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선 확보작전
1. 개요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으로 중부의 제9군단이 춘천을 확보하고 서부의 제1군단이 문산을 점려하는가 하면 동부의 국군 제1, 9군단이 양양까지 진출하자, 제8군사령관은 서부의 진출 통제선인 벤튼선과 중부의 카이로서늘 연결하고 전선 절단 작전의 최종 목표를 전군이 이 선까지 진출하는데 두기로 한다.
이 선은 서부의 문산에서 임진강 상류지역을 지나 동두천-춘천-현리를 거쳐 양양 북쪽의 조산리에 이르는 선으로 38도선을 통제할 수 있는 전술적 지형을 연하는 선이다.
이 무렵 적은 이미 38도선 북쪽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 중이였으므로 아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3월 말가지 이 선에 도달하였다. 즉 절단작전('51.3.7~31)을 통하여 서울을 재수복하고 최초 계획처럼 적의 병력과 물자에 크게 피해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적의 사상자는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4,800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이와같ㅇㄴ 상황에서 유엔군측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에 도달할 무렵 이후 작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38도선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2. 유엔군의 군사전략
유엔군측은 '51년 1월 하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여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을 펼치자 지난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였던 철군문제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이에 따라 미 행정부와 합참은 한국전쟁 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가지 노선에 따라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 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고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따라서 유엔군은 계속하여 적에게 최대의 손실을 가하여 38도선 남쪽의 영토의 통제를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방의력도 증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공세적 방어작전을 허용하여 아군이 군사작전으로 38도선에 도달하면 '50. 12월에 유엔 휴전위원회에 통보한 그 선에 따라 휴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결국 유엔군은 군사적으로는 전쟁전의 현상을 확보한 후 휴전에 의거 전쟁을 해결하며 통일 국가 수립은 그후 정치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였다. 이 것은 유엔 회원국 대다수가 참여하는 내용이였으며 이를 맥아더 사령부에 조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3월 24일 미 행정부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중공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 것이 맥아더 원수와 미 대통령 트루먼과의 트러블의 단초가 공식화 되고 확산되어 갔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3.24일) 이승만 대통ㄹ령도 유엔균이 38도선에서 정지해서는 안되며 북진해서 통일을 이륙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인위적으로 또 다시 분단은 정치, 경제적으로 존속과 번영이 불가하며 직ㅁ까지ㅣ의 ㅅㅇ리는 무의미하고 다시 남북간에 전쟁은 계속되리라 강조하였다.
이때 미 제8군은 개성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진강을 도하하여 철수 중인 인민군 제1군단을 공격하여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은 예성강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동측의 중공군으로부터 포위될 우려가 있어 이 지역의 작전은 수색과 전투 정찰대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철의 삼각지라는 용어는 당시의 기자들이 좀도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이름붙인 것이고 원산과 서울의 중간 지점으로 철도와 도로망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 이곳은 적의 전방지역 병참 중심지였으며, 적은 이곳으로 병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 제8군사령관이 관심사항은 철의 삼각지로 아군의 계속적인 진출을 보장할 수 있고 또 적의 공격준비가 명백해 지고 있는 싯점에 양호한 방어진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지형이었다.
이때 선정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이를 "캔사스"선이라 명명 하였다. 이 선은 서부에서는 38도선 북쪽으로 3.2km, 동쪽에서는 대체적으로 16km 정도 위치하여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선으로 지난 절단작전간 38도선으로 진출한 부대가 이 선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작전"이라 이름 붙였다.
그후 군은 다음 단계로 미 제1, 제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우타선과 와이오임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화까지 공격할 계획이었다.그리고 만일 이 작전간 적의 공격을 받으면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이 작전을 불굴작전(돈트러스작전)이라 명명 하였다.
3. 공산군의 전력 증강
공산군은 '51년 초에 유엔군의 재반격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고있었지만 만주에서 재편성한 인민군이 전방으로 진출하고, 중공군이 추가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전력을 보강하게 된다.
인민군 제6군단(제18, 제19, 제36)이 '51. 1월에 압록강을 건너 청성진으로 입북하여 2월 중순경 해주 지역 방어임무를 인계받는다. 뒤이어 제7군단(제13,제32,제37)은 압록강을 건너 사단별로 남하하여 2월 말경 원산지역에 도착하여 해안 방어지역을 제3, 제24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았다. 같은 시기에 제8군단(제42,제45,제46)도 만포진으로 들어와 군단 주력을 흥남지역으로 이동하여 제41사단과 제63여단을 흡수하였다. 그리고 제45사단은 인제로 남하하여 제3군단에 합류하였다.
이와같이 북한군의 원한-흥남 간의 예비 병력이 2개 군단 8개 사단 1개 여단이었으나 미 제8군은 적병력을 2개 사단, 1개 연대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민주에서 복귀한 제6군단과 지난 연말 동북부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여 진남포-신안주의 서해안 방어임무를 수행중인 제4군단(제4,제5,제104기갑사단,제26여단)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 제8군은 3월 중순까지도 이들의 위치나 병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5년 1~2월에 만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2월 하순에는 중공 제19병단(제63,제64제65군)이 신의주로 들어와 3월 초순에는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곡산-신계=이천 지역ㅇ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9, 제11포병연대도 들어왔다.
이 무렵 원산지구에서 재편성 중인 제9병단이 어느정도 전력이 보강된 제26군을 38도선 중부전선으로 진출시키게 되는데 이는 유엔군이 조기에 이동상황을 포착하였으나 제19병단의 압록강 도하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중공군 제26군은 3월 10일, 미 제24, 미 제25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38군, 제50군과 임무 교대를 하였다. 유엔군의 절단작전이 개시 되기전에 홍천지역에 집결돼 있던 제39군, 제40군은 제42, 제66군과 교대하여 전선의 중앙부로 투입되었다. 이러한 부대 교대 외에도 중공군 제47군이 3월에 들어와 제13병단에 배속되어 비전투부대로 순안, 순천, 남양리의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눈데 이 당시에 노새로 장비를 운반하여 "노새 사단"이라 호칭된 제5포병 사단도 들어왔다.
중공군의 이러한 병력 중강으로 총병력이 3개 병단 14개군 42개 사단, 4개 포병사단과 2개 독립 포병연대였으나 유엔군 정보 당국은 제9병단의 제26군을 제외 하고는 3월 말까지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가볍게 판단했다.
중공군 지원군사령부는 이미 3월 14일 반격개시선을 "장연-신원리-백천리-주천리-삭령-화천-양구-인제-양양 선으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전선의 각 부대는 의정부-주금산-청우산-홍천강 북쪽-풍암리를 연하는 제2방어선과 38도선 사이에 4월초까지, 38도선과 공격개시선 사이에서 20~30일 동안 국군과 유엔군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4. 피아의 전투편성
가. 공산군측 전투편성
(1) 중공군의 전투편성
서부전선의 중공군 제19병단은 제63군, 제64군, 제65군이었고, 중서부와 중동부 전선은 제3병단과 제9병단이 담당하는데 제3병단은 제12군, 제15군, 제60군으로 편성되고 제9병단은 제20군, 제26군, 제27군, 제40군으로 편성되었다.
(2) 북한군의 전투편성
서부전선의 제1군단은 제8, 제17, 제19, 제47사단으로 중공군 제19병단에 배속되어 있었고, 중동부 전선에 제2군단(제2,제9,제27,제31), 3군단(제1,제3,제115)과 제5군단(제6,제7,제10,제12,제13)이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 유엔군측 전투편성
(1) 서부전선 전투편성
미 제1군단예하에 미 제3사단, 미 제24사단, 미 제25사단,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 국군 제1사단, 영 제29여단, 터키여단으러 로 편성 되었다.
(2) 중서부 전선의 전투편성
미 제9군단 예하에 미 제1기병사단,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6사단, 영 제27여단, 태국대대, 그리스대대가 편성되었다.
(3) 중동부 전선의 전투 편성
미 제10군단 예하에 미 제2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5사단, 네덜란드대대, 프랑스대대가 편성 되고,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으로 편성되었다.(국군 제1해병연대는 주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운용됨)
(4)동해안 지역 밒 후방지역 전투 편성
동해안 지역은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 제9사단으로, 제8사단이 육본 직할로 호남지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5. 전투 경과
가. 캔사스선 진출 작전
국군과 유엔군은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군단간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주요 전투 부대도 대폭적으로 이동 또는 교체하였다.
서부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 미 제3사(영 제29여 배속),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단을 전선에 배치했다. 중부의 미 제9군단은 국구 ㄴ제6사, 미 제1기병사 및 영 제27사단을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 국군 제5사, 미 제7사를 배치하고 국군 제3군단은 제2사, 제3사를 공격제대로 그리고 제7사를 예비로 확보 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공격제대로 제9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공격준비를 완료한 각 군단은 4월 3일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 작전을 개시하였다.
(1) 중서부전선 진출전
평강
김화
화천댐
연천 철원 화천
개성
판문 장파리 전곡
광덕산
임진각(문산) 동두천 운천 명성산
불무산
국망봉
파주 영평천 관음산 사향산
덕정
금촌
의정부 포천
러기드작전에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임진강과 화천 저수지 사이를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1군단은 이미 캔사스서느로 진출한 좌전방 국군 제1군단과 중앙의 제미 제3사단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에 전념하고 우전방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은 3번도로(의정부-포천-김화-김화)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51.4.3일 도로 서쪽의 미 제25사단이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 계곡으로, 동쪽의 미 제24사단이 간음산, 국망봉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4월 6일 별다른 저항없이 군단은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미 제9군단도 좌전방에 영 제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단은 6일 캔사스선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전방의 미 제1기병사단이 중공 제39군이 강력한 저항으로 캔사스선 남쪽 화천 저수지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화천댐 진출작전에 군단과 사단의 공병이 견해차이가 발생한다. 군단 공병참모는 저수량이 절반도 못되고 실제 이걸 재래식 무기로 폭파하기란 쉽지않으므로 작전에 영향이 적을 것이라 판단한 반면 사단의 공병대대장은 댐의 수위가 최고일 때에 수문을 개방하면 제9군단의 주보급로인 가평=춘천-화천 도로 사용이 불가능해진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화천댐을 제9군단의 작전지역에 포함시키고 특수훈련을 받은 미 제4유격대를 7일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장은 유격 중대를 기습공격에 포함시키지않고 댐 확보에만 전념하게 된다.
결국 우려했던대로 중공 제39군은 8일 자정에 4개(총 18개)의 수문을 개방하고 일부는 부분 개방하므로써 북한강 상류 수위가 2m 높아진다. 이러써 춘천 일대의 일부 가교들이 떠내려 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9일 아침에 중공군은 주력이 범람으로 인한 고립을 고려하여 철수하게 됨으로써 미 제1기병사단의 제7, 제8기병연대는 용이하게 캔사스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 제해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려 했으나 군단장이 기필코 화천댐을 확보할 것을 명령하여 11일까지 3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군단장은 12일 곧 있을 예정된 불굴작전(돈틀리스 작전)으로 댐을 탈취하기로 하고 미 제7기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이곳으로 투입된 국군 제1해병연대의 교대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미 제9군단은 석룡산-화악산-지암리-신포리-용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2)중동부전선 진출전
제1요도 북한강
파로호
풍산리
월명리 양구 인제
화천 화천저수지
사명산(1198)
간동 죽엽산(859)
간무봉(556) 남면
용화산(878)
춘천댐
--------------------------------------------------------------------------------------------------------------------------------
제2요도
광치령
가아리 칠성고개 봉화봉
서호리
양구 원통
940고지 923
493
742고지 서릿골
인제 덕산리
712고지 725 601
아미산(493) 내린천
637고지
관대리 가로리
신월리 480 개운리
소양호 남전리 원대리
부평리
미 제10군단은 작전지역내 도로망이 제한되고 지형이 험준하여 진출이 다소 지연되었다. 4월 7일 부대 배치를 조정하여 조공인 미 제2사단이 화천 저수지 남쪽을, 중앙의 미 제7사단이 양구를, 주공인 우전방 국군 제5사단이 인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태기산 전투를 종료하고 부대정비와 위력수색에 주력하던 중 4월 7일 소양강 남쪽의 남전리-원대리로 진출하여 인제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사단 정면의 적은 인민군 제12사단이었으며 이를 증원하기 위하여 제15사단과 제45사단의 1개 연대가 소양강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은 좌전방에 제35연대로 먼저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제36연대가 도하하여 인제를 공격할 방침이었다. 제35연대는 4월 9일 23:00시에 제26포병대대와 미 제7사단 포병대대의 강력한 화력에 힘입어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관대리 부근의 적을 격퇴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때 제36연대의 선봉인 제6중대가 은밀히 기동하여 10일 01:00시에 가로리로 도하하였다. 중대는 소양강변에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대는 제2대대 주력을 투입하여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여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도하이후에 양구와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개운리 서쪽의 542-637-711-742고지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13일까지도 확보하지 못했다.
우전방 제36연대가 14일 원통을 목표로 공격하자 원통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합강리 서쪽의 548고지와 664고지에 강력한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고 하였다. 반면 제35연대 지역은 의외로 경미하여 목표선으로 진출한다.
15일 하루종일 인제 북방의 640고지 548고지 664고지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제36-2대대가 인민군 1명을 생포 하여 그날의 암구호를 알아내 540고지의 100여명을 사살하면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사기가 오른 사단은 제35연대가 최고봉인 940고지를 탈취하고 양구-인제 산간 도로인 548-664고지를 확보하고 서호리로 진출함으로써 캔사스선 확보를 목전에 두게 된다. 우전방 제36연대는 공격개시 7일 만인 17일 원통 북쪽 481고지와 봉화봉을 확보하여 결국 캔사스선으로 진출했다.
한편 국군 제5사단이 인제부근에서 적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동안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로, 미 제7사단운 양구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며 북쪽으로 진출하여 두번째로 전쟁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게 되어 대부분의 부대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연하는 이른바 캔사스선을 확보하였다.
이 전쟁전 상태로 회귀는 국군으로서는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국군 과 유엔군ㅇ이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나. 철의 삼각지대 공격
중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지상 및 항공정찰ㄹ과 포로 심문을 통하여 공산구늬 공세징후가 전 전선에서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 보급이 집중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여중부전선의 캔사스선의 방어종심을 강화하고 공산군의 공격준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하는 와이오임선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하게 된다.
이 목표선에 이르기 위해 1단계 목표선인 "우타선"은 캔사스선 전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으로 연결되며 활처럼 굽어진 선이다. 이 작전에는 미 제1군단의 미 제3, 재24, 제25사단이 공격하며 제9군단의 좌전방 영 제27여단도 단거리 공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51. 4. 11일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 리지웨이 장군의 유엔군 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의 미 제8군사령관 부임"
이 계획에 의거 공격제대들은 4월 11일 "불굴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으 직위에서 해임하고 ㅔ8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그 후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4월 14일 벤플리트 중장이 새로운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제1단계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14일 리지웨이는 한국에서 마지막 회의를 주재하여 적의 징후로 보아 아군이 캔사스선 남쪽으로 철수시 적용할 3개의 통제선을 설정하였다. 이 선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때 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였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 교두보선과 흡사하였다. 첫번재 선인 델타선은 춘천을 중심으로 동서해안에 이르는 선이며, 두번째선은 네바다선으로 서울 남쪽의 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이다. 그리고 서울 방어를 위한 골든선은 서울 서북쪽 10km의 행주에서 네바다 선상의 양평을 반원형으로 연결한 선이었다.
리지웨이는 불굴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이 유타선 이북으로 진출할 경우 통보하고 또 와이오밍선 이북으로 대부대를 이동시킬 경우에는 사전에 승인을 받도록 통제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때 전선에서 제1단계 불굴작전(돈틀러스 작전)을 개시한 부대들은 철의 삼각지대로 접근할수록 적의 저항이 강화되고, 떠한 폭우로 인하여 도로상태가 불량하여 진출이 매우 느렸다. 이런 상황에서 20일을 전후 하여 미 제3사단이 연천을 , 미 제25사단이 금학산을 ,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그리고 영 제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여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우타선과 캔사스선에 위치하거나 그 부근에 도달함에도 적의 공격이 즉각 개시될 조짐이 없자 벤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불굴작전 2단계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의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김하-화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의 2개 사단은 접적이 미미하여 캔사스선 북쪽ㅇ로3~8km를 진출하였다. 그러나 좌전방의 미 제1군단의 우전방인 광덕산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은 우인접의 국군 제6사단과 연걀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적과의 접적을 회피하였지만, 좌전방 미 제25사단(배속:터키여단)은 적의 포격으로 오전 중에 공격이 돈좌되었다.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2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불가하였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6.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화천댐 부근의 전투 흔적과 중공군 땅굴
나. 인제 개운리 서쪽 종격실 능선(전사에 기록)과 그 우측 725고기군 종격실 능선(실제 유해가 대구모 발굴됨)의 비교
다. 인제 남북리 전투전적비 부근의 유해와 아미산 전투의 허와 실
라. 땅벌이 유해속에 살고 있다(인제 북쪽 600고지군)
마. 광치령 남단 가아2리지역 대규모 유해발굴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바. 가아리 90세 할아버지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