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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뜨락 스크랩 동심초 권혜경
정규훈 추천 0 조회 369 13.12.11 23: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심초

 

 

동심초 -권혜경(원곡)

 

설도(薛濤) 詩 / 김안서 譯  / 김성태 曲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 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 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 려는고
한갖 되이 풀잎만  맺으 려는고

 

 

동심초(同心草)는 원래  당나라 여류시인인 '설도(薛禱)'의 '춘망사'(春望詞)라는 시의 일부를 김소월 시인의 스승인 김억(김안서)선생이 번역을 하고 김성태 작곡가 (1910- 2012.4.21)가  곡을 붙여 만들어진 가요입니다. 처음에는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1959년, 김진규 최은희 엄앵란) 를 통해 주제곡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당시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했던 가수 '권혜경'씨가 이 노래를 처음 불러 레코드로 취입 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이경숙, 백남옥씨 등 유명 소프라노 가수를 통해  불후의 명작 가곡'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지요.
 
*어머니 세대인  파란만장 삶의 권혜경씨를 추모하며....jj  "산장의 여인" 으로 잘알려진 가수 권혜경 씨 (본명 권오명, 1931 ~ 2008 , 강원도 삼척 출신)는 세무공무원이던 아버지의 5남매 막내딸로 태어난  뼈대있는 안동 권씨 가문에다 엄청난 재력까지 겸비한 집안서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여, 성악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양반집 규수가 되길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으로 일시 은행에 근무 하였으나 결국  1956년, 스물 여섯 되던 해 KBS 전속가수(안다성씨와  입사 동기) 가 되자,  '풍각쟁이 무당' 은 필요 없다며 집에서 쫓겨나 혼자 자취를 하며 1년뒤 불멸의 히트곡인  '산장의 여인' 으로 스타가 된다.

 

예명인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으며, 이름에 '벼슬 경(卿)'자를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시컬한 창법으로 대중 앞에 등장한것이다. 이어서  호반의 벤취, 물새우는 해변,등 힛트곡을 남겼고  1959 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동심초' 의 주제가 등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 그러나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 살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투병 속에서도 교도소와 소년원 위문공연을 수십년간 하는등 봉사활동을 해왔으며  영화 <울지마라 물새야>의 주제곡( '물새 우는 해변') 은  고인이 된 작곡가 박춘석씨가 투병 중인 권혜경을 배려해서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원곡의 멜로디 일부를 개작(改作)까지 해 건네 준 곡이라고 한다.<호반의 벤치> <물새우는 해변> <동심초: >는 병실 의자에 앉아서 취입을 했다고 한다. 수인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그녀는 오랜 병상에서 살아난것을 재소자들을 위해 여생을 보냈으며 1982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는 인권 옹호 유공 표창도 받았다.   1994년 부터 충북 청원군 남이면 농가에서 '산장의 여인' 노래 가사처럼  홀로 투병생활을 해오다 2008년 5월 지병으로 향년 77세로 그녀가 부른  '유성이 흘러간곳' 을 찾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자료참조: 산사랑

권혜경씨의 <동심초> 2011.11.20
 
대중 가수였던 권혜경(1931-2008)씨가 부른 <동심초>를 최근 들어보았습니다.
1956년 KBS에 전속가수 3 기로 들어가 이듬해인 1957년 <산장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함으로써 일약 유명 가수가 된 분입니다. 그 뒤 1959년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김성태 작곡의 가곡 <동심초>와 같은 것입니다.

창법이 다를 뿐인데, 대중가요풍으로 부르긴 했지만. 이 노래의 클래식한 분위기에 권혜경씨의 목소리가 어울렸기 때문에 이 곡을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권 씨는 서울 음대 성악가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동심초는 당초 1946년에 김성태 선생이 김억 시인이 번역한 중국 당나라 때 여류시인 설도의 작품에 멜로디를 붙인 것인데, 작곡 이후 10년이나 더 지난 후에 어떤 경로로 권혜경씨가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작곡을 해두었던 것을 그때 권혜경씨가 처음 부른 것인지 그 사이에 가곡으로 불려져 온 것인지 여부도 알 수 없구요.

 

크게 유행은 안했어도 권혜경씨가 부르기 전에 가곡으로 불려지긴 한 것 같습니다. 1963년 8월 31일자 경향신문은 ‘세미클래식한 창법이 클로즈업’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인기가수 권혜경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유성이 흘러간 곳‘(조남사의 동명연속방송극 주제가로 박춘석 작곡)이란 노래가 연 3주째 히트하고 있다. 8년전 일본색조의 저속한 노래가 범람하던 가요계에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와 세미 클래식 한 창법으로 클로즈 업 된 것이 권혜경이다. 권양은 이관옥씨에게서 정식으로 성악공부를 했다. 아무리 유행가수라도 발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요구이고 보면 권양은 남보다 먼저 가수로서의 정 코스를 밟아 온 셈이다.

 

동심초란 노래가 더욱 대중에게 침투된 것도 권양이 노래하면서 부터였고,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히트한 ‘산장의 여인’이나 ‘첫 사랑의 화원‘ 그리고 ’호반의 벤치‘ 등 모두 학생이나 지식인 사이에 더 유행되었다. 28세로 미혼인 권 양은 깔끔한 몸가짐으로 유명한데 앞으로 열렬한 연애를 한번만 해 보고 싶은게 꿈.”  여기서 나오는 이관옥씨는 당시 서울음대 성악과 교수로서 우리나라 제 1세대 소프라노로 꼽히는 분입니다. 또 ‘동심초가 더욱 대중에게 침투된 것은 권양이 노래하면서 부터였다’는 이야기는 그 전에도 더러 불려졌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아무튼 <동심초>라는 제목으로 극작가 조남사씨가 라디오 드라마를 써서 인기를 얻게 되자 신상옥 감독이 당시 최고의 배우들인  김진규, 최은희, 엄앵란, 김석훈씨를 캐스팅해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말소리가 투박한 엄앵란씨의 목소리는 성우 고은정씨가 대신했다고 합니다. 더빙을 한 것이지요. 라디오 주제가도 영화 주제가도 물론 권혜경씨가 부른 것입니다. 이 당시엔 김성태 선생이나 김동진 선생이 영화 음악, 영화 주제가를 많이 작곡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약간 비난도 받았다지요.

그렇게 대중음악으로 불리던 <동심초>가 어떻게 다시 가곡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 노래가 대중가요적인 요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가곡풍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비목>의 경우는 노래가 히트한  몇 년 후에 이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경우입니다. <동심초>의 경우는 <비목>처럼 가곡이 크게 히트하여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고, 이 제목의 드라마가 히트하여 영화로 만들어진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권혜경씨의 인생은 기구했습니다. 유명 가수가 된 직후인 1950년대 말부터 심장판막증 등 각종 병마가 닥쳐 평생을  병마와 싸우며 홀로 살다가 2008년 청주 효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산장의 여인>처럼 외로운 일생을 마쳤습니다.

권혜경씨의 인생 역정이 <산장의 여인>의 가사와도 너무 비슷해 이 노래의 작사자를 원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격려하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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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여인 권혜경  
  
77세로 별세한 원로가수 권혜경 만큼 가사의 굴레에 힘겨워했던 가수가 또 있을까.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산장의 여인 中) 1957년 데뷔곡 산장의 여인으로 일약 스타가 된 그는 불과 2년 뒤 28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판막증에 걸리고 이후 후두암까지 얻었다. 그 와중에도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발표하며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병은 재발을 거듭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명문학교를 나와 부러울 것 없던 그에게도 가혹한 운명의 벽은 컸다. 산장의 여인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찾아가 "하필 왜 내게 슬픈 노래를 줬느냐"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가사의 굴레가 시련이 됐던 가수는 많았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中)던 차중락은 낙엽이 지는 11월에 32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돌아가는 삼각지 中)의 배호는 안타깝게 29살에 요절했다.

 

애절한 선율의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사랑하기 때문에 中)를 노래하던 천재 음악가 유재하는 불과 25살에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밖에도 돌연사한 가수 김성재는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를 남겼고 하늘에 편지를 써(내 눈물 모아 中)를 부른 서지원은 20살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반면 밝은 노래로 삶의 긍정적 전환을 맞은 가수들도 있었다. 쨍하고 해뜰 날의 송대관은 문자 그대로 쨍하고 해 뜬 삶을 맞았다. 이한철도 2006년 괜찮아 잘 될꺼야란 노랫말의 수퍼스타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노래가사와 운명이 별 상관 없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팬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 유니(당시 26)의 히트곡 콜콜콜은 활력이 넘치는 노래였다.

 

뿐만 아니라 노래와 가수가 많아진 요즘 가사=운명이란 도식은 이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권혜경도 가사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었을까. 종교에 귀의한 그는 삶의 끝자락까지 전국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위해 봉사해왔다. 위문공연과 강연만도 400여 차례가 넘고 수인들 사이에서는 어머니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길은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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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의 <동심초> 2012.04.22 09:54:59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로 유명해져 이정식

가곡 <동심초(同心草)>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대중가수였던 권혜경(본명 권오명, 1931-2008)의 <동심초>가 유명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동심초>는 권혜경의 대표곡은 아니지만 그녀의 주요 히트곡 중 하나이다.
권혜경은 1956년 KBS에 전속가수 3기로 들어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오 대니보이’를 열창해 뽑혔다고 한다. ‘사랑이 메아리 칠 때’ 등 히트곡을 낸 안다성이 동기생이었다.
전속가수가 된 이듬해인 1957년 그녀가 부른 <산장의 여인>이 공전의 히트를 함으로써 권혜경은 일약 유명 가수가 됐다.
그 뒤 1959년에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김성태 작곡의 가곡 <동심초>와 가사와 곡이 같은 것이다.
 
창법만 다를 뿐이다.
 
대중가요풍으로 부르긴 했지만, 이 노래의 클래식한 분위기에 권혜경씨의 목소리가 어울렸기 때문에 이 곡을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권씨는 서울 음대 성악과를 중퇴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다 가수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심초>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작곡가 김성태 선생이 김억 시인이 번역한 중국 당나라 때 여류시인 설도(薛濤)의 작품에 멜로디를 붙인 가곡이다. 그러나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권혜경이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주제가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부터다.
1963년 8월 31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권혜경 이전에도 동심초가 불려져 왔음을 짐작케 한다.
 
(서울 음대 학장 시절의 작곡가 김성태)
 
이 신문기사는 ‘세미 클래식한 창법이 클로즈 업’이란 제목으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가수 권혜경을 다뤘는데 이런 내용이다.
“‘유성(流星)이 흘러간 곳(조남사의 동명 연속 방송극 주제가로 박춘석 작곡)’이란 노래가 연 3주째 히트하고 있다.
이 노래를 권혜경이 불렀다.
8년전 일본색조의 저속한 노래가 범람하던 가요계에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와 세미 클래식한 창법으로 클로즈 업 된 것이 권혜경이다.
권양은 이관옥씨에게서 정식으로 성악공부를 했다. 아무리 유행가수라도 발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요구이고 보면 권양은 남보다 먼저 가수로서의 정 코스를 밟아 온 셈이다.
 
<동심초>란 노래가 더욱 대중에게 침투된 것도 권양이 노래하면서부터였고,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히트한 ‘산장의 여인’이나 ‘첫 사랑의 화원’ 그리고 ‘호반의 벤치’ 등 모두 학생이나 지식인 사이에 더 유행되었다.
그동안 레코드에 취입한 곡만도 70여곡. 현재는 ‘오아시스’의 전속가수.
유현목 감독영화 ‘푸른 꿈은 빛나리’의 주제가를 금호동과 듀엣으로 부르게 되어 요즘 그 연습에 열중 - 두 사람 다 화제의 인기가수라서 더욱 기대된다.
28세로 미혼인 권 양은 깔끔한 몸가짐으로 유명한데 앞으로 열렬한 연애를 한번만 해 보고 싶은게 꿈.”
여기서 나오는 이관옥씨는 당시 서울음대 성악과 교수로서 우리나라 제 1세대 소프라노로 꼽히는 분이다.
또 ‘동심초가 더욱 대중에게 침투된 것은 권양이 노래하면서부터였다’는 이야기는 ‘노래는 그 전에도 있었으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보인다.
<동심초>라는 제목으로 극작가 조남사씨가 라디오 드라마를 써서 인기를 얻게 되자 신상옥 감독이 당시 최고의 배우들인 김진규, 최은희, 엄앵란, 김석훈 씨를 캐스팅해 영화로 만들었다.

전쟁미망인(최은희)과 약혼녀가 있는 출판사 전무(김진규)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영화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하는 노래 가사처럼 ‘주인공 두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맺어지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는게 영화의 스토리다.
1967년에는 출연배우가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으로 바뀐 두 번째 <동심초>도 나왔다.
 
(중국 사천성 망강루 공원 안 '설도기념관'에 있는 그림 속의 설도)
 
권혜경씨가 영화주제가로 부른 <동심초>는 당초 김성태 선생이 가곡으로 만든 것을 가요풍으로 부른 것이다.
1950년대 그 당시엔 가곡 작곡으로 유명한 김성태 선생이나 김동진 선생이 영화 음악, 영화 주제가를 많이 만들던 시기였다.
그래서 일부에선 순수 음악에서 벗어났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렇게 대중가요로 불리던 <동심초>가 어떻게 다시 가곡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 노래가 대중가요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원래 작곡된 대로 가곡으로 더 어울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권혜경씨 같은 목소리의 가수가 세미 클래식한 창법으로 부르지 않았더라면 이 노래가 가요로 히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심초> 같이 가곡에서 대중가요로 히트했다가 다시 가곡으로 정착한 유사 케이스로 <보리밭>을 들 수 있다.
<보리밭>은 6.25전쟁 중인 1951년 시인 박화목이 가사를 만들고 윤용하가 작곡한 가곡이지만, 1970년대에 가수 문정선이 고고 스타일로 부른 후 더욱 유명해졌다.

그후 <보리밭>은 언제나 인기가곡의 반열에 있다. 김소월 시로 된 가곡 중 가장 꾸준히 불리는 김동진 곡 <진달래꽃>은 1962년 소월의 생애를 다룬 영화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의 삽입곡이기도 했다.
노래가 히트한 후 같은 제목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진 케이스도 있다.
1968년에 가곡으로 나와 유명해진 <비목>인데 1979년 이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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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노랫말을 따라간 '산장의 여인'의 권혜경,
 
그후 2년간의 이야기

 

 

이름 앞에 늘 '산장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가수 권혜경(1931~2008)이 타계한 지 2년.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충북 청주 일원에서는 현재 추모 열기가 한창이다.

두 차례에 걸친 추모콘서트에 이어 문의관광단지 입구에 세워질 '권혜경 노래비'와 함께 지난 2010년 7월10일에는 '제2의 권혜경'을 발굴하기 위한 '제1회 권혜경가요제' 또한 열렸다. 청원군과 대한가수협회 충북지회(지회장 민진)에 의해서였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한 여인의 삶과 운명을 함께 한 이 노래처럼 만년에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

그러나 그 '산장'엔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다.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 '산장'에는 대체 어떤 일이 그동안 있었던 것일까.

내가 만난 권혜경, 그리고 타계 후 2년간의 이야기

 

 

글 l 박성서, 사진 l 최광호. 박성서

필자가 권혜경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이다. 원로가수 채록 작업으로 이어진 이 만남의 사진은 최광호가 맡았다.

 

권혜경은 단숨에 사진작가 최광호를 매료시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이토록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끔찍하게 껴안고 사는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이러한 감동을 계기로 최광호는 원로 연예인들의 삶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후 채록 일정이 잡히면 그가 누구든 간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 나와 셔터를 눌러댔다.

 

권혜경의 그 무엇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인물사진작가 최광호를 사로잡았을까.

2004년 부산mbc의 '박성서의 음악파일'을 시작으로 그동안 방송과 신문 지상을 통해 밝힌 우리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그 일부분을 먼저 소개한다.

.............................

 

"수소문 끝에 권혜경 여사의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사는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안 하고 산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또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나이 탓이라고도 했다.

무작정 주소만 가지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찾아낸 집은 산마을의 거의 끝자락에 있었다. '예쁜 집'이다. 열 평 남짓한 정원에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정원 한가운데 움푹 파인 구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 날 때마다 스스로 혼자 팠다고 했다.

나중에 본인이 누울 곳이라고도 했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의 몸을 충분히 눕힐 수 있다고 했고 언젠가, 누군가 찾아와줄 사람들과 되도록 가깝게 있고 싶어

일부러 지면에서 얕게 팠다고도 했다. 그녀의 꿈은 이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碑)를 세우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산장의 여인'의 바로 그 '산장'에 와 있는 셈이었다.

'산장의 여인', 그녀 나이 스물여섯이던 1957년에 발표한 첫 데뷔곡이자 대표곡.

 

거실은 널찍했고 벽에 걸린 각종 그림과 사진들, 표창장을 비롯해 상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어

마치 개인 기념관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순간 냉장고 앞에 붙어 있는 글귀에 시선이 멈췄다.

 

'(나) 죽은 후 연락처, 손○○ 02-000-0000, 019-000-0000.' 자필 메모였다.

 

이 메모 속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서울 사는 조카라고 했다.

이렇듯 죽음을 거둬들일 이가 언니의 딸이라니. 그렇듯 권혜경은 이 집을 지은 이래 줄곧 홀로 이 ‘산장’에서 살고 있다. 1994년 5월부터다."

 ...................

 

이렇게 시작되는 당시 이 기사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치매'였다. 이후 병원진단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정확한 이야기를 듣거나 채록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우연히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의 가수 오기택씨 집을 방문했다가, 뜻밖에도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발신자는 권혜경. 수신자는 오기택. 지난 2000년도 초에 쓴 편지였다.

 

편지 내용에는 권혜경 여사로부터 정확히 듣지 못했던 '집에 대한 자신의 심경'이 비교적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당시 양측의 허락을 받고 공개했던 편지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시골에 이사 온 지 9년, 그 많은 병이 다 나았어요. 죽으러 왔는데 '암, 심장판막'. 뽕나무를 차 대신 마시고 살았더니 모든 암이 없어졌어. 모든 신이 날 살려주었어.

 

-중략-

 

연예인은 죽음의 길에서는 집도 잘 지어야지. 집을 예쁘게 지었어. 내가 죽은 후 어려운 아이들에게 주고 싶고 땅도 많이 있는 것 아이들에게 줄 거야. 남이 하지 못하는 일도 많이 했어. 죽음으로서 나의 모든 것이 공개될 거야.

-바보 같은 누나, 혜경이가.' 이다.

 

 

권혜경 채록작업을 하고 있었던 내게는 더없이 반갑고 소중한 내용이었다.

궂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본인의 정확한 증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치매가 그러했듯 어느덧 권혜경 여사는 집에 관해서 조차도 때때로 앞뒤 내용이 바뀌는 등,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

 

또 하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결정할 때까지 적잖이 고심했음을 밝힌다.

 

 

이 사진은 권혜경 여사 타계 4개월 전에 권혜경 여사집을 찾았던 오기택씨와 20여년 만에 만나는 첫 장면이다.

처음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날 만남에 대해서는 짧게 정리해 쓰기가 결코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둘 다 독신이다. 평생을 홀로 살았고 또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고 걱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만나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꺼려했다. 마음 아프게 하기 싫어서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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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 작업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기 시작했고 전화를 받지 않는 날들이 점차 늘어갔다.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수차례, 주기적으로 전화를 했고 또 이따금씩 직접 통화했음에도 본인 외에 외부인이 전화를 받은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점이다. 최광호의 후배사진작가인 조수연도 동영상 다큐멘터리 작업에 가세했고 서강대 김학순 교수로부터는 권혜경의 삶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먼저 권혜경 여사의 의중을 물어봐야 할 텐데 며칠 째 집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무렵이었다. 원로가수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권혜경 여사가 타계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방송뉴스에서 직접 들었다는 원로도 있었다.

영화는 둘째 치고라도 혼자 사는 집에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무작정이라도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았다.

 

집 부근 남이지서를 통해 근황 확인을 부탁하려다가 문득 냉장고에 붙어 있던 '비상용 전화번호' 메모가 생각났다.

이전에 찍어둔 사진을 뒤져 전화를 걸었다. 조카는 처음엔 별일 없다고 했다가 다음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간병인'이라는 이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이 간병인은 집에서 꽤 떨어진 한 교회의 집사로, 봉사를 자청한 여성 분이라 했다. 병원을 찾은 우리 일행은 '간병인'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동안 '생활비와 병원비 등을 감당치 못해' 집이 결국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거였다. 또한 1년 전 쯤에는 마을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측으로부터 '6개월 밖에 못산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이후 퇴원, 한동안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는 말도 함께...

 

그날, 간병인과 함께 찾아간 집은 어느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뜰에 있던 구덩이는 메워져 있었고 한쪽엔 뭔가를 태운 잿더미도 보였다. 냉장고에 붙은 비상메모 또한 간병인 이름과 전화번호로 바뀌어져 있었다.

 

 

권혜경 선생이 퇴원한 뒤 어떻게 모시겠다는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간병인인 주OO집사는, "만일 퇴원을 하신다면, 흔히 말하는

속칭, '시설'로 모실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던 그녀가 몇 차례 방문 이후 말을 바꿨다.

"이 집에는 살아있는 동안까지만 거주할 수 있도록 새 집주인이 양해해주었다."고 했다. 이러한 배려를 해준 새 집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몇 차례 간병인에게 물었지만 끝내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권혜경 여사의 집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새 집주인 명의로 도착된 우편물 한 통을 발견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우편물로 소재지는 대전이었다. 일단 소유주 이름을 알게 된 셈이다.

 

 

이 이름과 함께 후에 더 알게 된 것은 이 새 집주인이 봉사활동을 자청한 간병인이 집사로 있는 교회의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이것을 진작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청주를 오가며 간병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한 주위 상황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일차적인 의문조차 풀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병인이 처음 권혜경 선생을 어떻게 알고 간병을 자청했는지, 그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

생활비와 병원비가 어느 정도였기에 집까지 넘겨야 했는지, 새로운 집주인은 얼마에 어떤 방법으로 이 집을 사들인 것인지,

그렇다면 그동안의 메모라도 적어둔 것이 있는지... 등.

혹 관련자료가 있다면 보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 뒤 쯤 간병인으로부터 노트 한 권 분량의 메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간병인은 권혜경 여사로부터 직접 받은 거라며 여러 장의 자필 메모도 함께 보여주었다.

내용은 제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내가 죽으면 내 모든 걸 주○○(간병인)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 -이러한 종류의 메모들이었다.

 

그럴수록 의문이 수시로 의구심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권혜경 여사가 이렇게 되기까지 어렵게 살아왔을 그 간의 과정을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그 무렵 대한가수협회(회장 남진) 측이 내게 의뢰하고 있던 회보, 'The Singers' 창간호를 통해서였다.

일부 제기될 비난은 감수하기로 했다. '치매'임을 밝힐 수밖에 없는 때가 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외부에 드러나지않게 될 수 있으면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권혜경 여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절실했다.

 

먼저 기사를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우선 불우한 원로들의 생계문제를 포함한 복지문제, 그리고 홀로 사는 독거노인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 등. 실상을 알림으로써 책임 있는 단체가 적극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리고 권혜경 여사의 집을 둘러싼 복잡한 과정은 차치해 두고라도 가능한 한 가수들의 대표권익단체인 대한가수협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을 이 '산장'을 다시 권혜경 여사에게 돌려주는 방안을 모색해달라는 것.

 

대한가수협회의 김원찬 사무총장과 이 문제를 협의했다. 사진이 너무 그로테스크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지만 권혜경 선생의 현실을 알고 나면 프레임이 이해될 거라고 설득했다.

몇 차례 조율 끝에 결국 이 기사는 대한가수협회보 'The Singers' 창간호에 실렸다.

 

 

'The Singers' 지면을 통해 권혜경 여사의 이러한 사정이 가요계에 전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 동료, 후배 가수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청주에 있는 대한가수협회 충북지회가 관심을 갖고 수시로 집을 방문했으며 대한가수협회 이사이자 후배가수 인순이는 자선공연을 펼쳐 수익금 모두를 권혜경 여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가수 정훈희와 이수미는 원로가수 금사향과, 그리고 최백호는 선배가수 한명숙과 함께 공연을 펼쳐 이 모든 수익금을 함께 무대에 선 원로 선배에게 건네는 훈훈한 미담도 이어졌다.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 역시 원로가수들을 위한 '아름다운 콘서트'를 펼쳤다. 이들 공연 현장에서 내가 피부로 느끼는 감동은 남달랐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권혜경 여사는 중환자실로 옮겼다. 연락을 받고 급히 문병 길에 나서기로 했던 사진작가 최광호와 필자는 결국 출발 직전,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8년 5월 25일이었다. 문병을 가려다 문상을 가게 된 우리는 청주로 향하면서 연합통신을 비롯해 가요계, 유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내가 유족들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하자 간병인인 주○○ 집사는 전화로 난색을 표했다.

'그들은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격한 감정으로 몰아세우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권혜경 별세 뉴스'는 인터넷 검색 1위에 올라있었다.

이로부터 3일 간 나는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화환이 속속 도착했다. 가수 조용필의 화환도 보였다.

조용필, 고인도 생전에 조용필이 '산장의 여인'을 즐겨 부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다음날 일간스포츠에 이러한 기사도 실렸다. 그 기사 중 일부다.

 

노랫말 따라 '산장의 여인' 되어 떠난 권혜경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삶을 노랫말에 내어 주는 것일까.

자신의 노래대로 '산장의 여인'이 되어 살던 가수 권혜경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권혜경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을 24일 밤, 국민가수 조용필은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을 치르고 있었다. 이날 5만 관객과 '노래방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던 조용필은  "내 애창곡"이라며 '산장의 여인'을 부르기 시작했다. 중, 장년 관객들도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다음날, 권혜경이 숨을 거뒀다.

 

조용필로서는 아무런 교감 없이 대선배의 가는 길에 조가(弔歌)를 부른 셈이 됐다.

조용필 측근은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 친분은 전혀 없었지만 듣자마자 조화를 보내 예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평소 조용필이 사석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십중팔구는 이 노래를 불렀지만 무대에서 쉽게 부를 노래는 아니었다.

본인도 부음을 듣고 '참 묘한 일'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하 생략, 송은섭 기자 

 

 

권혜경 타계, '산장'도 '산장의 여인'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장례 기간 동안 유족들을 비롯한 지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권혜경의 유일한 생존혈육인 둘째언니 권오택씨(당시 88세)와 그의 아들 건축가 원유택씨(당시 63세)도 만날 수 있었다.

둘째언니 권오택씨는 가수활동을 반대하는 부모 대신 보호자처럼 데뷔 때부터 한 집에 살며 돌봐주었던 인물이다.

또한 그의 둘째아들 원유택씨는 가까운 대전에 살고 있는 건축가로 이 집을 직접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권혜경 여사가 6.25 당시 피난시절을 이곳, 청원에서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조카 원유택씨는 이 집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은 만큼 애정이 남달랐다. 그 역시 명의가 갑자기 제3자로 바뀐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점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집 앞쪽의 임야 중 3분의 2마저도 그들의 명의로 이미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카 원유택씨는 무엇보다 인감을 자신이 대신 보관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며 분개했다.

그리고 강력하게 집만큼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기념관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집 뒤뜰에 수목장을 강행했다. 처음에는 집 앞에 있는 권혜경 소유의 야산, 비록 3분의 1만 남았다지만 그곳에서 수목장을 치르고자 했었다.

 

 

그런데 쉽게 믿지기 않은 상황이 발인 바로 전날 밤 우리에게 일어났다.

'수목장 자연장지 조성에 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는 뉴스가 노트북 화면에 뜬 것이다.

국회에서 통과된 '수목장 자연장지 조성에 대한 법률'은 쉽게 말하면 이전까지는 관계부처에서 정해진 장소에만 수목장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신고만 하면 어느 장소에라도 수목장이 기능하도록 법이 바뀐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권혜경 여사가 타계한 날이었다. 때문에 유족들은 서둘러 수목장 장소를 집의 '뒤뜰'로 바꿨다.

집 조경에 어울릴만한 나무를 다시 구하느라 발인시각을 두시간 늦추면서까지...

집 뒤뜰에서 거행된 수목장 장례식에서 유족인 친지와 지인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며, 고인을 보냈다.

 

 

▲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 유일한 생존혈육, 둘째언니 권오택씨(당시 88세).

그리고 서있는 이가 이 집을 지은 조카, 건축가인 원유택씨(당시 63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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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내 차례였다.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실질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누구보다 간절히 명복을 빌었다.

'사랑마저 물리쳐'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이 산장에서 살다간, 가련한 여인...

평생 '산장의 여인'이 되어 그 운명을 껴안고 살았던 삶이 그러했듯 죽어서도 영원히 '산장의 여인'이 되어달라고...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계속 여기에 남아 당신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겼던 이 '산장'을 꼭 지켜달라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촬영한 '권혜경 다큐멘터리' 작업도 이제 마무리 편집에 한창이다.

 우리는 마지막 '신(Scene)'으로 '제2의 권혜경'을 발굴하기 위한 권혜경 가요제 개막식에서 풍선이 하늘을 향해 오르는 장면과 함께 수목장 나무에서 새 순이 돋는 장면을 렌즈에 담아내고 싶어 했다. '산장의 여인' 끝부분,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의 가사처럼 그 '재생(再生)'을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패였다. 우리가 2년 만에 다시 찾은 집은 또 다른 이가 이미 이사와 살고 있었다.

집은 외형부터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대문의 위치도 바뀌었다. 이미 흙으로 덮어버렸던, 구덩이가 있던 뜰은 모두 깎여져 주차장으로 변했다. 이곳부터 현관까지 돌 계단이 만들어져 집으로 들어가려면 이 돌계단을 거쳐 올라가야 했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서 순간, 난 우습게도 '정말 산장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수목장 또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집을 사서 새로 이사 온 주인은 수목장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누구로부터도 이곳에 수목장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더구나 이 집이 그 유명한 권혜경씨 집이었다는 사실은 집수리하다가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1층 거실을 장식했던 가구와 기타 등 단 몇 개만이 지하실에 옮겨져 쌓여 있었다.

 

집을 함께 찾은 권혜경 여사의 조카, 원유택 씨 또한 이 집이 이미 다른 이에게 팔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조카 원씨로부터 그동안 새 명의의 집주인인 목사아들 측과 내용증명이 오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사아들 측이 '2008년 12월까지 권혜경 여사의 물건들을 모두 치워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가져가지 않으면 임의로 폐기하겠다는 것'을 통보해온 것에 대해 유족 측은 '부동산 매매 행위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과 함께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내용을 다시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그 내용증명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을 확인해보았다.

당시 유족 측인 원유택씨가 보낸 회신 내용 중 답변을 요하는 질문은 이러했다.

1. 이모(권오명, 가수 권혜경의 본명)를 간병하던 주○○씨와 새 주인과의 관계.
2. 간병을 자청하게 된 동기와 시기.
3. 목사님이라는 분의 함자(이름)와 새 주인과의 관계.

그러나 이 집이 또 다른 이에게 팔려 새로운 소유주가 이미 이사와 살고 있는 이 때까지도 이 내용증명에 대한 회신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사랑마저 물리쳐'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장에서 살다간 권혜경.
죽어서라도 영원히 '산장의 여인'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 그러나 권혜경 여사의 강한 꿈과 의지는 이제 이곳에서 사라졌다.
'해피 앤딩'으로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고 싶어 했던 우리들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결국 권혜경의 손때 묻은 기타가 줄이 끊어진 채 지하실에 남겨져 있는 영상이었다.

 

본명 : 권오명.
1931년 강원 삼척 출생. 1956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 이듬해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호반의 벤치',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발표. 60년대 전성기 시절 심장판막증, 결핵 등
병마와 싸우며 활동, 이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재소자를 위한 4백여 차례 봉사활동을 펼쳐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던 그는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표창을 비롯해 5백여 회 표창을 수상했다. 2008년 5월 25일 타계. 현재 청주 일원을 중심으로 '권혜경가요제', '노래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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