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九龍浦)
☞구룡포에는 “일본인 가옥거리(日本人家屋)”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이름 그대로 일본 가옥들이 몰려 있던 곳이다. 2012년 구룡포 근대역사관 개관과 함께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라는 이름을 달고 탄생하였다.구룡포 근대역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가가와현의 어부들이 처음 한반도 해역에 나타난 것은 1880년~1884년경으로 알려진다. 당시 가가와현의 세토내해는 어장이 좁아 어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힘없는 어부들이 어장을 찾아 먼 바다로 나선 끝에 어족자원이 풍부한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사라지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우리나라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수탈하기위해 많은 일본어부들이 구룡포로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1932년에는 그 수가 300가구에 달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여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가옥과 거리가 그들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건물들이 간직한 이야기를 보면 “호호면옥” 간판이 붙은 건물은 당시 구룡포에서 제일가는 “대등여관” 자리였고, 일본식 찻집이 들어선 “후루사토”는 80년 전 인기 요리집 “일심정” 이었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 계단을 오르기 전, 양옆으로 일본인 가옥이 펼쳐지고, 계단을 오르면 일본인들이 神聖시하는 神祠가 있던 민족의 가슴시린 현장이었다.
이 자리에 일제와 6.25때 항거한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사업으로 1960년 충혼탑을 건립하고 계단 양옆에 있는 비석들은, 일본인들의 이름이 있던 곳에 시멘트로 바르고, 돌을 돌려세워 이 고장을 빛낸 이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공원 외진 곳에 시멘트로 덧칠한 기념물은 도가야 야사브로의 송덕비로 전해지고 있다.
구룡포(九龍浦)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 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등대가 있는 언덕을 지나면, 구룡포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포항지역이 화산 층인 현무암이 많은 관계로 몽돌해변이 조성되고구룡포 삼정리에도 주상절리가 있다.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서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주상절리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화산이 폭발할 때 사선으로 분출하면서 주상절리(柱上節理)가 형성되어, 용암폭발지점과 분출장면이 그대로 멈춘 듯, 신기한 모습이다.
석병1리 두일포 마을을 지나면 아담하고 정갈한 해신당(海申堂)이 자리 잡고 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민들이기에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신당이 마을마다 모셔있고, 수호신인 당산나무도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고, 부귀영화를 바라며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성한 곳이라생각하고 해신을모신곳이다.
다무포 고래생태마을에 들어서면 그림 같은 팬션과 민박집이 반겨주고, 벼랑길을 돌아가는 구름다리위에서 만나는 멍석말이처럼 밀려오는시원바람과 하얀포말로 바위를 타고넘는 파도가 장관을 이룬다.
강사리 포구에 도착하면강사리 출신 박광훈 시인의 “내 故鄕 江山아” 시비가 시선을 끈다.
강사리에서 대보리로 넘어가는 해안가에 펼쳐지는 해금강. 아슬아슬한 벼랑위로 나무계단이 걸려있고,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암초들의 모습은 금강산의 만물상을 해안가에 축소판으로 옮겨놓은 듯, 천태만상의 암 봉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숨겼다 나타나는 모습이야 말로 선경이 따로 없다.
호미곶(虎尾串)
☞ 여기서 호미곶으로 걸어 이동하면 한반도의 꼬리 부분인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장기곶” 명칭이 “호미곶(虎尾串)”으로 공식 변경됐다. “곶”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리 모양의 육지를 말하며, 호미곶이란 조선 철종 때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의 대동여지도에는 '달배곶[冬乙背串]'으로 표기돼 있으나 일제가 1918년 장기갑으로 바꾸면서 토끼꼬리로 낮춰 불렀다. 정부는 1995년 일본식 표기를 바꾼다는 취지에서 장기곶으로 변경했었다.
한반도가 토끼 모습을 닮았다는 말은 일제가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지리학자의 “산맥체계론”을 교과서에 실으면서 한반도 모양을 연약한 토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이에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여암 신경준(旅庵申景濬)의 “백두대간”을 원용해 산맥체계론을 비판하고 연해주를 향해 발톱을 세운 채 포효하는 호랑이로 한반도를 그렸다. 이른바 '맹호형국론(猛虎形國論)'이다.
우리 국토를 호랑이에 비유한 이는 육당에 앞서 조선 명종조 풍수학자인 남사고(南師古)가 처음이다. 그의 “산수비경”에는 한반도를 앞발을 치켜든 호랑이 형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중에 백두산은 코에 해당하며, 운제산맥 동쪽 끝인 호미곶을 꼬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꼬리 부분을 국운이 상승하는 명당으로 친 것은, 호랑이는 꼬리를 축으로 삼아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민족이 화합하고 통일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2009년 개관한 새천년기념관을 바롯하여, 많은 조형물들이 너른 광장에 조성되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호랑이가 포효하는 한반도 모형”과 “천년의 불(성화채와)”,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을 형상화한 조형물, “전국최대의 가마솥”이다.
가마솥은 매년1월1일이면 해돋이를 보기위해 전국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과 함께 떡국을 끓여먹는 행사를 개최하기위해 2004년에 만든 솥으로, 지름이 3,3m에 깊이가 1.3m 둘레가 10.3m에 이르며, 한번에 20,000명분(4t)의 떡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호미곶 등대를 외면할 수가 없다. 보기에 아름다운 이 등대도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철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았다는 이 등대는 1908년 12월에 준공되었다. 1907년 일본 선박이 이곳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였는데, 조선이 연안에 해난시설을 갖추지 않아 일어난 인재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생트집을 잡았고, 이에 못이긴 조정은 국비로 일본인에게 공사를 맡겨 등대를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호미곶등대는높이 26.4m에 팔각형의 등대는, 내부가 6층으로 되어있고, 각층의 천장마다 조선왕실의 상징 무늬인 배꽃모양의 문장이 장식되어있다고한다. 1985년 2월7일 개관하여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해 오다가, 2002년 4월 19일 재개관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인류 최초의 등대는 파로스 등대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는 스페인의 라 꼬루냐 헤라클레스 탑으로 높이가 무려 55m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1903년 세워진 인천의 팔미도 등대라고 한다. 테마공원에는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등대 모형이 전시되어있고, 이곳이 우리나라 최동단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해변 암석 위에 마련한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표지석과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이곳 호미곶 , 에 위치하고 있다
첫댓글 대맥님 오랜많입니다.*^
우리다녀온 코스그대로 다시보여주시니
세삼 추억을보는군요.
회장님! 오랬만에 답글 합니다. 저, 보고 싶었죠?
이제는 정년을 얼마남겨두지 않고,지금은 시간이 빨리가고
할일은 많고, 하지만 10월 이후에는 자주 만나고 옛날처럼 산행할거예요~
지나간 세월,전북의 100대명산 발로걷고, 조선일보"월간산"개념도작성 연재하고
바쁘고 보람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앞으로 중앙 산악회에 보탬이 되는 "밀알: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