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世 益菴公(諱;萬和)派
耳溪集卷三十二 / 墓誌銘
內子貞敬夫人東萊鄭氏墓誌銘 幷序 a242_014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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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敬夫人鄭氏。東萊大姓。中興賢相文翼公光弼之後。金川郡守錫耇之女。母曰楊州趙氏。外祖都事明彬也。夫人十七。歸于我。我賦命險薄。早失怙恃。上奉
繼妣。克誠克敬。恩禮無間。和氣融如。家貧承三世祀。蘋蘩孔潔。烝嘗無缺。人稱爲孝婦。少居窮約。勤苦成家。佐我無扊扅之憂。晩受榮祿。不變素履。使我全羔羊之節。人稱爲令妻。育子女。慈與義幷。衣食廑免饑寒。而敎誨至於成立。人稱爲哲母。處妯娌不有物我。庭無間言。待媵妾。視同私親。感服出於至誠。下逮家衆。愛戴如父母。人服其壼範。天姿溫靚謙順。精神內蘊。擧止端凝。平居罕言笑。喜慍不形。事有甚憂。無戚戚容。人有可怒。未嘗大聲以色。人服其雅度。耿介修潔。絶無嗜好。視外物泊如也。從余州藩。屢享厚祿。而
在官無私儲。歸家無剩衣。服飾菲樸。無異寒素。人服其淸操。性喜施與。親戚隣里。有急必控。有求必應。無一毫見眉睫。人服其厚德。享年七十有五。受封誥至極品。君子偕老。子孫滿前。爰曁曾孫。亦皆英秀。人歸以完福。嗚呼。夫人德行。可謂備矣。祿命可謂豐矣。浩然乘化。後死者斯可以無憾焉。曩余歸自關西。猥提文衡。兒子樂浚登第。夫人蹙然有懼色曰。門戶盈矣。盍歸乎休哉。余曰。然。子誠知吾心矣。卽上乞骸之章。優游晩境。庶免大戾。此尤閨閤之高識。余常嘆服者也。老夫平生。無偶於世。而惟於室家之內。有此一樂。
今焉長已。寧不痛哉。先述德美。納于堋中。聊敍結髮之情。知心之誼而已。夫人生於癸卯十一月二十二日。終於丁巳十月二十五日。葬於天安郡南日峰山壬坐之岡。銘曰。
家人有恒。婦道乃昌。歸妹尙德。娣袂之良。禮稱如賓。冀氏以揚。詩咏小星。閨化用彰。溫粹之容。玉如虹光。和順之性。鳳鳴鏘鏘。允矣夫人。衆美咸章。地秘名山。哲媛是藏。出日之峰。懸燈之岡。半坎虛右。面勢孔陽。月維嘉平。日屆勾芒。千歲永托。卜云其臧。靈氣攸鍾。山明水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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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자 정경부인 동래 정씨 묘지명 병서 〔內子貞敬夫人東萊鄭氏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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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부인(貞敬夫人) 정씨(鄭氏)는 동래(東萊)의 대성(大姓)으로, 중흥(中興)의 어진 재상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후손이자 김천 군수(金川郡守) 석구(錫耇)의 딸이다. 모친은 양주 조씨(楊州趙氏)이고 외조부는 도사(都事) 명빈(明彬)이다. 부인은 17세에 우리 집에 시집왔다.
나는 타고난 운수가 험하고 박하여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다. 부인은 위로 계비(繼妃)를 정성과 공경으로 모시니 시어머니의 은애(恩愛)와 며느리로서의 예의가 간극이 없어 화목한 기운이 가득하였고, 가난한 집안 살림에 3대(代)의 제사를 받들며 제수가 매우 정결하고 제사를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효성스러운 며느리라고 일컬었다. 젊었을 때 곤궁하게 살며 고생스럽게 집안을 이룩하여 내게 염이(扊扅)의 근심이 없도록 도와주었고, 만년에 영화와 복을 받고도 소박한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아 나로 하여금 고양(羔羊)의 절도를 온전히 지키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훌륭한 아내라 일컬었다. 자녀를 기를 때에는 자애와 의리를 함께 썼고 의복과 음식은 추위와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로 하였으며 장성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우치니, 사람들이 현명한 어머니라고 일컬었다.
동서를 대할 때 나와 남의 구분을 두지 않아 가정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고 잉첩(媵妾)들을 대할 때에는 자기 친척과 똑같이 보니 잉첩들이 지성(至誠)으로 감복(感服)하였으며 아래로 일가(一家)의 권속(眷屬)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받들었으니, 사람들이 그 규방(閨房)의 법도에 탄복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고요하며 겸손하고 유순하며 정신(精神)이 내면에 깊고 행동은 단정하였다. 평소에 말하거나 웃는 일이 드물고 기쁨이나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아서, 심히 근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지 않았고 노엽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소리를 높이거나 낯빛을 바꾼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단아한 풍도에 탄복하였다. 꼿꼿하고 정결하였으며 기호(嗜好)가 전혀 없어 외물을 봄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었다. 나를 따라 외지로 와서 여러 번 두터운 녹봉을 누렸으나 부임지에 있는 동안 사적으로 축재(蓄財)한 것이 없었고 집에 돌아올 때 여벌 옷이 없고 차림새도 단출하여 가난한 선비 집안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청렴한 몸가짐에 탄복하였다. 성품이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척과 이웃에 급한 일이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돕고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응하면서 터럭 하나만큼도 아까워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후덕함에 탄복하였다.
향년 75세로 봉고(封誥)를 받아 가장 높은 품계에 올랐고 남편과 해로하였으며 자식과 손자들이 눈앞에 가득하고 증손들도 모두 빼어나니, 사람들이 완전한 복이라 인정하였다. 아! 부인은 덕행을 완비하였다고 할 만하고 받은 운수가 풍후(豐厚)하다고 할 만하며, 이제 구속됨 없이 자유롭게 조화(造化)를 타고 세상을 떠나니 뒤에 죽을 내가 아무런 유감이 없다.
옛날에 내가 관서(關西)에서 돌아와서 외람되이 문형(文衡)을 잡고 있을 때 아들 낙준(洛浚)이 과거에 급제하자 부인이 근심스럽고 두려워하는 낯빛으로 “집안의 복록이 가득 찼으니 어찌 돌아가 쉬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소. 당신은 참으로 내 마음을 아는구려.”라고 하고 바로 사직하는 소장(疏章)을 올리고 만년에 여유롭게 노닐어, 큰 죄과는 거의 면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부녀(婦女)로서 더욱 높은 식견으로, 내가 항상 탄복하던 것이다. 늙은 남편은 평생토록 세상에서 짝이 없었으나 오직 집안에서만은 이 즐거움이 하나 있었건만 지금 영영 끝났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먼저 미덕을 서술하여 광중(壙中)에 넣어 애오라지 부부의 연을 맺은 정(情)과 마음을 알아주던 정의(情誼)를 펼 뿐이다. 부인은 계묘년(1723, 경종3) 11월 22일에 태어나 정사년(1797, 정조21) 10월 25일에 삶을 마쳤고, 천안군(天安郡) 남쪽 일봉산(日峰山)의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가인이 떳떳함이 있으니 / 家人有恒
아내의 도가 비로소 창성하고 / 婦道乃昌
귀매에 덕을 높이면 / 歸妹尙德
잉첩의 소매가 아름답네 / 娣袂之良
예법에 손님과 같다 칭하였으니 / 禮稱如賓
기씨가 이로써 드날렸고 / 冀氏以揚
시에서는 소성을 읊었으니 / 詩咏小星
규방의 교화가 이로써 드러났도다 / 閨化用彰
온화하고 순수한 용모는 / 溫粹之容
무지개 빛깔 같은 옥이요 / 玉如虹光
화락하고 손순한 성품은 / 和順之性
쟁쟁하게 울리는 봉황 울음소리라 / 鳳鳴鏘鏘
진실로 부인다웠으니 / 允矣夫人
많은 미덕이 다 드러났고 / 衆美咸章
천지가 명산을 감추어뒀으니 / 地秘名山
현철한 여인을 여기에 모셨네 / 哲媛是藏
해 뜨는 봉우리요 / 出日之峰
등불을 걸어 둔 언덕이로다 / 懸燈之岡
반 개의 구덩이 오른쪽을 비워두니 / 半坎虛右
면세가 매우 양지바르도다 / 面勢孔陽
달은 가평이요 / 月維嘉平
날은 구망이라 / 日屆勾芒
천년토록 영원히 맡기노니 / 千歲永托
점을 치매 길하다 하였네 / 卜云其臧
영험한 기운 모이는 곳이니 / 靈氣攸鍾
산색은 밝고 강물은 길게 흐르네 / 山明水長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임영걸 (역) | 2021
註;본란 제 150호와 관련됩니다. 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되어 2024.2.1.자로 공시되었기 재차 올립니다.
첫댓글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 남겨봅니다
홍양호 부인 번역문 감사합니다. 자료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