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이광조
은퇴 후의 생활은 느긋한 편이다. 쫓기는 게 없어서 편하지만, 변화 없이 단조롭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기도 하다. 생활의 혁신을 되뇌며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삼일도 만만치 않다. 아이들에게 능동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지내 온 과거가 부끄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될성부른 떡잎처럼 매섭게 자신을 몰아간 아이들이 어떤 재목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담임의 한 해 농사는 어떤 반장을 뽑느냐에 적잖은 영향을 받는다. 호흡이 잘 맞으면 비서를 채용한 거 못지않은 덕을 보지만, 시원찮으면 마음대로 내칠 수도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적당한 구실 달아서 부실장에게 무게를 싣기도 하지만, 반장을 무시한다고 따지고 들어 그마저 뜻대로 안 될 때도 있다.
중학교 때 전교 학생회장을 지냈다는 아이가 내 반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들이 적극적으로 밀었다는 후문으로 보아 사회성이 괜찮은 아이인 것 같았다. 대답이 시원스럽고 심부름을 잘했으며 상황 파악이 빠른 아이였다.
쓸만하다고 생각하고 지켜보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거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점심시간에 우리 반 복도를 지나다 보면 교실에서 뛰어다니며 장난하거나, 여러 명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방해되니 밖에 나가서 놀라고 타일러도 그때뿐이었고,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대꾸할 때도 있었다.
일 학기 중간고사 이후 긴장됐던 분위기가 누그러질 때쯤 녀석의 달갑지 않은 행동은 더 자주 포착되었다. 솔선수범해야 할 반장이라는 놈이 야간 자습에서 무단이탈하는가 하면, 대의원 회의가 끝난 뒤에 두 시간이나 수업을 빼먹는 일도 있었다. 오월 전교 체육대회 날에는 각 종목에 출전할 우리 반 선수 명단을 들고 PC방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임기응변으로 선수를 메꾸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학생 어머니에게 가정에서 다잡아 달라고 부탁하고, ‘반장 직무 정지’라는 자극을 주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경고와 훈계를 되풀이해도 녀석의 일탈이 멈추지 않자, 2학기 첫날 학급 선거를 통해 녀석의 반장 자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녀석의 일탈은 더욱 심해졌다. 새로 뽑힌 반장이 학급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저를 추종하는 몇몇과 패를 지어 반 분위기를 해쳤다. 저 혼자 야간 자습 빠져나가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귀 얇은 아이들을 꼬드겨서 집단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참다못한 아이들이 나를 찾아와 녀석의 비행을 신고하기 시작했고, 새로 선출된 반장도 어떻게든 조치해달라고 호소했다.
매를 들거나 타일러도 변하는 게 없자 녀석의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다. 저 혼자 빗나가는 것도 참기 어렵지만 교실 분위기를 해치고 다른 아이들을 부추기는 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니, 뭔가 조치해야 할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어머니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심정을 털어놓았다. 착하고 재능도 있어서 대견하게 생각하며 키웠는데 중3 때부터 까불기 시작하더니 고등학교 입학 후 계속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또래들과 놀다가 한밤중에 들어오는 놈을 아버지가 나무라자 그길로 나가서 친구 집을 전전하며 속을 태운다고 했다.
엄한 집안에서 범절 있게 자란 자신이 어쩌다 저런 망나니를 키우게 되는지 모르겠다며 한참 눈물을 흘리더니, 감정을 수습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리 몽댕이 부러뜨려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무너지는 저희 집 일으켜 세운다고 생각하시고 민우 좀 잡아 주십시오. 원하시면 각서라도 쓸게요. 선생님!”
가정에 떠넘기려고 불렀다가 되레 뒤집어쓰게 된 꼴이었다. 오후 내내 그 어머니의 목멘 하소연이 귓전에 맴돌았다. 잘못 건드렸다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호소와 표정이 어른거려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교무실 뒤편에 있는 창고 사무실로 녀석을 불렀다. 제가 저지른 굵직한 비행 몇 가지를 열거하며 잘못을 인정하게 한 다음, 어머니가 다녀간 일과 각서 얘기를 꺼냈다. 참을 만큼 참았으니 남은 건 맞는 일뿐이라며 달아날 것을 대비해 문을 걸어 잠갔다. 준비해 둔 몽둥이를 잡으며 외쳤다.
“엎드려!”
“움직이지 마. 잘못 맞으면 병신 돼!”
경고를 끝내면서 바로 몽둥이를 내리쳤다. 하나, 둘, 세 번째 내려 치자 녀석은 죽는시늉하며 옆으로 굴렀다. 머리싸움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 쇼하지 마! 이 자식아. 오늘은 안 통해!”
머리통을 밟아버리겠다는 듯이 다리를 들어 올리자, 녀석이 놀라면서 다시 엎드렸다. 열일곱 대를 더 때렸지만, 녀석은 이를 악물고 참으며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었다. 매를 던지자 그제야 안도한 녀석이 엉덩이를 감싸 쥐며 소리를 죽인 채 울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는 녀석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일어나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나와 마주 앉은 녀석을 보며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못 알아들을 아이 같았으면 때리지도 않는다. 중학교 때까지 모범생이었고 공부할 자질도 되는 놈이 계속 추락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변한 모습 보여주는 게 제대로 반항하는 거다. 이래도 안 되면 완전히 무시해 버릴 것이다.”
묵묵부답 듣고만 있던 녀석을 일어나라고 한 다음 눈을 맞추고 나직이 말했다.
“아직 너를 버린 건 아니야. 지켜볼 테니 잘 해봐. ”
반 아이들에게 들으니, 그날 교실에 돌아온 녀석은 책상에 엎드려서 하염없이 울었고 하교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문 입은 그 후에도 열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물을 때 답을 할 뿐 아이들하고는 일절 말을 섞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제자리에 앉아서 참고서와 씨름했고, 야간 자습 시간에는 영어 문법을 후벼 팠다.
녀석의 급작스럽고 야무진 변화에 반 아이들은 놀랐고 이전에 같이 어울리던 농땡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나도 놀랐는지만 모른 척하면서 그런 자세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집에 와서도 말이 없고 제 방에 들어가 공부만 한다면서 아이어머니도 감동스러워했다.
이듬해 오월 스승의 날에는 교무실 내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이어졌고 끝에 ‘선생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민우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날 불러서 잘하고 있는데 왜 미워하겠느냐면서 변해서 착실하게 지내는 모습 계속 지켜볼 거라고 격려했다.
삼 학년 때는 모의고사 성적이 계열 팔등까지 했다는 소식을 일 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전해주었다. 삼 학년 담임에게 알아보니 육사를 원했는데 일 학년 때 내신성적이 워낙 나빠서 부산 모 대학 법대에 지원했다고 했다. 졸업하던 날 어머니와 함께 교무실로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그날 한 번 더 눈물을 보이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몇 년 뒤 삼월 어느 날 장교 정복을 입은 녀석이 교무실에 들어와 거수경례를 했다. 학군단에 지원했고 4학년으로 진급하면서 학생 제대장이 되어 전체 단원들을 통솔한다는 것이었다. 육사에 못 간 한을 그렇게 풀고 있다며, 제대장이 되자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었던 사람이 나라고 했다.
토요일 오후 빈 교무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포를 풀었다. 창고 사무실에서 때리고 맞은 심정이 오갔고 쓰지도 않은 각서로 엄포를 놓은 담임의 얄팍한 술수도 공개되었다. 스스로 반성하면서 변해야겠다고 여러 번 작정했지만, 번번이 무너지더란다. 그러던 중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당하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잡히더라고 했다. 학창 시절 통틀어 저를 가장 많이 때린 선생이라고 하길래 그런 소리 하는 걸 보면 좀 더 맞아야 한다며 매 찾는 시늉을 하고는 한참 웃었다.
법학을 전공하지만,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제대장으로 뽑힌 게 그렇게 좋고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일어서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때 맞은 거 평생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도는데 녀석이 거수경례하면서 외쳤다.
“장군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