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택하신 제자들
본 문 : 막 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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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교사가 옛날의 제자들을 찾기 위해 (경향) 신문에 내보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저는 24년전 경북 영천에서 영도국교 3학년 담임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제자들과 학부모님이 그리워 이 글월을 드립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제자들의 연락처를 알 수는 없을까요? 못난 이 사람이 잘못 지도한 탓으로 스승이 제자를 찾아나서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부디 저의 애통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현대의 제자들은 스승을 거의 찾지 않습니다. 오직 먹고 사는데 유용한 지식만을 배우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그로 하여금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일반군중들과 제자들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7~10절에서 예수님께 몰려드는 군중들을 볼 수 있습니다. 13~19절에서는 예수께서 12명을 불러 제자로 세우시는 주님의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능력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습니다.
9절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밀려드는 군중들 중에는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안수해 주기를 기다릴 것 없이 예수님을 만지기 위해 밀려들었습니다. 자칫 불의의 사고로 예수께서 부상을 입으실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서 해변에서 배를 조금 떼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린 자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를 메시야로 나타내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12절......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메시야 관념은 정복자적인 왕으로 생각하여, 로마인을 쳐부수고 권력으로 유대인을 인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야가 왔다고 하면서, 민족주의적인 반란과 폭동이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심각해집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하나님나라의 진리는 흙에 묻혀버리고, 도리어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운동만이 나타나서 결국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가르쳐야 할 그 길이 굽어지게 됩니다.
예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희생과 봉사,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찾아오는 많은 군중들을 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자신들의 목적한 바가 이루어지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살만하면, 돈 버느냐고 바쁘다고 해서 주님을 떠납니다. 건강해져서 일 할만 하면, 주님의 은혜 잊어버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면,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맙니다. 열명의 문둥병자중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한 백성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내어준 것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중의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막1장에서 이미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서 이미 세 가지 요소를 주목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다른 하나는 우리의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그리고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이 세상에 다시 보내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13~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부르시니...함께 있게 하시고....또 보내사.."
`나를 따르라' 이 주님의 부르심은 종말론적인 부르심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에 이러한 의미가 나타납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의 기간 6일 마져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막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게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16절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여기서 '세우다'는 말은 원어 포이에오( )로서, '만들다, 세우다, 행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사형으로 발전한 포이에마는 피조물의 뜻을 가지고 있고, 포이에시스는 창조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그들을 세우시는 것은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들의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모든 것을 주심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와같이 말씀하십니다.
막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는 것은 내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성격이 불과 같아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가롯 유다같이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자도 그들 중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서에서 이와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때문에 주께서 나를 부르신 것을 전적으로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내가 스승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서를 강해하면서, 처음부터 강조된 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예수님의 인격과 그 삶을 배우고, 이 세상에 나아가서 죽어있는 자들에게 새생명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 생명의 증인으로 보내기 위해서 입니다.
13-15절을 다시 읽음으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
새술은 새부대에
본 문 : 막2: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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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과 파란색은 분명히 서로 다른 색입니다. 빨간색을 가지고 파란색을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빨간색만을 알고 있는 사람은 파란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빨간색을 그대로 가지고 파란색을 받아들이면, 파란색이 되지 않고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보라색이 되고 맙니다.
인간은 빨간색을 가지고 파란색을 보려고 합니다. 더욱이 죄인인 인간은 그 빛을 바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구원은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반성이 아니요, 회개입니다. 변화가 아니라 부활입니다.
여기에는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계3:20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단지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영성의 부활은 바로 시작되지만, 생활태도의 변화는 오랜 훈련과정을 통해서 성숙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시대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부딛혔던 문제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추수를 하거나 도정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이삭을 거두어서 손으로 비벼서 이를 먹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에 추수의 일과 도정의 일을 하였다고 고발당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7-28)
그리고는 예증이나 하듯이 3장 1~6절에서 친히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를 명하고 있는데, 그중에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에 물구덩이나 구렁에 빠졌을 때 그를 사다리나 밧줄이나, 그밖의 기구를 가지고 끄집어 내서는 안된다." "안식일에 탈골된 것을 교정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안식일에 행한 행위는 실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지켰던 그 토요일 안식일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
오늘 이 의미 한 가지만 알고 가셔도 족한 줄로 압니다.
안식에는 두 가지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1.2장에 배경을 둔 창조신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다 이루시고 그 다음 날 쉬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다 이루어 놓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그날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속신학의 배경입니다.
신5:15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내가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곧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얻게 하신 날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에는 네 가족은 물론, 네 집의 가축들과, 네 문안에 유하는 객들과, 남종과 여종까지도 다 안식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곧 구속과 해방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에게 부활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입니다. 더욱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의 고통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삶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애굽의 종살이와 같은 삶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오셔서 안식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주인이십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부활의 역사가 없이는 어떤 인간에게도 안식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지켜오던 안식일-토요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를 이루신 날 일요일-주일로 바뀌어 지켜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복된 안식일에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의미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1)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의 잔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주께서 다 이루어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2)구원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죄로부터의 건짐과 용서와 치유, 사랑, 믿음, 소망을 즐거워하는 잔치입니다.
3)함께 하는 잔치입니다.
자신과 가족과 종과 객과 그 누구라도 함께 어울리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 병자에게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손마른자에게 명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3:5)
주님은 안식일에 그에게 새롭게 일할 수 있는 손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곧 예수님 부활이후의 구원받은 자의 삶의 형태는 이미 안식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삶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고통스런 노동에 매여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쉼에 이르는 노동의 즐거움으로, 이웃을 살리는 노동의 즐거움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당신을 위한 것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
본 문 :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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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두루 퍼졌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북부해안에 위치한 가버나움 동네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 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반적으로 문을 열어놓고 삽니다. 이에 한 사람도 더 들어올 수 없게끔 사람들이 찾아왔고, 열어놓은 문 밖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 습니다. 때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중풍병자와 그를 사랑했던 이웃들이 그를 침상채 메고 와서 지붕을 벗겨내고 지붕으로부터 달아내려 예수님앞에 둠으로, 중풍병자가 일어나게 된 것을 오늘 말씀에서 대하게 되었습니다.
1.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명이 침상채 메어가지고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이들의 지붕 구조는 약1m간격으로 벌려놓은 대들보 위에 잡목으로 가로지르고, 그 위에 진흙으로 덮어서 만들었습니다. 지붕은 평평하였고, 밖으로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종종 휴식과 기도를 위해서 지붕으로 올라가곤 하였습니다.
때문에 지붕을 벗겨내는 일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줄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쳐구니 없는 일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리어 한 중풍병자에 대한 그들의 돌봄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입을 열어 그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께서는 목적을 가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한 중풍병자로부터 죄를 보시고, 그 죄의 용서함이 없이 치유될 수 없음을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중풍병자? 이른바 뇌졸증 환자입니다. 뇌의 어느 부분에 핏줄이 터지거나 막히거나 함으로 뇌기능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어서 오는 질병입니다.
많은 질병이 인간의 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와 사회구조적인 죄악이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28:60~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말씀을 떠나 죄를 지을 때에는 이와같다고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을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
근본적인 죄로부터의 해방을 얻지 못하고, 인간은 이러한 질병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인간을 중풍병자와 같이 만듭니다. 죄는 인간을 멸망케 합니다.
죄에 빠진 사람은 마치 자동차 가는 길에 던져져 있는 큰 바윗돌과 같습니다. 자신도 바로 살지 못하고, 남에게도 손해를 끼칩니다. 가정에 한 사람이 죄의 수렁에 빠지면, 다른 가족도 함께 고통당합니다.
한편, 한 사람의 환자로 인한 고통과 수고는 온 가족의 고통이 됩니다. 이것은 곧 그 가족, 그 집단의 죄에 대한 공유적인 고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환자의 죄라기 보다는 그 집단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집단의 회개를 통하여 그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 자신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 곧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계시하시는 일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께서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직 하나님 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 함께 앉은 서기관들의 마음의 의논을 아셨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베껴쓰는 일을 주로 하였고, 율법을 가르치는 일도 하였습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 곧 의회 의원으로 당시 유대교에서는 중추적인 지도자급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서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음의 생각을 의논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9-10)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여기 서기관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죄의 결과로 질병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의 용서가 없이는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냥 "일어나 걸어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심의 권세를 증거하셔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고, 이어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서기관들, 그들이 도리어 중풍병자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2. 예수께서는 인생을 죄로부터 해방케 하시는 구주이십니다.
인간이 나라법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감옥에 가지요. 성경에 보시면, 죄인들을 감옥에 가두면, 사슬로 팔 다리를 묶어둡니다. 중풍병자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에게 결코 자유함이 없습니다. 자유한 자 같으나 실상은 돈을 버는 노예가 되며, 자유한 자 같으나 실상은 밥먹는 종밖에 되지 않습니다.
롬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루터는 자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찬은 가장 자유하다. 세상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앞에 나아가 자신을 맡김으로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십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다. 황제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 먼저 그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그는 답변하기를,
"그러나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황제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곳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 넣어 너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 시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저에게 결코 저를 떠나시지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격노한 황제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는 (1880-1966)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것을 배운 기적의 인간입니다. 그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배운 것 중에 최대의 소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가지 무엇인가의 노예로 머물러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 온전히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 명하노니,
"넘어져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라"
이제 나가서 중풍병자와 같은 이 세상의 이웃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사랑의 인도자가 되십시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본 문 :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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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죄인된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께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루는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금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마태복음에서는 마태 (마9:9)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따돌림을 받던 마태가 당시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세리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 제자가 됨으로, 도리어 유대인을 구원하기위해 마태복음서를 남기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위보다 마태로 더 잘 알려져 있기에 마태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세리 마태의 삶의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남들이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경건한 자는 그의 곁에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자신이 그러한 죄인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 자리에 스스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 있었습니다.
자기 유대나라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것만도 억울한 일인데, 로마를 위해서 자기 동족들의 피나는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자신의 이중적인 인격에 대한 고통이 그를 더욱 괴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면서도 감히 다른 어떤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한계를 통감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께서는 그냥 이 사람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세관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14)
이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눈길이십니다.
이는 이 사람의 삶을 전환하는 부름이었습니다.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자기에게 손 가락질만 하는 세상에, 예수님의 그를 향한 눈길과 초청은 그의 삶을 일으켜 세우고도 남았습니다.
"일어나 좇으니라"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과 일어나 좇은 모습은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앉아있다! - 이는 지금의 그러한 삶을 원치 않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고착되어 버린 삶의 형태입니다. 마태 그는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일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그 삶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담배를 먹으면서, 어쩔 수 없이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의하게 돈을 벌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적인 삶의 자리에 앉아만 있던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박차고 과감하게 일어나게 만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그에 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초청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는 지금까지의 안정과 풍요함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 곧 내가 살아가는 있는 방식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입니까?
혹, 지금 우리들의 생각안에는 이런 생각이 있지는 아니합니까?
오늘도 내가 주님께 구하는 기도 가운데는 그러한 구함이 있지 아니합니까? 다름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를 떠나 주님의 부르심의 삶을 살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더욱 머물러 그곳에서 안정을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에 대하여 재물과 명예를 구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어나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 본토에서 불러내시고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증거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부르신 후에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부정한 돈을 만지는 사람들, 강도, 이방인들 이른바 죄인들과 한 식탁을 나누는 것은 부정한 일로 보았습니다. 더욱이 의로운 자, 선지자, 경건한 자들은 이러한 죄인들과 직접적으로 교제를 하는 일을 삼가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는 더욱 예리하게 감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죄인의 식탁에 함께 앉은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고, 드디어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예수님은 왜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체를 나누셨습니까? 여기서 식탁교제의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1) 식탁교제는 식탁에 참여한 자들이 인격적으로 친분의 공통성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시입니다. 이 식탁의 교제를 거절하는 것은 서로의 하나됨을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반면에 식탁 교제에의 참여는 서로의 형제됨과 우정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식탁교제는 서로의 용서의 보증으로서 새로운 신뢰의 관계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2) 식탁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식사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와 축사는 이 식탁교제의 예배적인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면 그 의미를 쉽게 헤아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식탁을 대하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서 음식을 나눕니다. 이렇게 함으로 가족은 함께 식탁의 축복에 참여합니다.
초대교회가 식탁공동체를 매일 가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함께 하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3) 주와 함께 하는 식탁교제는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자리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기쁨의 잔치에 귀한 손님이 됩니다. 긍극적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용서를 미리 경험하고 그 종말론적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한 식탁공동체의 식사는 바라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마11:19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눅15:2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눅19:7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과 용서와 친교를 행동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음으로 이를 의도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였습니다.
17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주님의 초청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환자와 같이 죄인의 애통함을 아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초청의 음성이 들립니다.
스스로 의인된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초청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죄인 세리 마태는 주님의 부름의 음성을 듣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는 어디에 앉아있는가? 일어나 나를 따르라!
부모의 마음
본 문 : 막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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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미신이 사라졌는데 옛날에는 문지방을 밟으면 야단을 맞았습
니다. 왜냐면 예로부터 내가 만든 '집을 중요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집과 바깥 세계를 나눠놓은 경계선을 신성시 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집이란 쓰러지는 판자집이라도 자기에는 하나의 작은 세계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아드는 "집이란 단순히 사람 사는 곳만이 아니라 집의 상징성은 작은세계, 우주의 탄생"이라고 했습니다. 셍떽쥐베리는 깊은 산속 오두막집에서 불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별과 별의 통신"이라고 하며 캄캄한 밤중에 한 가정에서 밝힌 불빛이 별과 통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즉 가정은 항상 생명이 있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는 곳으로 집이 있는데 밤에 불이 꺼진 캄캄한 집은 생명이 없고 답답하지요.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집을 짓고 거기 최초의 등불을 켤 때 작은 영토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창조의 삶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고 정
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정에게 주신 축복의 기
능들이 상실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시대가 되어서 가정은 창조의 장에서
소비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현대 가정은 위기를 맞고 흔
들리고 있습니다. 엣날엔 모든 일이 집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살 아가는 모든 이야기거리가 가정의 몫이었고 가정은 삶을 창조하는 공장같
이 '만드는 기능'을 충실히 했습니다. 집에서 옷도 만들고, 된장, 고추장,
간장도, 입는거, 먹는거, 살아가는 것, 직업교육도 가정에서 다 했습니다.
지금은 home made는 비싸지요. 그런데 이런 가정의 기능이, 창조적 기능
이 전혀 없고 소비 기능만 있기에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니, 애고 어른이
고 밖으로만 나갑니다. 밥도 사먹으러 나가고, 옷도 사 입으러 나가고,
배우러 나가고, 집안에서 배우고 느끼고, 결단하는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돈만 들고밖에 나가기만 하면 슈퍼에, 백화점에 다 있고, 돈으로 행복을
찾겠다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병든 가정을 치유하지 못해 고민이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효도하
는 마음이 사라지는게 당연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오늘 우리가 있기까지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먼곳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르링크가 쓴 동화 중에 `파랑새'라는 작품이 있습니
다. 서양에서는 '파랑새'가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가난한 나뭇꾼 집에 태어난 치르치르와 미치르라는 오누이가 크리스마스 전날밤 파랑새를 찾으로 꿈나라에 여행을 갑니다. 회상의 나라에서 죽은 자들을 만납니다. 밤의 궁전에서는 갖가지 비극과 재앙을 봅니다. 행복의 궁전에서는, 물질과 돈의 허구를 봅니다. 미래의 궁전에서는 태어날 어린이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토록 찾던 파랑새는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꿈을 깼습니다. 한없이 허무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자기집 처마 끝에 매달린 새장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비둘기였습니다. 오늘도 참된 행복을 집에 놓고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잊어버렸던 우리의 가정ㅇ, 병들고 황폐해가즌 우리들 가정의 뜨락에 서서 이제 가정을 염려하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더이상 병들어 신음하지 않도록 기쁨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행복의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두가지 문제를 집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부모
자신의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성공적인 자녀가 나왔습니다. 사실 자녀교육만큼 어려운게 없습니다. 돈을 들여 세상교육은 얼마든지 시킬 수 있으나 진정한 삶의 교육, 신앙교육은 돈으로 못합니다. 모세나 사무엘은 모두 위대한 인물이지만 자녀교육에는 실패했습니다. 다윗도 자녀가 잘못되어 큰 곤욕을 치르는 비극의 왕이었습니다. 더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 아담도 자녀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녀 교육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완벽한 부모는 이런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이것저것 다 간섭하고 자녀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준다. 끊임없이 충고하고 "밥 먹어라. 단추 채워라. 문 닫아라. 빨리 가라. 숙제 해라. 뭐하지 마라" 부모나 자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완벽한 부모는 항상 자녀들이 기계처럼 복종하기 원하고 잘하면 보상 못하면 벌을 줍니다. 애들은 반항하고 분노, 포기, 거짓말하는 아이들이 되고 자율성이 없어집니다. 반면 허술한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아무런 간섭도, 통제도 안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지 인생 지가 알아서 하겠지' 합니다. 이런 부모의 자녀들은 세상 유혹에 쉽게 빠져 들도 방종하게 됩니다. 유능한 부모가 부모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부모는 우선 자신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입니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합니다. 자녀를 격려해주고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특히 자녀 위해 희생적 기도를 드리는 부모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는 최고의 힘을 줍니다. 가장 훌륭한 부모의 모델은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자기 딸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부모였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우리 부모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1. 어머니의 인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는 오랜 세월 인내하며 딸이 병고침을 받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어
머니가 우리의 부모상입니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치는 어
머니의 사랑입니다. 내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
리십니다. 마음으로 "우리 딸이, 우리 아들이 훌륭하게 될거야. 지금은
학교에서 문제아지만 언젠가 반드시 착한 애가 될거야"라고 기다립니다.
남들이 무시하고 멸시해도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기다려 주시는 부모님의
인내입니다.
2.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살렸다. 본문 26에 간구함을 매달려 기도함이다.
보통 기도가 아니라 절규하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기도가 예수님의 마
음을 움직일 수 있었과 어머니의 기도가 자녀를 살립니다.
3. 어머니는 수치를 받으셨다. 어머니를 본문에서 `개'로 취급했습니다.
처음엔 이 여인이 거절 당하는 모독을 받고 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러나 딸이 아파서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이런 수치는 호강스럽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기도가 이겼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참으로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갸륵한 사랑을 예수님이 받
으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단장의 애>란 말이 있습
니다. 진나라때 환온이란 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았더니 그 원
숭이의 어미가 슬피울며 죽었답니다. 그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
디마디 끊어져 있었답니다. 이게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그
러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부모님 앞에 효도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효행이 뛰어
난 나라였습니다. 50년 전만해도 빨리 늙고, 빨리 노인되기 원하는 나라
였습니다. 고종 황제의 밀사노릇가지 했던 헐버느는 "이 세상에서 효행이
최고인 나라는 조선이다"고 했고, 미국공사를 역임했던 샌즈의 회고록에서는 "나의 노년을 위해 조선 땅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은 "조선은 늙음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노인의 천국"이
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다 흘러간 옛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부모를 공
경하지 않습니다. 노부모를 모시기 힘들다고 관광지에 버리고 병도 없는
부모를 강제 입원시키고 심지어는 부모를 때리고 살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명심보감에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 애달프다. 어버이시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으랴. 그 깊은 은혜 갚으려 하나, 그 은혜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어라." "효자는 효자를 낳고 오역의 죄를 범한 자는 오역의 자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예기 "효기 백가지 행동의 기본이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은 두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계명과 사람의 효자되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부모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 없고, 사회적인 명성이 없어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한 룻처럼 나오미는 아들도 없는 가난한 시어머니였습니다. 유산도 없고, 후사도 기댈 것 없는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공경했고, 봉양했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어 보아스를 신랑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태어낙 하셨습니다. 장신대 총장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대학원생 면접시간에 "자네는 누구를 존경하는가?" 물으니 자기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하더랍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예 농촌에서 농사짓고 계십니다" "직분은 무엇인가?" "교회 집사입니다" 하기에 이 학생은 됐다 하고 합격 시켰다는 것입니다. 효도하면 하나님이 복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 20:21 "부모 공경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
엡 6:1 "네가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의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생은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되기 바랍니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원합니다. 그런 생을 위
해 부모 공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 공경은 약속있는 첫계명입니다. 우리 들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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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