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5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생명의 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21)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to be with you always,
말씀의 초대
필 리포스가 사마리아 고을에서 표징을 일으키고 복음을 전한다. 이는 그곳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사마리아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한다(제1독서).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자신의 죄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에 겪게 되는 모욕과 고난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할 계기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신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영을 보호자로 보내시어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하실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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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계명의 중요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주일을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날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젖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일을 '지키는' 것이 기쁨이라기보다는 무겁고 성가신 짐으로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한 왜 하필 주일마다 반드시 성당에 가야 하는지 짜증스러워하며 의문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속내 사이의 괴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먼 저 우리가 주일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설령 머리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주일의 신학'이 우리의 삶과 갖는 연결 고리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일요일이나 안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주일'의 의미는 사실 부활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신비에 눈을 뜰 때만이 주일의 소중함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98 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반포하신 교서 「주님의 날」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주일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교서는 교회가 처음부터 부활 주일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모든 주일을 경축하며 '부활의 날'로 이해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19항 참조). 주일에는 사실 구약의 안식일 신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찬미하고 '신적 휴식'의 의미를 알려 주는 안식일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인간의 존엄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그 럼에도 주일은 근본적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주일의 중심이 파스카 제사인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부활의 날인 주일은 과거 사건의 기억일 뿐 아니라,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생생한 현존에 대한 경축입니다"(31항). "교회는 주일마다 마지막 '주님의 날', 곧 끝이 없는 최후의 주일을 향하여 나아갑니다"(37항).
우 리는 주일의 미사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힘을 받습니다. 주일을 통하여 평일이 축복을 받듯이, 주일을 충실히 지낼 때 우리의 일상은 부활의 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 내려 주신 선물인 주일의 은총을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행동이다
-조재형 신부-
계절의 여왕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5월에 ‘성모의 밤’을 지냅니다.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밤에 성모님의 순명과 희생을 생각합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도 함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성모님에게 꽃다발과 노래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도 함께 봉헌합니다.
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는 ‘사랑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가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을 믿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성령께서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이 100여 명 있었습니다. 미혼모들이 맡긴 아이들, 결손 가족이 맡긴 아이들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여도,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아이들이 약하고, 자주 아픈 것을 봅니다.” 시설과 환경 그리고 음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과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육체적으로 허약해진다는 수녀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하느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안수해 줍니다. 안수를 통해 사랑의 성령, 위로의 성령, 뜨거움의 성령이 신자들에게 내리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을 두려움과 나약함에서 자유롭게 해준 것도 바로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필리포스 사도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앞둔 교우 분을 위해 안수기도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두려워하던 자매님은 안수기도를 받으시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맡기신다며 웃는 얼굴로 병원에 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를 열심히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신다면서 나이도 많으니 수술도 하지 않고 암을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면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먼 길을 가실 때면 며칠 전부터 준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찬도 미리 만들어 놓으시고, 빨래도 다 해 놓으시고, 찬장에 용돈도 넣어 두시고, 밥도 넉넉하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작은집에 연락하라고 하시고는 먼 길을 다녀오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골을 다녀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양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협조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빛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빛은 어둠을 이깁니다. 지금 자신의 몸에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그분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이시여! 나약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에게 오소서. 저희 몸에 당신의 불꽃을 당기소서. 그리하여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서공석신부-
지난 주일의 복음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명상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신앙인은 예수가 살아서 보여준 실천들이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 안에 그분의 실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의 실천 안에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그분과 같은 실천들이 나타나게 하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제자들의 실천 안에 예수님이 돌아와 살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계속되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인의 실천들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삶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얻어서 자기 개체(個體)를 유지하고, 또한 종족(種族)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무자비하고 포악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 삽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기에 같은 질서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생태를 기술하면서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 동물 본연의 질서만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을 만들어서 동물적 약육강식과 포악한 본능에서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약육강식하고 포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각종 횡포를 하는 것,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상대를 중상하고 모략하는 것, 돈 몇 푼을 위해 인색하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은 ‘털없는 원숭이’들이 지닌 약육강식의 포악한 모습들입니다. 인류가 지닌 법에 저촉되지 않고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포악함으로 인간은 인간다워지지도 않고, 인간다운 사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한 사람 희생하더라도 더 큰 진실을 위해 헌신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국선열들이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제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 선생님들이 있었고 승객을 구출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선박 근무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생존들이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도 살신성인의 사랑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보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부모의 희생이 있어서 인류역사 안에는 아름다운 인간 사랑이 지속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 인간이 소원성취 하겠다고 수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역사 안에 한 번씩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혹은 구원에 대한 광신(狂信)적 신앙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 다 가지고 누려서 성공하고, 내세에 가서도 구원받아 잘 살겠다고 수작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안에서 보람을 찾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부모의 흐뭇한 보람이 있고, 제자를 아끼고 사랑해서 유능한 인재로 키워놓은 스승의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의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삶의 보람을 심는 노력을 우리는 헌신(獻身)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도 있고, 인간 생명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이 헌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헌신이 하느님의 생명을 진솔하게 산 결과였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헌신을 모든 순간에 하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이라 소외당한 사람을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누구도 버려지거나 불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는 재물과 권력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인간생명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 헌신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헌신을 보면서, 그것이 그분이 아버지라 불렀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본받아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헌신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봅니다. 그 생명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협조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깨닫는데 먼저 예수님이 하신 협조가 있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은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진리이고, 성령은 그 헌신의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능력과 삶의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대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다.’는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의 삶 안에 그분이 하신 헌신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오 늘 복음(요한 14,15-21)은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이란 참으로 어려운 개념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시원한 설명은 흔치 않은 편입니다. 심지어 '정의 내리기 힘든 게 바로 성령'이라는 달관한 견해를 가진 이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16 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청해 다른 '협조자'를 보낼 것인데, 그는 바로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 '협조자'라는 말입니다. 협조자의 헬라어 원문인 '파라클레토스'는 원래 '~를 위해서 말하는 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변호인'이라고 하면 비교적 근접한 번역이 될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말하는 분, 곧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15-17절).
성 령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떠나더라도 결코 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비록 몸은 떠나지만 제자들 안에 살아 있고, 그것은 곧 하느님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相互內在). 보통 알쏭달쏭한 말이 아닙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21절에서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들여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랑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니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미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결국 사랑의 원천으로 향하게 되어 하느님과 상호내재(相互內在)가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성령'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사 도 8,5-8.14-17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 곳 교우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베드 3,15-18에서는 그리스도를 마음 안에 모시고 고난의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해 나가라는 당부를 담고 있습니다.
오 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성령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성령에 대해서 참고할 문헌은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1세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아직 성령에 대한 공통적인 입장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 27권에도 각각 조금씩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1 세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를 겪고 있었습니다. 언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 십자가형을 당할지, 언제 유다인들을 만나 봉변을 당할 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었던 겁니다. 비교적 편하게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 같은 끔찍한 박해의 위협과 고통 속에서 그들은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앞에 '변호인'이자, 신앙을 담대하게 지켜나가게 하는 '조력자'이며(사도 8,14- 17),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도록 도와 주는 든든한 배경입니다(1베드 3,15-18). 그들에게는 성령을 문자화시켜 개념정리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니 원래 성령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담당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관된 정의가 신약성서에 안 나오는 것이겠지요.
'성령은 바람입니다'(요한 3,8).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멋진 정의를 되새겨 봅니다.