껴진다고 하겠다. 특히 入寂 후 興敎寺로 粉骨이 옮겨진 圓測은 15살 때 唐에 들어와 장안에서 玄奘 등 고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그를 도와 많은 經典을 번역하였고 이후 중국불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시기 新羅와 唐 간의 우호적인 관계발전으로 唐의 역사문화에 '新羅'라는 요소가 강하게 남게 되었으며 또한 신라는 당의 선진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사회 등 제 방면에서 비약적인 발전과 신속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Ⅲ.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와 장안 성내의 거주 유적지
1.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高麗曲'
역사적으로 볼 때 唐의 高句麗人에 대한 집단적인 遷徙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645년 唐 太宗의 고구려 원정이 끝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史書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릇 [高句麗의] 玄兔 橫山 盖牟 磨米 遼東 白巖 卑沙 夾谷 銀山 後黃 등 10개 城을 함락시키고 遼 盖 巖 등 3개 州의 戶口를 천사시켜 中國으로 들어간 자가 七萬人에 이르렀다. (『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起 寶藏王 4年 10月條, "凡拔玄兔 橫山 盖牟 磨米 遼東 白巖 卑沙 夾谷 銀山 後黃十城, 徙遼 盖 巖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 高惠眞은 十五萬六千八百人을 이끌고 [唐에] 歸降을 청하였다. 太宗은 그들을 轅門으로 들게 하였다. 高延壽 等은 膝行으로 앞으로 나아가 拜手하며 下命을 청하였다. 太宗은 傉薩 以下 酋長 三千五百人을 선발하여 관품을 주고 이들을 內地로 천사하였다. (『舊唐書』卷199上 高麗傳, "[高]延壽[高]惠眞率十五萬六千八百人請降. 太宗引入轅門. [高]延壽等膝行而前, 拜手請命. 太宗簡傉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 授以戎秩, 遷之內地.")
두 번째는 669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즉 고구려가 멸망한 후, 唐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과 부흥운동을 막기 위하여 이들을 關中지역을 포함한 중국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唐] 高宗은 [高句麗 유민] 三萬八千三百戶를 江淮 以南과 山南 京西 여러 州의 空曠地에 遷徙시켰다. (『三國史記』卷22 寶藏王 二十七年(669) 夏四月條, "高宗移三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 及山南 京西諸州空曠之地.")
高句麗의 戶 二萬八千二百과 車 一千八十乘, 牛 三千三百頭, 馬 二千九百匹, 駝 六十頭를 옮겨 內地로 들게 하였는데, 萊州와 營州에서 般次 發遣하여 江淮 以南과 山南, 幷州 凉州 以西 여러 州의 空閑地에 安置케 하였다.(『舊唐書』卷5 高宗本紀下 總章2年(669)條, "移高[句]麗户二萬八千二百, 車一千八十乘, 牛三千三百頭, 馬二千九百匹, 駝六十頭, 將入内地, 萊 營二州般次發遣, 量配於江淮以南及山南 并 凉以西諸州空閑處安置.")
高句麗 百姓들이 여러 차례 離叛하자 高句麗의 戶 三萬八千二百을 江淮 以南 및 山南 京西 여러 州의 空曠地에 遷徙시키고 貧弱者는 남겨 安東을 지키게 하였다.(『資治通鑑』卷201 總章2年(669) 四月條, "高[句]麗之民多離叛者, 敕徙高[句]麗戶三萬八千二百於江淮之南, 及山南 京西諸州空曠之地, 留其貧弱者, 使守安東.")
세 번째는 寶藏王의 '獨立'企圖가 발각되자 이를 계기로 681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번 遷徙는 일찍이(677년) 寶藏王과 함께 遼東으로 귀환시켰던 사람들을 다시 천사시킨 것이다.
寶藏王은 요동에 이르러 謀叛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唐 高宗은] 開耀元年(681)에 邛州로 소환하였다. [왕이] 永淳초년(682)에 죽으니 [고종은 왕에게] 衛尉卿을 추증하고, 명령을 내려 수도로 옮겨 頡利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들은 河南 隴右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천사하고, 貧者들은 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다. (『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起 寶藏王 下 開耀元年, "[寶藏]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開耀元年, 召還邛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頡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河南 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儀鳳(676~678) 때에 高宗은 [寶藏王] 高藏을 開府儀同三司 遼東都督의 관직을 주고 朝鮮王에 封하며 安東에 거하면서 고구려의 故土를 治理케 하였다. 高藏이 安東에 이르러 몰래 靺鞨과 通하여 謀叛을 도모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召還되고 邛州에 유배되었다. 동시에 그 유민을 分徙하여 河南 隴右의 여러 州로 나누어 천사하고 그 외 貧弱者들은 安東城의 주위에 남겨 두었다. (『舊唐書』卷199上 高麗傳, "儀鳳中, 高宗授高藏開府儀同三司 遼東都督, 封朝鮮王, 居安東, 鎭本蕃爲主. 高藏至安東, 潛與靺鞨相通謀叛. 事覺, 召還, 配流邛州, 并分徙其人, 散向河南 隴右諸州, 其貧弱者留在安東城傍.")
고구려 유민의 공간적 이동은 이후 한중 문화교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유민의 한 갈래는 중국 내지로 이주하여 韓文化의 중국 이식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구려 유민은 나라가 망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방향은 대체로 4군데로 나누어진다. 첫째, 中國 內地로 이주된 것. 둘째, 突厥로 들어간 것. 셋째, 靺鞨로 들어간 것. 넷째, 신라로 들어간 것 등이다-필자) 669년과 681년 강제 천사된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고구려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豪民이었으며 甘肅 방면으로 이주한 유민 가운데는 唐의 군사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큰 功業을 세운 이도 적지 않았으니, 高仙芝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위의 고구려 유민 집단 천사기록 중 구체적인 위치의 확인이 가능한 곳으로 江淮 以南, 山南 幷州 凉州 以西 여러 州의 空閑地와 河南 隴右의 여러 州로 나누어진다. 그 중 關中지역과 관련된 기록 중 北宋人 張禮가 저술한 『游城南記』에는 그 지명의 존재와 유래에 대하여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당시 張禮가 瓜洲村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劉希古는 본명이 舜才이다. 그는 進士에 낙방하고서 申店으로 내려와 潏水 변의 구석진 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瓜洲村을 시인 杜牧이 수박을 심은 땅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張禮)는 許渾集를 읽고 『和淮南相公重游瓜村别业』라는 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淮南相公은 바로 杜佑이다. 두우는 세 아들 즉 杜師塤 杜式方 杜從郁을 두었다. 두목은 바로 두종욱의 아들이다. 이렇게 보면 두우는 이미 瓜洲別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목이 그 땅에 수박을 심은 것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당시 마을 남쪽 언덕에는 瓜洲墓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어찌 瓜洲人이 처음 살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長安縣에 高麗曲이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高麗人이 살았던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張注曰: 劉希古名舜才, 爲進士不第, 退居申店潏水之陰. 瓜洲村, 俗以爲牧之種瓜之地. 予讀許渾集, 有『和淮南相公重游瓜村别业』詩. 淮南相公杜佑也, 佑三子師塤 式方 從郁. 牧之從郁子也. 由此考之, 在佑已有瓜洲別業, 則非牧之種瓜地明矣. 今村南原上有瓜洲墓, 豈始有瓜洲人居此而名之耶? 亦猶長安縣有高麗曲, 因高麗人居之而名之也. 밑줄은 필자)
卞麟錫 교수는 『唐 長安의 新羅史蹟』(파주, 한국학술정보주식회사, 2008)에서 위의 내용이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된 집단 거주지-'高麗曲'의 실존여부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北宋 元祐元年(1086) 張禮에 의해서 확인한 이 高麗曲이 900여년을 지난 현재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히 판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곳이 분명 長安縣에 속하며(최소한 張禮가 살았던 시대에 이곳은 長安縣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필자) 瓜洲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변린석은 高麗曲의 위치를 비정하는 과정에서 중국어 발음과 유사한 '高力渠'가 戶縣 草堂鎭에 있음을 확인하고 이것이 바로 高麗曲임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즉 지금의 지명은 高麗曲이 아닌 高力渠로, 언제부터 지명이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개의 발음이 모두 ‘까오리취’(Gaoliqu)라는 점에서 동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로 원래 고려곡의 지명이 세월의 흐름 속에 여러 차례 변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 唐의 大宦官 高力士의 별장이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고 현재의 高力渠가 비록 戶縣에 속해 있지만, 당시 이 지역은 장안현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이곳이 바로 高麗曲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高麗曲의 '曲'은 里坊 안의 曲巷에서부터 나온 말이며, '巷'은 里坊 안에 설치된 행정상의 기층단위라고 하면서 唐代에는 里와 坊을 동시에 사용하였다고 '曲'의 의미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長安縣에 안치된 고구려인들은 長安 城南의 莊園이나 屯田 등에서 奴隸와도 같은 일을 하며 安置된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도 가하였다.
이런 주장에 반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학자 拜根興은 변린석의 '高麗曲'의 位置比定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반박하였다.
北宋人 張禮는 일주일의 시간을 들여 步行으로 長安 城南을 유람하였다.(張禮는 1086년 閏 2월 戊申(10일)에 출발하여 甲寅(16일)일까지 7일간 유람하였다-필자) 그리고 "기술한 城 郭 坊 市 村 墟가 50여 개에 이르고, 山 原 河 湖는 30여개에 이르며, 園圃 別墅 寺院은 40여개에 이른다. 그리고 名宦 人物은 一百二十餘人에 이르고 또한 陵墓 寺廟 碑碣 및 小橋 珍木 역시 그가 중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史念海 曹爾琴校注『游城南記 前言』, 三秦出版社, 2003) 일주일의 시간 내에 보행으로 유람한 항목이 이렇게 많으며 또한 현재 西安 南門의 동남부에서 출발하여 돌아왔다는 것 역시 현재의 상황에서 볼 때 굉장히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물며 『游城南記』의 내용으로 볼 때, 張禮는 도착한 곳곳마다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였는데, 그의 이런 세심한 관찰력은 현재의 우리도 본받아야 할 일이라 생각된다. 卞氏가 비정한 '高麗曲'의 위치는 長安 城南 구역에서 상당히 멀리 벗어나 있는데, 장례의 유람 속도로 보았을 때 그는 그렇게 먼 곳에까지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游城南記』에서 말한 '高麗曲'은 마땅히 서안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임에 틀림없으며 卞氏가 책에서 비정한 원래 高力渠가 위치해 있는 戶縣 관할 하의 宋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곡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가와 관련해서, 張禮가 長安 城南을 유람할 때는 7세기 중후반을 200여년 지난 11세기 중기이며, 또한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을 지난 과거의 일로 시간의 급격한 변화 속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만약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우리 역시 확실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밑줄은 필자 (『卞麟錫「唐代長安的新羅史蹟」評介』, 『唐硏究』제13기, 2007, "宋人张礼用一周时间, 步行游览长安城南, '记述的城郭坊市村墟就有五十多座, 山原河湖三十多条, 园圃别墅寺院四十多处, 名宦人物一百二十多位, 至于陵墓寺庙碑碣以至于小桥珍木也为他所重视, 内容颇为广泛'(史念海 曹爾琴校注『遊城南記 前言』, 三秦出版社, 2003). 在一周时间内步行考察如此多的考察项目, 而且是从现西安南门东南部出发, 现在看来都是一个很难办到的事情, 更何况从『遊城南記』内容看, 张礼每到一处都认真观览摩挲古物, 其严肃认真一丝不苟令人崇敬. 但作者比定的高丽曲位置, 远离长安城南区域, 按照张礼的“游历”速度, 也不可能到达如此远的地方. 故此, 我认为『遊城南記』中的"高丽曲", 应该是在距离西安城较近的地方, 而非书中比定的原高力渠所在地今户县辖下的宋村. 至于高丽曲的具体位置究竟在哪里? 张礼其人游历城南当时, 距离七世纪中后期200余年已经过去, 远离今天更是1300余年, 时间的沧桑掩埋了一切. 如果没有结论, 我们也没有必要一定要确定一个." -밑줄은 필자)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732284A4C383015)
<그림 1> 高力渠의 현재 행정구역은 陝西省 戶縣 宋村鎭에 속해 있다. 그림은 高力渠村民委員會 및 警務室(치안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모습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232E284A4C38860F)
<그림 2> 高力渠村의 모습
현재 高力渠는 70가구에 2백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로 거주민의 姓氏를 보면 石 李 鐵 寧氏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림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촬영한 高力渠村의 전체 모습이다.
2. 고구려 유민의 중국 내지 천사와 '東北工程'에 대함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당시 高句麗가 中國의 中央政權에 속한 일개 地方政權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따라서 高句麗史가 韓國史에 속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中國史에 귀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주체와 주민, 국가의 발전배경, 멸망원인, 隋․唐과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전쟁의 성격규정 등 고구려사의 전반적인 면에서 기존의 연구성과와는 다른 설을 내놓고 있다. 이는 統一的 多民族國家인 中國이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한 역사정리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적 필요성이 과거에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을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 멸망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 내지로 들어가 漢族으로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인들이 중국 내지로 천사되어 간 뒤 역사적 변화를 겪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학계의 주장이 대단히 논리 비약적이며 牽强附會的이란 것을 알게 된다. 즉 中國 內地로 강제 천사된 고구려 유민들의 의식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나라를 잃은 亡國民으로서의 비참한 삶을 영위해가면서도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唐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배를 위하여 徙民策을 실시하였다. 즉 왕을 비롯한 상층 귀족과 豪强者들을 대거 內地로 遷徙하여 통치한 것이다. (徙民策 외에 당은 고구려 故土를 羈縻州로 편제한 다음 남아 있는 자들을 예속시켜 집단적으로 통치하기도 하였다-필자) 3차에 걸친 대규모 고구려 유민의 중국 내지로의 천사가 있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영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후 渤海를 건국하는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중국 내지로 천사된 고구려 유민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최종적으로 漢化되었을 것이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한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가 '中國史'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대다수 고구려인들은 의연하게 본래의 고구려 영토에서 새로운 국가(渤海)를 세웠기 때문이며, 또한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 내지로 강제 천사된 고구려 유민들의 숫자가 많고 적음과 그리고 漢化程度의 깊고 낮음만으로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와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논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실들이 있는데, 즉 첫째, 고구려 유민들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했는가 그렇지 않았나 하는 점이고, 둘째, 이들이 가지고 있던 의식적인 측면, 즉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며, 셋째, 중국인들이 강제 천사된 고구려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도 주의해야 할 점이며, 넷째,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분으로 파악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등의 문제이다.
첫째, 新羅나 靺鞨, 日本 등지로 천사한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로 끌려간 자도 있을 것이지만 거의 대다수는 자진 귀부한 자들이다. 이와 달리 중국으로 간 유민들 중 泉男生과 그의 아들 泉獻誠, 그리고 高足酉 등처럼 비록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진해서 간 자들도 있어 중국 내에서도 특권을 누렸는데 이들은 고구려인이란 의식보다 唐朝의 臣民이란 의식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일부 자진투항한 자들과 달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唐의 사민정책에 따라 강제로 집단 천사된 경우이며,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선택의 여지없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국가의 멸망으로 망국민의 한을 품고 강제 천사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諸史書의 기록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七萬人이었다(入中國者七萬人)" 혹은 "唐은 고구려 유민 三萬八千三百戶를 중국 내지로 천사하였다([唐]移[高句麗遺民]三萬二千三百戶於中國內地)" 등은 고구려 유민 대다수가 자신들의 거취를 선택할 수 없이 강제로 천사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둘째, 唐에서 관직을 역임한 고구려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자진 투항한 泉獻誠이 스스로 '非華人'으로 인식하고 있었듯 출신을 고구려로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泉獻誠이 이런 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강제로 끌려온 다수의 고구려 유민들은 어떠했겠는가? "고구려인들은 이반자가 많았다(高麗之民多離叛者)"라는 『資治通鑑』總章2年條의 기록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 것임을 반증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은 고구려 유민의 정체성 확인에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泉男生은 遼東郡 平壤城人, 高慈는 朝鮮人, 泉獻誠은 '其先高句驪國人', 泉男産은 遼東朝鮮人, 高足酉는 遼東平壤人, 高玄은 遼東三韓人이라 했다. 그리고 유민 후손들 가운데 高震과 그의 넷째 딸, 그리고 高欽德의 묘지명에는 이들을 渤海人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서에 그 기록이 나오는 高仙芝, 王毛仲, 王思禮, 李正己 모두 高麗人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이미 세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나 타인들 모두 이들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高仙芝와 王思禮, 李正己 등이 立身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처음으로 활동했던 곳이 바로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출세가 시대상황의 변화와 개인적인 능력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 후손들의 지지라는 점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高仙芝와 王思禮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지역인 隴右道와 그 주변 일대, 李正己가 起身한 營州 일대 모두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지역에는 '高麗曲'처럼 고구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집단촌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민후손들도 비록 前代처럼 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서로 간에 동질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高仙芝, 王思禮, 李正己가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功을 세우고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부대에 속했던 고구려계 병사들의 결속력이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현숙, 「中國 所在 高句麗 遺民의 動向」, 『韓國古代史硏究』23, 2001, pp.92~93.)
중국 내지는 아니지만 신라말기 弓裔가 자립하여 국호를 '後高句麗'로 할 수 있었던 데에도 한반도 중부지역에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거나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지역민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唐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최종적으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과 대비된다.
셋째, 唐 내지로 강제 천사된 고구려 유민들은 처음부터 漢化되지도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즉 唐人들은 고구려인들을 오랑캐로 인식했으며 결코 '중원의 한족과 같은 형제민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고구려 유민들의 후예가 唐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들이 있음을 들어 고구려인들이 漢人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高麗奴'라는 욕을 들었던 高仙芝의 예에서 보듯 이는 당시 고구려인들에 대한 唐人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처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고선지가 石國 정복으로 唐의 강역을 고비사막 너머까지 넓히는 功을 세웠지만 그도 政敵들로부터 '高麗奴'라는 모멸에 찬 욕을 들어야만 했다. 唐에서 태어나 唐의 民으로 살면서 관직을 얻고 唐을 위해 활동을 했지만, 그들은 결국 唐人의 눈에는 亡國民의 후손일 뿐이었다. 다음의 기록은 고구려 유민들이 처한 당시 환경을 비교적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京兆의 고구려 사람의 집이 가난하여 御史臺에서 勳官을 대신해 문서를 遞送하는 일을 했다. 그때 令史가 거짓으로 帖을 만들어 고구려인에게 주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요구하게 했다. 그러나 일이 실패하자 令史는 도주했고 추적했으나 잡지 못했다. 御史 張孝嵩이 고구려인을 잡아 고문을 했는데 무릎 뼈가 땅에 떨어지고 두 다리가 다 못쓰게 되었다. 令史를 대신하여 죄를 승인하고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도록 보냈다. 大理卿에게 장계를 올려 말하니 옛날 판례를 보면 병이 심한 자에게 형을 가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했다. 장효숭이 화를 내며 말하길, 다리 아픈 것이 어찌 문서를 위조한 죄를 없애겠는가 하고 이에 명하여 마주 들고 시장에 끌고 가 그를 참하게 했다. (『朝野僉載』卷2 『叢書集成初編』, 中華書局, 1985, p.19, "京兆人高[句]麗家貧, 於御史臺替勳官遞送文牒, 其時令史作僞帖, 付高[句]麗追人擬嚇錢, 事敗, 令史逃走, 追討不獲, 御史張孝嵩捉高[句]麗拷, 膝骨落地, 兩脚俱攣抑, 遣代令史承僞, 准法斷死, 訖大理卿狀上, 故事准名例律, 篤疾不合加刑, 孝嵩勃然作色曰, 脚攣何廢造僞, 命乃昇上市斬之." 위 내용은 김현숙, 「中國 所在 高句麗 遺民의 動向」, 『한국고대사연구』23, 2001, pp.71~72를 재인용한 것임.)
위의 기록에서 '京兆人高[句]麗'는 어떤 과정을 거쳐 入唐했는지 모르나 장안에 와서 살았는데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그가 지역적 기반과 다른 기득권을 모두 상실하고 敵國으로 와 어렵게 생활해야 했던 亡國民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가난 때문에 범죄에 연루되어 공모자의 죄까지 덮어쓰고 무릎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은 뒤 처형당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통해 추측컨대, 집단 거주지인 '高麗曲'에서 생활한 고구려인들 역시 노예와도 같은 어려운 생활을 했을 것이며 他地方으로 천사된 유민들의 고생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무엇보다도 중국은 그 역사전통상 단 한 번도 고구려를 '中國'의 일부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역대 '中國'의 사료에서 고구려가 단 한 번도 자국사로 취급되지 않고, '東夷'나 異域으로 다루어졌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중국학자들이 唐 내지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의 수량과 漢化된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들이 조속히 한족에 동화된 이상 고구려사는 '中國史'라는 그들의 논거로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 등 북한․일본학자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영역에는 많은 고구려인들이 남아서 끝내는 자신들이 지배층이 된 발해를 건국하였다는 사실과, 당으로 유입된 고구려인들은 오랫동안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사실은 당 이후 역대 '中國'의 왕조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상의 언급에서처럼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어도 자신들의 뿌리가 당에 패한 고구려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까지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려 하는 중국학자들의 노력은 극히 제고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이런 중국학자들을 학문적으로 설득하고 설복시키기 위한 노력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3. 고구려 유민의 장안 성내의 거주 유적지
唐의 수도 長安에는 총 108개의 坊이 있었다. 현재의 西安城郭은 明왕조 시기 건축된 것으로 唐代 長安城郭에 비해 약 7배는 작았다고 한다. 坊의 구성은 4면이 城牆으로 둘러싸였고 사람들은 坊의 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었다.
宋敏求가 편찬한 『長安志』에 의하면, 장안 내에는 총 249개의 저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는 장안 六萬家(군인을 포함하여 약 100만 인구)라는 인구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적은 숫자임에 틀림없다. 고관들이 차지하였을 249개의 주택 외에는 모두 民家였을 것이다. 저택의 수는 한 개의 坊에 2~3개 정도로 나누어질 수 있다. 현재 고구려 유민의 주택으로 위치 확인이 가능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패망 이후 장안으로 왔던 淵蓋蘇文의 아들 泉男生이 기거했던 주택이 興寧坊 내에 있었는데, 이는 현재 서안 시내 長樂西路의 동쪽 부근에 해당된다. 둘째, 실크로드 개척에 혁혁한 공을 세운 高仙芝의 옛 집터 유적지를 들 수 있다. 그는 현종시기 755년 경 장안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古宅은 장안의 宣陽坊 내에 있었는데, 이곳은 지금 서안 시내의 文藝路 北段 明勝路 부근으로 확인되고 있다. 셋째, 당 현종의 옹립을 도왔던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王毛仲의 저택 역시 장안에 있었다. 그의 저택은 시기는 달랐겠지만, 천남생의 저택이 있었던 興寧坊 내에 같이 있었다. 현재는 서안 시내 長樂西路의 서쪽 부근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 李元佐와 李同이 살았던 주택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1) 泉男生 주택 유적지
泉男生이 唐에 귀의하기 전의 사정을 史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泉男生의 字는 元德으로 高句麗 淵蓋蘇文의 아들이다. 9살 때에 中裏小兄으로 전임되었는데 이는 唐의 謁者에 상당하는 관직이다. 후에 中裏大兄으로 전임되어 國政을 알게 되었고 辭令은 모두 천남생이 주관하게 되었다. 그 후 中裏位頭大兄을 맡았다. 그리고 莫離支가 되어 三軍大將軍을 兼하고 여기에 大莫離支를 더하였다. (『新唐書』卷110 泉男生傳, "泉男生字元德, 高[句]麗蓋蘇文子也. 九歲,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 皆[泉]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 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그리고 泉男生이 唐에 귀의하는 사정을 史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乾封初(666), 高句麗 大將 泉男生은 무리를 이끌고 [唐에] 귀부하였다. 高宗은 將軍 龐同善 高侃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舊唐書』卷83 薛仁貴傳, "乾封初, 高麗大將泉男生率衆内附, 高宗遣將軍龐同善 高侃等迎接之.")
천남생이 기거했던 주택의 실존여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興寧坊의 東南 모퉁이에 左衛大將軍 泉男生의 주택이 있다.(徐松, 『唐兩京城坊考』卷3 外郭城, "[興寧坊] 東南隅, 左衛大將軍泉男生宅.")
천남생은 666년에 莫離支가 되었다. 그해 그가 국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방순시에 나선 틈을 타 두 아우 泉男建과 泉男産이 공모하여 그를 몰아내고 고구려의 朝權을 장악하였다. 천남생은 하는 수 없이 國內城에 의거하면서 아들 泉獻誠을 당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 후 천남생은 唐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당 고종은 그를 特進 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에 임명하였다.
<그림 3> 唐長安城의 興寧坊
史念海主編, 『西安歷史地圖集』, 西安地圖出版社, 1996, 唐長安城圖(唐初~唐玄宗天寶十四年(755))를 참조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3933264A4C3AFB04)
<그림 4> 『西安歷史地圖集』를 근거로 천남생의 주택은 현재 長樂西路 10號 쯤으로 파악되며 이곳에는 2008년 12월 현재 '西北金花羊毛杉貿易大廈'가 들어서 있다.
(2) 高仙芝 주택 유적지
高仙芝(?~755)의 출신과 그 출세와 관련되어 史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高仙芝는 高句麗人이다. …… 그가 20여 세에 [父親을 따라] 安西에 이르러 父親의 功으로 游擊將軍을 역임하였다. 여러 해가 지난 후 父子는 並班되었다. 高仙芝는 容貌가 수려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能하였다. 父親은 그의 柔弱함을 걱정하였다. (『新唐書』卷135 高仙芝傳, "高仙芝, 高[句]麗人 …… 仙芝年二十餘, 從至安西, 以父功補游擊將軍. 數年, 父子並班. [高]仙芝美資質, 善騎射, 父猶以其儒緩憂之."
高仙芝는 본래 高句麗人이다. 부친 高舍鷄는 일찍이 河西軍에 從軍하여 수차례 功을 세워 四鎭十 將 諸衛將軍에 이르렀다. 고선지는 용모가 수려하고 騎射에 능하였으며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安西에 이르러 부친이 功이 있어 [그를] 游擊將軍에 임명하였다. 즉 20여 세에 장군이 되었는데, 父親과 班秩이 같았다. (『舊唐書』卷104 高仙芝傳, "高仙芝, 本高[句]麗人也. 父[高]舍鷄, 初從河西軍, 累勞至四鎭十將 諸衛將軍. [高]仙芝美姿容, 善騎射, 勇決驍果. 少隨父至安西, 以父有功授游擊將軍. 年二十餘卽拜將軍, 與父同班秩.")
고선지가 살았던 주택의 실존여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宣陽坊의 서문 남쪽에 右羽林軍大將軍 고선지의 주택이 있다. (徐松, 『唐兩京城坊考』권3 外郭城, "[宣陽坊] 西門之南, 右羽林軍大將軍高仙芝宅.")
고선지는 宣陽坊의 西門 남쪽에 살았다. 선양방에는 고선지의 주택 외에 楊國忠, 楊貴妃의 3자매, 그리고 安祿山 등 당시 권세가들의 저택들도 함께 있었다. 당시 권세가들은 아침 朝會에 쉽게 당도하기 위하여 皇宮인 興慶宮 동쪽에 모여 살았던 것이다. 史書에서 기술했듯이 고선지가 安西지역으로 옮겨간 시기는 약관 20여 세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선대가 중국에서 入仕한 지역이 안서지역일 것으로 생각된다. 고선지는 夫蒙靈詧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開元末期에는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天山山脈 서쪽의 達亥部를 정벌한 공으로 安西副都護 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이후 河西節度使에 轉任되었고 右羽林大將軍에 補任되었다. 비록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했지만 755년에는 密雲郡公에 封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安祿山의 난 때에 土賊副元帥가 되어 출정했다가 潼關으로 후퇴한 죄로 邊令誠에 의해 軍中에서 처형당했다.
<그림 5> 唐長安城의 宣陽坊
史念海主編, 『西安歷史地圖集』, 西安地圖出版社, 1996, 唐長安城圖(唐初~唐玄宗天寶十四年(755))를 참조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37D8244A4C3B7E2D)
<그림 6> 고선지의 주택 유적지는 현재 文藝路 北段 明勝路 9號 쯤으로 파악되며 이곳에는 2008년 12월 현재 '悅城 樂器城招商體驗中心'의 건축이 한창이었다.
(3) 王毛仲 주택 유적지
왕모중(?~731)의 출신과 그 출세와 관련되어 史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王毛仲은 원래 高句麗人이다. 부친 游擊將軍 王求婁가 죄를 지어 관직을 잃게 되었다. 이때 王毛仲을 낳았는데 그는 현종(李隆基-필자)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총명하여 당시 현종이 臨淄王으로 있었을 때 늘 左右에서 일을 처리하였다. …… 현종이 번왕의 관저에 있을 때 늘 영웅호걸들과 함께 하며 먹을 것과 재물들을 베풀자 이들은 [현종에게] 歸心하였다. 왕모중은 이러한 현종의 뜻을 알고 심히 삼갔다. 이에 현종은 그의 敏惠함을 좋아하였다. (『舊唐書』卷106 王毛仲傳, "王毛仲, 本高[句]麗人也. 父游擊將軍職事[王]求婁, 犯事沒官, 生毛仲, 因隸于玄宗. 性識明悟, 玄宗爲臨淄王, 常伏事左右 …… 玄宗在藩邸時, 常接其豪俊者, 或賜飮食財帛, 以此盡歸心焉. [王]毛仲亦悟玄宗旨, 待之甚謹, 玄宗益憐其敏惠.")
왕모중이 살았던 주택의 실존여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郭虔瓘의 주택 북쪽으로 特進 王毛仲의 주택이 있다.(徐松, 『唐兩京城坊考』卷3 外郭城, "[興寧坊] [郭虔瓘] 宅北, 特進王毛仲宅.")
왕모중의 주택은 장안성 동쪽의 興寧坊에 있었다. 그의 부친 游擊將軍 王求婁가 죄를 지어 관직을 삭탈당하자, 그는 臨淄王 李隆基(이후의 玄宗)의 家奴가 되었다. 이후 726년 왕모중이 출세한 후 그의 부친은 秦州刺史로 追贈될 수 있었다. 처음 왕모중은 東宮의 말단 자리인 말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었으나 1년이 채 못 되어 3品階의 大將軍이 되었다. 史書에서 기술했듯이 왕모중은 매사에 敏慧하여 현종의 눈에 들게 되었다. 710년 太平公主와 정변을 모의한 韋后를 죽이고 예종이 즉위하자 李隆基는 태자가 되었다. 713년 蕭至忠을 죽이고 공을 세우자 輔國大將軍이 되었다. 왕모중은 현종 친위대의 실세로 羽林軍과 左右 1萬騎를 지휘하고 있었다. 왕모중은 제왕과 함께 御幄 앞에 앉았기 때문에 현종은 그가 보이지 않으면 몹시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현종이 그를 상당히 신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19년 왕모중은 特進 太僕卿으로 승진하였고, 721년에는 최고의 勳官 開府儀同三司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후 그는 太原에서 不法으로 兵器를 監索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참소로 인하여 瀼州로 유배되었다가 永州에서 교살되고 말았다.
<그림 7> 唐長安城의 興寧坊
史念海主編, 『西安歷史地圖集』, 西安地圖出版社, 1996, 唐長安城圖(唐初~唐玄宗天寶十四年(755))를 참조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662274A4C3BFE12)
<그림 8> 왕모중 주택 유적지는 현재 長樂西路 151號 쯤으로 파악되며 이곳에는 2008년 12월 현재 '康復路交易廣場'이란 건물이 들어서 있다.
(4) 李元佐의 주택
비록 현재는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나, 新羅人 李元佐 역시 장안 성내에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史書記載는 다음과 같다.
會昌三年(843) 8월 13일, 나(圓仁)는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左神策軍押衙 李元佐의 집에 묵고자 했다. 그가 바로 左軍中尉親事押衙이다. 그는 신실한 불교신자로 道心이 극진했으며 新羅人이다. 그의 주택은 永昌坊에 있는데, 북문으로 들어가 서쪽 第一曲을 돌면 한 담장에 이르는데 이것이 [영창방]의 남쪽 벽이다. 이곳이 護國寺의 뒷담장의 서북 모퉁이가 된다. 집에 도착하여 만나기를 청한 바 이루어졌다. (圓仁, 『入唐求法巡禮行記』卷4, "[會昌三年] 八月十三日, 爲求歸國, 投左神策軍押衙李元佐, 是左軍中尉親事押衙也. 信敬佛法, 極有道心, 本是新罗人. 宅在永昌坊, 入北門西回第一曲, 傍墻南壁上, 當護國寺後墙西北角. 到宅相見, 許計會也.")
(5) 李同의 주택
고구려인 李同 역시 장안 성내에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사서기재는 다음과 같다.
右羽林將軍 李同은 飛騎로 궁중의 儀仗을 맡았다가 후에 遼東大都督 玄菟郡公으로 벼슬을 옮겼다. 이때 [高宗으로부터] 京師의 第宅을 받았다. (『新唐書』卷110 泉男生傳, "右羽林將軍李同以飛騎仗廷寵. 遷遼東大都督 玄菟郡公, 賜第京師."
당시 장안 성내에 주택을 가지고 있던 해동삼국 출신 인물들은 앞에서 언급한 泉男生․高仙芝․王毛仲․李元佐․李同 외에도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史書의 기록을 근거로 그 실존여부와 현재의 위치에 대한 확인이 가능한 것은 이들의 주택뿐이다.
Ⅳ. 해동삼국 출신 구법승의 활동과 그 특징
海東三國 출신 승려의 入唐 求法活動은 당시 한중 양국의 문화교류, 특히 佛敎文化의 교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고구려․백제․신라에 전래된 후 비로서 구법승의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 규모와 숫자는 확대되었다. 구법승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관련 사료의 부족으로 그 통계를 내기 곤란하지만 현존하는 사서와 금석문, 그리고 비문 등을 통하여 그 대략적인 숫자를 파악하면 7~9세기 간에 180여 명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학자 陳景富의 『中韓佛敎關係一千年』을 근거로 하여 이들의 人名과 학문분야 등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陳景富은 史書 및 기타 자료의 통계를 바탕으로 불교가 한국에 전래되고부터 元末明初 시기까지 해동삼국 출신 구법승이 총 27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시기별 해동삼국의 구법승 활동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