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긴 글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런 삶,
이렇게 생을 채색하는 삶도 있구나!!
딱히 이유는 댈 수 없지만,
아니 이러구 저러구 구구절절 제 개인 생각이 넘치겠지만,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분야이지만 ,
님들과 꼭 만나게 해 드리고픈 님을 만났기에
꼭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합니다.
헌신속의 자신만의 충만함으로 집안에서만 맴돌았던 주부 경력 20년 즈음에.
중년의 나이가 넘도록
자신있게, 재미있게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한 날이 있었죠.
욕심부리지 않고 편안히 무언가를 만드는 흉내라도 내보자라고
한복교실을 찾았습니다.
전문가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진 인생선배님도 그 곳에서 만났죠.
한 땀 한 땀 소중함을 알게 되고 초보의 바느질을 겨우 익히게 된 즈음
그 님에 이끌려 아무 생각없이 찾아 뵙게 된 8순이 넘은 할머니 한 분.
<한평생을 한 우물을 파니 천덕꾸러기였던 지난 세월을 뒤로 하고
예인으로 대접해 주더라.>
< 노동하지 않는 자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 이웃 할머니들속에서도 나는 아는 게 없어. 자신도 없고.
영화의상 이야기, 바느질 이야기만 하면 신이 나.>
개개인 소개를 할 때 바느질을 가르친다는 이의 말에..
< 부탁이 있는데... 기술만 가르치지 말고 정신도 가르쳐야 돼.
정신이 살아 있어야...............................역사가 되어 흐르는 거야.>
가녀린 작은 그 님의 몸에 배어 있는 조용한 단호함은
그 누구도 넘 볼 수 없는 그 님만의 성인이요, 선구자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편안히 이웃에서 뵙는 할머니셨고
그 날도 손님을 맞아 당신의 일거리에서 일손을 멈춘 장인이셨고
한 명의 주인공과 수 백명의 엑스트라들을 꼭 맞게 꾸미시는 예인이셨습니다.
<씨네 21>에 10회에 걸쳐 연재된 영화의상(제작가) 이해윤님의 구술 인터뷰 기사를 발췌해서
지난 주 제가 담은 그림과 함께 옮깁니다
56년 <단종애사>(전창근 감독)부터 2001년 <친구>(곽경택 감독)까지
단 한 사람에 의해 배우들의 입을거리가 결정돼왔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무려 47년간(2003년 현재) 영화 의상에 종사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의상 할머니’ 이해윤.
1991년 춘사영화제 의상상(<사의 찬미>)을 비롯,
같은 해 대종상 특별부문상(<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6년 대종상 의상상(<금홍아 금홍아>),
2001년 여성영화인 공로상 수상이 전부인 그녀는
업적에 비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유현목, 신상옥, 김수용 등 시대의 감독들과 함께 하며
현장을 지켜온 영화계의 산 증인이다.
반세기 동안 한국영화에 옷을 입혀온
이해윤 할머니 회고록을 연재한다.
양평의 영화의상 창고 앞에서의 이해윤님.
분홍색 남자 저고리가 어딨어?
옷감의 질만 문제되는 게 아냐. 나염이 발달하지 않아서 색깔이 형편없었어.
그나마 다행인 게 사극에 쓰이는 옷들은 빨강, 남색, 초록, 노랑색만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됐거든. 지금은 TV 사극이나 영화 사극이나
너무 화려하게들 가고 있는데, 실제로는 궁중 예복에 쓰이는 색이 얼마 안 돼.
고증도 안 된 의상을 입고서야 어찌 제대로 된 사극을 만들 수 있겠누.
원래 분홍색은 여자 색이어서 남자 옷에는 쓸 수 없는데도
언제부턴가 떡하니 분홍색 남자 저고리와 바지와 등장하는 것도
고증이 부족한 탓이야. 너무들 공부를 안 해.
내가 일할 땐 지금처럼 자료도 많지 않았어.의상 연구 서적이 다 뭐야.
비원이나 규장각을 직접 찾아가 꽂혀 있는 장서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며
의상에 대해서 공부하곤 했어.
영화 의상하는 사람은 영화의 성격이 어떤지,
어느 배역에게 옷을 입히는지, 시대적 배경이 어딘지
배우나 감독 못지않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대본 읽기는 기본이고, 원작이 있다면 원작부터 구해다 읽고,
영화 속 시대를 말해주는 자료가 있다면 구비해놓는 게 의상이 해야 할 일이야.
배우들의 신체치수를 외운다니까 놀라는 사람들이 있어.
그게 뭐가 놀랄 일이야. 치수뿐만 아니라 특징까지 다 알고 있어야 해.
저 배우가 목이 긴지, 붙었는지, 어깨를 벌리고 다니는지, 구부리고 다니는지,
다리가 휘었는지, 같이 사는 가족마냥 알아야 해.
그래야 옷을 입는 배우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자기 옷이라 느끼게 되지.
현장에서 옷을 풀어놓으면 배우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어.
배우의 몸을 아는 사람이면 어디가 안 맞아서 불편한지 단박에 알 수 있지.
그 님의 단촐한 공간!
헤진 성인 엑스트라의 옷을 튿어 빨고 말리고 손질을 한 뒤 어린이의 옷으로 수정 작업등 하신다고...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 감독의 ‘춘향이’ 대결이 화제였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최은희와 막 샛별처럼 떠오른 김지미를 두고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느냐,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온통 관심이 쏠렸지.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내가 의상을 맡았어.
하지만 이 흥행 대결은 어느 정도 결과가 예상되는 싸움이었어.
당시 최은희의 인기는 김지미를 압도할 정도로 절정에 오른 것이었고,
신상옥의 작품 역시 홍성기 것보다야 입소문이 잘 났어.
예상대로 신상옥의 <성춘향>이 홍성기의 <춘향전>을 훨씬 앞지르며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안았지. 두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훨씬 화려하고 정교했어.
감독이, 어리고 예쁜 김지미의 매력을 한껏 살려달라고 부탁해서
장식이며 바느질에 훨씬 공을 들였거든.
최은희는 자신의 옷을 직접 지어 입었기 때문에
<성춘향>에선 그저 엑스트라만 챙기고 말았지.
.........................................
김지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나름의 옷 짓는 노하우가 모두 동원됐지.
의상이 다 지어지면 일일이 다림질을 해야 하는데,
다리미에 쓸 숯을 피우는 것도 큰 일이었어. 그럴 땐 조명부나 촬영부 사람들이 도와줬어.
그이들이 숯을 피우는 동안 나는 배우들 머리를 빗기고.
숯 다리미와 발로 밟는 재봉틀은 현장의 필수품이었어.
그 두개만 있으면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지.
그렇게 신이 나서 일을 했는데도 <춘향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무 돈도 받지 못했어.
다만 한 무더기의 의상만 손에 돌아왔지.
그 순간 퍼뜩 이 의상을 그냥 버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역사적 고증도 확실한 옷들이기에
충분히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했거든. 그래서 그 작품부터 의상을 모으기 시작했지.
그게 시작이었어. <성춘향>이 끝나고
신 감독이 신필림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더라구.
그땐 뭐 누구 소속으로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
그래서 얼른 그러마고 했지. 그래서 신필림 소속으로 찍은 작품이
같은 해 <연산군>(1961)과 이듬해 <폭군 연산>(1962)이야.
왜 두 작품만 찍고 나왔느냐, 돈을 너무 많이 주는거야.
다른 의상하는 사람들이 2만원을 받으면 나는 6만원을 주는 거야.
이게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구.
하루는 신 감독과 동향인 제작부 김씨에게 물었어.
“날 돈을 이렇게 많이 줘도 돼? 회사는 문제없어?”하니까
그이 하는 말이 “문제없긴요, 그냥 허세죠.” 그 말 듣고 바로 나와버렸어.
돈이 없어도 맘이 우선 편해야잖아.
헤진 옷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깔끔하고 빳빳하게 손질 되어 있던 옷이었습니다.
한복도 마찬가지지만, 군복은 시대별로 고증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시대가 돼버리니까 신경이 많이 가.
일본군이야 일본서적이 종로바닥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니까 쉽게 구해다 볼 수 있었고,
인민군은 중앙정보부에서 참고를 하라고 견본을 하나씩 보내줬어.
계급장이나 훈장 등을 확인하려면 반공회관을 찾았지.
러시아군이나 중공군도 다 그런 식으로 알아내야 했어.
지금은 전쟁기념관이 번듯하게 세워져서 전쟁 관련 복식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만 그땐 정보부나 육군본부를 가야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
서적에 관련해서는 남편의 도움이 컸어. 그이가 항상 하는 말이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과 같다”였거든.
특히 옷하는 사람들은 천만 잡고 있기 일쑨데,
머리가 텅텅 비어서 어떻게 시대에 맞는 옷을 짓겠냐고 꾸중도 많았지.
그래서 문양, 색깔, 세계의 군복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구해다 줬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른바 ‘건빵 주머니’라 불리는 바지주머니가 생기고,
양쪽 가슴에도 총알주머니가 달렸어.
목 위까지 채우던 칼라에서 양옆으로 45도가량 벌어지는 칼라로 바뀌었고.
전후를 기점으로 군복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
서로 다른 나라의 군복을 200∼300벌씩 지어도 어디 가서 공수해 온다는 생각은 못했지.
그저 손으로 일일이 짓는 거 외엔 머리 쓸 줄 몰랐어.
물론 어디 가서 구해지는 물건도 아니었고.
68년 최인현 감독의 <방울 대감>을 끝내고, 신상옥 감독과 <내시>를 찍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거야. 피곤이 잘 가시지 않고, 머리가 멍한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어.
하지만 타고난 근골만 믿고 병원 갈 생각은 안 했어. 결국 일이 터졌지.
크랭크인을 얼마 두지 않아 의상 만들 천을 고르는데 머리가 핑그르르 돌더니
그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거야. 뇌출혈이었던 거야.
그로부터 40일을 꼬박 병원 신세를 졌어. 사실 그 기간은 거의 기억에 없어.
중환자 독방에 30일을 누워 있었으니. 게다가 수술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나가서 횡설수설하고 사람도 몰라봤어.
의사들은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나봐. 나중에 퇴원을 하는데,
아무 약도 안 주는 거야. 내가 오히려 아무 약이나 조금 달라고 했지.
내가 결정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남편의 배려 덕분이야.
홀로 독방에 누워(그것도 돌아다니지 못하게 꽁꽁 묶인 채)
멍하니 횡설수설 하는 모습을 본 남편이, 그게 하도 측은해 보였는지
침대 두개 있는 방으로 옮겨 달래서 그 옆에 누워 나를 보살폈거든.
다른 방으로 옮기는 도중에 정신이 차차 돌아와서 사람을 알아보더래.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현장으로 돌아와선
바로 <내시>에 쓰일 금관조복 100벌을 만드는 데 착수했어.
주위에서 다들 말렸지만, 그게 빨리 낫는 길이라 생각했어.
좋아하는 일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가더라도 그게 낫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6년 이상 살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벌써 36년이 넘었으니, 세상만사 천운에 달린 거지.
74년에 이르러 김수용 감독이 김지미, 허장강 등을 고용해 대작 <토지>를 만드는 데 날 불렀어.
55년 문단에 진출한 박경리가 69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이 원작이었지.
19세기 말 경남 하동군의 만석지기 가문이 겪는 역사적 격동을 다루는 영화인지라,
의상만 해도 일본 군복, 농민옷, 양반 옷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어.
특히 김지미는 극 중에서 어린 서희부터 나이 든 서희까지 고루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나이에 따른 신체변화와 시대 변화를 고려한 의상을 만들어야 했지.
결국 공을 들인 대가로 파나마영화제에서 당당히 의상상을 거머쥐었어.
낡았지만 아주 깨끗하게 뽀송 뽀송하게 마당에 널려 있는 옷들.
<영화엔 주인공만 있는 게 아니잖아!>
<웰컴 투 동막골>의 의상이려나?
동막골에서의 강혜정이 입은 조끼, 대장금에서의 앞치마를 보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지금의 영화들과 팔순 넘으신 어르신의 매치가
그저 놀라 입이 안다물어지더군요.
<토지>의 의상상도 결국 김지미가 받았다는 것만 알았지, 뒤에 아무 말이나 보상도 없더라고.
하긴 국내 영화제만 해도 스탭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게 최근의 일인데.
그것보다 더 힘빠지는 경우는 주연급 배우 의상만 몇벌 만든 이가 의상부 대표로 상을 받을 때야.
<사의 찬미>(1991)와 <금홍아 금홍아>(1995)는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장미희와 이지은에겐 전속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그이들이 수상자가 됐거든. 온갖 엑스트라와 다른 주조연들 옷들은 내가 다 지었지만,
다 소용없더라구. 상을 타야 공이 인정되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해봐야…’란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꼭 힘빠지는 경우만 있었던 건 아냐.
1977년 변강문 감독과 <난중일기>를 찍으면서 의상일에 대한 참된 자부심도 느꼈으니까.
이순신 장군이 입었다는 갑옷을 지을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단 참고할 견본이 없다는 거야. 어떻게든 이순신 동상을 참조해
그럭저럭 모양을 흉내내긴 했는데, 이번엔 입체감이 잘 살지 않는 거야.
래서 급히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서 갑옷에 달 쇠미늘을 차례로 오린 뒤
한장한장 두드려 볼록한 모양이 나오게 가공했지.
그리고 양옆에 구멍을 뚫어 실로 엮으니 척 모양이 나오는 거야.
그땐 낚싯줄 같은 나일론줄이 없어서 그냥 무명실을 여러 줄 겹쳐 썼기 때문에
한컷 찍고나면 날카로운 비늘 가장자리에 실들이 뚝뚝 끊어져버려 다시 달아야 했어.
그러면 현장 한켠에 앉아 추운 바람을 피하느라
한벌은 입은 채로 다른 한벌은 바느질을 하곤 했지.
지금 영화 의상 연구하는 이들이 그때 갑옷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이 평가해주면
뿌듯한 마음이 들어.
80년대 들어 나에게도 영화를 보는 눈이 생겼달까.
단순히 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고르는 게 아니라
작품다운 작품을 찍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어.
돈만 주면 아무 영화나 찍던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남는’ 영화에 관심이 생긴 거지.
여러 명의 손님을 맞아
당신 집을 찾아 준 손님에게 어떻게 밥값을 내라고 하누?.... 하시며
일행이 내겠다는 식대를 완강히 거절하시던 어르신.
나에게 의상철학 비슷한 게 생겼어.
영화의상은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것.
영화의상이란 모름지기 유행을 선도하고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영화에서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액세서리를 하고 나왔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곤 하잖아. 그게 흥행한 영화라면 말할 나위가 없지.
근데 영화매체라는 게 만들어지는 시기와 유포되는 시기가 어느 정도 간격이 있거든.
그러니까 만들 당시엔 획기적이고 시대를 앞서도
만들고 나서 상영될 즈음이면 어느새 남들이 다 하는 한물간 패션이 되곤 했어.
그렇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 때 더욱 신경을 써야 했지.
앞으로 어떤 패션이 주목을 받겠구나 하는 시대감과 더불어
그 이후의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는 창조력이 함께 필요한 작업이었어.
<어우동>이 관객을 만나서는 ‘그저 그런 에로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극중 의상의 작은 변주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개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어.
어차피 영화는 하나의 그럴 듯한, 있음직한 거짓말이잖아.
따라서 의상도 정확히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기도 해야겠지만,
감독의 상상력과 의상장이의 창조력이 만나 전혀 새로운 복장을 선보일 수 있는 거겠지.
고증이 필요하고, 또 고증을 받아야만 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영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간의 작업을 통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어.
실제로 사실을 중시하고 조금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을 찾는,
예컨대 임권택 감독이나 이두용 감독, 배우 김승호씨 같은 경우에는
나와 작업하는 것을 기꺼워하고 좋아했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굳이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의상부와 일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대충 손바느질이나 익히고, 소품이나 만지다 온 젊은 사람들도
흉내는 낼 수 있었으니까. 까탈스런 잔소리나 의견 대립 없이
그저 감독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기도 할 테고.
떠나는 객들에게 식사 대접도 모자라 나물 한 봉지씩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어쨌거나 내 안의 그런 신념과는 상관없이 상황은 자꾸 어려워져만 갔어.
지금 생각하면 희안하게도 그런 고된 시간들이 그런 신념을 더욱 부추긴 것 같기도 하지만.
87년 또 한번의 화재를 겪어 경황이 없으면서도
찍고 있던 <연산일기>를 소홀히할 수 없었어.
오랜 영화 지기인 임권택 감독이 의뢰한 작품이기도 하고,
유독 연산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손에 자주 떨어져
‘더 낫게 만들어야지’ 하는 조바심도 있었고.
뇌출혈로 병원 신세를 질 때 얻었던 빚을 채 갚지도 못했는데,
의상을 제대로 짓겠다고 또 빚을 냈어.
영화가 잘 되면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겠지.
그런 바람 때문인지 영화가 개봉되고 많은 호평 속에 대종상 네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이뤘어.
그 영화 덕에 감독이든 배우든 다 한몫 단단히 잡았겠지만,
나는 여전히 예외였어. 영화를 시작하면서 받은 수표 한장을 제외하고
영화가 개봉된 뒤, 상을 받은 뒤 내게 온 몫은 단 한푼도 없었으니까.
조금도 청산되지 않은 빚을 고스란히 지고
한 동네에서 버티다 지쳐 다른 동네로 떠나는 ‘이사 전쟁’도 여전히 계속됐지.
그렇게 상황이 어려웠어도 현장을 떠날 수는 없었어.
이유는 한 가지야. 내가 바보라서 그래.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다 떠났겠지만
내겐 천형처럼, 천직처럼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자리였어.
마당에 탐스럽게 피어 있던 함박(작약)꽃.
같은 해 찍은 <사의 찬미>는 거대한 제작 스케일로 일단 화제를 모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의상비만 1억5천이라는 거야.
조연들 옷을 지었던 내가 받은 돈이 3천만원이었으니까
장미희 옷을 맡은 이가 무려 1억2천을 받았다는 얘기지.
이걸 능력 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배우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기분이 씁쓸하더라고.
그래도 김호선 감독 사정을 뻔히 아는 내가 돈 때문에 투정을 부릴 순 없었지.
나중에 그해 <사의 찬미>를 비롯한 세개 작품이 의상상 후보로 올라가는 바람에
시상식엘 몇번 갔었는데, <사의 찬미> 시상식장에 장미희 옷을 지은 여자가 앉아 있는 거야.
처음엔 ‘설마 회원도 아닌 이가 상을 타겠어. 그냥 자리를 빛내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식장에 그녀의 이름이 불려지니까 꼭 배신당한 기분이더라고.
물론 그녀의 솜씨로 여주인공이 맵시있게 표현된 건 인정하지만,
영화 전체의 의상을 만진 나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그 일이 있고 나서 김 감독이 미안했던지 춘사영화제에서 의상상을 주도록 애를 썼나봐.
난 그래도 지금껏 한번이라도
“그때 왜 회원인 나는 푸대접하고, 비회원에게 상을 주느냐”는 소리 해본 적이 없어.
아쉬운 소리만큼 하기 싫은 게 있을까. 안 주면 그만인 거지.
그때 내가 속으로 그랬지. ‘그래, 상은 니가 타가라. 일은 내가 다 할게’라고.
한진영화사에서 찍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몬트리올영화제와 백상영화제 등에서 상을 휩쓸면서 91년이 끝났지.
92년도에 가서 제일 먼저 받은 시나리오가 최영철 감독의 <백백교>야.
지금도 내 필모그래피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사실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야.
찍다가 돈이 없어서 중간에 엎어진 영화거든.
그래서 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뭣해.
고 다음에 찍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장군의 아들3>(임권택),
<하얀 전쟁>(정지영)이야말로 96년 <애니깽>(김호선)으로
작품활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맡은 작품들 중 백미라고 할 수 있어.
<장군의 아들>은 30년대 종로 거리가 배경이라 한복과 양복이 한데 어울려 등장했어.
양복의 경우, 내 전공이 아니니까 주로 사서 쓰거나 양복점에다 맡겼지.
극중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경우 실제 복장보다 더 화려하게 각색이 됐어.
원래 기생들은 관에 속한 몸이라 일종의 유니폼이 정해져 있거든.
나라에서 허가를 받은 차림새란 게 고작 남색 치마에 흰 저고리가 다야.
우리가 알고 있기론 기생들 옷이 화려하고 다양할 것 같지만 그게 정석이라고.
그치만 감독들은 밋밋한 그림 대신 변화를 주고 싶어하지.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영화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기생들이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었지.
그건 무당도 마찬가지야. 굿을 할 때나 오색도복을 입는 거지
평상시엔 기생과 같이 남치마에 흰저고리야.
임 감독의 경우, 앞서도 얘기했지만, 아주 별나거나 튀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옛날에 실제 입었던 옷차림,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쓰는 감독이었어.
기생의 옷차림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해 변형됐지만,
다른 배역의 옷들은 거의 실제 그대로의 옷차림이 재현됐지.
그리고 항상 자기의 바람에 부합하는 의상들을 두고 칭찬했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컸어.
일도 많고 그래서 고생도 많던 92년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하얀 전쟁>이었어. 그해의 대미를 장식하기도 했던
정지영 감독의 이 영화는 베트남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됐어.
그래서 난생처음 베트남에 갔지.
떠나기 전 혹시 물자가 부족할까 대부분의 의상(거의 군복)은 만들어서 갔거든,
거기다 실이랑 미싱이랑 단단히 챙기니 마음이 든든했어.
근데 막상 도착하면서부터 일이 서서히 꼬이기 시작하는 거야.
시발은 미군복에서 시작됐어. 감독이 준비해간 미군복에서 작업복이 빠졌다는 거야.
촬영장에 의상부라곤 나밖에 없고, 촬영을 지체할 수는 없고,
어떻게든 일손부터 구해야 할 판국이었어.
그래서 일단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으로 갔지.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어.
근데 아무리 가도 사이공 시장이 안 나타나는 거야.
아마 한나절은 꼬박 달렸을 거야.
시장이라도 부르기도 뭣한 작은 사람들의 무리가 나타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거기 모인 사람들 중 반은 거지거나 도둑이었어.
다행히 현지 여성들을 소개해주는 사람을 만나 일손을 대충 구했지.
의사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옷이 잘 만들어질 리가 없지.
나중에 옷을 입은 배우들이 잘 맞지 않는다고 투덜댈 땐
고만 마음이 팍 상하기도 했어.
고생한 만큼 일이 잘 안 풀릴 때의 심정을 그들은 알까 하고.
안성기 하니까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 분장한다던 한 여자아이가 내 앞에서
“안성기 선배님 같은 분과 일하게 돼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거야.
그 말이 어찌나 내 귀에 거슬리는지,
분장이나 의상장이에게 배우란 단지 옷을 입히는 마네킹이나 도구인 거지.
그런 정신이야말로 프로 정신인 거야.
배우가 유명하면 영광이고, 아니면 뭐라는 소리야.
그냥 배우는 배우일 뿐이고, 동료고, 작품세계를 연출하는 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놓쳐선 안 돼. 의상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야.
공사다망한 92년이 지나고 93년이 왔지.
그해 가장 마지막으로 내게 온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서 송화의 붉은 저고리를 잊을 수 없어.
임 감독이 두고두고 칭찬하던 팥색 저고리는
실은 두루마기를 뜯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서 만든 거야.
옛것을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그 색깔과 질감에 호감을 나타낼 수밖에.
경청하는 바느질 팀 젊은 선생님들.
(저는 사실 글을 옮기지만 부끄럽게도...
말씀중 일 때 일행의 안전을 책임졌기에 몇일 몇밤의 강행군 일정속에 있어
턱없이 부족한 잠에 계속 눈을 감은 채 간간히 잠을 쫓아야 했던 송구함이 있습니다!)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정진우 감독 회고전에 갔더니
한 학생이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구.
그래서 날 아냐 했더니 여기에 실린 글을 읽었다나.
자기도 영화의상에 관심이 있어 지금 신인 감독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다른 말은 해줄 게 없고 딱 두 마디만 당부했어.
대본은 반드시 10번 이상 읽을 것,
매일 일지를 쓸 것(일기가 아니라).
대본은 아예 달달 외울 정도가 돼서 감독이 지시하는 것만 들어도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알아야 하고,
일지를 씀으로써 각 장면에 쓰이는 옷 이름과 종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해.
물론 밥을 굶어도 영화판에 3년은 붙어 있을 각오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 두 가지만 기억하고 실천해야 의상을 만지는 기본이 완성되는 거지.
이 글을 읽는 의상학도들도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마음에 새겨둬야 해.
작별의 시간!
어느새 마지막 글이라니
그동안 해줘야 할 말 대신 내 푸념이나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고,
내 삶을 이렇게나마 정리한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 과연 도움이 될까도 싶어.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몸이 말을 듣는 동안까지
계속 의상을 만지는 것과 맘 맞는 의상쟁이들과 함께
애꿎게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영화의상을 한데 모으는 거야.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창고를 내어서라도 그런 의상들을 건질 수 있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지. 그저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성 물건이 아니라
두고두고 다른 영화에 활용하는,
시대와 극의 분위기에 따라 헌 의상을 적절히 고쳐 쓰는
그런 영화풍토를 만드는 게 나의 바람이야.
그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연락해.
그리고 지금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구술 이해윤/ 1925년생·
<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서편제> <금홍아 금홍아> <하얀전쟁 ><친구> 의상 제작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출처 : | 권유진의영화의상 | 글쓴이 : 임승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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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문을 보시고 싶으실 때는 다음 카페의 위 출처에서 확인 바랍니다.^^
105세의 어머님을 모시고 계시다고 합니다.
2007년 예술인의 어머니상에 이해윤님의 어머님께서 선정되셨습니다.
권유진님은 이해윤님의 자제분으로서 대를 잇는 영화의상을 하고 계십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시면서
후학들에게 주시는 가르침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바람이라고 하시는 활용을 하기 위한 영화의상 전문 박물관 건립이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기원드려 봅니다.^^
첫댓글 히야~~~작년인가 그저 그대가 '바느질'...어쩌고 할 땐 이리 어마어마한 어르신과의 조우는 상상도 못했네요.긴 글 읽어 내려오며 몇번을 다시 오르내리다가 콕 콕 박히는 단어 몇개,...'있음직한 거짓말' '어르신''영화의상' '105세의 어머님'..그리고 파라솔 밑의 웃음띤 그대 얼굴,......같은시간 다른 삶을 사는 멋진 분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설레임같은 흥분을 느끼며.
^^ 지도 압도되어 뿌렸기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른 바느질 팀 샘들 초상권땜사 차라리 이 몸 얼굴 나온 걸루 다 방문 분위기 전합니다.^^
큰 차이는 없지만 < 단 한 번이라도 비록 지면이라도 꼭 만나게 해 드리고픈 님.> 으로 정정햇는데요. 스크랩 글이라 여그에 이래 올리고 갑니다. 좋은 월욜 저녁!! 행복하시고 신나는 일주일 맹글어요.^^
한없이 한없이 제 자신이 작아짐을 느끼면서 ........겉멋만 가득 든 제 자신을 반성하면서.......
아이고~!!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열씸이실 걸로 보여지던 님!( 제가 직접 뵌 적이 없기에...^^) ... 우리들 여성의 강인함, 인내하시며 결국엔 이루어 내시는 어머니를 보고 선배를 만난 겝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 후배들! 좀 더 현명하게,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크게, 좀 더 넓게, 좀 더 멋지게, 좀 더 좋은 세상의 밑거름, 견인차되는 모습으로 가꾸는 게지요.^^ 일선에서 매일을 노력하고 계실 님! 아자! 아자!^^
두 눈 크게 뜨고 귀도 쫑긋,입은 한껏 벌린 채,....그저 경외심으로 ~~! 나중에 몇번이고 다시와 읽어 볼까 합니다. 이 귀한 만남,..매직님의 귀한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저 경외심으로...^^ 감사합니다. 멋진 인생 선배를 만나 가지는 경외심! 함께 해 주심에 감사드려요.^^
후아~~ 아침에 소화(?) 다 하긴 너무 벅찹니다,..정신 수습하여 다시 정독,안아갈까 합니ㅏㄷ.
헙~! 어마어마(?)한 분을 이렇게 영접?!.......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