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래 동시집 {우주보다 큰 아이} 발문>
나란 존재의 소중함
전병호
1. 마법의 순간으로 들어가며
먼저 시 한 편 읽어보겠습니다.
이리 와
이리 와
바람 부는 날
따라가다
놓쳐버린
벚꽃 잎
어디선가
웃음소리 들렸어
길가
돌멩이
분홍 눈을 뜨고
웃고 있었지.
-〈분홍눈〉 전문
김금래 시인의 시는 낯설 때가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평소 동시를 많이 읽은 사람이라고 해도 김금래 시인의 동시를 읽는 순간 ‘?’ 하고 당황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한 글자씩 찬찬히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아하, 이렇게 다른 문법. 다른 표현으로 시를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읽었던 시와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김금래표 동시’의 참맛을 느끼려면 지금까지 읽은 동시는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럼, 〈분홍 눈〉에 관해 말해볼까요?
시적 화자는 길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 벚꽃 잎을 발견한 순간 돌멩이가 ‘분홍 눈’을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심코 지나쳤으면 못 보았을 그 순간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것입니다. 이제 벚꽃잎이 날아가 앉기 전의 돌멩이와 벚꽃잎이 날아와 앉은 후의 돌멩이는 서로 다른 돌멩이입니다. 벚꽃잎이 내려앉기 전에는 무생물이었지만 벚꽃잎이 내려앉은 후에는 스스로 웃고 눈을 뜨기도 하는 살아있는 개체입니다. 즉, 〈분홍 눈〉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낯익은 세계가 아니라 돌멩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뜬 새로운 눈이라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돌멩이가 생명을 얻고 ‘분홍 눈’을 뜨는 이 마법 같은 순간, 우리도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뜹니다. 시를 읽는 목적도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분홍 눈’을 갖기 위함이 아닐까요?
아마 김금래 시인은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새롭고 감동을 주는 동시를 쓸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갖고 싶다고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오랜 습작 끝에 마침내 보답처럼 얻어지는 것이지요. 그 결과 김금래 시인은 시인으로서 자기만의 표현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2. 통찰력에서 오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단순화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가 됩니다. 시인은 수행자처럼 사물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길러야 합니다. 깨달음 없이 새로운 시적 발견은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실패할 때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한계를 느끼고 슬럼프에 빠지기도 합니다만 끝없이 다시 도전해서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얻어내야만 마침내 시 한 편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김금래 시인이 시를 얻는 순간을 살펴볼까요?
발길에
차이던
산비탈
돌멩이
오늘은
꽃비 맞아 꽃이 되었네
나비 날아오네.
-〈돌꽃〉 전문
산비탈을 구르던 돌멩이와 꽃비를 맞은 돌멩이는 다른 돌멩이입니다. 산비탈을 구르던 돌멩이는 무생물이고, 꽃비 맞은 돌멩이는 생물, 즉 살아있는 돌꽃이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산비탈 돌멩이일 때는 사람들 발길에 차이기만 했는데요 돌꽃이 되니까 나비가 날아옵니다. 나비는 돌꽃을 꽃으로 알고 찾아온 것입니다.
밤길을 날아가요
이마에 불을 켜면
앞이 환할 텐데
옆구리에 불을 켜면
옆이 환할 텐데
꽁무니에 불을 켜고
반짝반짝 날아가요
지나온 길 환하라고
- 〈반딧불이〉 전문
반딧불이는 왜 바보처럼 꽁무니에 불을 켜고 날아갈까요? 앞이 환해야지, 왜 뒤가 환해야 한다는 걸까요? 이 시는 경쟁하며 앞으로만 달리던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뒤돌아보게 합니다. 내 불빛이 뒤를 비추면 뒤에 오던 친구도 줄줄이 꽁무니에 불을 켭니다. 서로를 비추며 날아가는 반딧불이의 춤은 아름답습니다. 지나온 길이 환하면 혼자가 여럿이 됩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행복해지고 세상은 변합니다. 시인은 행복의 비밀을 시에 숨겨두어 새록새록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래서 잊고 있던 중요한 가치를 되찾게 합니다.
껍질은
손으로 살살 벗겨주세요
속도
미리 나눠놓았어요
난
칼이 싫거든요.
- 〈귤〉 전문
일반적으로 귤을 소재로 시를 쓰면 맛있다 향기가 좋다 빛깔이 곱다 등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김금래 시인은 대뜸 “껍질은 / 손으로 살살 벗겨주세요”, “속도 / 미리 / 나누어 놓았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난 / 칼이 싫거든요.”라고 말합니다. 칼은 상황에 따라 사람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칼이 싫다고 한 것입니다. 시인은 귤이 조각으로 나뉘어 있고 까기 쉬운 껍질로 덮여있음을 재발견하고 귤 속에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숨겨놓은 것입니다.
김금래 시인은 보물찾기처럼 시 속에 많은 메시지를 숨겨놓았습니다. 집세 대신 나뭇가지에 빗방울 브로치를 달아주었다는 〈보석 브로치〉, 파도가 물결 망치로 바위를 다듬는 〈갈매기 의자〉, 캄캄한 밤이면 연꽃이 촛불로 피어나는 〈그림자와 연꽃〉 등에서도 새로운 시적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김금래 시인의 동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단순화’와 ‘단순명쾌성’입니다.
구멍이 있어
그물이 되지
구멍이 있어
바닷물 놓아주고
고기를 잡지
구멍이 있어
새끼는 돌려보내지
구멍이 있어
내일이 있지
- 〈그물〉 전문
그물 구멍이 너무 작으면 어떻게 될까요? 새끼까지 모두 잡아 물고기 씨가 마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속의 그물은 물고기만 잡고 바닷물과 새끼는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바다도 그물도 내일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시에서 단순명쾌성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김금래 시인은 그것을 훌륭하게 복원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산골
외딴집에
첫눈
온다
돌담 위
운동화
가슴이
콩닥콩닥
누가
올까
두멧길
내다보다
산길
바라보다
눈에
묻혔네
- 〈산골 첫눈〉 전문.
시인은 “돌담 위 / 운동화”에 초점을 맞춰 눈 내리는 산골을 그립니다. 단순화한다는 것은 이처럼 절제된 언어로 핵심 이미지를 그려내어 감동을 안겨주는 기법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첫눈 내린 산골 마을이 그림처럼 환하게 그려집니다.
3.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바다야
이제 안녕!
난 투명한
빗방울
네 속에선
내가 보이지 않아
나 다시
구름이 될래
짠
바닷물 말고
사막의
오아시스가 될래.
- 〈구름 일기〉 전문
빗방울은 바다가 됩니다. 그러나 빗방울은 슬픕니다. 왜냐고요? “네 속에선 / 내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빗방울은 울지 않습니다. “바다야 / 이제 안녕!“ 작별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납니다. 빗방울은 짠 바닷물이 아니라 낙타에게 물을 주는 사막의 샘물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찾아 새 출발하는 빗방울에게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배추를 버리고 김치가 되는 〈더하기 이별〉, 구멍 있는 돌담으로 변신해 바람을 이기는 〈구멍의 비밀〉, 폭력이 비폭력으로 순화되는 〈주먹으론 할 수 없어〉, 이천 년 동안 살아남은 〈주목나무 할아버지〉, 버드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먼저 하늘에 닿는다는 〈하늘 닿기〉 등 많은 시가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서 변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나란 존재의 발견과 화합
난 손바닥 하나로
전봇대를 가리지
날아가는 새도
지구보다 큰 해님도 가리지
눈 감으면
하늘땅도 사라지게 할 수 있어
끝까지 가릴 수 없는 건
오직 하나
눈 감아도 보이는
나!
- 〈우주보다 큰 아이〉 전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입니다. 내가 있어야 세상이 있습니다. 내가 있어야 우주가 존재합니다. 시인은 그런 나를 우주보다 큰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나를 누가 사랑해야 할까요?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나를 쓰러지게 하는 것도 결국은 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많이 아파하는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또한 쉽지 않습니다.
〈양파 벗기기〉에서 양파가 매워 우는 눈물은 엄마의 사랑이 그리워 우는 눈물로 바뀝니다. 〈나도 좀 봐주세요〉에서는 상황이 조금 더 난처한데요. ‘동생은 / 소리만 내고’ 우는 시늉을 하면서 언니인 나를 혼내 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씁니다. 나는 동생보다 더 크게 울었지만 글쎄요? 엄마가 나를 위로해주기는커녕 혼낼 것만 같은 이 슬픈 예감은 무엇 때문일까요? 결국 ”나는 눈물 콧물 / 뚝뚝 떨어“뜨리면서 진짜로 울게 됩니다.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무의식 깊이 숨어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불쑥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뭇잎 떨어진 자리에 새잎 돋듯 우리는 상처로 인해 성숙해집니다. 자신을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힘이 생길 때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또 화합하게 됩니다.
울고 싶은 날
딸기는 누가 웃겨 줄까
딸기는 딸기를 웃겨
과자를 던져 받아먹다가
막춤을 추다가
엉덩이로 이름을 쓰다가
검정깨 뿌려놓고
데구르르 구르는 거야
슬픈 딸기는 안녕!
벌렁벌렁 웃음 참는 딸기코가
주근깨 딸기코가
거울로 가지
풋! 하하
-「딸기는 딸기를 웃겨」 전문
‘내’ 눈물은 누가 닦아줄까요? 딸기는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자를 던져 받아먹다가 / 막춤을 추다가 / 엉덩이로 이름을 쓰다가 / 검정깨 뿌려놓고 / 데구르르 구르는 거야”에서 보듯 마침내 자신을 웃기는 데 성공합니다. 딸기는 행복한 자신을 확인하려고 거울 앞에 섭니다. “풋! 하하” 하고 웃으려고 했는데 순간 눈물이 찔끔 나지 않았을까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을 웃긴 딸기는 그만큼 자신을 사랑한 것이지요.
또 다른 시를 볼까요?
태풍이 밀어버린
코스모스
쓰러져도
웃어요
비에 젖어도
웃어요
흙이 묻어도
웃어요
꽃잎이 빠져도
웃어요
태풍은
달아나고
해가
났어요
웃음이
이겼어요.
-「힘센 웃음」 전문
웃음은 태풍을 물리치고 해를 뜨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것은 돈이나 물질보다 웃음이 아닐까요? 끝까지 웃는 사람이 힘센 사람입니다. 꽃들은 모두 웃어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이 밖에도 아픔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수박밭으로 굴러갈까 봐〉, 〈엄마 구출 작전〉, 〈인사가 달라〉, 〈바위와 고릴라〉, 〈별 보는 자전거〉도 나란 존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보여줍니다.
5. 끝에
김금래 시인은 어린이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넌 우주보다 큰 아이야!”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알면 남도 사랑하게 됩니다. 김금래 시인의 시속으로 여행을 떠나면 태풍에 쓰러져 웃는 코스모스와 칼을 물리치는 귤을 만나고, 꽁무니에 불을 켠 반딧불이가 친구랑 춤추는 비밀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은 여행길에 앉아 깊어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것입니다. 김금래 시인의 시는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단순 명쾌하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시는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김금래 시인의 시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이유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