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자전거 여행
유 형 오
대전 주변에서만 자전거 라이닝을 하니 싫증도 나고 따분하여 바다 주변을 달려보자고 목적지를 찾다가 남해군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차량도 안 다니고 도로 옆이 바다 이니 경치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마침 지인 버스가 남해 대방산을 간다고 하여 “자전거를 가져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창선·삼천포대교 전에 하차하여 자전거를 조립 후 남해로 출발한다. 철 구조물로 만들어 놓은 다리는 마치 어릴 때 보았던 로봇 태권브이처럼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가 나를 환영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자전거로 달리니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바닷가 구석구석을 볼 수 가 있었다. 차 안에서는 느끼지 못 하는 비릿한 바다 냄새와 하늘을 나는 갈매기와 바다 속 물고기들의 대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창선 다리로 들어서니 거센 물살 위에 쇠 파이프를 바다에 단단히 박아 놓고 여기에 묶은 그물로 물고기는 잡는 죽방렴이 있었는데, 예전엔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족마을 앞에 있는 작은 섬 입구에 죽방렴 체험 장이라고 쓰여 있었고 작은 다리가 있었다. 지족마을 어르신들이 모여서 굴을 까면서 감을 먹고 있다가 사진을 찍자고 하니 얼굴을 가린다.
“예쁜 얼굴 왜 가려요?”하니 “네가 잡아 갈까봐”한다. “내가 열(10)살만 더 먹었어도 어르신과 여기서 사는데”하니 “이 넘, 미친 넘이네” 굴을 까다 말고 모두들 박장대소 하며 웃는다. “네 오늘 잘 몬 걸렸다, 우리 행님이 여기 대장 욕쟁이 할멈이거던” 감을 주면서 맛을 보라고 한다. 감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와, 나를 안 데려 가노”하여 “십(10)년 뒤에 데리러 올게요!” 하니 모두들 웃으면서 “잘 가레이” 한다.
맑고 투명한 바다는 해안선 도로를 달리는 나의 가슴 속까지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길옆에 낯익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 “환상의 커플” 촬영지라고 한다. 항도마을에 들어서니 눈에 익은 모습이 펼쳐지고 마을 방풍림에는 색깔이 벗겨진 나무 의자 하나만 외로이 있었다. 홀로 앉아 눈을 감으니 드라마 주인공인 강자와 상실이가 뛰어다닌다. “꽃을 좋아하고 마음이 순수한 여자, 재물이 많고 똑똑한 여자” 이들과 같이 잠시 놀다 갈까?
회사에서 나오니 모든 일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힘들고 어려우면 안 하면 되고, 쉽고 머리 아프지 않은 것만 찾게 된다. 눈에 안 보였던 게 보이게 되고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과도 흉허물 없이 지내게 된다. 그런데 한번 만나 골치 아픈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된다. 부탁 할 일도 없고 받을 일도 없고 너무 이기적으로 변한 게 아닌 가 해 약간 걱정도 되지만 “머리 맑은 일만 하고 가도 아쉬움이 남는 인생인데 괜히 일을 만들지 말라”는 집사람의 신신당부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집사람에게 의지하여 하루 세끼 해결을 해야 하는 신세이니, 말 잘 듣는 모범 남편으로 자연히 바뀌게 되었다.
힘으로 넘치는 젊은 시절엔 상실이 캐릭터가 좋았는데, 힘 빠지고 나이가 드니 강자 캐릭터가 더 좋아졌다. 꽃을 좋아하며 항상 머리엔 꽃을 꽂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하얀 눈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겉치레의 아름다움보다 속마음의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강자” 잠시나마 이렇게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뛰어놀다 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오늘 만난 지족마을 어르신들과 길가에서 스친 사람들, 파란 하늘과 해안선을 배경으로 한 그림 속의 주인공이 나란 걸 느끼니 피로도 말끔히 사라진다. 다만 혼자서 이 경치를 즐기기에는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 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또 항구 마을에서 보지는 못하였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잠시 옛날 일을 떠 올리며 추억 속에 잠기기도 하였다. 홀로 자전거 여행이란 이렇게 기억 속에 묻힌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며 잠시나마 만나는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기도 하여 피곤함도 잊게 만들어 준다. 다음 남해 여행 때는 꼭 동행을 데리고 와 이 풍경을 같이 즐기겠다고 다짐하며 약속 장소에 다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