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
국립 부여박물관
이 향로는 백제가 [웅진 ]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공예품이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사용된 도금과 주조 기술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기술적 성과라는 평가가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길쭉한 하대에 알의 모양을 얹은 박산 향로의 형식에 있어서만 유효한 논증이다. 중국의 박산형 향로에 비하여 백제 금동 대향로는 그 심미성과 정밀함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
한편 최근에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도교와 불교의 습합'을 반영했다는 기존 견해에 반론하기도 한다. 당시 불교계에서 전승되었을 문헌 가운데 '가루라(금시조) 목 아래에 여의주가 있다[如意者, 此鳥頸下有如意珠.]'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반열반경』 중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神仙呪術,作倡伎樂]'는 기록이 있고, 『묘법연화경』에도 '사람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若使人作樂, 擊鼓吹角貝, 簫笛琴箜篌, 琵琶鐃銅鈸]'라는 문구가 있다. 즉, 백제 금동대향로의 도상을 불전(佛典) 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수당대에 걸쳐 불교 내에서는 『홍명집』 등을 저술해 도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격의불교로 당시의 불교상을 정의하기엔 문제가 있다. 향로의 도상에 대해 지나친 추정과 상상은 지양되어야 하고, 향후 구체적인 전거를 들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