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라운드에서 약자였다.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최전방에 시세 대신 바로스를 선발로 내세운 이유는 공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을 잘 지키긴 했지만 공격적으로 나서는 팀은 아니었다. 바로스는 라인 사이에서 공을 받아 골대를 등지는 능력이 있었기에 최전방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저는 선수들에게 경기 초반에 공을 뺏기지 말고 오래 뛰면서 처음부터 압박받지 말고 자신감을 얻으라고 말했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그렇게 빨리 실점한 것은 충격이었고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게임 계획이 바뀌지 않았다."
"사비 알론소는 종종 라인 사이를 누비며 위험한 움직임을 펼치는 카카와 홀로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박스 투 박스인 제라드는 원래 위치를 벗어나 전방으로 돌진하는 경향이 있어서 두 센터백은 크레스포와 셰브첸코와 일대일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다. 끊임없이 오버래핑하는 카푸는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종종 후방에서 수평을 이루거나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키웰까지 급작스레 부상을 당해 스미체르를 투입해야 했다. 저는 시즌 내내 경기에 나서지 않는 선수도 어느 경기에서든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에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체로 자주 출전한 스미체르는 그 말을 이해했다. 루이스 가르시아를 바로스 뒤쪽 중앙에 배치하고 스미체르를 오른쪽 측면에 배치했다. 루이스는 매우 역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선수라 중앙에 배치하면 위험할 수 있었다."
"루이스 가르시아가 박스 안에서 움직이다가 네스타의 태클에 걸려 공이 손에 맞았다. PK를 외쳤지만 역습 상황에서 두 번째 골을 내줬다. VAR가 있었다면 무효였을 텐데.. 두 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또 한 번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벤치에서 항의했지만 두 골이나 뒤지고 있던 상황이 기억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크레스포가 밀란의 세 번째 골을 넣는 장면이 보였다. 저는 선수들에게 골을 넣으면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3골이나 뒤지고 있어서 그런 상황에서는 영향력이 덜 한다. 저는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영어도 잘 못해서 단어 선택과 발음도 신경써야 했다. 시즌 초반 훈련에서 프리킥을 앞둔 제라드에게 "와인 조심해 (Wind를 Wine으로 발음)"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 모든 선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프타임 때 밀란의 태도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가투소가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빅이어를 만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라커룸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소리나 축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서포터들이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는 소리도 그 순간 듣지 못했다. 당시 저는 선수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선수들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지에 집중하고 있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역할은 선수들을 자극하고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저는 매우 분석적이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선수들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려고 노력했다. 저는 선수들에게 골을 넣어야 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서포터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집에 그 메시지가 걸려 있다. 선수들은 계획이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이 잘못되면 새로운 계획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저는 3백으로 전환하고 하만을 투입해 미드필더를 강화했다."
"미드필더가 재편되면서 리세가 더 깊숙이 들어가 크로스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해서 첫 골이 터졌다. 하만의 투입으로 여유가 생긴 제라드는 박스 안으로 공을 헤더로 연결했다. 그는 갑자기 라인을 뚫고 들어가 위험을 조성하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피를로 주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피를로의 영역에 더 많은 선수를 배치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스미체르가 중거리 슛을 했고 다시 한 골차로 따라붙었다."
"지난 몇 년간 라 리가에서 사비 알론소를 지켜봐 봤기에 잘 알고 있었고 새로운 축구 스타일에 적응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공간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영리한 선수였다. 그는 그 시즌에 엄청나게 성장했다. 겨우 23살이었지만 이미 많은 개성과 침착함을 보여줬다. 디다가 막아낸 페널티킥을 다시 성공시켜서 저는 그의 실패를 한탄할 겨를이 없었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 골을 실점한 밀란은 강도를 높였고 경기는 더욱 대등해졌다."
"한 골을 뒤진 상황에서 역전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감정적으로도 긴장감으로 인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됐다. 캐러거와 스미체르는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밀란 선수들도 지쳐 있었다. 저는 지브릴 시세를 경기 막판에 투입해 그의 공간과 신선함, 스피드를 활용하려고 했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역습 상황에서 밀란을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연장전 하프타임에 저는 사비 알론소에게 경기와 공을 계속 통제하면서 루이스 가르시아, 스티븐 제라드, 지브릴 시세를 빨리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셰브첸코를 상대로 한 두덱의 놀라운 선방도 있었다. 끝까지 가려면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
"해당 시즌 밀란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선수들을 분석했고 그중 4명의 슛 방식을 알고 있어서 자신감이 있었다. 한 팀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선수가 네 명이나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에 이점을 활용해야 했다. 보통은 한두 명, 많아야 세 명 정도다. 두덱은 골키퍼 코치인 호세 마누엘 오초토레나에게 정보를 전달받았다. 숙제를 해와서 자신감이 있었다. 캐러거는 세션 전에 그를 만나 1984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브루스 그로벨라르 했던 것처럼 골라인에서 움직여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제게 중요한 것은 두덱이 밀란의 슛 방향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른쪽으로 다이빙하면 페널티킥을 막을 좋은 기회가 있다. 사비 알론소가 이번 시리즈의 첫 번째 페널티킥 키커가 되어야 했지만 경기 중에 페널티킥을 놓쳤기에 다시는 키커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저는 슛을 가장 잘한다고 생각되는 선수를 골랐지만 그 순간의 압박감을 견딜 수 있는 선수도 골랐다. 축구 선수들은 승부차기에서 실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 나서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겁이 나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는 7~8명의 선수가 출전하길 원했어요. 그중 5명을 선택해야 했다."
"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하만과 제라드는 시세와 마찬가지로 매우 신뢰할 수 있었다. 셰브첸코가 슛을 쏘기 위해 일어섰을 때 그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가 매우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슛이 경기의 운명을 결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어깨에 그 압박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슛을 놓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냐고? 물론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뿌듯하고 기뻤지만 상대 선수에 대한 존경심도 컸다. 얼마 전 아드리아노 갈리아니를 다시 만났는데 그가 저에게 ‘이스탄불 결승에서 우승했을 때 정말 품격 있게 우리를 맞이해 줬고 아테네 결승에서 졌을 때도 똑같이 해줬어요.’라고 말했다. 그 후 저희는 호텔에서 파티했고 저녁 무렵에 저는 밖에 친구를 데리러 나갔다. 다시 방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경비원이 저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제 친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나? 신이다! 몇 마디 설명하니까 통과시키더라 (웃음)."
"역대 결승전 중 가장 감동적인 결승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나리오를 가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더 좋은 축구를 하고 더 많은 골을 넣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감동과 우여곡절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다. 그날 밤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하프타임에 3골을 뒤졌지만 리버풀 팬들이 이스탄불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고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았던 상황에서 그 응원을 보고 정말 놀라웠다. 리버풀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좋아하는 선수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매우 단합되어 있다. 빅이어를 들어 올린 순간보다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