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랑방 안동 제199호(2022.7~8)
목탁 소리 사라진 절터에 홀로 남은 탑마느티나무
탑마는 풍천면 금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폭 좁은 하신천 시내를 따라 양지바르게 작은 취락이 형성돼 있는데, 가장 유서 깊은 마을이 바로 이 탑마다.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마치 비단처럼 아름다워 금계리錦溪里라 하였다. 이곳은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마’ 또는 ‘탑리塔里’라고 불렀다. 탑마 서쪽 산기슭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한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장구한 세월을 보내면서 절은 사라졌고 경내에 세웠던 오층전탑은 허물어져 겨우 기단부 흔적만이 돌무더기처럼 쌓여있다. 탑에서 1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는 이 절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으려나? 탑과 고목은 사찰 경내의 같은 마당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지만 이웃한 전탑마저 사라졌으니 휑한 절터에 홀로 남게 된 신세가 가련한 모습이다.
어느 여름날, 필자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삽재를 넘어 탑마느티나무에 이르니 매미 가족들은 일제히 합창으로 환영해주었다. 산 높고 골 깊은 오지의 생경한 풍경이 아직 눈에 익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청량한 노래는 어느 조화로운 오케스트라보다 반가움과 기쁨의 선물로 다가왔다. 무성한 가지와 잎새로 덥혀 그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줄기에는 많은 매미껍질을 남겨두었다. 우화과정에서 남긴 탈피 흔적으로 어느 대갓집 대문채의 문패처럼 걸려있다.
원줄기는 죽어도 당당한 모습의 느티나무
탑마 도로변(풍일로)에 차를 세우면 약 80m 북쪽 산기슭에 당당한 모습의 느티나무가 보인다. 나무 앞 넓은 무논에는 7월의 벼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느티나무 그늘에는 다릿발이 높은 육각 정자를 놓아 한여름 바람 쐬기 좋은 쉼터를 마련해 두었다. 마침 마실나온 할머니 두 분이 더위를 식히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곁에 가보니 나무는 생각보다 줄기가 굵고 사방으로 잘 안배된 가지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원줄기가 톱으로 잘려나갔고 뿌리에서부터 잘린 부분까지 큼직한 외과수술을 받아 진회색 몰탈로 매워져 있었다. 병에 걸린 건지 아니면 벼락으로 인한 피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주민들 말로는 어느 해 겨울 누군가 나무 속통에 불을 질러 화재 피해를 봤는데 그래도 다 타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오래 살다 보니 이런저런 수난을 겪었던 모양이다.
2015년에 발행한 ‘안동의 당나무’에서는
‘현재 나무의 보존상태는 그리 좋지 못하다. 고사된 부분이 많아 뿌리에서부터 가지에 이르기까지 외과수술을 크게 실시한 흔적이 보이며, 가지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쇠기둥을 세워두었다.’라고 쓰여있다. 가지를 지탱해주던 쇠 받침대는 당시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지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원줄기였던 모양이다. 7년이 지난 오늘 와보니 쇠기둥은 치워지고 원줄기는 완전히 고사하여 잘려나간 상처만 보인다. 그래서 이 거목은 원줄기를 잃어버렸으니 남은 사방의 가지가 비대해지면서 펑퍼짐한 외관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눈비와 태풍으로 가지쩌짐을 방지하기 위해 마주 보는 굵은 가지 사이에 강철 로프를 연결하여 두었다. 나무 살 속 깊숙이 앙카보드를 박고 그 고리에 로프를 연결하여 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거수 보호를 위한 알맞은 처방은 아닌 듯하다. 필자가 여러 보호수를 만나보았으나 이런 방법으로 가지쩌짐에 대비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나무 아래 바닥 면을 완전히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아마도 잡초가 못 자라게 마을 주민들이 조처한 모양이다. 시멘트 바닥은 관리가 쉽고 청소하기에는 좋은 면이 있으나 나무의 생장에는 결코 좋을 수가 없다.
보호수 탑마느티나무 아래에는 오석으로 만든 사각형 표지석이 서 있다.
고유번호 : 11-14-5-7-1
수종 : 느티나무 지정일자 : 1982년 10월 26일
수령 : 150년 소재지 : 풍천면 금계리575-3
수고 : 14.5m 관리자 : 안동시장
나무둘레 : 6.6m
당신堂神의 역할보다 주민들의 쉼터로
현재 나무의 생육 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해 보이고 위로 자라기보다 옆으로 성장하여 수관의 폭이 한참 넓어졌다. 가지고 있던 줄자로 가슴높이둘레를 실측한 결과 7.7m였다. 20년 전보다 1.1m나 더 굵어졌다.
동네 느티나무 아래로 마실나온 강순희(87세)와 김계화(85세) 할머니를 만났다. 둘은 언니 동생하는 매우 다정한 단짝이라고 소개하였다. 예전에 이 당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경쟁하듯 풀어주셨다.
“근 40년이 넘었나? 그때 동네에서 정한 제관이 있었는데, 그 사람 집안에 불미스런 분란이 생겨가주구 쭉 내려오던 동지사를 못지냈니더.”
“그 분란이란 게 뭐였나요?”
“ 글쎄 말이시더, 그게... 좀 부끄러분 일인디..., 그집 아들이 남하고 쌈이 붙어서 난리가 났으니 그런 집안사람이 지사를 지낼 수는 없었니더.”
자세한 사건의 내막을 말하기를 꺼리는 눈치여서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적어도 40년 전까지는 탑마 당나무의 민속의례는 존속하였으나 그 사건 이후로 당나무 고사는 중단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제관이라면 남달리 몸과 마음을 극히 정재해야할 터이니 그런 부담을 감당할 현대인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 아닌가. 다른 농촌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런 민속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육각형 정자는 탑마 주민들의 요긴한 휴식공간으로 느티나무 그늘 속에 지어졌다. 이웃한 논과의 수평 차가 심하여 논땅 일부를 희사받아 지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낮은 논쪽의 정자 다릿발을 길게하여 수평을 맞추었다. 여름철 시원한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낮잠 한잠 자기에 매우 안성맞춤으로 생각되는 장소였다. 그 외에도 주민 편의시설로 튼튼한 나무벤취 3개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농사철이라 찾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예의 두 할머니께서 매일 쓸고 닦고 하며 청결을 유지해 왔으나 이도 이젠 힘에 부쳐 청소하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 농촌 실정의 노령화로 인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이웃한 전탑은 태풍 사라로 무너지다
이제부터는 본 느티나무와 같은 절 마당을 쓰고 있었던 ‘금계리오층전탑錦溪里五層塼塔’과 도난당한 금계리 ‘비로자나석불毘盧遮那石佛’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려 한다.
아득한 옛날, 통일신라시대에 탑마 서쪽 산기슭에 ‘화인사’라는 절이 세워지게 되었다. 물론 절집도 여러 채 짓고 부처님을 모셨을 터이다. 절 마당에는 높은 탑을 쌓아 신도들의 기도처로 삼았으며 기화요초를 심어 이승에 아름다운 불국토를 꾸미지 않았겠는가.
법당이 있을 법한 곳은 모두 콩밭이나 참깨밭으로 변하였고 혹간 과수원도 보인다. 양지바른 층암 절벽을 배경 삼아 규모 있는 사찰에서는 저녁 범종이 울렸고 염불 목탁 소리 끊이지 않았으리라. 절 마당 가운데는 정성으로 구운 벽돌로 한층 한층 탑을 쌓으며 소박한 소망과 생의 염원을 새겨넣었겠지. 그 탑이 금계리오층전탑이다. 필자가 현장에 갔을 때는 완전히 무너진 지 63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그저 개간지의 돌무더기 모습으로 변하였고 그 위로 오만 덤불이 올라타고 있을 뿐이었다. 덤불을 헤치고 겨우 찾아낸 부서진 벽돌 몇 조각에 흙을 털면서 천년의 시공을 오가는 상념에 싸였다.
안동문화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대목이 ‘안동은 전탑의 고장’이었다. 안동의 불교 문화 중에서 특징적인 요소로 전탑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고장이라는 말이다. 1608년에 발행한 향토지인 ‘영가지’에는 7개소의 전탑을 기록하고 있다. 즉 법흥사전탑, 운흥동전탑, 조탑리전탑, 임하사전탑, 금계리전탑, 개목사전탑, 옥산사전탑(월천전탑)이다. 그중 법흥사지7층전탑, 운흥동5층전탑, 조탑리5층전탑은 현존하나 옥산사와 임하사, 개목사전탑은 벌써 사라졌고 금계리5층전탑은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 영남지방을 덮칠 때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금계리 화인사는 창건 시기를 9세기 초 830년 경으로 보고 있다.(일단의 학자들의 주장) 그렇다면 사찰 창건 시기와 안동 지역의 활발했던 전탑 조성 시기에 이 탑도 조성되었으리라는 추측해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사라호 태풍이 오기 전에 촬영된 흑백 사진에서는 이미 탑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고 옆으로 많이 기운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모습으로 얼마나 오래 지탱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태풍과 지진에는 취약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잡초 속을 헤집으며 전탑의 밑자리[基壇部]를 확인해보려 하였으나 흙에 묻히고 덤불에 가려 줄자를 대보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느티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나무벤취에 앉아 땀을 식히며 이런 질문을 던저본다.
1. 왜 하필 이곳에다 전탑을 세웠을까?
2. 천년의 긴 세월 동안 몇 번이나 무너졌을까?
이곳에서 약 8km 동쪽에 일직면 조탑리5층전탑이 있다. 규모나 조성 시기, 주변 환경이 너무나 비슷하다. 두 전탑은 국곡과 어담 사이의 고갯마루를 기준으로 비슷한 거리에 서 있다. 단 조탑리전탑은 동류하는 물가에 서 있고 금계리전탑은 서류하는 물가에 서 있을 뿐이다. 탑을 조성한 기존재료인 전돌의 형태나 크기는 두 탑이 비슷하나 조탑리전탑에서만 측면에 문양이 확인되고 있다. 이곳의 전돌은 암회백색 무무늬 전돌을 주로 사용했다. 벽돌은 납작한 사각형 모양이고 가로 26.5cm, 세로 8.5cm, 두께 5cm이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나 청 색깔이 도는 전돌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수 과정에서 새로 구운 보충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두 탑은 통일신라시대 엇비슷한 시기에 배산임수의 위치를 잡아 조성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금계리전탑은 본래 5~7층으로 추정되며 겨우 4층까지 남아있다가 태풍 사라로 완전히 무너졌다. 이후 마을 주민들이 흩어진 벽돌을 모아 진흙으로 접착하여 조악하지만 단층 모양으로 탑을 만들었다. 자연의 재해와 사람의 무관심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마저도 관리가 되지 않아 풀 속의 돌무더기로 방치되는 실정이다. 소중한 불교 유적이 이렇게 방치되고 소멸되는 게 안타까워 탑마 주민들은 이 탑의 복원을 위해 여러 차례 건의하고 호소하였으나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자 이젠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굴꾼에 보쌈당한 보물급 비로자나석불
사라진 화인사 절터엔 또 하나의 수난사가 전한다. 점마 아낙들이 아침저녁으로 정화수를 바치며 소원을 빌고 기도하던 신앙의 대상이었던 불상을 도난당한 사건이었다. 아까 만난 김계화, 강순희 할머니가 번갈아 가며 일러바치듯 말했다.
“돌부처는 조기 당집에 있었는디, 양손을 요래 잡고 앉아 있는 돌미륵인디, 어느 날 밤에 도적놈이 차에 실고 갔잔이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몰랬니더.”
“차를 저짝 밭뚝에 대 놓고 그쯤꺼지 끌고가서 실고 훔쳐갔니더. 참말로 귀신 곡할 노릇이지요.”
도난 사건은 1998년 일어났다. 아마도 문화재 전문 도굴꾼의 소행으로 보인다. 탑마느티나무 바로 앞에 시멘트 블록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은 작은 ‘탑마당집’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그 당집 안에 앉아 있던 돌부처를 훔쳐 간 것이다, 그러니까 당집과 전탑 그리고 탑마느티나무는 서로서로 마주 보며 가족처럼 모여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깨어진 기왓장, 이끼긴 돌, 흩어진 벽돌 파편들은 모진 세월 인고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도난당한 불상은 돌로 다듬은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이었다. 사진으로 보아 ‘마애리비로자나불좌상’과 너무 닮았으나 두부는 더 투박한 조각 솜씨로 보였다. ‘조선고적도’ 도록에 도난 전 촬영한 흑백 사진에서는 손가락을 가지런히 감아쥔 양손을 가슴에 대고 있다. 오른쪽 무릎에 약간의 상처가 보이지만 석불 뒷면에 있는 광배는 온전한 상태로 확인된다. ‘경북마을지’에는 ‘탑은 사각형 지대석 위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높이 660cm의 석불을 앉혀 놓았다.’ 하였는데, 아마도 그 석불이 전탑이 무너지니 할 수 없이 곁에 당집을 짓고 석불을 옮겨놓은 것으로 생각한다. 즉 전탑의 감실에 계시던 부처님을 탑이 붕괴하니 부처만 끌어내어 작은 집을 짓고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당집으로 이동한 석불은 이후 이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빌던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아들 낳기를 원했고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무사 안녕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풍년 농사를 기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것을 감쪽같이 잃어버렸으니 그 실망감이 오죽했으랴. 뿐만아니라 또 다른 날, 도굴꾼이 와서 무너진 전탑의 기단부 내부를 파내어 무엇을 훔쳐 갔는지도 모른다고 주민들은 진술하였다. 이웃 아낙이 우물에 물 긷기 위해 나와 보니 탑의 가운데가 밤새 파헤쳐져 있음을 발견했단다. 우물은 바로 탑 앞에(현재는 우물은 매워졌고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다) 있었다. 그러니 전탑의 심초석 부분을 도굴하였다는 뜻이다. 이 마을은 두 차례나 도난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경찰에 도난신고를 하였으나 수사 실적은 없었다.
마을 주민 박영태와 정재봉 씨는 잃어버린 석불을 찾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가서 온갖 골동품상을 뒤졌다. 그러나 비슷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오죽 화가 났으면 그랬나 싶다.
진짜 비로자나 부처님은 잃어버렸지만 민초들의 신앙심은 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빈자리에는 요즘 시중에서 거래하는 이미테이션 석불상 하나를 안치해두었다. 타나 남은 촛불과 조화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가끔 개인 기도처로 활용되는 흔적이 분명하다. 조금은 허름하고 농사용 창고처럼 남아있는 당집 안에는 옛 절터에서 수습된 5개의 돌덩이가 놓여있다. 2개는 연화문이 뚜렷한 둥근 모양이라 불상 좌대나 기둥 초석으로 보이고 나머지 3개는 석탑 부재가 분명했다.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정육면체의 다듬은 돌로써 석탑 어느 부분의 탑신석(탑의 몸돌)이었다. 양 모서리 쪽으로 도톰한 우주가 양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전탑만 존재하였던 절이 아니라 석탑도 함께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탑마를 떠나며
오늘은 보호수 탑마느티나무를 취재 왔다가 아득한 옛 화인사 폐사지를 보고 속절없는 연민에 빠진 느낌이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한가. 사라진 사찰의 황량한 시간을 거슬러 보는 소중한 순간이 아닌가. 염불하던 중도 벌써 떠났고 절도 연기처럼 사라진 땅 위에는 깨어진 기왓장 사이로 콩잎이 자라 바람에 나부낀다. 전탑은 신라 무사의 강골처럼 버티다가 그도 60년 전에 운명을 다하였고 언제 생겨 언제 없어진 지도 모를 석탑은 몇 개의 돌덩이로 변하였다. 역사의 수난 속에서도 용케 남아오신 돌부처님은 낯선 도둑에게 보쌈당했으니 폐사지의 분위기는 그저 가슴만 싸할 뿐이다. 목탁 소리 사라진 절 마당에 오직 홀로 남은 늙은 느티나무만이 먼 과거에서 오늘까지 시공을 연결하고 있었다. 탑마느티나무은 유서 깊은 금계리의 허전한 서쪽을 비보해 주고 아울러 하신천의 수구매기 역할까지 묵묵하게 담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