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서라-젊은 날의 도전에서 배운다> 화광신문 제1467 (2022.10.21)
제21회 청년부의 문화운동
학회를 따라 하는 시대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이 청년부 실장 시절, 시찰로 방문한 행사가 있다.
1958년 5월 24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개최한 '제3회 아시안 게임'이었다.
이 대회는 4년에 한번 개최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포츠대회다.
이날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제3회 아시안 게임을 보기 위해, 청년부 간부 두세명을 데리고 국립경기장에 갔다. 앞으로 있을 학회 청년부의 체육제, 문화제에 참조하려고도 생각한다…." "눈부신 젊은이들의 열과 힘 그리고 기예." "내년에는 반드시 청년부에서 개최하고 싶다."('젊은 날의 일기4')
동행한 간부 중에는 초대 음악대장 등이 있었다. 대회를 관전한 선생님은 "머지 않아, 무엇이든 학회를 따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강한 확신과 깊은 각오가 담긴 말이었다.
학회 문화제의 연원은 1954년 11월 7일,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니혼대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세기의 제전'이다. 청년부가 최초로 주최한 체육대회로, 이 문화제를 기획한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었다.
당시 이사실(理事室)은 처음부터 문화제 개최에 찬동하지 않았다. 그해 5월 6일, 이케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음악대를 발족했으나 그 과정에서도 선배 간부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뛰어난 종교가 있는 곳에 반드시 위대한 문화와 예술이 탄생한다. 진정한 인간문화의 창조는 학회의 사명이다.'
음악대 발족과 '세기의 제전'을 개최하려는 마음을 이해한 단 한 사람은 바로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이었다. 은사는 "장래를 위해 의미가 있을 테니 하라"고 애제자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어느 간담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청년부의 문화운동 의의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청년은 신심(信心), 신심이라고 말로만 외쳐서는 정체되고 맙니다. 학회는 신심을 근본으로 한 폭넓은 문화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도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실력이 늘었군요"
이케다 선생님의 열의로 실현된 '세기의 제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젊은이의 제전'이라는 이름을 내건 체육대회가 각 방면에서 개최돼 화려한 춤과 카드섹션 등도 도입했다. 장년부와 부인부도 적극적으로 응원해, 청년부의 문화행사를 통해 인재를 확대하는 '창가의 전통'이 구축됐다. '젊은이의 제전'은 '사제(師弟)의 원점'을 새기는 역사적인 행사가 됐다.
1957년 9월 8일, 요코하마 미쓰자와육상경기장에서 개최한 이 문화제에서 도다 선생님은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했다.
그러한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은 문화운동에서 큰 역할을 맡은 '음악대'와 '고적대' 육성에 주력했다.
1954년 5월 6일에 발족한 음악대는 사흘 뒤인 9일에 처음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가운데 일본 전국에서 모인 청년 5000명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다. 당시 청년실장인 선생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지휘를 했다.
음악대가 사용한 악기는 빌려온 것이었다. 선생님은 '광포(廣布)의 악웅(樂雄)'을 일류로 성장시키기 위해 악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음악대에 세심한 조언을 계속 보내며 연주곡과 연주형태, 복장 등을 거듭 고민하고 연구했다. 고적대는 33명으로 구성돼 1956년 7월 22일에 결성됐다. 선생님은 '세계제일의 고적대로 성장하라'는 기대를 담아, 사비를 들여 관악기와 드럼을 증정했다.
이듬해 1957년 10월에 개최한 제1회 고적대연수에서 '태양처럼 밝고 달빛처럼 맑은 고적대가 되어라'는 지침을 보냈다.
"실력이 늘었군요."
연습장소를 방문한 선생님은 '평화의 천사'들을 계속해서 격려했다.
1958년 3월 16일 '3·16'의 광포후계 의식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도다 선생님은 몸이 현저히 쇠약해지고 있었기에 거가를 타고 회합장소를 떠났다.
이케다 선생님은 참석자를 배웅하고, 고적대와 음악대가 각각 환송의 선율을 연주했다. 배웅을 마친 애제자는 은사가 들을 수 있도록 음악대에 연주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때 연주한 '성락추풍오장원'이 도다 선생님이 들은 마지막 곡이 됐다.
이듬해 1959년 4월, 도다 선생님의 1주기 법요에서 음악대와 고적대는 이 곡을 시작으로 한 연주를 은사의 묘소에 바쳤다.
성묘가 끝나고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대, 고적대의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는 동안에는, 창가학회는 문제 없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만든 음악대와 고적대는 각종 콘테스트에서 눈부신 실적을 남겨 명실공히 '일본제일'을 자랑하는 문화의 기수(旗手)로 발전했다.
올해는 동일본대지진 복구지원을 위한 음악대의 '희망의 유대' 콘서트가 2년만에 라이브로 재개됐다. 그리고 3년 만에 퍼레이드에 출연하게 되면서 각지에 '우정의 하모니'를 넓히고 있다.
'제삼문명'의 여명
1958년 6월 30일, 총무에 취임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면서 청년부의 문화운동에 계속해서 새로운 등불을 밝혔다.
1958년 10월 6일에는 젊은 여성 150명으로 구성된 '여자부합창단'(여성부 '후지합창단'의 전신)을 발족했다.
한 해 전 8월, 은사가 "청년부에 합창단을 만들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발족식에 참석한 이케다 선생님은 신심(信心)을 관철하기를 바라며 훗날 "'후지산처럼 기품 있게' 그리고 '광야처럼 끝없이' 광포(廣布)의 길을 나아가세요"라고 지침을 보냈다.
1959년 여름, '젊은이의 제전'이 처음으로 일본 전역에서 실시됐다. 10월 15일, 선생님의 제안으로 최초로 '전국일본학생 변론대회'가 도쿄 메구로에서 개최됐다. 11월 23일에는 도쿄 간다에서 제1회 '학생제'가 열렸다.
종문은 "'축제'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인데 그런 축제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얄팍한 트집을 잡았다. 대학부 멤버들을 지키고 종문을 설득한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었다. 그런 가운데 개최된 학생제는 창작극, 일본 무용, 악기 연주, 기록영화 '학회의 발자취' 상영 등 예술성 풍부한 행사가 됐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이 행사야말로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철학을 근저로 하는 대문명, 문예 부흥의 여명"이라고 선언했다.
문화운동의 흐름이 확대되는 가운데, 선생님이 강조한 것은 바로 '제삼문명(第三文明)'이라는 큰 구상이었다. 스물일곱살 때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반드시 이 대중을 토양으로 했을 때 차대의 깊이 있고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 영원한 금자탑을 쌓을 수 있는 문화가 수립될 것이다. 아아, 제삼문명."('젊은 날의 일기2', 1955년 11월 12일)
1959년 7월 3일에 개최한 남자부간부회에서 처음으로 '제삼문명'에 관해 상세히 언급하고 청년부에 커다란 기대를 보냈다.
"현대의 민중은 정신문명의 세상에서도, 물질문명의 세상에서도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민중이 근저에서 느끼는 욕구는 물질도 마음도 아닙니다. 진실로 갈구하는 것은 색심불이의 생명철학에서 출발한 '제삼문명'입니다."
7월 9일에 개최된 여자부지도회에서는 "세계평화를 위해 최고의 문화건설을 위해 '제삼문명'이라는 색심불이의 문화를 창조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 뒤, 스승이 불을 밝힌 '제삼문명'의 이상(理想)이라는 등불은 창가(創價) 청년들의 손으로 세계로 넓혀졌다.
국경을 초월한 젊은이들의 유대가 빛나는 '세계평화문화제' '세계청년평화문화제'는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큰 행사가 됐다. '음악제' '문화제' '창가청년대회' 등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평화의 흐름을 확대하는 청년부의 문화운동이 이번 하반기에는 청년층을 주역으로 하는 '소카청년 페스타'라는 이름으로 일본 각지에서 개최된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는 '학문으로 감화한다'는 뜻으로, 인간의 마음을 일구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폭력이나 권력 그리고 금력(金力)과 같은, 인간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과 맞서 싸우며 인간성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다."
문화로 구축된 창가의 연대는 분단의 어둠을 비추는 '희망의 광원(光源)'이 될 것이다.
어린 은어처럼 약동하는 젊은이.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평생 싸우자.
나를 희생해도 좋다.
은사가 그러하셨다.
'젊은 날의 일기4' 1958년 12월 12일
- 화광신문 제1467 (20221021)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