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화
얼떨결에 끌려온 카페 안의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흘러 넘쳤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손이 매운 건 대충 알았어도, 정작 남자의 볼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었던 탓이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 했는데, 이제야 맨 정신으로 보니 너무나 괜찮은 남자였다.
“사과해요. 아니, 어떻게 사람 말도 안 들어보고 뺨을 그렇게 때립니까? 그리고 뭐라고요? 변태새끼요? 저요, 변태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슨 짓 할지 몰라서 그렇게 하신 거라고요?”
“네. 아니 죽겠다고 소리 꽥 지르는데 그럼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제 일만 생각하면 정말…… 당신 같은 여자 처음 봅니다.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네요.”
“참나, 저도 마주치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오해하게 그 쪽이 만드셨으니까 제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 쪽 뺨 때린 거 미안해요! 됐어요?”
난 흥분한 나머지 음료수 컵을 세게 놓았고, 내 행동에 놀란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않더니,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사과를 그렇게 성의 없이 합니까? 다시 하세요. 정식으로, 진지하게.”
“전 똑같은 말 두 번 안 하거든요. 어쨌든 다시는 볼 일 없을 테니 이만 헤어지자고요. 전 바쁜 일이 있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난 그렇게 도망치 듯 카페를 나왔다. 오늘은 꽤나 정상적인 하루가 될 것 같더니만, 오늘도 왠지 일이 꼬여 이상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행여나 그가 쫓아올까 난 서둘러 차를 몰았고, 그와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늦으셨네요. 편집장님.”
“아, 응. 일이 생겨서…… 왜 이렇게 썰렁해?”
“다들 외근 나갔어요. 오늘은 편집장님이랑 저랑 외롭게 일을 해야겠네요.”
이제 경력 2년 차인 미진이 우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미진! 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남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데 남자가 자꾸 뒤를 돌아보고 웃어. 그럼 여자가 변태라고 오해를 안 할까? 더욱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는데!”
나는 점점 영화같이 떠오르는 어제 일에 흥분했는지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고장이 났는데요?”
“불도 다 꺼졌는데!”
“불도…… 다 꺼졌는데요?”
“날 안았어!”
“꺄아아아악!”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 지르고 그래?”
내 말을 듣고서 미진이는 비명을 질러댔고, 부끄러운 지 그녀의 얼굴엔 조그마한 홍조가 띄었다.
“안았다고요? 혹시, 그 남자 편집장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너무 맘에 들어서 이때다 싶어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에이, 아니야! 그때의 난……”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도도하고 시크한 내 얼굴의 포인트인 아이라인이 눈물로 인해 다 번지고, 눈은 다 퉁퉁 부어서 개구리 같았을 텐데. 그래도 미진이 한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어느새 달력을 보니 주희의 결혼식은 당장 모레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서 회장이 내민 서류봉투에 현욱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조만간 정욱이가 귀국하지 않냐? 일명 서정욱 일 시키기 프로젝트다.”
“네?”
“나는 그 자식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니까 네가 정욱이 책임지고 우리 호텔에서 일할 수 있게 잘 길들여놔. 그래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지.”
“아버지. 정욱이는 호텔 일에 관심 없어하는 것 같은데……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게 하죠.”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네 어미처럼 정욱이한테 설득 당한 것이야?”
서 회장의 말에 현욱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문득, 서 회장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며칠 전 정욱이 애타게 자유를 찾던 전화 통화 내용이 생각 나 왠지 그의 마음에 공감 갈 것 같았다. 같은 형제지만 너무나도 다른 정욱과 현욱. 정욱은 일보다도 노는 걸 훨씬 좋아했고, 성격도 밝고 능글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욱은 일을 더 우선시했고, 그래서인지 서른넷 이라는 나이에도 그는 아직 결혼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다. 너마저 딴 길로 샜으면 난 누구한테 의지했겠냐?”
“왜 그러십니까? 어머님 있으시잖아요.”
“네 엄마는 쇼핑 중독이야. 돈만 갖다 주면 백화점으로 향하지. 어휴, 나이가 들면 좀 사그라지겠거니 했건만. 내가 돈도 못 버는 가난뱅이였으면 난 벌써 이혼 당했을 거다. 넌 뭐 여자 없냐? 이제 너도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놨으니 결혼 해야지? 네 엄마처럼 쇼핑 중독인 며느리 난 싫다. 참고로.”
“없습니다. 아직은. 결혼 생각도 아직 없습니다.”
“만날 일만 하느라 여자 만날 시간이 없었겠지 이놈아! 내가 주말에 자리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한 번 나가봐.”
서 회장의 말에 현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회장실을 나왔다. 정욱은 어디서 뭘 하는 지, 여태 전화도 없다. 그런 점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저녁을 먹기 위해 호텔 로비를 나오다 어제의 불미스러운 일을 광경 했던 직원들과 마주쳤다.
“식사 하러 가십니까?”
“아…… 네. 저기,”
“네.”
“어제 일 말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 말입니다.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뭘…… 말입니까?”
“뭔가 착오가 있었다고요. 제가 정말로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라 그 정신 나간 여자가 오해를 해서 그런 거니까 오해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욱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아이고, 그럼요! 우리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데 감히 그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저희는 아무런 오해 안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 근데 그 여자 정신 나간 여자였습니까? 하긴, 꼴을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무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하하하하하, 오늘도 열심히 수고하세요.”
직원들의 말에 현욱은 기분이 좋은 지, 호탕한 웃음을 짓고서 호텔을 빠져 나갔다.
*****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나는 옷을 갈아입다 처음 본 옷을 발견하고서 꺼내들었다. 바람 불면 하늘하늘 거리는, 은색에 가까운 원피스를 쫙 훑어보고서 난 그대로 옷장에 다시 넣어두려다 수영이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뭐야? 노크도 안 하고!”
“너 이거 얼마 주고 샀어? 딱 보니까 비싼 옷 같은데…… 일부러 내 옷장에 넣어놨지? 안 들키려고?”
내 말에 수영은 잡지를 보다 황당한 듯, 침대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무슨 소리야? 그 옷은 또 뭔데?”
“하! 야, 신수영. 너 연기 하지 마. 이거 네가 산 옷이잖아! 엄마한테 안 들키려고 내 옷장에 넣어놓은 거 아니야?”
내 말에 수영은 답답했던 지, 엄마를 연신 불러댔고, 한가로이 tv를 보고 있던 엄마는 수영이 방으로 들어왔다.
“중요한 장면 나오는데 왜 자꾸 불러대고 지랄이야?”
“언니가 자꾸 날 모함시키잖아!”
“너 그 옷 왜 들고 있냐?”
엄마는 내가 들고 있던 옷을 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이거 엄마 옷이었어?”
“미쳤냐? 네 옷이지! 오늘 백화점 갔다가 예뻐서 하나 샀어.”
“우와, 엄마 진짜 차별하는 거 아니야? 왜 언니는 이런 예쁜 원피스 사다주고 난 안 사주는 건데? 왜?”
“네는 예쁜 옷 잘 사다 입잖아. 네 언니 옷장 봐. 만날 청바지에, 티에. 하도 불쌍해서 질러줬어. 안 그래도 내일 결혼식인데 예쁘게 하고 가야 덜 비참하지.”
“엄마!”
엄마의 말에 난 소리를 버럭 질렀고, 결국 엄마는 손으로 귀를 막으며 조용히 퇴장했다. 더욱 더 슬픈 건 엄마의 말에 수영은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조용히 침대로 기어들어가 잡지를 읽었다. 허탈해진 나는 원피스를 다시 들고서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 놈의 집구석, 독립을 하던가, 시집을 가던가 해야지…… 서러워서 어디 살겠어?”
그때, 핸드폰이 울려댔고, 누군지 확인한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엎어버렸다.
“청담동이요.”
다음날, 난 비몽사몽한 채로 일어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택시에 몸을 실었다. 꿀맛 같은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내 영원한 안티인 엄마는 나를 거칠게 깨우더니 화장하고 오라며, 택시를 태워 보냈다.
“아씨! 내가 결혼하나? 화장 그냥 대충 하면 되지. 무슨 청담동까지 가서 하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몇 시간 후, 나의 모공, 잡티가 다 보이던 쌩얼은 어느새 화사하게 변해있었고, 난 만족하며 샵을 나왔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택시에서 불평하던 내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 결혼식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하아, 그냥 가지 말까? 아프다고 꾀병부리고 그냥 집에서 쉴까? 아, 진짜 가기 싫다.”
난 아직까지는 실감하지 못 했다. 말이 곧 씨가 된다는 것을. 난 정처 없이 떠돌다 택시를 잡기 위해 골목길에서 나오다 순간 튀어나온 승용차 한 대를 발견하고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전 박유림이라고 합니다. 아버지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꼭 한 번 뵙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진짜로 볼 줄은 몰랐네요.”
“아, 네.”
선한 인상을 가진 여자의 말에 현욱은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웃고만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지, 머릿속이 혼란인 그는 그저 여자가 무슨 말만 하면 웃기를 반복했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네.”
“그럼 식사 주문할까요?”
드디어 말문을 튼 현욱이 대화를 리드하자, 여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판을 보았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고, 전화 건 사람은 정욱이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현욱은 여자에게 예의를 갖추며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고, 그가 전화를 받자 정욱의 목소리는 다급한 듯 떨려오기까지 했다.
“너 왜 그래?”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교통사고가 났어. 지금 여자 쓰러져서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좀 와줄 수 있어? 나 지금 돈 한 푼도 없어서 그래.”
정욱의 말에 현욱은 당황한 듯, 그의 얼굴은 점점 심각하다 못 해 아예 굳어졌다. 정욱과 전화를 끊고서 현욱은 유림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린 뒤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삐딱한 자세로 정욱이 팔짱을 끼고서 서 있었다.
“서정욱!”
“빨리 왔네.”
“어떻게 된 거야? 많이 다친 거야?”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넘어지면서 바퀴에 손이 아주 조금 끼었나봐. 깨어나면 정밀 검사 해본다고.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마. 나도 잘못한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말에 토 안 달고 조용히 있잖아.”
“당장 짐 싸서 집으로 들어와.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형!”
“내 말대로 해.”
현욱의 말에 정욱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없이 나갔다. 10여분이 흐르자,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서 현욱에게 뛰어왔다.
“여기 있던 남자 분 못 보셨어요?”
“제가 형이거든요. 무슨 일 생겼습니까?”
“환자 분 깨어나셨거든요. 정밀 검사 하셔야 되니까 일단은 환자 분한테 상황 설명 해주세요.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 하시거든요.”
간호사의 말에, 현욱은 재빨리 여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고통스러운 지, 여자가 신음소리를 내자, 그는 긴장을 하며 조심스레 커튼을 젖혔다.
“저기…… 죄송합니다. 치료비는 제가 ㄷ……ㅏ…… 엇!”
“뭐야! 그 쪽이 여길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