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려울 때 불러모으시는 하느님
1980년대는 개인용컴퓨터가 나오기전이었지요 간혹 사무실에는
단말기라는 것을 사용했지요 미국에서는 인터넷망이 전세계적으로 깔려있었고요
그런데 지금과 같은 윈도우환경은 아니었기에 단말기를 설치한다든지 아니면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명령어를 알아야 했었지요 국내에서는
기업단위로 인트라 망이 개설되었지만 그 속도는 아주 느렸지요
그러던중에 한국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기업을 중심으로 이 전용선망에 접속할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부담없이 그 망을 이용할 수가 있었고 그때에 지금의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이망을 이용해서 무료로 제공했는데 그 망안에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하였지요 때로는 이들 모임이 오프라인모임이라고 해서 행사도 했었는데
한국경제신문사건물에서 행사장과 행사비용을 부담하면서 유치를 했었지요
그래서 한국경제신문통신망을 사용하는 인구가 늘어났지요 그때에는 일반인에게는
전용선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다들 전화선망을 이용했었지요 처음에는 전화선망은
접속료만 받았기에 하루종일 물려놓으면 아주 저렴하게 되었지요
여기에 천주교친교를 목적으로 모임이 생겼지요 서울서강대학 예수회 마리아니스트
성바오로수녀회와 남자수도회의 수녀님 수사님 신부님과 서울지역의 대학생등
청년들이 함께 했는데 저는 30대후반에 그모임에 참여 할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수도회 즉 수녀원이나 남자수도회도 자주 갔었지요
남자들만 사는 남자수도회는 먹을것이 그다지 풍복하지 않았지요
수녀원을 방문하기 전에는 남자수도회에만 갔었지요 그런데 성바오로딸수녀회의
어느 수녀님이 우리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셔서 그곳에 알려졌지요 지금은 인터넷사이트
에서 책등 여러 가지 소개글도 올리지만 그당시에는 이런분야에 아주 미약했지요
그래서 원장수녀님이 한날 저희를 초대했었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남자수도회만 생각해서
수도회민폐를 끼치지 않을려고 수녀원입구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갔는데 의외로
여러 가지 음식을 충분히 받았지요 그리고 원장수녀님을 모시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알려드리고 돌아왔지요 돌아오는길에 선물도 받았지요 원장수녀님이 ‘우리는 이것밖에
드릴것이 없내요.’하면서 좋은 책을 여러권을 주셨습니다
그때 같이 다니는 자매님들중에 수녀원에 들어갈려는 분도 있어서 같이 수녀원도
찾기도 하였습니다. 수녀원은 성소자들을 위한 소개모임도 있고 또 개별적으로 상담도
해주셨습니다. 그때에 중견수녀님이 주로 모임에 오셨는데 그때 그수녀님은 수녀원의
주방일을 맡고 계셨지요 수녀님은 다른수녀님도 돌아가면서 이일을 맡는다고 하셨지요
1990년 2000년으로 흘러가면서 성소자수가 줄어들어서 수도회건물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요
마리아니스트라는 수도회는 남자수도회 여자수도회 그리고 재속회같은 평신도모임이
있었지요 평신도모임도 수도회처럼 입회기 청원기를 거쳐 종신서원를 하게되었지요
가끔씩 수사님이 오셔서 강의도 해주시고 매주 모임을 갖고 한달에 한번은
수도회에서 전체가 모여서 그날 음식당번을 맡은 팀에서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마련
같이 나누워먹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다니는던 중에 그곳을 떠나서
청원기까지 한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되어서 그 수도회 수사님이나 신부님이
저의 본당에서 하는 여러 가지 세미나에 초빙되어서 강의도 해주셨고 그수도회에
있는 피정의 집에서 1박2일 레지오교육행사도 할 수가 있었지요
그곳에는 매달 소식지를 발간해서 보내주시기도 하였지요
지금도 그때 만난 몇분의 수사님과 전화통화는 하고 있습니다. 수도회가 마포근처 망원동
골목에 있었는데 지금은 강화도나 고양시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제가 서울에 가더라도
찾아뵙기가 어려웠지요.. 우리팀은 몇 명이 안되었는데 수도원에서 수사님이 방안으로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들어오셔서 방에 뉘우고 그 주위를 촛불을 밝히고 주변을 우리들이
둘러앉아서 묵상하고 기도를 하였지요
그때에는 합정역에서 불과 20분남짓절어가거나 아니면 마을버스를 타면 10분에
도착할 수가 있어서 수시로 방문했었지요 때로 같이 식사하기도 하고 어떨때에는
수사님이 성무일도를 바치는 시각이 될 때에는 같이 들어가서 바치기도 했었지요
남자수도회큰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성모의 밤행사도 하고 겨울 추울 때 성탄성야는
수도원건물안에서 하기도 하였지요 참으로 평화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때에는 수사님이 타자기로 쳐서 복사해서 나누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서강대학 성당옆에있는 방에서 모임도 하고 때로는 미아리에 있는
수녀원의 시설을 이용해서 하루 피정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부 직장을 다닌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울대 연세대학등 좋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어있습니다
그러던중에 통신망이 유료화가 되면 우리모임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갔지만
그래서 우리는 통신모임을 하지않더라도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 여기저기서
만남을 했기 떄문에 별 지장을 받지않았습니다. 그때에 서울교구에서 청년성서모임이
소개되었고 창설20주년기념식을 준비했었지요 먼저 거기에 참여한 젊은이가 소개를
해서 우리공동체에 2팀이 생겼지요 다들 학생들이라서 연수를 방학때 받았지만
저는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주말이 가능한 가을에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그곳에서 몇동안 머물면서 봉사도 하였습니다. 창세기뿐만 아니라
탈출기 그리고 마르코까지 하게되었고 서울교구지도신부님께 알려져서 직장인을
위한 수련회에서 봉사도 할 수가 있었지요 한달동안 매주 동성고등학교별관에서
모여서 프로그램을 짜고 같이 나눔도 하였지요 이를 하면서 일년에 2차례씩
주말에 봉사자제교육도 받았고 의정부 한마음수련장이나 아니면 부천의 가톨릭대학(
통합이전에는 성신여대라고 했음)수련관에서 봉사자들을 위한 피정에 꾸준히
참여하였지요 그때 많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본당에 들어와서 청소년분과를 맡고 교구교육이나 피정등에 참여했지만
저에게 소중한 추억은 수도원에서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우리나라 천주교
청년들을 위한 대안은 수도회뿐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젊은 수녀님 때로는 나이드신 수녀님을 교구행사에
파견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도회와 성서형제회와의 연결고리가 될만한
어떤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니스트가 망원동안에 있을때에 그 골목안에는 재래시장이 있었지요
모인사람들을 조별로 나누워서 각자 시장에 가서 그날 해먹을 식자재도 구입하고
같이 요리하고 나누워먹으면서 서로 친교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좋은 추억이
되었지요. 지금도 이런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도원이나 피정의집에서 그날 묵상한 것을 쓰게한후에 이를 제출하면
며칠후에 집으로 보내주시곤했었지요 참으로 제 신앙의 큰 밑그림이 되었지요
서울동성동에 자주 갈때에는 맞은편 서울의대병원쪽 골목안 조그마한 수녀회피정의
집에서 1박2일을 청년들과 함께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청년들중에는 사제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나왔는데 사제가 되지 못해서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요즈음은 젊은이의 수가 줄어서 이마저 어렵겠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들어서 많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힘들때에 우리를 불러 모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